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유명한 신비주의자 힐데가르트 본 빙겐(Hildegard von Bingen)도 '과수(果樹)들에는 저마다 신의 뜻이 숨겨져 있으며, 오로지 은총을 입은 사람들만이 이 뜻을 깨달을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네. 힐데가르트의 이 말은 암흑기(서양사에서 봉건제와 교회의 속박으로 학문과 예술이 쇠퇴하였던 중세를 이른다-옮긴이)의 과학 철학을 기술한 것이며, 또 이 철학은 현실 세계의 다양한 사물은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플라톤 철학의 신념에서 비롯되었네. 플라톤은 『대화편』에서 이러한 신념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말했을 뿐이었는데, 중세의 기독교도들은 그가 이 저서에서 말한 이데아의 세계가 자신들이 믿는 낙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간주해 버린 것일세.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의 만물은 신이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보낸 상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네. 당시 성직자들의 역할은 융 학파 정신 치료가의 역할과 비슷했네. 신의 숨겨진 '메시지'를 해석해서 무지한 대중에게 설명해 주었으니 말일세. 그리고 그들은 사과의 유혹적인 빛깔, 양면성을 지닌 맛, 여성을 암시하는 중심의 생김새,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감추어진 별의 모양이 바로 금단의 선악과나무에서 자랐을 열매임을 나타내는 표식이라고 해석했다네."
  그 은둔자는 설명을 마친 후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 사악한 과일이 사과라고는 나와 있지 않네. 사과를 그런 식으로 취급해 버린 이들은 바로 로마 가톨릭교도들이지. 그리스 정교회는 그 금단의 열매를 단지 오만과 성욕의 상징으로만 보고 있네." 이어서 그는 강한 어조로 덧붙였다. "여보게. 이것들은 그냥 사과일 뿐일세. 그리고 신의 뜻에 따라 이제는 이렇게 네 조각으로 나누어졌네. 우리 네 사람을 위해 하나씩 말일세." 그는 웃음을 지으며 그 사과 조각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자, 드시게."


<악마의 정원에서> 20~21쪽, 스튜어트 리 앨런, 생각의나무


  세상의 진리를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오류 중 하나는, 자신이 알아낸 진리가 정말로 진리인지 혹은 자신의 착각이 만들어낸 실수인지를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과연 사과는 악마의 상징일까? 아담과 이브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낸 선악과일까? 상징은 갖다붙이기 나름이다. 사과에서 발견했다는 여러 상징들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겠는가. 그 한 가지 예로 중국에서 사과는 평안함을 상징하는 예물이다. 악마와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이 대목의 마지막 부분을 좋아한다. 그렇다. 이것들은 그냥 사과일 뿐이다. 눈길을 걸어와 지친 여행자들에게 원기를 되찾게 해 줄 고마운 음식, 맛있는 사과일 뿐이다. 그러니 자, 한 입 베어물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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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이 성공하자 문화 시설들이 성공적인 도시 부활 전략이 될 수 있다는 시각이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이 상징적 건물을 보기 위해서 관광객들이 몰렸다. 1994년 빌바오를 찾은 관광객 수는 140만 명에 불과했지만 2005년에는 이 숫자가 380만 명으로 늘어났다. 미술관을 찾는 관광객 수만 매년 100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분명 빌바오에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다. 한 연구 결과는 미술관 때문에 생긴 신규 일자리 수는 900개 정도에 불과하며, 미술관 프로젝트로 인해서 바스크 재정은 2억 4,000만 달러 감소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빌바오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낼 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곳이 겪은 경험이 표준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
  구겐하임 같은 미술관이 하나 성공할 때, 매년 40만 명의 신규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갖고 잉글랜드 셰필드에 세워진 전국 대중문화 센터처럼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실패한 곳들이 수십 곳이 생긴다. 1999년 문을 열었을 때 이 센터를 찾은 관광객 수는 예상치의 4분의 1에 불과했고, 결국 같은 해에 센터는 문을 닫았다. 독일 중동부에 있는 도시 라이프치히에도 아름다운 예술 박물관이 있지만 이 박물관이 지어진 후 숙박 요금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안타깝게도 박물관 관광객 수는 급감했다.


<도시의 승리> 130쪽, 에드워드 글레이저, 해냄

  '지역 발전을 위한 다양한 시설의 유치'가 선거철 공약의 단골이다. 그러한 시설들 중에서는 정부 기관, 기업, 문화 시설 등의 다양한 종류가 언급된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지역에 유치되면 '일자리 창출'이라는 말이 추가로 따라온다. 정말로 그럴까?
  위 글에서는 문화 시설을 예로 들어 그것들이 실제로 창출해내는 효용이 그것들을 위해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높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물론 그러한 시설의 유치가 지역 발전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성공 사례가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그 지역이나 그 시기의 특수한 조건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지에 대한 검토가 항상 따라와야 한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모방을 하면 크게 손해볼 가능성이 무척 높아진다. 박지원이 자신의 글에서 언급한 '부뚜막을 줄여서 승리한 경우와 부뚜막을 늘여서 승리한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똑같은 배수진이지만, 한신이 쳤을 때는 승리했고, 신립이 쳤을 때는 패배한 이유는 무엇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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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스틀리와 마찬가지로 플레이페어도 미개척 분야에 과감히 도전했다. <경제·정치지도첩> 서문에서 그는 돈이 어떻게 선으로 표시될 수 있는지 고개를 가로저을지도 모르는 독자들의 의구심에 다음과 같이 일격을 가했다.


  기하학적 측정법은 돈이나 시간과 무관하다는 점을 이유로, 많은 이들이 이 방법을 잘못되었다고 비난해왔다. 하지만 분명 이 방법으로 시간과 돈이 표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이러한 이의를 잠재울 가장 손쉽고 간단한 방법일 것이다. 상거래 과정에서 어떤 사람이 받는 돈이 모두 기니guinea(영국의 옛 화폐)이고, 매일 저녁 그가 낮 동안에 거두어들인 그 기니들을 한꺼번에 쌓아둔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경우 각각의 무더기는 하루를 의미하고, 그 놀이는 그날 하루 동안에 받은 돈의 액수와 비례할 것이다. 이 단순한 논리로 우리는 시간, 비례 그리고 양이 물리적으로 결합할 수 있음을 확인한 셈이다.
  감히 단언컨대 직선적 산술lineal arithmetic이란 대폭 축소되어 종이 위에 표시된 이 기니의 더미들과 같다. 종이 위에서는 (예를 들어) 1인치가 지도상에서 어떤 강의 폭이나 영토의 특정 넓이를 나타내듯이, 500만 기니의 부피를 나타내기도 한다.

  플레이페어는 정보를 그래프 형태로 나타내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는 데이터가 소통되는 효율성의 개선이었다. 인간 사회에서 지식이 증가하고 거래가 늘어나면서, 개인과 개인 그리고 개인과 다수 사이의 정보 전달 양식을 간편하게 만드는 일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특수층을 겨냥한 것이었다.


  고위층이나 활동적인 사업가들은 일반적 개요에만 관심을 둘 뿐 일반 정보의 수준을 넘어서는 특수용법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따라서 특수한 사항들을 일일이 검토하느라 골머리를 앓을 필요도 없이 이들 도표의 힘을 빌어 그러한 정보를 얻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보화 혁명의 세계사> 230~232쪽, 대니얼 R. 헤드릭, 너머북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경제 동향 같은 걸 다룬 도표와 그래프는, 의외로 그 역사가 길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이 인류에게는 꽤나 새로운 개념에 속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무척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위의 사례와 같은 경우도 있고, 정약용도 복잡한 자료문서를 도표화시켜서 정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고보면 인류의 발전을 엿볼 수 있는 방법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기술과 방법의 발전을 관찰한다는 이야기도 틀린 말은 아닌 듯 하다.
  정보라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 같다. 그 내용이라는 것은 단독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맥락 사이에 삽입되었을 때 비로소 정보는 제 능력을 발휘하니 말이다. 이는 인류가 집단 생활을 하면서 주고받음이 발전하면서 정보 역시 발전했을 거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정보에 대한 공부를 조금 더 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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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생명은 먼저 물질적인 속박을 줄이고 점차 정신적인 속박을 풀어야 높이 날고 멀리 나아갑니다. 이때 특정한 방향이 없으면 이전에 이루었던 여러 가지 수양의 노력이 뿌리 없는 나무나 근원이 없는 물처럼 될 수 있습니다. '방향'이란 정신적인 고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제 태어나고 어디에서 성장하는지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자신의 가정환경과 교육환경, 교유하는 친구, 직종은 대체로 나 자신이 자유롭게 고를 수 없습니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하 영역은 자신의 정신적 고향이지요.
  인생에는 방향이 없을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방향은 정신적인 추구입니다. 그리고 고대인의 지혜를 자양분으로 삼는 겁니다. 이러한 방향을 찾았다면 인생은 놀라운 빛을 낼 것입니다.


<장자 교양강의> 34쪽, 푸페이룽, 돌베개

  고대인의 지혜를 자양분으로 삼는 것이 가장 좋다는 주장만 제외하면, 위 글은 참으로 좋은 충고를 해 주고 있다. 노래 가사처럼 '도전은 무한히, 인생은 영원히'라고 하지만, 그 영원한 인생에서 방향이 없다면 그것은 커다란 공허함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방랑하는 사람조차도 방랑의 끝을 알리는 목적지는 존재한다. 그것이 없다면 방랑이라고 할 수 조차 없다. 결국 방향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방향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아가서 스스로 자신의 방향을 잡는 것이 커다란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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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나는 커피숍 '진진당'까지 왔습니다.
  긴장하면서 커피숍의 유리문을 밀어 열자 별세계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나를 맞았습니다. 어둑한 가게 안은 검게 빛나는 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이야기하는 소리, 숟가락으로 커피를 젓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선배는 이마데 강 거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마치 봄날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선배는 그 햇살 속에서 턱을 괴고 앉아 어쩐지 낮잠 자는 고양이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배 밑바닥에서부터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공기처럼 가볍고 작은 고양이를 배 위에 올려놓고 초원에 누운 기분이랄까요.
  선배가 나를 알아보고 웃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나도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리하여 선배 곁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어떤 인연.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392~393쪽, 모리미 토미히코(모리미 도미히코), 작가정신


  모르던 두 사람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은 무척 신비한 일이다. 그 인연의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헤쳐가다 보면 얼마나 아득할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아득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의 결말은 무척 인상적인 문장으로 마무리짓는다.(소설의 결말부분을 인용했다고 스포일러를 누설했다 뭐라 하지 마시라. 이 소설은 결말까지 가는 과정을 봐야 하는 소설이다!) '이렇게 만난 것도 어떤 인연.' 참으로 담백하게 좋은 문장이다. 

  덧. 이 소설의 만화책도 국내에 정발되었다. 만화책 역시 놓치기 아까운 물건이니 한 번쯤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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