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 아나키즘의 토대를 마련한 고전! 세계를 뒤흔든 선언 6
하승우 지음 / 그린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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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아나키즘에 별로 관심이 없다. 예전 학교 다닐때 다른학교에 나보다 한 학번 낮은 친구가 자기는 고등학교때부터 아나키즘에 관심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아나키즘의 '아'자도 몰랐는데... 신기한 녀석일세..."라고 생각했다. 여하간에 아나키즘은 이런 분야의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뭔가 큰 매력을 안겨주는 것임에는 틀림 없나 보다.
 

'아나키즘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한 고전'이라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해설한 이 책은 그럼 왜 읽었냐 하면, 사실 별 다른 이유는 없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면 다 못 읽을것을 뻔히 알면서도 절대 1,2권씩 안 빌린다. 무조건 최대 대출할 수 있는 3권을 맞춰서 빌려온다. 이것도 거의 30분 정도 뭘 빌려올까 고민하다가 고른 책이다.
 

저자인 하승우는 지행네트워크(http://jihaeng.net)의 일원이기도 하다. 또 다른 지행네트워크의 일원인 이명원씨의 글들이 참 좋다고 생각하곤 있었는데, 하승우의 글은 이 책이 처음이다. 그런데 첫 만남에 첫인상이 좀 별로다. -_-;;
 

이 책의 유일한 장점은 쉽게 쓰여졌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전혀 집중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복근운동 한답시고 다리를 수직으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짓을 하면서 읽었는데, 그래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크게 무리는 없었다. 중간중간에 곁들여진 사진도 볼만했고...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 아전인수격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주로 설명한 바와 같이, 제1인터내셔널 시기에 아나키스트들 대립했던 맑스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사회주의자들 중에 훌륭하다고 이름난 사람들을 죄다 아나키스트라고 묶어버리는 듯 하다. 내가 아나키즘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실제 그들이 아나키스트인지 아닌지 따질 형편은 안되지만, 저자 말대로 그들이 모두 아나키스트라고 하더라도 그 처럼 단일집단으로 묶어버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소개한 아나키스트들 중에는 테러리스트도 있고, 평화주의자도 있고, 생태주의자도 있는데, 이들이 모두 아나키스트라는 울타리 안에서 얼마나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또한 볼셰비키를 악마화하는 식의 논의도 좀 눈쌀을 지푸리게 한다. 저자는 볼셰비키의 만행과 비민주성을 폭로하는데 치중한 나머지, 아나키즘이 이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던 약점들에 대해서는 어물쩡 넘어가는 듯 하다. 내가 구체적인 사례를 아는게 없어서 딱히 반론을 구체적으로는 못하겠지만, 아나키즘의 약점이라고 할 만한 단서들이 이 책에서도 몇 군데 보인다. 그것은 바로 신간회를 통해 민족주의자들과 야합(?)하려 했던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중국의 한인 아나키스들의 조직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의 강령이다.(193-4쪽)

 

1. 일체 조직은 자유연합조직원리에 기초할 것.

2. 일체 정치운동을 반대할 것.

3. 운동은 오직 직접 방법으로 할 것.

4. 미래사회는 사회 만반이 다 자유연합의 원칙에 근거할 것이므로, 정치적 당파 이외의 각 독립운동 단체 및 혁명운동 단체 와 전우적 관계를 지속 존중할 것.

5. 국가 폐지

6. 일체 집단적 조직을 소멸할 것.

7. 사유재산을 철폐하고 공산주의를 실행하되 산업적 집중을 폐하고 공업과 농업의 병합, 즉 산업의 지방적 분산을 실행할 것.

8. 종교, 결혼제도, 가족제도 폐지.

 위 내용에서 2번, 6번, 8번은 한편으로는 황당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순진하다는 생각 밖에 안든다. 정치운동을 반대한다면 전체 사회에 별 영향을 못 끼칠 소규모-자족적 협동조합 활동이나 (협동조합 자체가 자족적인 활동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의 폭발력은 더 광범위 할 수 있는데, 정치운동에 대해 거부감을 잔뜩 안고 활동하면 자기들 스스로 그렇게 한계지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기껏해야 몇몇 부르주아 인물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테러활동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일체 집단적 조직을 소멸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아나코-코뮨적 공동체는 조직이 아니란 말인가? 위계적 조직과 수평적 조직의 경계는 무엇인가?
 

마지막 종교, 결혼제도, 가족제도를 폐지한다는 주장은... 음... 여기서 저자도 인용한 홉스봄의 말이 참 적절하단 생각이 든다. "부르주아지에게 충격을 주는 일이 그들을 타도하기보다는 쉬운 것이다." 종교, 결혼, 가족을 폐지하자는 말이 부르주아지에게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막히며 충격적인 언사겠는가? 그러나 그런 '말'로 그들을 타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 순진한 발상이지 않는가?
 

막판에 가서는 광주항쟁까지 아나코-코뮨주의의 실현이라고 말하는 부분에 가서는 정말 아무거나 막 갖다 대는구나 싶었다. 
 

그린비에서 나온 책 중 내가 읽어본 것은 왠만큼 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정말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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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김앤장 -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10
임종인.장화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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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5일에 쓴 글입니다.)

 나는 작년 초 진보신당이 만들어지는 걸 매우 띠겁게 바라보던 사람 중에 하나이다. 무엇보다도 당을 뛰쳐나가신 분들이 내걸은 이유(종북주의와 패권주의)가 전자의 것은 시기적으로 좀 쌩뚱맞고, 후자의 것은 어차피 이놈이나 저놈이나 오십보백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에겐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임종인이라는 사람 때문이다. 신당의 두 상임대표라는 사람들이 맨날 임종인을 끌어들이려고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듯한 모양새가 모양새가 영 띠꺼워 보였기 때문이다.(=>요 문장은 좀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대충 넘어가 주시길...) 임종인이 대체 뭔대? 얼마나 잘난 놈이길래 열우당에 있던 놈을 데려오려고 저리도 거품을 무나? 어렴풋하게 예전에 이라크 파병에 대해 비판하면서 행정부와 각을 세웠던 기억이 나긴 하는데, 그런 식의 활동은 진정성이라고는 개미 코딱지 만큼도 안 느껴지는 천정배, 김근태 이런 놈들도 다 하던 짓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래봤자 열우당인데..."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이건 내 정치적 당파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열우당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 문제가 되는 것인데, 난 이게 어떤 측면에선 요즈음 일반적 시민들의 구 집권세력에 대한 보편정서가 나에게 독특한 방식으로 체현된 것이라 (강하게!) 주당한다.

 

그러다가 임종인이 보궐선거 출마를 결정하고 진보정당들에 지지요청을 보낼 즈음 레디앙과 한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걸 보고 임종인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진보의 재구성'을 외부 사람 끌어오기로 대체하려는 신당의 몇몇 어르신들의 행태에 대해선 여전히 띠거운게 내 기본적인 관점이다.) 사실상 친노파 '출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친노신당을 친박연대에 비유하는 것을 보고 그냥 큰 제목만 읽어보고 닫으려던 기사를 끝까지 다 읽게 되었다. 블로거 한윤형의 말을 빌자면 "2004년 탄핵열풍을 업고 열린우리당에서 금뱃지를 단 인물들 중에 자신을 뽑은 유권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헤아렸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다가 임종인이 외환카드 노조위원장을 지낸 장화식과 함께 쓴 <법률사무소 김앤장>을 읽게되었다. 예전에도 읽으려다가 임종인의 '출신성분'이 맘에 걸려 멀리하다가 위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서 나름 그와의 '오해'를 풀고 편한 마음으로 읽어갔다.

 

일단 최종 감상평(??)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런 책을 쓰고도 아직 이 사람이 정치인으로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라는 거다. 삼성 이건희 회장보다 1년 수입이 더 많은 사람을 대표 변호사로 두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 사적 권력 집단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속옷까지 벗겨서 낱낱이 까발릴 생각을 하다니, 이 양반들 간댕이를 수십개씩 은행에다 냉동보관하고 있는것은 아닌가? 실제로 위클리경향의 전신인 뉴스메이커에서 김앤장 비판성 기사를 썼다가 김앤장으로부터 몇 십억대 소송 협박을 받고 정정기사를 내보내야만 했던 전례를 저자들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책 속에는 대한민국 최고 로펌이 살아가는 방법이 조목조목 드러난다. 핵심은 이중생활!! 대한변협에는 그냥 공동사업자(이거 맞나? 도서관에 책을 반납해서 정확한지 확인해 볼 수는 없지만....)로 등록해서 변호사법상 로펌에 가해지는 제약을 피하고, 국세청에는 로펌으로 등록해서 세제상의 혜택을 받는다. 게다가 수많은 고위공직자 출신들을 고문으로 거느린 이 로펌은 당당히 2년에 한번씩 국세청으로부터 납세자 표창을 받아서 주기적으로 2년간 세무조사를 면제받는다.

 

이건 그냥 도의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자. 뭐 전과자들이 장관되고 총리도 되는 세상에 쩝... 그러나 정치적으로, 국민경제적으로 문제인 것은 이들이 신자유주의를 위한 법률해석, 나아가 법개정에까지 개입할 수 있는 막강파워를 지녔다는 점이다. 세계최초 문자해고를 발명하고, 단협해지를 단체협상과 함께가는 연례행사로 만들어 버린 것도 이 변호사 집단의 머리에서 나온 거라 한다. 진로소주가 불법적으로 헐값 매각될 당시에도 진로 사장의 등뒤에서 칼끝을 겨누던 것도 이 변호사 집단이다. 기업 사장까지 무릎꿇게 할 정도면 노동자들은 집단 암매장 시켜도 눈하나 깜빡 안할 놈들이라는거지...

 

하나하나 열거하기에도 숨이 찬 이 devil's advocates(악마의 옹호자)를 여론의 심판대 위로 끌고 올 여지를 만들어 놓은 두 저자에게 늦었지만 박수를 보낸다. 여하간에 이번 보궐선거에서 좋은 성과를 거둬서 18대 국회에서도 그가 말한 '보이지 않는 권력을 보이게 하는'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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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참여 경제론 - 개정증보판
김대중 지음 / 산하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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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지는 한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서야 후기를 남긴다. 사실 그냥 김대중의 경제학이기 때문에 관심이 간 것도 있지만, 하버드대학에서 교재로 쓰인다는 책이라길래 "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라는 생각을 갖고 책을 펼쳤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나서야 대학에서 교재로 쓰는 책들이 항상 다 좋은 책은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하버드라고해서 별 수 있겠나...

 

본문의 내용에 왈가왈부하기 전에 고인에게 괜히 몇 가지 따지자면,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의 바탕이 된 논문을 미국의 교수들이 읽고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책으로 출판하자고 제의했다는데, 그 교수들이 대체 누구인지 전혀 얘기를 안한다. 그냥 '저명한 교수'라고만 말한다. 뭐야? 이름이 '저명한'이야? 게다가 남의 말을 인용한 부분들에서 한 번도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처음에 논문으로 쓰여졌던 것을 대중적 출판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러 뺀 건가 싶으면서도, 아무리 그래도 이게 뭐 신변잡기 농담따먹는 책이 아닌 이상 기본적인 것은 지켜야 하지 않나 싶다. 그가 책 전체에서 출처를 밝힌 부분은 오직 숫자와 표로 이루어진 통계자료들 뿐이다.

 

<대중참여경제론>에 담긴 김대중의 경제사상을 몇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경제는 지금껏 정부주도의 관치경제의 심각한 폐해를 겪어왔다. 관치경제는 자유로운 경제주체의 활동을 제약하고 독재정권과 유착된 일부 재벌에게만 편향적으로 재정분배가 이뤄지도록 했다.  2) 정부에 의해 인위적으로 금리가 낮게 유지됨으로 인해서 은행으로 돈이 모이질 않고, 게다가 부족한 은행자금의 기업 대출과정에 정치권력이 개입함으로써 대출을 통해 사회적 부가 대거 재벌로 이전된다. 은행을 통한 자산증식의 경로를 찾지 못한 돈들은 대부분 부동산 투기로 몰려 인플레이션을 조장한다.  3) 결국 이런 정부주도 경제성장 정책은 일부재벌과 대토지소유자의 이익만을 보장하고 중소기업과 근로자의 이익을 배제한다.  4) 한국이 기존의 경제성장의 성과를 이어받아 '세계 8대 선진국에 들려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대토지 소유자에게 중과세를 매겨 불로소득을 차단함과 동시에, 금리 자유화-한국은행 독립, 그리고 법인세 인하 등을 통해 시장경제를 원활히 작동케 해, 금융시장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이런 논의 속에서 얼마간 정치적인 결론도 도출되는데, 이는 어느정도 87년 이후 정세에서 김대중이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대립전선의 재구축에 대한 주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편에는 권위주의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일부 재벌과 대토지 소유자가 한 편에 있고, 다른 한편엔 건전한 기업가(중소기업)과 근로자, 그리고 민주화 세력이 버티고 있다. 후자의 세력은 지금껏 관치경제의 폐해로 인해 성장이 발목잡힌 이들로서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경제주체이다. 이들은 성장된 금융시장에 동등한 투자자로서 활동할 수 있으며, 특히 근로자들은 소규모 다수조합으로 활동하여 국민경제에 제동을 걸기보다는 광범위한 전국적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국가적 단위의 협상에 참여해 자신들의 법적 권익을 지키고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요로한 책의 내용에 근거하여, 나는 김대중이 정말 준비된 대통령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저런 내용은 IMF가 남한에 요구했던 경제개혁 조치의 주요 내용과 거의 흡사하다. 그리하여, 김대중이 IMF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도입했던 것이, IMF의 강요때문이었다고 항변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아주 중요한 증거자료가 될 것이다. 니들이 김대중을 그렇게 떠받들고 싶으면 최소한 선상님이 쓰신 책 정도는 읽어보고 떠들어야지...

 

이 책을 읽으면 김대중이 추진했던 일련의 경제개혁 조치들이 IMF 사태에 의해 우발적으로, 자기 의도와는 다르게 추진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전국단위 노동조합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실제 파견법, 정리해고법과 맞거래된 민주노총의 합법화로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그의 사상과 정치적 실천 사이에 놓인 잘 뻗은 고속도로가 참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항간에는 김대중이 2000년도에 생산적 복지를 내걸고 기초생활보장법 도입한 때에 정권 초반 신자유주의 정책과 단절하고, 그의 원래 경제사상이라 할 수 있는 대중경제론을 실현해 보려는 시도였다고 말하는 놈도 있더라. 그러나 이 말을 김대중이 대선 첫 도전 때 낸 <대중경제 100문 100답> 집필을 막후에서 지원했다는, 심지어 요즘엔 그 때문에 대필 논란까지 제기되고 있는 박현채 선상님께서 듣는다면 저승문을 박차고 뛰쳐나오고 싶으실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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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장하준 지음,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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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말이 진보라는 말 만큼이나 진부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그 재구성의 내용들이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것보다 못한 것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바람을 타고 고개를 내미는 사민주의 논의와 함께 주목받고 있는 장하준의 경제학도 비슷한 케이스란 생각이 든다. 아니 어떤 면에선 경악스럽기까지 한 측면도 많다.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은 '진보의 재구성'의 요소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경악스러운 논의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의 전체적인 논의 속에서 계속 눈에 걸리는 것은 사실상 그가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른 목소리를 통해 같은 말을 한다'. 그러면 우선 그의 논리 구조를 따라가 보자. 그는 순수한 의미의 '자유시장'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모든 '시장'의 형성에 있어서 어떤 사회에서도 국가의 개입을 배제하고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난 여기까지는 전혀 색다를 것이 없는, 진보학계에서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란 생각이 드는데, 왜냐면 이런 사실은 장하준이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칼 폴라니가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라는 허상을 공격하면서, 그리고 쉬잔느 브뤼노프가 국가와 자본이라는 머리 두개 달린 독수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미 깨뜨린 논리이다. 물론 폴라니나 브뤼노프를 굳이 언급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어찌되었건 이 정도로 뭐 대단한 사상적 진전을 본 것마냥 오바할 거 하나 없다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가 '자유시장'이라는 베일에 감춰진 '국가'라는 마피아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이 국가를 미화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보통 신자유주의의 선봉장들은 국가를 시장경제의 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한다.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장하준은 폴라니나 브뤼노프처럼 사회의 파멸을 초래하는 시장경제의 성장에 동조한 국가의 역할을 폭로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에 국가가 엄청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고전파 경제학이 경제성장을 위해선 국가의 역할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장하준은 같은 이유로 국가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국가가 암암리에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해 해 왔던 '긍정적인 역할'들을 인정하고 이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간간히 심지어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계획경제에도 긍정성을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마치 허무개그를 보는 것만 같다. 장하준은 초국적 기업에 대한 전통적 신자유주의자들(신고전파, 오스트리아학파, 후생경제학 등)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자랑하는 외국인 직접투자는 사실 선진국 내부에서만 발생했고 실제 개도국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말한다. 실제 신자유주의가 관철되는 과정에서 산업부문에서의 직접투자보다는 금융에서의 포트폴리오 투자 같은 간접투자가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내가 장하준에게 묻고 싶은 말은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이다. 그는 줄곧 강조하는 산업정책의 발전을 위해서 이런 부문에까지 해외 자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산업부문에도 외국자본이 직접개입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자? 뭐 이런건가?

나의 이런 의문은 뒷부분으로 가면 말끔히 정리된다. 그는 초국적 기업  투자를 촉진하는 것은 규제완화 조치들이 아니라 국내정치적 안정성이라 주장한다. 왜냐면 실제 규제완화 여부와 상관없이 개도국의 기업투자 유치 실적은 늘지 않았고, 오히려 선진국에서만 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171쪽)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주도하는 '전략적 산업정책'을 통해 국제적 조건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앞에서 그의 주장이 '다른 목소리로 같은 말하기'일 뿐이라고 일갈한 이유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가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자나 장하준 자신이나 모두 초국적 기업 투자 자체는 '선'이라는 인식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신자유주의자는 규제완화를 주장하고 장하준은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주장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사실상 세계적으로 '순수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 말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는 남미에서도 워싱턴 컨센서스를 수용하는 친미세력의 정권 장악이라는 국내정치적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NAFTA도 체결하고, 아옌데도 때려잡았던거 아닌가? 물론 이 당시 남미의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하준이 박정희 정권 당시 한국 정치 상황을 안정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 당췌 이 양반이 생각하는 '안정'이 뭔지 아리송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 신자유주의자들도, 장하준도 국가주의자이다. 다만 장하준이 좀 더 솔직할 뿐이다. 여기서 장하준이 어떤 국가주의자인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기술관료 즉, 테크노라트에 대한 비판이 주되게 제기되고 있는데, 장하준은 정확히 이런 테크노라트들의 치어리더다. "선별적 산업, 무역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경제학자로서의 능력보다는 오히려 관리자로서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229쪽) 이딴 식이라면 어떻게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장하준은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에겐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장하준의 테크노라트를 위한 응원가는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는 중국, 한국, 폴란드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초국적 기업은 매몰비용의 문제 때문에 정부의 정책전환에 불만을 가지고 자금을 회수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초국적 기업을 상대로 해당 국가 정부가 다양한 협상 카드를 제시할수 있고, 협상 과정에서 초국적 기업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165-167쪽) "그러니 이 땅의 모든 기술관료들이여! 두려움을 버리고 당당히 나아가라! 전 세계 자본에게 당당히 호객행위를 하라!"

한 학생단체에서 낸 팜플렛을 보니까 장하준을 비판하면서 그의 입장이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던데, 솔직히 난 이런 비판도 좀 오버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가 만약 현시기 자본주의가 위기라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가 이 단체가 생각하는 '위기'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일테고, 그렇기 때문에 장하준은 (이 단체가 생각하는) 위기를 극복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단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극복의 방향은 '대안세계화'인데, 장하준은 대안세계화 정도되는 대안 논의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정확히 이런 수준에서, 노무현은 장하준의 책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놈의 '진보의 재구성'을 이루기 위해선 장하준도 노무현도 넘어서는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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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학 함께 읽기
김도현 지음 / 그린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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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약간의 변명

 

내가 그의 책에 논평하는 것은 적절한 것일까? 장애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사실상 전무한 국내 좌파의 토양 위에서 그나마 장애와 관련해서 의미있는 글들을 써왔던 수유+너머의 고병권마저도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사실 내가 김도현의 책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장애 문제에 관한 한 그는 내 교육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차후 문제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고병권의 말을 기준으로 하자면 내가 '서평'이라는 큰 타이틀을 걸고 '낙서' 수준으로라도 글을 찌끄리는 것은 상당히 발칙한 생각이겠지만, 버스비 천원이 아까워 3-40분 거리 정도는 가뿐하게 걸어다니는 내가 만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이 책을 샀으니 인터넷 쇼핑몰에 상품평 올리는 사람들마냥 몇 마디 코멘트 할 자격은 있는 것 같다.

 

일단 뭔가 평을 하려면 해당 주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다른 문헌들, 특히 논평하려는 책과 다른 관점을 가진 문헌들과 비교하는 것 정도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더군다나 나 같은 풋내기 독자가 이 책을 평하는 글을, 심지어 낙서수준으로라도 쓴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상 국내에서 장애문제를 자기 학문적 과제로 다루는 사회복지학이나 특수교육학 전문서적을 제외하고 대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장애(학) 관련 서적은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내가 봤을 때 (물론 공부를 전혀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장애복지 어쩌구 하는 이름을 달고 있는 책들은 그냥 '장애'라는 단어를 '노인'이나 '아동' 등으로 바꿔놓으면 또 아주 새롭고(?) '훌륭한'(??) 이론서가 될 만큼, 장애문제 자체에 대한 고민은 전무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사정이다보니 김도현의 <장애학 함께 읽기>의 참고문헌 목록에도 (국내출판 문헌만 봤을 때) 전공서적스러운 몇 개의 문헌과 저자 자신이 이전에 쓴 다른 책을 제외하고는 장애문제 자체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결국 이 책은 전문 연구자도 아닌 저자가 거의 맨땅에 해딩하는 식으로 해외 원문서적 찾아가며 읽어낸 장애학의 정수를 그의 말마따나 소화한 만큼 보여주는, 그래서 완전 알짜배기로만 뭉쳐있는 그런 책이다.

 

 

 

내가 읽은 <장애학 함께 읽기>

 

이 책의 1부는 주로 '장애' 자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와 이 중에서 특히 주로 사회적 생성주의 모형에 따르는 '사회적 장애이론'에 대한 소개에 할애하고 있다. 이에 근거한 관점은 그의 전작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메이데이, 2007)에서도 얼마간 제시되고 있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주로 영국 리즈대학 장애학연구센터의 연구성과들을 중심으로 이해를 돕고 있다. 하지만 이론에 대한 소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다양한 운동세력들(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몸의 사회학 등)간의 논쟁을 덧붙이면서 저자 자신이 생각하는 장애학의 지평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나아가 2부에서는 장애학이 사회운동 속에서 실현되기 위한 다양한 논의들을 엮어놓는데, 이 부분에서는 특히나 저자의 폭넓은 독서편력이 돋보인다. 그는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대안사회체제에 대한 논쟁에 장애문제가 논의될 수 있는 방식, 그 중에서도 특히 장애와 노동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폴 애벌리의 '노동거부'와 '기본소득'론, 그리고 이에 대한 우회적 비판의 경로로서 울리히 벡의 '새로운 노동세계'건설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며 이 둘을 경쟁시킨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서는 제도정치와 비제도정치의 결합 또는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의 결합이라는 오래된 논쟁을 장애인운동의 시각에서 다시 읽어내고 있다.

 

노회찬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여성학을 읽고 젠더가 배제된 정치는 진보일 수 없음을 깨우쳤듯이, 이제 우리는 장애학을 함께 읽고 장애가 배제된 정치 또한 진보일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나는 이 책이 노회찬의 이 말을 더 근원적인 물음에 닿게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장애인운동을 전체 사회운동에 어떤 자리에,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라는 물음. 젠더가 배제된 정치여서는 안된다고 이해했다면, 이는 곧 여성운동이 사회운동의 단순한 '부분집합'이 아니라 사회운동 자체의 성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핵심'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페미니즘을 우리 운동의 전략적 심급으로 사고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장애인운동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운동사회 전반적으로 이런 시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저자가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말미에서 발리바르가 제기했던 '노동과 자본의 모순으로 포섭할 수 없는 인간학적 차이'라는 시각을 환기시키면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장애를 인간학적 차이로 이해하고 이로 인한 모순들이 다른 어떤것으로 전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조를 이해하는 노력이 아직 많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일전에 나는 어떤 활동가가 여성운동이 왜 전략적 심급을 갖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이유를 장애인운동과 다르게 여성운동은 보편적일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즉, 장애인운동은 특수한 사례이기 때문에 전체운동의 질을 결정할 수 있는 전략적 심급이 아니라는 것이고, 여성운동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하나하나 반박하고 따지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기에 넘어가긴 하겠지만, 어쨌든 <장애학 함께 읽기>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전체 사회운동 내에서 장애인운동의 근원적 위치를 물을 수 있는 통로를 만났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 2부를 읽으면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장 '장애 정치' 부분은 장애정치를 다룬다기 보다는 일반적인 사회운동론을 다룬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도 그럴것이 여기서는 주로 20세기 사회주의 운동 탄생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는 논쟁인, 당이냐 사회운동이냐라는 쟁점을 환기시키고 여기에 장애문제를 살짝 얹어놓는 듯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쉽다'라는 느낌이 책 자체에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책의 논의를 둘러싼 장애정치의 발전 수준에 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장애정치에 대한 논의가 이런식으로밖에 갈 수 없는 것은 저자 자신의 논의력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장애운동이 세계 어디에서도 정치무대의 제대로된 논의 테이블에 올라온 적이 없는 척박한 환경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 자신도 불가피하게(?) 장애운동 외부의 이론적 자원들을 동원했던 것일테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양한 이론적 자원에 근거를 둔 논의 방식이 장애인운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밑거름으로 기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활동가의 롤모델

 

어쩌다보니 난 지금까지 김도현씨가 낸 3권의 책을 다 사보게 되었다. 근데 좀 씁쓸한 것은 그의 책 세권이 내가 지금까지 본 장애운동 관련된 책 중에 한권 빼고 나머지 다 라는 사실이다. (그 한권은 삼인출판사에서 나온 <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이다) 내가 그 동안 책을 많이 본 편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장애문제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관심을 두고 있던 편이다. (그냥 '관심'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런데 내가 본 4권에 장애문제 관련된 책 중에 3권을 김도현씨가 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장애운동의 이론화, 대중화를 위해서 그 혼자 독고다이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공부하고 투쟁하는 사회운동가의 전형적인 롤모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참 그런 의미에서 김진균상 같은 것은 정말 아무한테나 주는 상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여하간에 이 허섭스러운 서평, 아니 낙서를 보시는 분들에게 <장애학 함께 읽기>라는 양서를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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