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병합 당시 병합조약 문서에 당시 조정 대신들이 서명한 후 그 아래에 가부를 적었다. 내무대신이었던 김윤식金允植은 '불가불가不可不可'라는 네 글자를 썼다. 병합에 찬성한다는 말인가, 반대한다는 말인가? '불가! 불가!'라고 끊어 읽으면 병합을 결사반대한다는 말이니 만고의 충신이다. "불가하다고 하는 것이 불가하다"로 읽을 수도 있다. 이 경우 병합은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는 역사의 필연임을 강조한 것이 되어 천하의 매국노가 된다. 또 "불가불 가"로 읽으면 어떨까? '불가불'이나 '부득불'은 '어쩔 수 없어서', '아니라고 할 수 없어서'의 뜻이니, '속으로는 반대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찬성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회색분자, 박쥐의 언행이다. 이 말의 해석을 두고 당시 말들이 시끄러웠다. 병합이 되자 그는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나아가 자신의 문집으로 일본 학술원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 매국노의 소행이 분명하다. 하지만 뒤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의 독립 승인을 요구하는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일본 정부에 제출하여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작위 또한 박탈당했다. 일생의 출처 행적이 그의 말과 어찌 그리 방불한가.
<한시미학산책> 148~149쪽, 정민, 휴머니스트
자신의 뜻을 짐짓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 쓰는 것이 모호함이다. 이렇게 해석이 되기도 하고, 저렇게 해석이 되기도 하는 표현법을 쓰는 것이다. 이는 불우한 시절 자신의 큰 뜻을 감추려는 사람이, 그럼에도 채 감추지 못해서 그걸 드러내야 할 때 그를 보호하는 방패막이가 되어준다. 그러나 또한 야비한 자가 자신의 흉악한 행색을 숨기기 위한 용도의 방패막이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세상의 모든 물건이 시작부터 선과 악이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약도 과하게 쓰면 독이 되며, 독도 적당한 양과 때에 맞춘다면 약이 된다. 검 역시 사람을 죽이는 검이 있고, 사람을 살리는 검이 있다. 심지어는 사람의 혀조차도 한 번 놀림으로 여럿을 살리기도 하고 여럿을 죽이기도 한다.
결국 세상 만물의 용도를 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 그의 본질이다. 그의 본질이 선악 구분이 없는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선과 악을 위해 세상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하니 어찌 자신을 항상 경계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