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책이 없느냐? 몸에 재주가 없느냐? 눈과 귀가 총명하지 못하더냐? 무슨 까닭에 자포자기하려 드는 게냐? 폐족이라 그런 것이냐? 폐족은 다만 과거와 벼슬길에 꺼림이 있을 뿐이다. 폐족이 성인이 되거나 문장가가 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폐족이 통재달식通才達識의 선비가 되는 데는 아무 거리낄 것이 없다. 거리낌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크게 유리한 점이 있다. 과거에 얽매임이 없기 때문이다. 빈고하고 곤궁한 괴로움이 또 그 심지를 단련시켜 지식과 생각을 툭 틔워주고, 인정물태人情物態의 진실과 거짓된 형상을 두루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두 아들에게 부침[寄兩兒]', 정약용, <다산어록청상> 182쪽에서 재인용
곤궁함을 핑계로 모든 일을 놓으면 안된다. 혹은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의 이유를 '곤궁하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내세워서도 안된다. 이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불행 자랑' 중에서도 가장 낮은 행동이다.
주역의 산지박(山地剝) 괘는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이 덩그러니 남은 가장 곤궁한 상황을 보여준다. 이 암담함은 과연 어떻게 풀릴 것인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음 괘는 지뢰복(地雷復)이다. 그 암담함 뒤에 남은 것은 그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나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회복의 의미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 속에 담긴 큰 뜻이 이러하지 않을까?
결국 그렇게 본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내 모습은 하늘과 땅이 나를 핍박하기 원해서였겠는가? 아니면 내가 내 모습을 그렇게 이끌어놓은 것인가? 지금까지의 내 게으름을 이 글에 비추어 통렬히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