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이와 반복> 83쪽 까지 읽었다. 서론:반복과 차이 부분이다. 전공자들도 서너 번을 읽어야 한다는 본문들인데 나같은 문외한에게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난해하다. 다만 머릿속에 잡히는 것은 니체와 키엘케고르가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던 ‘반복’의 문제는 더욱 매우 중요한 철학주제이며 중요한 그만큼 개척자들이 던져 준 그 주제와 내용을 그러므로 보다 현대적인 차원으로 정교하고 세밀하게 체계적으로 규명, 엄밀하게 사유,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이고 그런 흐름에서 들뢰즈의 존재론이 의미있게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들뢰즈의 존재론은 키엘케고르의 단순한 재해석에 국한되지 않고 거대한 포월성을 노린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반복개념은 뒤로하고도 문제를 던졌던 키엘케고르의 반복은 무엇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키엘케고르의 반복과 들뢰즈의 반복은 어떤 차이가 있고 키엘케고르의 그 반복을 들뢰즈에게서는 어떻게 계승되고 어떤 방식으로 심화되고 있는가? 이제 겨우 서론을 읽었는데 섣부른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그렇다면 일단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또 길을 잃어버리기 전에) 키엘케고르에게로 돌아가 보자. 반복이라는 그 개념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겸---.특히 그 반복의 문제를 제시한 키엘케고르의 <반복>은 분량도 많지 않은 만만히 얇은 책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 책은 2006년 9월에 내가 두 번을 정독했던 책이다. 어쨌든 들뢰즈와 유기적으로 선을 이어 다시 펴 재 정독해 본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키엘케고르의 잘 들어맞고 있는 예언이다.
“그 누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이 문제(반복)가 근대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387쪽)
405쪽에는 또 이런 문장도 있다.

“반복은 마땅히 반복되어야만 하는 새로운 범주이다. 근대철학에 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고대 그리스 철학에 조금이라도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범주가 곧 엘레아 학파(존재)와 헤라클레이토스 학파(운동,생성)간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것이며 매개라고 잘못 명명되어 온 것이 다름 아닌 반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키엘케고르의 반복개념은 (들뢰즈의 차이개념을 어느 정도 이해한 덕분인지) 비교적 쉽다. 우선 역자(손재준; 삼성출판사, 1983년판 <세계사상전집>19)의 친절한 해설을 편하게 옮겨 보자.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고 기계적이 되기 쉬운 그날그날의 일상적 생활을, 언제나 새로운 결의와 각오를 지니고 살아가는 생활태도와 마음가짐, 이것을 가리켜 키엘케고르는 특히 ‘반복’이라고 칭했다. 때문에 반복이라는 개념은 ---‘윤리적 실존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인 동시에 ‘윤리적 세계관의 핵심’인 것이다.”
세계관? 핵심? 그렇다! 반복은 되풀이를 뜻하는 단순한 어떤 동작이나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자기 확신적 감격을 의미하는 너무나 비중 있는 개념, ‘윤리적 세계관의 핵심’으로 언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키엘케고르는 그 <반복>을 통해 관념과 합리주의, 그 외면의 체계적 질서의 의식의 기능성에 메말라버렸던 존재의 신비와 그 감격적 힘, 생동하는 윤리적 힘을 들고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 존재를 구원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이런! 들뢰즈의 차이라는 개념에서 기만당할 뻔 했던 함정을 나는 또 보기 좋게 반복한 것이다. 2년 전에 그 텍스트를 읽을 때에는 그냥 존재의 감격을 진술해 준 몇 줄 문장을 건진 것을 다행으로 알고 밑줄을 긋고는 그래도 의미있게 읽었다고 자위하며 ‘역시 키엘케고르! 운운하며 두 번이나 정독했었는데---오 마이 갓! 그 허망함에 힘이 다 빠진다.)
“나는 다시금 나 자신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나는 반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제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472쪽)
반복이란 어쨌든 키엘케고르에게서는 잃어버린 나를 찾은 존재의 감격! 그 자체를 이르는 개념이다. “인생은 내가 보다 더 사랑했던 것을 나에게도 주었습니다. 나 자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473쪽) 자기 확신과 감격에서는 창조적인 삶의 에너지가 스스로 발산되는데 그 발산되는 생성과 운동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써 개체 존재를‘반복’으로 명명했던 것이다. 그 생성의 창조적 힘은 너무나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 힘은 모든 만물과 사태들을 의미화 시키는 매혹적인 인격적 능력, 감격으로 까지 지반되고 올라간다. “도취의 잔이 다시금 내 손에 쥐어졌습니다. 벌써 그 향기가 내 코를 찌르고 있습니다.”(474쪽)
물론 이 반복은 플라톤으로부터 발생, 적체된 합리주의적 전통에 대비된 것이다. 사유와 존재를 분절된 논증의 기능성으로만 엄밀하게 체계화 시키는 전통철학으로 하면 (생성적 존재에 대비해서)현실은 형식적 현실이 되어 버리고 존재는 그 창조적 감격이 말라 형식적 존재로 비어 버린다. 그런 체계사유에서는 개체존재도 항시 그 외적 체계나 엄밀 과학의 구조의 위격에 투사되어 자신의 근원 자아와 대면하는 인격적 촉발이 그만큼 흐릿해 질 수 밖에 없다. 존재의 생성과 기쁨은 촉발되지 못하고 기능성과 합리적 표상의 구조물 속에서 녹아나 엷어져 그 존재는 유실되고 말라버리는 것이다. 그 형식존재의 내적 기제에서 자기치유와 생산의 반복의 차원이 발생될 리는 만무하다. 합리적인 표상의 개체 존재는 그런 무능한 존재로 퇴행되는 것이다. 그런 유사존재에서는 외형적으로는 반복과 유사하지만 전혀 반복이 아닌 건조한‘습관’만이 생산되는데 곧 그것은 운동과 생성이 아니라 엘레아학파의 상기(相起:anamnesis)라고 명명되는 그러한 공전(空轉)의 개념이다.
그 반복이 아닌 실증논리의 상기적 차원에서는 존재가 비록 존재라는 이름으로 설정되고 유통되지만 그 존재는 유사존재, 존재의 겉모습, 존재의 감격을 만들지 못하는 메마른 허영과 같은 것이다. “나는 쉬지 않고 성실하고 끈기있게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도 남는 것이 없군요.”(452쪽) (그런데도 한편, 인간은 그 상기의 마력에 깊이 물들고 길들여져 그 상기적 차원을 막연하게 동경하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런데도 나는 당신(상기적 세계관)없이는 못살 것 같군요.”(446쪽) -<반복>에서 연애에 빠진 청년을 멘토링하는 교양 있는 신사는 이런 유사반복의 허영적 존재를 잘 표상해 주는 장치가 아닌가?)
상기(습관)에서는 그러므로 자기 확신의 자리가 없다. 근원자아와 대면되지 않는 피상적 자아는 중심적 자아가 처음부터 없으므로 항시 그 자아는 필연적으로 스스로 어떤 허영적 외면에 투사되고 휘둘리게 된다. 무대와 시장, 그것을 치장하는 문화나 학문의 근엄 권위, 교양의 겉 멋, 새로운 자극과 같은 외적 허영과 권위에 끊임없이 휘둘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휘둘림’이 내면에 더 큰 구멍을 만드는 것은 그렇게 휘둘리면서도 양심이나 근원적 자기확신같은 그런 환상이나 관념의 이상을 인간이 내재적으로 경험하게 되는데---도달할 수 없는 이상은 환상으로 살아있되 그 이상의 형식과 겉 껍데기일 뿐인 상기, 즉 습관의 범주만 반복하고 있다는 그 채워지지 않는 그 빈 공간을 휘둘림, 외적 투사가 필연적으로 팽창시켜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스스로 메마르게 앙상해져 가는 악순환의 고리에 기계적으로 묶인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 스스로의 전체 내용에서 ‘허영심 이상의 더 깊은 근거를 찾지 못한 채’ 집을 찾지 못한 불안한 존재로 실존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삶은 그렇게 해서 무의미하고 매너리즘, 자기창조와 생산적인 인격적 힘이 없는 내적 무능 의 늪! 그 자체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곧 ‘겉멋의 신비주의’이다.
바로 이 좌절과 마름 속에서 키엘케고르가 반복을 들고 나온 것이다.
“나는 다시 나 자신이 되었습니다.---나를 결박하고 있던 올가미들은 모두 끊겨져 나간 것입니다. 마술의 힘으로 나의 마음속에 들어 와서 나를 나 자신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던 마법의 주문이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습니다.---나는 이제야 나 자신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473쪽) 좌절이 극복된 그 극적인 자기발견의 감격, 그 지속적인 감격은 존재의 힘이며 윤리적 에너지를 포함하는 존재의 기쁨! 핵심! 그 자체이다.
“반복은 어떤 윤리관이라도 해결해 준다. 반복은 모든 교의적 문제에 없어서는 안 될 전제이다.”(406쪽)
이렇게 존재의 감격, 반복을 주창하면서 심지어 키엘케고르는 이런 재미있는 문장까지 남겨 놓는다.
“(헤겔의)매개(Mediation)라는 말은 외국어이다. 그에 반해 반복(Gjentagels)이라는 훌륭한 말은 덴마크어이다. 이런 철학적 용어를 가지고 있는 덴마크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내는 바이다.”(406쪽)

그렇다면 이 반복은 어떻게 경험되는 것인가? 윤리적인 실존의 핵심적인 이 부분은 어떻게 마련되는가? 이 부분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극적인 부분은 어떤 고난도의 지적 이해력이나 그 능력을 요구하고 있어서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영역에서 운위되는 것이어서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그 종교적 차원을 경험적으로 알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간단하고 쉬운 문제이겠지만---) 우선 이 차원을 이해하려면 먼저 시인이 되어야 한다. (합리적인 사유가 극한까지 발전한 관념론의 해체가 키엘케고르의 주 과제이므로 그래서 그는 그 스스로가 자신의 철학을 논리실증적인 논문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반복>과 같이 시적인 감성으로 기술했던 것을 이제야 알겠다. 물론 니체도)
“반복은 언제 나타나는 것일까요?---인간의 언어로는 그것을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사고할 수 있는’인간적인 일체의 확실성과 개연성이 그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했을 때, 그것은 나타났습니다.”(467쪽)
반복은 인간이 그 자신의 한계성이 끝까지 밀려간 그 이후의 지점에서 나타난다. 근원자아가 아닌 허영과 자극, 외적 근엄, 겉멋의 신비주의가 깨어지고 극한 혼돈으로 스러질 때 그 지점에서 경험되어 지는 것이다. 키엘케고르는 이 범주를 구약성서의 욥의 경우를 들어 설명한다. 인간의 외면적 위업과 내면적 경지의 정상에서 닥쳐온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는 운명적인 절대고난! 이때 삶의 근원적 혼란에서 습관의 형식기제들은 뿌리를 드러내고 아무런 현실적인 내용이나 해석력을 얻지 못하는 절대무능, 오히려 존재의 내용을 더욱 논리적으로 혼란하게 흔들게 할 뿐이다. 존재의 근거를 설명할 수 있는 그 어떤 표상들도 존재하지 않는 무중력의 혼돈! 그 지점에서 약간 더 밀려 나가면 존재는 합리적 관념 그 이상의 발화점에 맞닥뜨려 촉발되고 그 지점에 걸려 나선처럼 뒤집힌다. 그렇게 전복된 역광은 이후에 반사적 힘으로 튀어 오르는데 이것은 곧 종교적 차원의 어떤 ‘거듭남’이다. 이전의 무능과 한계의 하한선이 낮아지고 내려간 만큼 그 역광의 힘으로 이제는 거꾸로 존재가 그 메말랐던 무의미의 거대진공을 블랙홀처럼 흡수하며 충만한 감격으로 번개처럼 변환되어 상승해 버리는데 그 내용은 가공할 만한 범주를 채워 낸다.
극적인 역전극---! 무가 유가 되고 빈공간은 넘치는 생명의 발원지가 되는 존재의 감격은 바로 이 극적인 반전의 정오에서 유출되어 넘친다. 가장 낮은 저점의 존재의 자기발견적 겸손을 기점으로 가장 최상위의 존재의 기쁨과 영광의 고도를 누리는, 그러면서도 그 영광에 대하여는 주권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겸손적 자유!(이것이 진짜 자유가 아닌가?), 이로써 반복으로서의 존재는 근원적 의식 좌표를 찾고 제 자리를 얻는다. 곧 반복은 인간 심연의 최저층과 최상층을 충만으로 채우며 의식으로는 최저층의 무한에 대한 자각을 깔고 그 역광의 반사로는 절대에 이르는 신적인 영광을 아우르는 거대 폭의 내면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런 가공할만한 범주를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거대 자유’라는 표현으로 유통해도 될까? 곧 유한의 겸손한 좌표에서 의미와 감격적 힘으로는 무한의 영광에 이르러, 존재의 내면에 감각 이상의 만족으로 침입될 수 없는 상기(습관)가 확장해 놓은 빈 우주적 공간을 마침내 인격적 힘으로 흥건하게 채워내는 힘을 포함하는 거대자유!---.
“반복의 사랑에는 상기의 사랑에서처럼 기대에 대한 불안이 없으며 탐험에 따른 불안한 모험도 없다.---순간에 대한 지극히 복된 확실성만이 있을 뿐이다.--- 반복은 축복받은 우리의 일용양식으로서 우리를 배부르게 해 준다.---요컨대 반복을 선택한 사람만이 참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388쪽)
좀더 쉬운 예로 정리해 보면 이런 이야기도 될 수 있을까? 같은 두 사람의 직장인이 있다고 하자. 두 사람 다 학력이나 실력 역량들이 엇비슷한데 그 중 A는 남다른 정열과 감격으로 일상의 업무를 소화해 내고 B는 그냥 매사의 태도가 매너리즘적이다. 외적으로는 우열을 구별하기 힘든 A와 B인데 내적으로는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는 이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알고 보니 쉽게 매너리즘에 빠지는 B는 별 어려움 없이 바로 입사한 케이스 였고 A는 긴 백수생활을 통해 아픔과 좌절 고통을 뼈저리게 느낀 케이스, 그 차이였던 것이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A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삶의 최고의 감격적인 기회도 될 수 있음을 온 몸으로 깨달을 줄 안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졌던 그 고통을 통하여 자신을 얻고 자기의 발견, 즉 반복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자신의 존재가 가장 소중하고 귀한 자각적 존재임을 알고 그 확신과 감격에서 삶의 성장과 창조적인 동기를 무한하게 경험해 낼 줄 안다.
물론 이 비유는 키엘케고르가 설명하는 반복에 대한 종교적 범주로 올라가는 기술에 비하면 좀 소극적이고 약간 더 일상적인 이해가 될 것이지만 역광으로 뒤집힌 반복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는 있지 않을까?
어쨌든 이와 같이 키엘케고르의 반복은 논리적 합리성을 넘어 초월적인 ‘예외’의 성격을 띤다. 그도 그럴 것이 감격이 없는 존재의 에너지가 합리적인 논리 세계관으로 인한 상기(습관)로 말미암은 열매였기에 그 상기적 차원을 깨고 일깨우는‘깨움’은 당연히 상기의 세계관 바깥, 즉 초월의 영역에서 주어져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 역학관계로 보면 상기에 대비해서는 초월은 논리를 초월하지만 그 초월이야말로 해법적으로는 ‘실증’그 자체가 아닌가? (그러면 그렇게 개념과 논리를 벗어나면 그 반복은 은유적 신비주의와 어떻게 구별이 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규명과 더욱 정교한 논리는 들뢰즈에게서 볼수 있을 것이다. 이미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차이와 반복>서론에서 그는 이런 문장을 기술해 놓고 있다.
"반복을 추상적으로 설정하는 데 만족하여 그것의 내부를 비워버린다면, 우리는 하나의 개념이 왜 그리고 어떻게 자연적으로 봉쇄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며, 일반성과 혼동되지 않는 반복이 나타나도록 할 수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거꾸로 반복의 문자적 내면을 발견할 때, 우리는 외피로서의 외면적 반복을 이해할 방법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성의 질서를 되찾을 방법도(또 키엘케고르의 소망을 따르자면, 단독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을 화해시킬 방법도) 갖게 된다”(77쪽; 김상환역 <차이와 반복> 민음사))
어쨌든 들뢰즈의 언어를 이해하기 전에 이렇게 키엘케고르로 먼저 우회해 본 것은 백번 잘한 것으로 자평된다. 이렇게 다시 보니 ‘이전에 <반복>을 두 번씩이나 정독했다’느니 하는 치기어린 교양인척 하는 허영적 ‘습관’을 넘어 키엘케고르의 거대모습이 새삼 분명하게 보이고 그리고 유기적으로 들뢰즈의 반복을 훨씬 분명하게 이해해 볼 자산을 마련하는 횡재를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길을 잃지 않으려고 건조한 철학용어들을 정신없이 쫓아가 보다 이런 뜻하지 않게 광대한 삶에 대한 정리와 성찰도 또한 성찬으로 만끽해 보지 않는가? 이것으로도 이미 소시민의 지루한 책읽기는 그 보상이 넘친다.
연속되는 의문은 그렇다면 들뢰즈는 어떤 내용으로 이 반복의 문제와 그리고 이 반복과 (언뜻 지금으로서는) 구분이 잘 안가는 차이의 문제를 규명했으며 어떤 논리와 어떤 범주로 반복의 내부를 채워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반복을 그렇게 문자적 내면으로 채워 낸다고 할 때 그 상기와 재현을 넘는 반복 고유의 ‘상기를 깨는’ 그 대칭적 의미가 그만큼 손상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가져 본다. 논리적으로 담길수록 반복은 그 고유의 자리가 상기적으로 희석될 수 있는 특이한 면을 반복 스스로가 포함하고 있으므로---. 물론 들뢰즈가 전개하는 문자적 내면이 단순한 실증적 논리의 차원이 아님을 잘 알지만---그렇다면 들뢰즈는 어떤 상상력과 논리로 그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었을까? 그 질문들이 그 정교한 사유의 범주를 나같은 문외한이 나름대로라도 충분히 느끼고 해독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뒤엉겨 있다는 것은 당연한 고백이고---.
결국 이 두려운 험산준령들 난맥들에 대한 내 나름의 도전도 반복으로 하면 최선의 접근과 태도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반복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일수록 그만큼 깊이가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이 반복이라는 사실과 또 인생이 반복한다는 이 사실 때문에 인생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자이며---
다만 반복을 즐기면서 조용히 자기 길을 걸어 갈 뿐이다.”(388.3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