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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의 연인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예담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요시다 슈이치 책을 오랫만에 읽었다. 2009년에 작성한 <요노스케 이야기> 서평이 마지막이니 거의 6년 만이다. 리뷰를 작성한 책 외에도 몇 권 더 그의 책을 읽었지만, 어느 순간 '나랑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손에서 놓게 되었다.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데다 일본 소설은 더더욱 읽지 않다보니 다시 만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돌아왔다.
그의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이웃 블로거들의 영향이 크다. 하나 둘 올라오는 서평을 읽고 있자니 이번 책은 나랑 너무 잘 맞을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 고요한 바람으로 시작해 자연스럽게 책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요시다 슈이치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만나게 된 책이 <타이베이의 연인들>이다.
<타이베이의 연인들>은 다다 하루카와 료렌하오를 중심으로 다양한 연령대의 일본인과 타이완인이 등장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주요인물인 오이물산 입사 4년 차 직원인 다다 하루카는 타이완 신칸센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타이베이로 떠난다. 오래 전 타이완 여행에서 만난 한 남자를 잊지 못하는 그녀는 느긋하고 낙천적인 성격이 왠지 타이베이와 잘 맞는 느낌이다. 다다 하루카가 잊지 못하는 한 남자인 료렌하오(에릭)는 오래 전 그녀의 여행에 하루를 함께 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후 연락이 끊긴 그녀를 잊지 못해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현재 일본 건축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인연의 끈이 보이지 않던 몇 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자신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녀를 만나게 된다.
다다 하루카의 상사인 안자이 마코토는 타이완 신칸센 프로젝트로 인해 타이베이에서 일하고 있지만, 왠지 타이베이는 자신과 맞지 않는 듯 하다. 아내와 불화는 물론이고 계획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타이완의 느긋한 업무 문화에 적응하기 힘든 그이다. 그런 그에게 타이완인 호스티스 유키는 유일한 안식처가 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쁘지만 좋은 의미(?)에서 점점 타이완인처럼 변하는 안자이 마코토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타이완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하야마 가쓰이치로는 일본의 패전으로 일본으로 돌아온 뒤 한 번도 타이완 땅을 밞지 않는다. 젊은 시절 일본 고속도로의 근간을 만들며 바쁘게 지냈지만, 은퇴 후 아내 요코가 죽고 혼자 쓸쓸히 지내고 있다. 나카노 다케오(랴오총)는 일본 식민지 시절 하야마 가쓰이치로와 한 몸처럼 붙어다닌 타이완인 친구다. 그러나 가쓰이치로의 말 한마디로 그와 60년 넘게 만나지 못했다. 누가 봐도 '타이완 남자'인 첸웨이즈는 고등학교 졸업 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유유자적 지내고 있다. 그런 그의 앞에 소꼽친구 창메이친이 미혼모가 되어 나타난다.
꽤 여러 명의 주요인물이 교대로 등장하며 이야기를 진행하기 때문에 조금 산만해 보일 수 있는 구성이다. 또 제목에 '연인들'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으니 '연애 소설이구나'하고 집었다가 '이건 연애 소설이 아닌데'하며 실망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마치 타이베이의 야시장을 걷고 있고, 항구도시 단수이의 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며, 비내리는 구아바 밭을 스쿠터로 달리는 기분이 들 정도로 대단한 흡입력이 있는 소설이다. 영상처럼 배경을 묘사하는 문체와 덤덤하지만 깊게 인물을 바라보는 통찰력은 '요시다 슈이치의 글이 이런 느낌이었지'하는 새삼스러움을 불러왔다.
하지만 읽는 동안 한 켠에는 불편한 마음이 존재했다. 아마 한국인만이 느끼는 불편함이 아닐까 싶은데, 조선 역시 일본 식민지 시절을 겪은 입장에서 친일적인 타이완인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야마 가쓰이치로가 회상하는 옛 타이베이에서는 식민지의 처절함이나 괴로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일본의 지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들과 친하게 어울리는 타이완인이 등장해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가쓰이치로가 보는 영화 <비정성시>의 내용을 찾아본 뒤에 타이완인의 태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에는 일본 패전 이후에 겪었던 타이완인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한다. '결국 흘러가는 대로 놔둘수밖에' 없는 남국의 모습이 그들의 역사에도 묻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완이 궁금하고 그 곳으로 떠나고 싶어졌다. 손으로 만져질 것 같은 묘사와 숨소리가 들릴 것 같은 표현이 타이완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스콜이 오는 타이완의 공기에는 물냄새가 숨어 있지 않을까. 구아바밭의 푸르름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생각만으로도 눈이 청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오늘을 살아가는 그들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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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카는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에릭을 한 발짝 뒤에서 따라갔다. 구 년이라는 세월이 도려내져서 구 년 전과 지금이 잇닿은 것 같았다. 시간이 만약 리본 같은 것이라면 구 년의 길이를 잘라내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 붙인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도려낸 구 년의 리본은 어디에 있을까.
하루카는 무심코 발밑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두 사람의 발 밑에 잘라낸 리본이 떨어져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하루카는 크게 휘젓는 에릭의 팔로 시선을 돌렸다. 착각이라는 건 알지만 에릭이 그 손에 리본 끄트머리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카는 하늘하늘 흔들리는 리본의 다른 한쪽 끝을 잡으려고 반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흔들리는 리본을 좀처럼 잡을 수 없었다. - 246~247p.
"타이완......"
가쓰이치로는 새삼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을 다시 쳐다보고 말았다. 한눈에도 몸에 딱 맞는, 좋은 옷감의 양복을 차려입었고, 새하얀 와이셔츠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발밑을 보니 구두는 조명이 반사될 정도로 반들반들 잘 닦여 있었다.
가쓰이치로는 타이완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떠올렸다. 숱하게 빨아서 후줄근해진 러닝셔츠, 아버지의 바지를 물려받아 만든 반바지, 늘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탓에 햇볕에 그은 살갗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타이완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았던 무렵의 자신과 눈앞의 청년은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가쓰이치로는 그사이에 흘러간 시간이, 자기들이 악착스럽게 일해서 지금 막 슬라이드로 보여준 일본의 발전이 늠름하고 믿음직스러운 청년의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301p.
고노스가 이야기했듯이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타이완으로 돌아간다"고 표현하는 인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쓰이치로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같은 고향 사람을 알게 되면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안도감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따져보면 나고 자란 곳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의 뭔가를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몰라도 상관없는 듯한, 그런 너그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가쓰이치로는 숨을 삼켰다. 나의 고향은 분명 타이완이다. 그런데 왜 지금껏 등을 돌리고 살았을까. - 30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