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90년대 말 교회 이단들이 퍼뜨린 지구 종말론에 대한 두려움으로 순진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가정과 직장, 학교를 내팽개치고 나와 단체 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다. 교회 이단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귀의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뿐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고통에 빠질 것이란 협박 아닌 협박으로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들이 말하는 지구의 종말이란 개인의 죽음을 의미했는데, 죽음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한 사기극으로 밝혀졌다. 그들이 말하는 가장 무서운 재앙이 과연 죽음뿐일까?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까지는 죽음 이외에 두려운 것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죽음이란 우리 모두가 피해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기에 두려우면서도 당연시하게 받아들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라마구의 세상에서는 죽음 보다 더한 재앙이 존재했다. 죽음처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고통스럽고 추악하기만 한 끝이 보이지 않는 재앙. 소설의 특징답게 허구적인 면이 강하긴 하지만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힘 때문에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순간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파란 불이 떨어지길 기다리던 차 안의 한 남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눈이 멀기 시작한다. 이 가엾은 남자를 집으로 데려다 주던 자동차 도둑도.. 처음에 눈이 먼 남자를 치료한 안과 의사도.. 그에게 치료를 받은 환자들도…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단지 눈 먼 사람들과 마주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백색 질병이 순식간에 전 세계를 덮치기 시작한다. 전염병임을 확실시한 정부에서는 눈 먼 사람들과 보균자들을 철저히 격리시키기 위해 정신병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에 이들을 수용한 후 군대를 통해 감시에 들어간다. 눈이 멀었으니 먹을 음식을 가지러 가는 것도 벅찼으며, 씻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용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을 찾는 일 조차 버거운 그들이었다. 그러나 정부에서 그들에게 해 준 일은 오직 먹을 음식과 청소에 필요한 세제를 공급하는 것 – 그것 또한 직접 갖다 주지 않고 병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둘 뿐이었다 -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그들을 배려하는 어떠한 다른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정부를 대신한 군대는 이미 그들을 인간 취급 하지 않으며 언제든 사살이 가능함을 암시한 후 몇 명의 눈 먼 사람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든 희망은 존재하는 법인지, 눈 먼 자들의 세계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으니 안과 의사의 아내가 바로 희망의 정점에 서 있다. 안과 의사의 아내는 그 세상에서 눈이 멀지 않은 오직 한 사람으로, 눈 먼 자들을 인도하고 감싸주며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눈이 멀게 된 이들은 결국 자신을 잃어가게 되고 사람이기를 포기하게 되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고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부끄러움을 모른 채 화장실이 아닌 곳에서 용변을 보고, 다른 사람의 이목에 상관 없이 섹스를 하고 다른 사람의 음식을 뺏는 등 원시적인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는 그들. 그런 상태로 수용소의 인원이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되면서 이기적인 개인 위에 새로운 집단이 생겨나게 되고, 강한 자와 약한 자로 양분되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결국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을 것을 빼앗기고, 자신의 물건을 상납하며 먹을 것을 얻고 결국엔 자신의 아내까지 바치게 된다. 집단 이기주의, 폭력, 강간, 살인이 난무하는 이 곳에서 그나마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자들이 안과 의사의 아내를 필두로 서로 단합하여 강한 자들을 물리치고 그 곳을 탈출하게 되지만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조차 그들이 갈 곳은 없었다. 자신의 집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찾게 된다 하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됨으로 인해 수도가 끊기고, 전기가 끊겼으며, 먹을 것이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먹을 것을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명의 결점이다. 우리는 집 안에 들어오는 수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급수 밸브를 열고 잠그는 사람들, 전기가 필요한 급수탑과 펌프, 부족분을 확인하고 여유분을 관리할 컴퓨터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곤 한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일을 하는 데는 사람의 눈이 필요하다는 것을.” 결국 그들은 무리 지어 다니며 버려진 가게를 뒤지고 쓰레기 통을 뒤져 음식을 먹고 아무 곳에서 잠을 자며 간신히 생명을 연장하게 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처음 눈이 먼 남자, 안과 의사, 검은 안경을 쓴 여자 등 이름으로 불리어지지 않는다. 이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답게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며, 본능에 의지해 사는 동물들과 다름 없음을 나타낸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기 이전에 이미 눈이 먼 이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생활하기에 불편하기만 했을 뿐 인간다움을 잃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소수의 사람들이 눈이 멀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눈이 먼 사람들은 눈이 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마침표와 쉼표만으로 이루어진 문장부호 속 글에 몰두하다 보면 내가 눈이 먼 듯한 착각에 빠져 백색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움이 뭔지를 잃어서도 안 된다. 지금 이 세상이 폭력과 야만에 길들여지지 않도록 바라 보기만 해서도 안 된다. 눈이 멀지 않았을 때 세상을 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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