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구축주의자들이 '생산주의자'가 되어 이젤을 버리고 노동 현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이 생산에 결합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공장에서 그들은 그저 성가신 존재일 뿐이었다. 공리주의 원칙을 내세운 구축주의가 혁명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것은 차라리 사진과 그래픽을 이용한 '아지프로(선전 선동)'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특히 롯첸코의 작업은 명쾌한 초보적 상징주의로 예술과 대중을 효율적으로 결합시켰다. 대량으로 복제할 수 있는 사진은 그에게 사회주의적 속성을 가진 매체로 여겨졌다. 혁명과 대중이 서로 소통하는 길을 열어준 구축주의의 정치적 포토몽타주가 베를린 다다의 그것과 거의 동시에 출현했다는 점은 특기해둘 만하다.

구축주의 그 이후

  1920년대 중반이면 구축주의 아방가르드가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문화를 생산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에 세계를 휩쓸었던 반(反)모더니즘 운동('질서로 회귀')의 러시아적 버전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나타난다. 1932~1933년에 대대적으로 벌어진 아방가르드 숙청 이후, 이 흐름은 소비에트의 공식적 예술 양식으로 자리 잡는다. 1934년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선언은 구축주의를 비롯한 모든 아방가르드 운동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 이후 소비에트에서 건축과 예술은 구축주의자들이 꿈꾼 것과는 정반대로 과거로 퇴행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신고전주의의 영웅적 양식을 취하게 된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 283쪽, 진중권, 휴머니스트

  이 당시의 소련으로 간 예술가들의 흥망성쇠에 대한 책을 읽어보면 서글픈 감정이 든다. 그들은 소비에트가 세워지면서 그 속에서 자신들의 진보적인 예술세계를 자유롭게 펼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듯 하다. 그러나 현실은, 점점 그들을 원하지 않게 된다. 이상을 위해 모인 공동체가 점점 변질되면서 권력추구를 위한 거대조직이 되면(아, 이런 표현은 너무 진부한가?) 그 속에 있던 진보적 흐름은 억압되고 축출당하곤 한다. 혹 살아남은 흐름조차도 그 흔적만 남거나, 철저하게 체제의 이상을 위한 도구로 변신해 버린다.
  뉴스 기사에서 본 북한의 소위 '아! 불고기' 선전포스터를 보며, 북한 주민의 가난함에 슬퍼하고 북한을 통치하는 자들의 뻔뻔함에 분노하지만, 그것 말고도 착잡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 이 포스터는, 소련의 구축주의자가 주도적으로 자신들의 재능을 활용한 선전선동이라는 '장르'가, 국가 혹은 국가 위에 서 있는 한 개인의 욕구와 욕망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고 초라하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물로만 보인다. 저 어설픈 리얼리즘 양식이라니! 이걸 보고 우리들이 '웃기지만 슬픈'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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