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책이 없느냐? 몸에 재주가 없느냐? 눈과 귀가 총명하지 못하더냐? 무슨 까닭에 자포자기하려 드는 게냐? 폐족이라 그런 것이냐? 폐족은 다만 과거와 벼슬길에 꺼림이 있을 뿐이다. 폐족이 성인이 되거나 문장가가 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폐족이 통재달식通才達識의 선비가 되는 데는 아무 거리낄 것이 없다. 거리낌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크게 유리한 점이 있다. 과거에 얽매임이 없기 때문이다. 빈고하고 곤궁한 괴로움이 또 그 심지를 단련시켜 지식과 생각을 툭 틔워주고, 인정물태人情物態의 진실과 거짓된 형상을 두루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두 아들에게 부침[寄兩兒]', 정약용, <다산어록청상> 182쪽에서 재인용

  곤궁함을 핑계로 모든 일을 놓으면 안된다. 혹은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의 이유를 '곤궁하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내세워서도 안된다. 이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불행 자랑' 중에서도 가장 낮은 행동이다.
  주역의 산지박(山地剝) 괘는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이 덩그러니 남은 가장 곤궁한 상황을 보여준다. 이 암담함은 과연 어떻게 풀릴 것인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음 괘는 지뢰복(地雷復)이다. 그 암담함 뒤에 남은 것은 그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나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회복의 의미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 속에 담긴 큰 뜻이 이러하지 않을까?
  결국 그렇게 본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내 모습은 하늘과 땅이 나를 핍박하기 원해서였겠는가? 아니면 내가 내 모습을 그렇게 이끌어놓은 것인가? 지금까지의 내 게으름을 이 글에 비추어 통렬히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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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2011)로 반교리 돌담길은 전장 2킬로미터의 복원사업이 마우리된다. 얼마 전 돌담길보존회장과 이장이 나를 찾아왔다. 동네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청장이라고 부른다.

  "청장님, 감사하고 미안하구먼유."
  "뭐가요?"
  "살다보니 우리는 나라에서 돌담을 다 고쳐주는 혜택을 받았는데 청장님네는 사비로 했으니 미안헌 거쥬."
  "우리집은 외딴집이라 문화재구역이 아니라서 내가 한 건데 뭘 그러세요. 동네 훤해진 거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그래서 하는 말인디 그때 빼놓은 돌담도 다시 하게 해줄 수 읎시유?"
  "이젠 청장이 아닌걸요."
  "그래두 전관예우라는 것이 있다구 방송에서 하데유."
  "그건 법조계 얘기죠."
  "같은 공무원인디 그래두 뭔가 조금은 있갔지유."
  "아, 전관예우 받다가 혼나는 것은 방송에서 못 보셨어요?"
  "그래두 결국은 다 무사하더구먼유 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342쪽, 유홍준, 창비

 

  뒤에서 끼리끼리 주고받으며 '이를 세상이 알 리가 없지.'라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다. 그러나 옛 말에도 있듯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아니, 벌써 넷이 아는 셈이다. 어찌 그 넷 뿐이겠는가? 아무리 진짜 모습을 감추려고 거짓된 모습을 꾸며서 연기한다 해도, 그 뒤의 진실을 감출 수는 없다. 결국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변의 진리를 비유하여 옛 사람들은 '하늘의 도'라고 하였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백이와 숙제는 천하의 의인이나 굶어죽었고, 도척은 천하의 큰 도적이나 천수를 누렸다. 하늘의 도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탄식했다. 그러나 하늘의 도는 결국 그들의 삶을 후대에 전하여 진정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역사가 판가름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당장 그 사람의 수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밝혀지는 옳고 그름은 더욱 부지기수다. 이럴진대 어찌 감히 함부로 비밀리에 그릇됨을 취하려고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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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단에 초목을 심어 꽃 한 송이를 보려면 드는 품이 만만치 않다. 잘 심어 뿌리를 안정시키고, 땅에서 양분을 끌어올려 가지와 잎을 틔운다. 가지도 쳐주고 거름도 주며, 때로 버팀목도 세워주어야 한다. 꽃은 그 노력의 결과일 뿐이다. 바른 마음과 도타운 행실은 초목의 뿌리요 줄기다. 이것이 든든해야 힘을 받는다. 고전을 익히고 견문을 넓히는 것은 뿌리를 통해 줄기로 양분을 끌어올리는 과정이다. 가지 끝까지 양분이 전달되어야 꽃망울이 부퍼서 아름다운 꽃송이를 피운다. 문장은 바로 이렇게 해서 피워낸 꽃송이다. 바탕 공부 없이 꽃만 피우려 들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천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안된 글쟁이다.


<다산어록청상> 159쪽, 정민, 푸르메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때로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다. 그 사람이 남긴 작품은 정말로 좋은데, 그 사람 자체는 그야말로 볼 것 없는 추물인 경우가 그러하다. 차마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행적과, 입에 담을 수밖에 없는 뛰어난 작품의 대비는 역설적이다.
  그러나 징그러운 배추벌레가 나비가 되며, 미남미녀가 죽은 뒤 아홉 추한 모습을 보이며 사라진다. 미와 추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미에서 추가 나오기도 하고 추에서 미가 나오기도 한다. 천한 것으로 아름다움을 만들 수도 있고, 아름다움이 천박함을 돋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 천한 것이 따로 있으니, 예술을 한다는 걸 간판으로 걸고 자신의 추한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사람이 그것이다. 예술이 자신의 악취나는 행위의 근본이 된다는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 절로 코를 쥐고 피하고 싶어진다. 대체 이는 어떤 악취이기에 소리와 모습조차 구린내가 난단 말인가?
  단지 이러한 행동을 보면서, 자신이 그렇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반면교사를 삼아 열심히 정진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행동을 피하고 바른 길로 가겠다 다짐하여 자신을 갈고 닦으며 아름다움을 피우기를 다짐하여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구린내나는 자들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이 길러지게 되는 셈이니, 이는 좋은 현상인 것인가? 알 수가 없다. 이것이 어찌 예술에만 한정되는 이야기이겠는가? 세상의 모습을 보며, 단지 안타까운 심정을 가슴에 담아둘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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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러 공격으로 사망한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가치는 포기된 그들의 생산 함수로 결정된다. 희생자 가족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고인의 상대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온갖 개인적 장점들을 제시한다. 한 미망인은 36년간 결혼 생활을 했던 자기 남편의 상실이 새신부의 신랑이 사망한 것보다 더 비싸게 평가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미망인은 자기 남편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가 자신의 휴대 전화를 사용해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로 증명이 되며, 따라서 즉시 사망한 사람보다는 더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다. 9.11 사태의 사망자 가족에게 제공된 보상금으로 인해 유족들이 사망자에게 부여하는 가치와 생명이 대단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가치는 한정된 예산에 맞출 수밖에 없다는 현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희생자에 대한 보상 문제에 관한 한 모든 사람이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의 가격> 70~71쪽, 에두아르도 포터, 김영사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생명은 정말로 귀중하다. 그들을 차마 잃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은 어디에도 견줄 수 없다. 그 가치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들을 모아서 비교평가를 하게 된다면, 여기서 충돌이 벌어진다. 누가 어떻게 나의 '절대적'이 남의 '절대적'보다 '상대적'으로 더욱 가치가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세상의 모든 다툼이 시작된다.
  합리적인 사고가 이런 다툼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려면, 개인의 절대적인 가치를 상대적으로 측정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경제학에서는 효용함수(utility function)라는 것을 만들어서 이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도 지난한 작업으로 보인다. 한 길 물 속은 알아도 열 길 사람 속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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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경은 부산포 사람이다. 그는 성정이 거칠지 않고 선을 찾고 행하려 애쓰기를 즐겨하였으나, 게으르고 놀기를 좋아하며 굼뜸이 있었다.
  하루는 무경이 문득 탄식하여 말했다.
  "공자가 말한 이립은 자신이 바로 서는 때를 말함인데, 그것이 나이 서른이다. 아! 이제 내 나이 스물 아홉이 되었는데, 돌아보니 이립은 커녕 궁색하면서도 좀스럽게 하루하루 연명해 나갈 생각만 하고 있으니, 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아! 심하도다, 나의 비루함이! 어찌 이런 모습을 산 사람의 행색이라고 말하고 다닐 수 있을 것인가! 궁하도다, 나의 무능함이!"
  그러다 문득 어떤 이의 글을 읽고 무릎을 치며 다시 말했다.
  "여기에 내 살 길이 들어 있구나! 해가 떠서 질 때까지 글을 정성을 다해 읽는다. 그리고 밤이 되면 읽었던 글의 내용을 깊이 생각하여, 그 중 가장 긴요한 부분을 따로 기록하고 나의 생각을 정리한다. 이를 백 일만 한다면 잘 되면 세상에 내놓을 경륜이 깃들 것이고, 못 되어도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축이 곧게 설 것이다! 이것이 내 살 방법이로구나!"
  그리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손발을 휘휘 저으며 춤을 추었다. 내가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다 배를 잡고 웃었는데, 곧 정신을 차리고 우스운 행색을 여기에 기록했다.
  아! 대저 아무런 흠이 없는 호박이 아름다워 보이기는 하나, 그 안에 모기나 매미 같은 흠을 품은 호박을 더 높은 가치로 매기고 찬탄하니, 여기에 무경이 깨달은 바가 들어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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