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 피쉬
오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네가 설령 내 앞에서 사라진다 해도 둘이서 지냈던 날들의 기억은 남아.

그 기억이 내 안에 있는 한 나는 그 기억 속의 너로부터 계속 영향을 받게 돼.

물론 유키코뿐만이 아니라 부모님이나 와타나베씨, 지금까지 만났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지내온 시간은 기억의 집합체가 되어 지금의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

= 본문 중=

 

 

소멸하는 기억은 없다. 겉으로만 그렇게 드러나 보일 뿐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모습을 드러낼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야마자키 역시 표면적으로는 잊었다 생각한 유키코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화로 인해 19년간 수면 아래로 가둬놓은 옛 연인과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린다.

3평 남짓한 골방에서 고서점에서 사들인 책과 인스턴트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사회와 단절된 채 생활하던 야마자키는 톰의 죽음을 알리는 어머니의 소식에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유키코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 후 3년을 함께한, 영원할 것 같던 그들의 사랑은 와타나베씨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날 끝나고 만다. 가장 서로를 필요로 한 순간에 야마자키는 다른 여자와 함께였고, 유키코는 야마자키를 외면한 채 방치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무서워서 뒤돌아볼 수가 없어 앞으로만 내달렸다는 유키코의 가련한 모습에 유키코의 딸 아야짱에게 사다리를 올라가고 싶으면 밑을 돌아보면서 올라가라고 말하며 목 메여 하는 야마자키의 모습에 명치 끝이 아파왔다.

 

흔하디 흔한 사랑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리기엔 여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삶이 파일럿 피쉬와 너무 많이 닮아 있어, 문장 하나 하나도 차마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다른 물고기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수조 안에 제일 처음 넣는다는 물고기, 물이 맑아져서 비싸고 좋은 물고기가 살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다른 곳으로 버려지는 물고기가 파일럿 피쉬란다.

그 물고기처럼 서로가 서로의 파일럿 피쉬가 되어주면서 또 그로 인해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그들.

야마자키와 유키코, 야마자키와 가나짱, 유키코와 이쓰코가 그러했고 와타나베와 그의 딸들이 그러했다.

자신의 희생으로 다른 물고기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으니 파일럿 피쉬는 죽으면서도 행복했을까?

다른 이의 불행을 딛고 일어서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 과히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의 파일럿 피쉬가 되고 있다. 참 아이러니하지만 말이다.

 

희생이라는 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 내가 이미 다른 사람들의 희생 위에서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순간 뜨끔했다 그 희생이 없다면 우리 삶은 무척 외로울 거란 생각이 든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수많은 파일럿 피쉬들을 위해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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