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정체성을 고립주의 관점에서 축소화하는 일이 초래하는 결과는 광범위하다. 사람들을 독보적으로 굳어진 범주로 나누기 위해 끌어들인 환영은 집단 간 투쟁을 선동하는 토대로 이용될 수 있다. 물론, 고급 이론들이 문명에 따른 분할이나 공동체주의적 틀 속에 감금하기와 같은 고립주의적 특징들을 지니고 있더라도 어떻게든 대결의 씨앗을 뿌리려는 목적을 지닌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정반대다. 예를 들어 "문명의 충돌" 이론이 제시되고 장려될 떄, 그 목적은 이미 현존하고 있는 현실로서 간주되는 것을 식별하는 것이며(나는 이것이 잘못된 방식으로 수행되지만, 연구 동기나 추진력과는 별개의 쟁점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론가들도 스스로를 대결을 야기하거나 가중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결의 실체를 "밝혀내는"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이론은 사회사상과 정치 활동, 공공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인간을 단일 정체성 속으로 인위적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세계를 편 가르는 결과를 낳고 세계를 잠재적으로 훨씬 더 선동적이게끔 만들 수 있다. 예컨대 인도를 앞에서 언급한 "힌두 문명"으로 특정하는 환원주의적 관점은 이른바 힌두트바 운동의 종파적 행동주의자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아왔다. 실제로, 이런 행동주의 운동은 당연히 인도에 대한 자신들의 축소된 관점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개념적 범주화라면 어느 것이든 끌어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이 운동의 극단주의 분파는 2002년 구자라트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를 조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결국 그 희생자들은 대부분 무슬림이었다. 이론은 현실에서 실제로 접했을 때 이론가들 스스로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중대한 것으로 여겨질 때가 가끔 있다. 그리고 그 이론들이 개념적으로 혼동될 뿐만 아니라 종파적 배타성을 강조하기 위해 쉽게 이용될 수 있을 때, 이론은 사회적 대결과 폭력을 이끄는 이들에게서 열렬한 환영을 받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의 배타성을 주장하는 이론이 무슬림들이 가진 (자신의 종교적 소속 관계 외의) 다른 모든 정체성의 타당성을 무시하는 일과 결합되면, 폭력 버전의 지하드를 지지하는 개념적 근거를 제공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지하드는 평화를 위한 노력과 격렬한 선동 둘 다를 위해 호출될 수 있는 유연한 용어다.). 이슬람 테러리즘으로 오도되어 불리는 것의 최근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경로를 이용해 폭력을 조장한 경우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무실림이 가진 상이한 정체성들, 예컨대 학자,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 역사가, 건축가, 화가, 음악가, 작가로서의 상이한 무슬림 정체성들이 역사적으로 풍요로웠던 것은 무슬림이 과거에 이룬 성취에 (그리고 3~6장에서 이미 논의된 바 있는 세계적 유산에) 크게 공헌했으나, (이론의 도움을 약간 받아) 호전적 종교 정체성만을 외곬으로 옹호하는 주장들이 이를 압도하면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정체성과 폭력> 281~283쪽, 아마르티아 센(아마티아 센), 바이북스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의 범인에 대해, 외국의 한 언론에서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그가 자신의 주장을 쓴 것들에서 단어 몇 가지를 바꾸면, 오사마 빈 라덴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범인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이며 민족주의자라고 한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문명의 대결' 구도에서 이 둘은 서로 다른 주장을 가지고 싸우는 존재가 아닌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누군가 말한 바 있는 '극우와 극좌는 서로 같다'는 언술이 이 모순적으로 보이는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고 하지만, 의견을 아주 극한으로, 골수적으로 밀어붙이면 그 결과는 거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극우에서 극좌로, 혹은 극좌에서 극우로의 전향은 그래서 쉽다는 듯 하다. 자신이 사용해 온 단어 몇 가지만 바꾸면 되니 말이다. 아, 이러한 모습을 나는 예전에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들.
  나는 세상에 보편적이고 참된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즉 다시 말해 세상에 보편적으로 그릇된 이야기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런 게 있다고 한다면, 이번 노르웨이 테러 사건과 2001년 9월 11일의 테러는, 그러한 '보편적으로 그릇된' 무언가의 편린일 것이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구 고령화로 자산 가치가 완전히 붕괴된다는 증거는 거의 없지만, 고령화가 가져오는 경제적, 정치적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산에 대한 장기적인 수익률이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가장 일차적인 이유는 노동력의 상대적인 희소성으로 인해 자본 수익률에 비해 노동 수익률(급여와 임금)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되면 자산 가격 상승률이 둔화되고 기업의 배당금 성장도 둔화하며 전체적인 수익률이 낮아지게 된다. 그러나 물가가 상승하고 민간 부문과 공공 부문에서 재정적 압박이 심해지면 평균 이자율이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면 자산의 실질 가치는 정체되거나 하락하게 된다.
  고소득층은 이러한 사태에 대비할 능력이 충분하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국가 연금이나 공공 자금으로 운영되는 의료보험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구는, 특히 저소득층이나 중산층에게는 저축과 연금이 부족하면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기업들은 앞으로 더 높은 세 부담을 짊어질 수밖에 없다.


<고령화 시대의 경제학> 199쪽, 조지 매그너스, 부키

  21세기의 가장 중대한 세 가지 경제학적 문제로 '세계화, 양극화, 고령화'를 꼽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세 가지 문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당장 우리에게 닥쳐오는 현실이다.
  그 중에서 고령화는 우리에게 '국민연금 문제'로 알려져 있다. 연금 액수는 한정되어 있는데, 연금의 혜택을 받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 수명은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때문에 앞으로 지출될 연금의 액수는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증가분을 부담하는 것은 그 시기에 일을 하는 사람들, 즉 우리와 우리 자식 세대가 된다.
  위 글에서는 고령화로 인한 여러 문제들 중 자산에 미치는 영향을 간단하게 짚어보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두 번째 문단이다.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이라는 두 계층이 고령화의 영향을 받는 모양새가 다르다는 지적이다. 고령화 문제가 양극화에도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가 된다. 굳이 양극화에만 영향을 줄까? 고령화는 결국 저렴한 가격에 노동을 하는 사람을 찾게 되고, 여기서 외국의 값싼 노동력 유입이 이루어지면서 다문화사회가 만들어지고, 이는 곧 세계화 문제로 이어진다. 현 시대의 문제는 어느 한 가지만 집중적으로 다루기에는 서로 너무나 얽혀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문제를 단순하게 재단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투명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많은 구축주의자들이 '생산주의자'가 되어 이젤을 버리고 노동 현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이 생산에 결합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공장에서 그들은 그저 성가신 존재일 뿐이었다. 공리주의 원칙을 내세운 구축주의가 혁명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것은 차라리 사진과 그래픽을 이용한 '아지프로(선전 선동)'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특히 롯첸코의 작업은 명쾌한 초보적 상징주의로 예술과 대중을 효율적으로 결합시켰다. 대량으로 복제할 수 있는 사진은 그에게 사회주의적 속성을 가진 매체로 여겨졌다. 혁명과 대중이 서로 소통하는 길을 열어준 구축주의의 정치적 포토몽타주가 베를린 다다의 그것과 거의 동시에 출현했다는 점은 특기해둘 만하다.

구축주의 그 이후

  1920년대 중반이면 구축주의 아방가르드가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문화를 생산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에 세계를 휩쓸었던 반(反)모더니즘 운동('질서로 회귀')의 러시아적 버전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나타난다. 1932~1933년에 대대적으로 벌어진 아방가르드 숙청 이후, 이 흐름은 소비에트의 공식적 예술 양식으로 자리 잡는다. 1934년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선언은 구축주의를 비롯한 모든 아방가르드 운동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 이후 소비에트에서 건축과 예술은 구축주의자들이 꿈꾼 것과는 정반대로 과거로 퇴행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신고전주의의 영웅적 양식을 취하게 된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 283쪽, 진중권, 휴머니스트

  이 당시의 소련으로 간 예술가들의 흥망성쇠에 대한 책을 읽어보면 서글픈 감정이 든다. 그들은 소비에트가 세워지면서 그 속에서 자신들의 진보적인 예술세계를 자유롭게 펼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듯 하다. 그러나 현실은, 점점 그들을 원하지 않게 된다. 이상을 위해 모인 공동체가 점점 변질되면서 권력추구를 위한 거대조직이 되면(아, 이런 표현은 너무 진부한가?) 그 속에 있던 진보적 흐름은 억압되고 축출당하곤 한다. 혹 살아남은 흐름조차도 그 흔적만 남거나, 철저하게 체제의 이상을 위한 도구로 변신해 버린다.
  뉴스 기사에서 본 북한의 소위 '아! 불고기' 선전포스터를 보며, 북한 주민의 가난함에 슬퍼하고 북한을 통치하는 자들의 뻔뻔함에 분노하지만, 그것 말고도 착잡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 이 포스터는, 소련의 구축주의자가 주도적으로 자신들의 재능을 활용한 선전선동이라는 '장르'가, 국가 혹은 국가 위에 서 있는 한 개인의 욕구와 욕망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고 초라하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물로만 보인다. 저 어설픈 리얼리즘 양식이라니! 이걸 보고 우리들이 '웃기지만 슬픈'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실 별일도 아니었고,-나는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으며-사람들은 내가 사고로 당한 것을 일부러 자초하는 마당이니-외과의사가 옆집에 살았다고 해도, 그를 청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사실 닥터 슬롭은 그 일로, 기대 이상의 이득을 보았지요.-어떤 사람은 가는 철사에다 커다란 분동(分銅)을 다는 재주를 부려 출세를 하기도 하지만,-나는 오늘날까지도 (1761년 8월 10일) 그 사람의 명성에 대한 값의 일부를 지불하고 있습니다.-아!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다면, 한갓 돌멩이도 분을 냈을 것입니다!-하녀가 깜박하고 ******* ***을 침대 밑에 준비해두지 않았군요.-도련님, 어떻게 안 되겠어요? 수잔나가 한 손으로 내리닫이 창을 올리며, 다른 손으로는 내가 창틀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부축하며 말했습니다.-도련님, 이번 한 번만 **** *** ** *** ******하면 안 되겠어요?
  나는 다섯 살이었습니다.-수잔나는 우리 집안에 제대로 매달려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며,-내리닫이 창이 번개처럼 우리 위에 떨어지자 이렇게 소리쳤습니다.-아무것도 없어,-아무것도 없다고-이제 나를 붙잡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토비 삼촌의 집이 훨씬 안전한 피난처였기 때문에, 수잔나는 그리로 피신했습니다.


<트리스트럼 샌디 2> 38쪽, 로렌스 스턴, 문학과지성사

  위에 적혀 있는 대로, 이 소설은 18세기의 작품이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요즘 소설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실험정신이 가득하다. 고의로 생략한 *** 부분 때문에 이 부분의 내용은 참으로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음, 주인공 화자는 남성이고, 사람은 매일마다 소변을 봐야 하고, 저 저택의 들어올리는 창문의 창문 고정쇠는 없으며, 때마침 방에는 ***가 없었고, 그럼에도 소변을 봐야 했다. 이 정도로 짐작하실 수 있으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쿠라산 인들의 이야기를 제일 먼저 하려 한다. 그들은 수전노로 유명한데, 특히 마르우 사람들은 가장 유명한 수전노이다.

  우리의 친구가 이렇게 전했다.
  마르와지는 손님이 오거나 방문한 손님이 오래 앉아 있으면 이렇게 묻는다.
  "점심은 드셨는가?" 만약 손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것참 아쉽군. 내가 좋은 음식을 대접하려 했는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손님이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참 아쉽군. 내가 좋은 후식을 대접하려 했는데……"라고 말함으로써 손님에게는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고 주인의 체면도 잃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기 일쑤이다.


<수전노> 32쪽, 알 자히드, 문학과지성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전노에 대한 이야기는 웃음거리로 많이 쓰인다. 그들의 행위는 왜 웃음거리가 되는가? 그들이 아끼기만 하기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필요한 것에서 아끼는 행위는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수전노가 웃음거리가 되는 이유는, 전혀 필요없는 것조차 아끼거나, 그 아낌이 너무 지나쳐 공동체와 거스르거나, 혹은 아껴서는 안 될 상황에서도 아끼는 모습 때문이다.
  유머란 보편적인 모습에서 일탈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연스레 행동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정작 유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왜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웃는지를 깨닫지 못한다.(웃기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사람들은 제외하자.) 자신의 삶의 방식이 어디가 어그러지고 잘못되었는지를 알지 못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세상의 보편적인 모습이 엉망진창이라면, 거기서 바르게 행동하는 것 역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남이 나를 보고 웃음거리로 삼는다면, 그것은 나의 잘못인가, 아니면 남의 잘못인가? 이를 분별하기는 무척 어려워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