전당포에서 잠시 쉬는데 주인이 중간 대청으로 인도하여 뜨거운 차를 한 주발씩 권한다. 진열된 가재도구가 특이한 게 많고, 설치된 시렁과 들보는 단정한데, 저당 잡힌 물건은 모두 옷가지였다. 보퉁이 속에는 물건 주인의 성명, 별호, 물건의 특징, 주소 등을 적은 쪽지를 붙여 놓고, 다시 '모년 모월 모일에 아무개가 어떤 물건을 무슨 상호의 전당포에 직접 가지고 와서 건네주었다'라고 적혀 있다. 이자는 10분의 2를 넘지 않고, 기한을 넘기고 한 달이 지나면 물건을 팔아서 처분할 수 있다. 전당포 주련에는 금빛 글씨로,

  『서경』 홍범구주洪範九疇에는 부富를 먼저 말했고,
  『대학』 10장도 절반은 재물을 논하였다.
  洪範九疇先言富 大學十章半論財

라고 적혀 있다.


<열하일기 1> 94쪽, 박지원, 김혈조 옮김, 돌베개

  <서경>과 <대학>은 유교의 중요한 경전이다. 위 문구를 보면 유교에서 재물을 소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자는 의문을 가진다. 그런데 그런 걸 가리키는 문구가 왜 하필이면 전당포에 있었는가? 전당포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손가락질 받는 곳이다. 재물을 하찮게 여기는 왜곡된 생각이 결국은 저 문구가 전당포에서만 있도록 이끈 것은 아닌가? 그런 추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경>의 홍범구주의 가장 처음은 오행에 대한 이야기다. 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대학>의 10장은 실제로 반 정도는 재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 실제 내용은 재물보다는 인재를 중요시하라, 정도로 요약하면 될 듯 하다. 따지고 보면 미묘하지만 틀린 이야기만은 아니다. <서경>에는 분명 부에 대한 언급이 나오며, <대학>에서 분명히 재물을 논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실상을 저렇게 구호로 요약하니, 진실은 반 이상 감추어져 버렸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요약 속에서 실체를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요약은 접하기 쉽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 속에 진면목은 사라지고 없을 가능성도 높다. 책을 '죽은 성현의 찌꺼기'라고 일갈한 수레바퀴 장인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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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존 프럼이 돌아오는 날을 2월 15일이라고 믿었지만, 연도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추종자들은 해마다 2월 15일에 모여서 그를 맞이하는 종교 의식을 올린다. 아직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낙심하지 않는다. 아텐버로는 샘이라는 숭배자에게 물었다.


  "하지만, 샘. 존이 화물이 올 거라고 말한 지 19년이나 지났잖아요. 그는 약속하고 또 약속했지만 화물은 아직 안 오고 있어요. 19년이면 좀 오래 기다린 거 아닌가요?"
  샘은 땅을 향해 있던 시선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오기를 2000년 동안 기다릴 수 있었다면, 나도 존을 19년 이상 기다릴 수 있지요."


<만들어진 신> 313쪽, 리처드 도킨스, 김영사

  믿음은 맹목적이다. 진실조차 믿음 앞에서는 흐려지고 본질을 드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 믿음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굳이 종교적인 믿음만이 아니다. 세상 어느 분야에서도 믿음은 존재한다. 믿음의 유의어는, 아마도 미련함일 것이다.
  신념 또한 믿음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자신이 가진 신념은 자신이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일을 이루게 이끌어 주지만, 눈 옆을 가리면서 세상을 온전히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세상에서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다가, 크게 성공한 이의 이야기도, 크게 망한 이의 이야기도, 크게 성공했다가 더 크게 망한 이의 이야기도, 크게 망했다가 더 크게 성공한 이의 이야기도 들려온다.
  그렇다면,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여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 어떤 일에도 공통되는 확고한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은 점점 늘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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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3학년 봄까지 2년간을 돌이켜보건대, 실익 있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노라고 단언해두련다.
  이성과의 건전한 교제, 학업 정진, 육체 단련 등 사회에 유익한 인재가 되기 위한 포석은 죄다 빼 버리고 이성으로부터의 고립, 학업 방기, 육체의 쇠약화 등 깔지 않아도 되는 포석만 족족 골라 깔아댄 것은 어인 까닭인가. 책임자를 추궁할 필요가 있다. 책임자는 어디 있나.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 10쪽, 모리미 도미히코, 비채

  책임자는 여기에 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 자신.
  바깥에서 문제의 근원을 찾기 전에, 그 문제의 시작이 나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을 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남 탓이 아니라 내 탓을 하고, 그리고 자신을 철저하게 추궁하여야 되지 않을까. 당장 나부터 그런 걸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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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소재 가치가 높을수록 퇴장되기 쉽다는 주조 화폐의 속성에 의해, 또 주조 이익을 얻어 재정을 보전하려는 각국 정부의 시도에 의해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몰아서 쫓아냄)하는 현상이 끊이지 않았다. 이를 가리켜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이라고 부른다. 즉 양화는 용해되거나 해외로 유출되어 화폐 기능을 상실하고 악화만이 유통을 계속하는 현상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신대륙 발견 이후 금보다 은이 대량으로 공급되에 기존의 금과 은 간의 교환 비율이 깨졌는데, 이때 상대적으로 악화인 은화의 통용력이 오히려 더욱 높아졌다. 이 역시 그레셤의 법칙이 작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


<금융경제학 사용설명서> 76~77쪽, 이찬근, 부키

  그레셤의 법칙은 경제학에서는 역선택(adverse selection)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고차 시장인데, 좋은 중고차와 나쁜 중고차가 있을 때, 중고차를 사려는 사람은 두 가지 차 중 어느 차가 자기 것이 될지 알 수 없는 경우를 가정한다. 그럴 경우. 구매자는 좋은 중고차를 사는 값과 나쁜 중고차를 사는 값의 중간 정도 되는 값을 제시할 것이다. 그 값을 보면 좋은 중고차를 가진 판매자는 자기가 생각한 가격보다 낮기 때문에 차를 팔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나쁜 중고차를 가진 사람은 실제보다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으므로 차를 팔려고 할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중고차 시장에서는 좋은 중고차는 나오지 않고 나쁜 중고차만 매물로 계속 나오게 된다.
  이 법칙이 화폐나 중고차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와 집단 속에서도 이런 현상은 눈에 띈다. 처음에는 '좋은' 사람들이 가득하던 '물 좋던' 공간에 하나둘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고, 공간의 평균적인 질이 점점 낮아지게 된다. 그러면 '좋은' 사람들은 그 공간에서 누릴 수 있는 효용이 낮아지면서 점점 그 공간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리고 '이상한' 사람들이 그 공간으로 계속 유입되고, 나중에는 '이상한' 사람들만 가득한 이상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세상은 계속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기만 하는, 점점 퇴락하고 오염되기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그 이상한 공간의 모순이 터져나와 커다란 변혁이 도래하게 된다. 그 변혁의 결과가 어떤 식이 되건, 그 전의 모습과 후의 모습은 같지 않을 것이다. 혹은, 공간이 이상해지기 전에 조금씩 자정작용을 펼치는 것으로 이상한 공간이 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이 되었건, 세상은 악화가 가득하기만 한 세상을 바라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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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마디로 말해 경제학은 희소한 경제적 자원을 활용하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과 관련된 학문이다. 따라서 희소성(scarcity)과 선택(choice)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경제학의 본질을 형성하게 된다. 만약 어떤 자원이 희소하지 않다면 구태여 최선의 활용방법을 선택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물질적 욕망을 넉넉히 채워 주고도 남을 만큼 풍부하게 존재하는 자원은 거의 없다. 이렇게 한정된 자원만을 갖고 사는 우리의 경제생활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데도 이를 포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선택은 반드시 어떤 대가를 요구한다는 뜻이다. 합리적 선택이란 여러 선택가능성 중 가장 작은 대가를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합리적 선택을 위해서는 각각의 선택이 요구하는 대가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 선택의 대가를 경제학에서는 機會費用(opportunity cost)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내고 있다. 어떤 것의 기회비용이란 그것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많은 선택가능성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보유하고 있는 가치를 뜻한다.


<미시경제학> 5~6쪽, 이준구, 법문사

  사람들은 완벽한 세상을 추구한다. 그러나 저마다 가지고 있는 완벽한 세상의 모습은 다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상을 가지고 있다. 이상은, 현실과 만났을 때 다양한 반응을 불러온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상이 현실 속에서 타협과 공존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이상은 이 현실 속에서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반응들 속에서 사람들의 행동이 결정되고, 위치가 생긴다.
  위치라는 것을 굳이 둘로 나눠본다면, '현실의 큰 틀은 유지하되, 세세한 부분을 보완해 가면 점차 완벽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와, '현실의 큰 틀 자체가 가장 큰 문제이니, 새로운 틀을 만들어 지금의 것과 교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을 것이다. 각각의 위치는 저마다의 이상이 현실과 부딪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모두 치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위치에 서 있다 해도, 그곳엔 갈등은 존재한다. 현실을 보수하려는 자들의 위치에서라면, '현재의 틀에서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유지하는가'와 같은 갈등이 생긴다. 새로운 것으로 바꾸려는 자들의 위치에서도, '새로운 틀에서는 어떤 것이 필요하고 어떤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라는 갈등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정말로 치열하다. 세상은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사용을 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상을 현실에서 주장하기 위해서는, 위치에 대해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자신의 위치에서 발생하는 기회비용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 없이 이상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공허하고 덧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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