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형철에게 가능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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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비평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절박하다.

    나는 부조리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사람이다. 많은 상처를 주었고 적은 상처를 받았다.

    이 불균형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

    오로지 나의 삶을 나의 글로 덮어버리기 위해 썼다. 문학이 아니었으면 정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면서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이것이다.

    나는 문학을 사랑한다. 문학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다. (‘몰락의 에티카’)  

 

신형철은 단정하고 다정한 문학평론가다. 그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칭찬의 용법은 과장도 상투도 없이 읽는 이를 열락으로 이끄는, 이를테면, ‘죽고 싶다는 욕망과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내전을 벌이는 시를 쓰는 사람에게 이름이야 별 무소용일 것이다. 그는 그저 끊임없이 흩어졌다 모이는 몸, 부단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혼의 이름 없는 주인 같다(‘강정’, 2007)’같은 것이다. 나는, 그가 김민정 시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쓴 ‘삶의 어느 법정에서건 나는 그녀를 위해 증언할 것이다’같은 선언들 앞에서 들뜬다.  신형철은 예리하며 유려하다. ‘기소와 선고를 위한 문장을 쓰고 나면 나는 거의 고통스럽다. 나는 여전히 한 문장도 두려움 없이 쓰지 못한다’고 말하는 그가 써내는 언어는 불가피하다. 끊임없이 그는 혹독하게 맑은 눈으로 작품의 결을 열고 포착한다. 그의 안내로 한국 문학의 크고 작은 산맥을 등정한 이가 적지 않다. 그가 꿰뚫는 작품의 내면은 정확하고, 이를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해내는 참신한 묘사는 적확하다. 작품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하는 권능이, 그에게는 있다. 권혁웅 평론가는 그를 “지식이 해박하면 문장이 거칠고, 문장이 유려하면 논리가 성글고, 논리가 치밀하면 애정이 결여된 저 비평과 비판의 악무한 속에서 신형철의 글은 단연 빛난다”고 평한다.

그는 서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5년 봄부터 문학평론을 쓰기 시작해 2007년에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이 되었고 ‘제2의 김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8년에는 첫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를  출간, 8쇄를 찍었다. 평론집으로는 이례적인 기록이다. 현재 그는 세 군데의 대학에서 한국 문학을 강의하며 여전히 평론과 칼럼을 쓰고 있다. ‘자부도 체념도 없이 말하거니와,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거의 전부’라고 말하는 이의 이력이다. 

최근 그는 여기에 첫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출간을 추가했다. 이 책은 그가 2006년 봄부터 2009년 겨울까지 쓴 글을 추린 것이다. ‘몰락의 에티카’ 출간 즈음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을 핑계 삼아 전화를 걸었다. 그는 얼마간 머뭇거리다 다소의 체념을 섞은 목소리로, 그러나 공손하게 “지난번에 못해드렸으니까요… 이번에는 해드려야겠지요?”라고 대답했다. 그의 신중한 글을 오랫동안 읽어온 나는 그러한 망설임마저 어쩐지 그답다고 생각했다. 

 

정문정 기자 tiger@naeil.com 사진 임민철 STUDIO ZIP

  • 하나밖에 없는 것을 만드는 야망

     

    첫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가 출간되었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저의 일상은 읽고 쓰는 것이어서, 그걸 어느 정도 정리할 때가 되면 책을 내는 거예요. 감회가 새롭다기보다는 마무리를 잘 했다는 느낌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두 번째, 세 번째 책을 낼 거라서 일부러 이번 책에 원고를 쓴 연도를 적었어요. 이번 책이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쓴 원고를 묶은 것이니 다음에는 또 2010년부터 쓴 원고를 모아야죠.

     

    지금까지 내신 책들의 제목이 굉장히 개성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지으세요? 제목은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걸 짓겠다는 마음으로 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는 사람에게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것을 만든다는 야망이 필요한 것이죠. 저는 정말로 제목에 신경을 많이 써요. 제목은 첫 문장이기도 하지만 글을 끝까지 읽고 한 번 더 보게 되니까 마지막 문장이기도 한 거예요. 처음이자 마지막 문장을 무성의하게 쓴다는 건, 글쟁이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라 생각해요.

     

    이 책을 읽고 독자들이 어떤 느낌을 공유하면 좋겠다, 생각하신 것이 있을 텐데요. ‘느낌의 공동체’라는 제목은 이상이고 희망이에요. 책을 통해 제가 느낌의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생각은 없어요. 바라는 것은 이 책을 읽고 제가 언급했던 책을 손에 쥐신다면 좋겠다는 거고요. 욕심을 더 부리자면, 이 책을 쓰는 중에 제가 가장 솔직해졌을 때 전하고 싶었던 감정이 슬픔인데요. 슬픔은 인간의 근원적 감정인 것 같고, 슬픔처럼 솔직하기 어려운 감정도 없는 것 같고, 슬픔처럼 공감하기 어려운 감정도 없는 것 같고요. 가장 나누기 힘든 이 감정이 조금이라도 전달된다면 제일 어려운 걸 한 거니까 보람 있을 것 같아요. 

     

    글마다 문체가 다 달라요. 평하시는 작품마다 푹 빠졌다 나와서 글을 쓴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지요. 좋아하면 그렇게 돼요. 문장 스타일이 좋으면 자연스럽게 따라하게 되고요. 문태준 시인에 대해 쓸 때도 그 시인의 말투를 기분 좋게 따라가며 썼어요. 평론은 논리적으로 쓰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지만 산문은 그때그때 받은 느낌을 받아 그대로 쓰는 거니까요. 그런 글은 설득력은 다소 약하더라도 작품을 읽으며 제가 느낀 감정은 독자에게 전달이 더 잘 될 것 같아요.

     

    선생님의 책을 읽다 보면 분명히 과장하는 수사가 아니고 담백한데도 읽다가 몸이 달아오를 정도로 뜨겁고 아름다운 칭찬이 많아요. 칭찬을 어떻게 그렇게 기발하게 하세요? 저는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칭찬하고 싶어요. 저는 그런 방식으로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흠을 잡을 땐 특별한 능력이 필요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허물을 보고 한 목소리로 비난하기도 할 만큼 단점은 바로 눈에 보이니까요. 그런데 좋은 칭찬은 상대를 깊고 정확히 알지 않으면 하기 힘들어요. 설득력이 없으면 과장으로 보이고 호들갑을 떠는 것 같죠. 뛰어난 비평가들은 정확해요. 벤야민이 보들레르를 칭찬하거나 김현이 이청준을 칭찬하는 문장은 정확하지요. 저는 이것이 뛰어난 능력이라 생각해요. 제가 누구를 칭찬한 문장이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고 공유되면 좋겠어요. 가장 정확하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방식으로 칭찬을 함으로써 한 작품을 그 비평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할 수 없게 하고 싶어요.

     

    비판을 하실 때는 굉장히 조심스러워 보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내가 아는 바와 믿는 바를 쓰겠다’는 전제를 시작하고 이야기를 하시곤 합니다. 그런 모습이 과도한 자기 검열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자기 검열해요. 기본적으로, 저는 비판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비판하는 데 쓸 시간이 없어요. 제가 쓸 글은 한정되어 있어요. 비판해야 할 때는 나는 과연 이 비판에서 자유로운가, 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남에게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나 시행착오를 겪고 결함이 있잖아요. 비판하는 문장을 쓰는 순간 그 말이 제게 돌아오는 것 같아서 힘들어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는 나는 올바르고 정의로워서 이런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죠.

     

    하지만 평론가의 주요한 업 중 하나가 비판이기도 한데요. 비판적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존중해요. 저도 전혀 안 하는 건 아니고요. 신인 작가에게는 잘 안 하지만 고은, 신경림 같은 어른께는 가끔 해요. 그분들은 제가 비판해도 별로 상처 받으실 것 같지 않아서요. 어쨌든 저는 무엇보다 제가 괴로운 글을 쓰고 싶지 않아요. 저는 사명감이나, 옳고 정의로운 자리에 서서 평가를 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에요.

     

     

     

  •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실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계신데요. 학생들에게 어떤 것을 강조하는 선생님인지 궁금합니다. 학생을 가르치고 있지만,‘멘토’ 같은 역할을 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저도 아직 시행착오를 하며 살고 있어서요. 단지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문학을 통해 배우라는 것이죠. 저는 가르칠 자격이 없지만, 좋은 책은 해줄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해요. 예를 들어, 저는 ‘무엇은 무엇이다’같이 용감하게 정의하거나 ‘무엇 해라’하고 명령하는 제목 좋아하지 않고요. 한 단어로 된 제목 좋아하지 않아요. 더 잘 할 수 있는 걸 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성의 없게 보여요. 두 어절이나 세 어절로 된 제목을 좋아하는데 두 어절의 제목은 두 단어만 쓰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해놓은 것과 하고 싶었던 것의 간격을 보여 줄 수 있어서 화두를 던지기 좋은 것 같고, 세 어절은 한국어의 리듬이 가장 잘 살 수 있는 것 같이 느껴져요.

     

    선생님이 대학 때는 어떤 학생이셨어요? 노래패 활동한 것밖엔 없어요. 아마추어 수준으로 작사랑 작곡, 노래하면서 1학년 때부터 대학원 때까지 살다시피 했어요. 문학이야 평생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책 읽는 것이 생활이었고요. 문학을 평생 하겠다고 확신한 이유는, 제일 좋아하고 제일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어요. 잘할 자신 없이 좋아만 했다면 안 했을 거예요. 짝사랑은 슬픈 거잖아요. 조금씩 깊이 바꿀 수 있는 일이 보람 있고 생산적이라는 생각을 했고, 제 자신의 한계와 역량에 비춰봤을 때 이 일이나마 제일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선생님 삶에 비추어봤을 때, 평론가가 되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해주세요. 문학 작품을 읽어낼 수 있는 깊이가 있어야 할 텐데, 저는 그 깊이는 살아온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 제일 크다고 생각해요. 너무나 평탄하게 자기 삶을 꾸려온 사람이라면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등장인물의 상황에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적어지겠죠. 그런 사람일수록 이론에 과도하게 의존할 것이고요. 저도 제가 살아온 한계 안에서밖에 못 봐요. 문학의 한 측면만 간신히 잡고 있는 거죠. 그런 면에서 평론가는 많을수록 좋은 거예요. 그런데 저는 대학생에게 어떻게 살지 조언하라면 해줄 말이 없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시행착오를 거치고 상처를 주고 또 받고 실수를 하면서 밖에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그나마 시행착오를 덜 해보자고 책을 읽어서 누군가 상처받은 기록을 보고 인생에 대해 느끼겠지만 그건 직접 경험한 것과 다르잖아요.

     

    그렇다면 선생님은 인생에서 난관을 겪을 때 상처에 열려 있으려 노력하는 편이신가요? 첫 책 머리말에 ‘내가 나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면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내가 문학을 사랑한다는 것’이라 썼어요. ‘이건 정말 제 진심이에요’, 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많지가 않아요. 저는 ‘여러분,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 없어요. ‘여러분 뜻대로 안 될 겁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저는 비관적이에요. 아무리 노력해도 분명히 상처를 받을 거고, 그때 그 난관을 아주 이기적인 방식으로 돌파하려고 할 거예요. 그리고 결국 돌파하겠죠. 인간이니까. 나중에 아프게 그때를 돌아보게 될 것인데 그때, 뭔가를 배울 거예요. 그 순간에 조금 더 나은 인간으로 한 단계 올라가는 거죠.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아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졸렬한 사람이구나 깨달으면서 점점 쓸 수 있는 문장들이 생기는 거죠. 그때가 되면 아름답고 정의로운 문장은 쓸 수 없고 내가 겪었던 것들을 돌아볼 때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문장이 나올 테지요. 그런 경험 거치면서 쓸 수 있는 문장들이 쌓여서 글쟁이가 되겠고요. 저도 아직 멀었어요. 4,50대가 되면 더 많이 보이겠죠.

     

    지금 가장 집중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미약하나마 독자와 작가를 계속 연결해주고 싶어요. 작가에게 힘을 주는 좋은 글을 쓰고, 제가 가진 생각을 탐구하면서 밀고 나가는 것을 우선으로 하면서요. 다음에 나올 책의 가제도 정했는데요, ‘가능한 불가능’이에요. 3,4년 뒤에 2번째 평론집을 낼 텐데, 문학이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믿고 밀어붙이는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첫 평론집의 주제와 이어지는 말인데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지 생각 중이에요.  또 앞으로 하나의 주제를 정해서 연작 비평을 해보려 해요. 주제가 ‘항의’거든요. 좋은 문학 작품들은 다 세계질서에 저항하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내용으로 비평을 쓰려고 준비 중이에요.

     

    글을 쓸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쓸 수 있는 단어는 줄어들고 할 수 없는 말은 많아지잖아요. 그럼에도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글을 쓰는 존재들은, 글에 대해 가장 많이 회의하지만 가장 많이 의존하고 위안받는 사람들이에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글만큼 저를 행복하게 하는 게 없거든요. 체험이 있으니까 계속하는 거죠. 인간은 내버려두면 알아서 행복하게 살아가요. 행복한 길을 찾아가는 게 인간 같아요. 지금 저는 행복한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런 거죠… 그렇지 않을까요? 네, 그런 것 같아요.

     

     

    마지막 말은 동의를 구하는 것 같기도 했고 확신하는 것 같기도 했고 의심하거나 다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단정하는 말마다 조심스러워 하며 ‘나도 아직 멀었다’’나는 할 수 없다’같이 전반적으로나 부분적으로 한계를 규정하는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습관인 것 같은 이 평론가는 불가능의 가능성만을 신뢰한다. 신형철에게 가능한 것은 이토록 도저한 언어들에 대해 말하는 일이다.

     

     

     

    자부도 체념도 없이 말하거니와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거의 전부이다

    Shin Hyung Cheol

     

     

    사랑할수록 문학과 더 많이 싸우게 된다.

    사랑으로 일어나는 싸움에서 늘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는

    잘못을 저지른 쪽이 아니라 더 많이 그리워한 쪽이다.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야 다시 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다.

    나는 계속 질 것이다. (‘느낌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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