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반복> 288쪽 까지 읽었다. 1장 차이 그 자체와 2장 대자적 반복까지이다. 1장은 문자 그대로 즉자적 차이를 개념과 매개의 부족함과 재현의 메마른 빈곤성을 서론과 연결, 약간 더 강도를 더해 정리해 주는 것으로 드러내 주고 있고 2장은 즉자적 차이가 대자적으로 연관되는 가운데 어떻게 경험되어지는 국면인지 그 차이의 반복이 데카르트와 칸트의 논리, 니체, 키엘케고르의 그것과 그리고 프로이트의 무의식과는 또 어떻게 연관되고 구별되는 것인지를 매우 정교하고 구체적인 논리로 포괄해 주고 또 그것을 때로는 폐부 깊숙이 찌르며 섬밀하게 쪼개어 준다. 서론과 1장은 비교적 일반적인 논리로 하지만 이쯤해서는 그 강도가 심화되어 동원되는 주변논리와 철학자들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이는 이해가 쉽지 않을 정도로 난해한 부분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본격적인 심화논리들이 3장부터는 더욱 치밀하고 정교하게 전개되는 것으로 보여 나 같은 일반인들을 다시 긴장 시킨다.

1장과 2장에는 이미 많은 내용들이 변별되고 전개되고 있는데 그 미세한 부분들을 나름대로 다시 소화하고 정리하는 것은 나의 교양철학의 범위에서는 당연히 버겁고 힘겨운 작업이다. 읽기를 따라가다가 그 흐름에서 인상적인 느낌이나 차이나는 자극과 같은 흥미위주의 문장으로 추적하는 순박한 기술로 오늘의 정리도 대체해 본다. 이것도 전문가가 아닌 쫓기지 않는 허접한 자유인(?)의 여유임을 자위하면서---.

1,2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전통철학이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 설정하고 끊임없이 부정하고 무화시켜야만 하는 일자로서의 존재에 대비된 생성, 즉 비-존재를 ?-존재로 명기해야 될 것이라고 말한 1장 6절중의 부분이다. 니체이후의 현대철학을 생성 대 역사라는 대립 항으로 간단히 파악할 수 있다면 이 도식은 더 편리한 대칭항으로 하면 존재 대 비-존재의 구도가 된다. 존재와 비존재, 사실은 존재에 대비해서 현상적으로는 비-존재가 더 중요한 항이 되는데 여전히 존재에 대비해서 그 생성의 무한한 유동성을 존재에 종속적인 이미지를 주기 쉬운 비-존재로 명명되면 언제든지 이 비-존재는 전통철학이 수행해 왔듯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 전달되기 쉽고 철학의 작업은 바로 그 부정적인 공간을 몰아내고 무화시켜야 하는 그 대상으로서의 비가 된다. 그 비-존재의 ‘비(非)’는 ‘부정적인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며 ‘다른 어떤 것’정도가 아니라 들뢰즈에 이르러서는 존재자의 삶의 내용과 확장이 생기되는 존재의 사실상 전부의 공간으로 격상되는데 비-존재는 그러므로 ‘비’가 아니라 ‘?-존재’로 달리 명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




“존재는 본연의 차이 그 자체이다. 존재는 또한 비-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존재는 부정적인 것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문제 틀의 존재, 문제와 물음의 존재이다. 본연의 차이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그렇기 때문에 비-존재는 차라리 (비)-존재라 적어야 하고, 그보다는 ?-존재라고 적는 편이 훨씬 낫다.(159쪽)

이렇게 되면 ‘비’는 존재의 허상이나 열등한 무로서의 대칭성이 아니라 무한한 물음과 적극적 탐구, 절대적인 긍정의 무한공간으로서 격상된다. 곧 본질을 전복시키는 침범으로서의 허상, ‘시뮬라크르'(simulacre)인 것이다. 곧 들뢰즈에게서는 지젝이 지적해 주었듯이 존재/생성의 문제가 아니라 생성 없는 존재/생성의 문제로 전복된다. 이런 전복을 극명하고도 통쾌하게 기호화해 주는 것은 단연 존재라는 낱말 앞에 부착된 저 부호‘?’이다.

무한한 광역의 공간을 향하여 무한한 질문과 생기적 추동을 예표하는 ? 부터는 이제 개체존재, 생성과 분화, 유동하는 차이와 반복은 모든 공간을 침투하고 채워내는 유목적 분배와 발산으로 만개할 수 있게 된다. 그 유목적 확장과 충만, 그렇다면 그 팽창해 오른 공간운동을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담아내는 생성의 우주론이 이번에는 필연적으로 요청될 것인데--- <차이와 반복>은 바로 이에 대한 응답이었던 것이다.

이런 거대 형이상학, 질료와 역사에 대비 존재와 초월을 포월하는 고전적인 형이상학이 아니라 거꾸로 존재와 초월을 무화시키는 물질과 표상의 형이상학, 들뢰즈는 지금 이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 형이상학이 존재의 힘을 사물(허상) 뒤에 숨겨진 초월적 본질 ‘존재’에 위계적으로 설정, 혼돈의 우주와 허상(사물)에 그 시대에 필요한 의미 있는 질서를 구축해 내기를 노렸다면 존재를 무화시키는 전복의 형이상학은 개체존재 내부의 생성적 역능으로 그 힘을 대신하며 디지털 문명사회의 유목적 지평을 열고자 한다. 개체존재가 고유한 성격으로 발산 하는(하고 있는)차이와 개체 존재의 자기 확신으로 인한 자기 확장운동을 지칭하는 반복이 그 내적 엔진인 것이다. 이렇게 거꾸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전통철학은 존재의 힘이 위에서 아래로 투사되지만 들뢰즈는 아래에서 안에서 스며 나오고 치고 나오는 유물론적 역학구조를 띤다.(이에 대해 한편, 알랭 바디우는 생성론 바탕아래의 하이데거, 사르트르의 던져지고 투여된 수동적 존재론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들뢰즈의 기본적 존재론 그 저변을 보고 들뢰즈의 개체존재는 충분히 주체적일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들뢰즈의 철학이 이렇게 거대의 국면을 포월하는 형이상학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차이와 반복은 키엘케고르의 낭만적 반복에 비교해서는 훨씬 세속적으로 풀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키엘케고르의 반복은 신앙적이어서 인격적이고 내재론적이다. 존재론적 감격을 터전으로 해서 스스로 인격적 윤리성을 띠는 종교성을 포함하는 성격인데 들뢰즈에 와서는 이 개체존재의 자각적 내재적 힘이 도덕적인 범주를 넘어 개체존재의 확장의지 일반으로 확대된다. 곧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유목적으로 흩어지고 발산되는 욕망 일반으로 까지 포월하는 전방위적인 범주로 넘쳐나는 것이다. 전통 존재론의 배후에는 형상이나 신이 있어 필연적으로 논리와 개념의 도그마에 빠져 생성 없는 존재론으로 심화되는 만큼 그것을 전복, 생성의 세계관을 담고자 하는 들뢰즈에게는 신과 같은 고정된 위격을 용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기에서는 키엘케고르가 아니라 니체가 그 중심공간에 배치되어야 한다. 신을 부정하다 못해 반(anti)-신인 니체, 하지만 신이라고 하는 절대관념을 포월하는 파토스가 부재해도 그에 못지않은 원초적 의지, 역능적 야성을 포함, 대체, 지시해 주고 있는 그 니체의 세속적 초인의지의 운동이 들뢰즈의 유물론적 우주론의 적합한 베이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2장까지 오는 동안에도 곳곳에 반복적으로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재해석과 그에 기초한 역능적 발산을 기술하고 있지 않은가?(이 지점에서도 나는 <들뢰즈의 니체>로 우회해 보아야겠지만 당장 그 책이 내손에 없고 또 다른 책들이 밀려 있으므로 다음기회로 미룬다.)




‘영원회귀’라는 자유발산의 원초적인 힘과 의지, 그리고‘회귀’라고 하는 동일적 운동, 결국 무한한 야성적 발산도 일말의 그 발산의 중심적 균형을 따라 돌고 도는데 그 원환적 운동은 운동하는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의미에서의 회귀이지 그 회귀는 단순한 기계적 반복이 아니다. 반복된다는 운동적 동일성이 존재하지만 그 운동의 내용은 “변신과 가면들로 연출되는”스스로를 변형할 수 있는 자기창조적인 에너지이다. 이것이 들뢰즈가 이해하는 니체의 영원회귀라면 이 영원회귀의 운동력, 내재적 세계관이야 말로 들뢰즈가 노리는 생성우주론의 매혹적인 내적 기제로 내장될 수 있지 않은가? 이 존재의 근본 운동력으로 하면 어떤 일자나 신을 가정하지 않더라도 존재의 운동을 전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한편, 그렇게 과월되는 전체 운동에서 일말의 균형이 포함된 질서를 향한 일의적 믿음을 잠재적으로 경험할 수가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들뢰즈의 관심은 생성 없는 존재에 대비된 생성이 어떻게 디지털 문명을 소화해야 하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장착 가능하고 철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지를 그리고 그 생성론 중심의 전도된 열린 개방성의 생성 세계관이 절대긍정으로 용인되는 가운데 대중적으로 사유될 수 있는지를 열어 보이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작업을 다시 정리하자면 그래서 들뢰즈의 존재론은 ?-존재론이며 그럼으로써 존재에 씌여졌던 왕관은 유목적 아니키즘, 그 비-존재의 범주로 중심이 넘어가는 전복된 존재론인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들뢰즈에게 그의 가장 까다로웠던 논적이었다고 하는 알랭 바디우의 이름으로 섣부른 태클을 걸어 보자.(나는 지금 어떤 학술적 흐름이나 정합성의 순서를 따라 내 나름의 글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읽은 책들을 중심으로 그 감흥과 자극, 생각의 도전들과 충격들을 나 자신의 언어로 정리하면서 때늦은 교양철학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극대화하기를 꾀하는 어떤 즐거운 욕망을 실현하고자 할 뿐이다. 엊그제 바디우의 책 몇 쪽을 읽었으므로 그 자극을 보다 생산적으로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을 이런 식으로 끼워 정리해 보는 것이다.) 들뢰즈 비평서인 바디우의 <존재의 함성>은 (특히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매우 난해한 문장들로 되어 있는데 그 책의 전반부에 나오는 질문중의 하나는 바로 바디우가 주창하는 주체의 문제로 읽혀진다.


바디우가 보기에는 차이와 반복 같은 내적 힘으로 유지되는 들뢰즈의 존재론은 개체존재가 보다 분명한 주체화로 보장될 때에나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개체존재는 그 개체존재가 충분히 주체적인 존재자인가? 바로 이것이 바디우가 던지는 질문 중의 하나로 보인다. (들뢰즈의 기본 개념조차도 버거운 나 같은 일반인은 당장 텍스트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급급해 이런 질문을 경험해 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도 희미하게나마 의문시해 본 회의들을 바디우는 고도의 철학논리와 사유로 정면으로 제기한다. 대가의 회의와 질문에 편승해 그 대가의 질문이 이렇게 나의 회의인양 금방 나도 철학자가 된 듯한 동일시의 착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가소로운 경험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바디우가 보기에는 들뢰즈처럼 그렇게 개체존재가 하나의 개념적 존재에 붙들리지 않고 유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충분한 주체로서의 개체존재가 될 수 없다. 우선 들뢰즈의 개인은 그 사유하는 힘, 의지자체가 역능적으로 생성된다고 하지만 그 역능도 사실은 사유의 조건들로부터 구조적으로 기인하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자율적이지가 않다. 그 사유는 외형적으로는 욕망으로 촉발되는 것처럼 언표되고 있지만 그 분화하는 욕망의 근저는 분명 들뢰즈의 이론에서는 내재성의 강제에 의해 밀쳐진 것으로 분명 수동성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가 자신의 비평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들뢰즈 자신의 문장들을 우선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사유 안에서는 결코 사유될 수 없는 사유인 외부의 사유가 점령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정화된 자동장치이다.”(<영화2.시간-이미지>원서.233쪽) “사람들은 분명히 그리고 실제적으로 오로지 선택된 것만을 선택한다”(같은 책.232쪽) 이런 실존주의적인 존재론을 바탕에 깔고도 생성의 효과와 자기창조적인 능동성을 주목, 전체적으로 강조하다보니 많이 나아가 들뢰즈는 존재의 기계적인 응용으로까지 긍정하고 용인할 수 있는데 이렇게 까지 과월하게 되면 차이와 반복의 개체존재는 “욕망하는 기계”로 까지 치닫게 된다. 곧 지젝이 우려하는 바와 같이“기계-되기”의 관계이다.




이 지점에서 지젝이 잘 지적해 주고 있듯이 그렇게 되면 심지어 개체존재의 반복과 의식은 일정부분 기계가 떠안게 되는 현상적 전복도 발생한다. (실제로 유전공학이나 생물과 기계장치가 응용적으로 결합되고 있는 것은 지금의 과학현실이다.) 그러면 지젝의 질문처럼 그렇게 “다시금, 기계에 의해서도 조종되는 인간은 자신의 움직임을 계속 자발적인 것으로 “경험”할 것인가?”(지젝,<신체없는 기관>. 김지훈 박재철 이성민역. 도서출판b.43쪽) 라는 역전된 회의도 더욱 분명하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바디우는 들뢰즈의 이 수동성을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제기하고 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들뢰즈가 제시하는 내용들 속에서 자율성에 대한 격려를, 또 욕망의 생산물들로 대지를 가득 채워 나가는 당당한 개별자의 아니키적 이상에 대한 격려를 보게 된다고 확신하는데, 사실 이들은 들뢰즈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올바른 방향을 벗어나 있다. 이들은 들뢰즈가 욕망과 관련하여 만들어 낸 개념(그 유명한 "욕망하는 기계들"), 더 나아가 의지나 선택과 관련하여 만들어 낸 말 그대로의 기계적인machinique개념을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취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사실 이때의 개념은 사유나 행위의 원천이 우리일 수 있다고 고려하는 일을 아주 철저하게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모든 것은 언제나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 오며, 심지어 모든 것은 언제나 이미 그곳에, 즉 일자라는 무한하며 비인간적인 원천 안에 미리부터 존재한다.”(<존재의 함성>,박정태역. 이학사.51쪽)


이러한 하이데거, 사르트르의 실존적 존재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들뢰즈의 개체존재는 그러므로 그 차이와 반복을 건강한 힘으로 생산하고 작동시킬 수 있는 주체화된 존재인가? 그리고 그렇게 들뢰즈의 개체존재가 충분한 주체화의 지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 확장되는 것이라면 그 확대 속에서 규정되고 묻게 되는 그 차이와 반복의 생성이라는 것은 결국은 생성이 아니라 변화를 모방하고 쫓아가는(쫓기는) 문자 그대로의 어떤 허상에 속하는 환영이 아닌가? 하는 질문도 가능해 진다. 그렇다면 사물이 존재의 환영이며 허상이라고 설정하는 플라톤을 뒤집고 극복하기를 노리는 들뢰즈 자신도 그 자신이 결과적으로는 그 허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상의 바다에 허약하게 빠져 표류하고 말게 되는 것이 아닌가? 바디우의 회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독설적 비평이 물론 개체존재의 강렬한 주체화를 언표, 해체주의의 아나키적 과월을 극복, 진리의 윤리를 묻고자 하는 바디우 특유의 개성에서 촉발된 의문이겠지만 상당히 의미있는 질문으로 여겨지기에 이렇게 덧붙여 보는 것이다.


한편, <차이와 반복> 역자인 김상환 교수는 이 텍스트의 전체내용에서 2장 4절, 반복을 정신분석의 영역을 아우르면서 정리해 준 대목을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다고 해설에서 밝히고 있는데 나로서는 도무지 그 말의 뜻을 잘 실감할 수 없다. 역자는 그 이유를 “현대 인문학의 새로운 지반이자 아직도 개척해야 할 대륙으로 남아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자신의 철학적 개념들을 동원하여 깔끔하게 재해석하는 작업”을 한 들뢰즈의 솜씨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나와 같은 일반인의 눈에는 그 대가의 솜씨가 먼 산과 같이 아직은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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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 131쪽 까지 읽었다. ‘반복’의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키엘케고르의 <반복>을 재차 정독했는데, 역사와 공간에 대한 시간의 우위, 즉 생성과 변화의 탐구라고 하는 현대철학의 전체 흐름에 잇대어 그렇게 다시 읽어 본 키엘케고르는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키엘케고르와는 전혀 다른 키엘케고르였다는 것은 지난번에 정리한 바와 같다.


그가 심도 있게 다룬 ‘반복’은 철학의 한 건조한 개념, 부분적인 영역이 아니라 그렇게도 절실했던 인간의 조건을 묻는 존재를 향한 중심적인 성찰을 겨냥한 중핵적 표적이었던 것이다. 이로서 철학은 그 담론에서 관념론 지향의 철학에서는 경험해 보기 힘들었던 삶을 향한 직접적 성찰과 조우하는 말 그대로의‘철학’이 되는 것인가? (이런 흐름의 내용의 현대철학이 정신분석과 만나면 이제 철학은 대중적인 감각과 흥미를 촉발시키는 가공할 발화점으로 폭발할 것이다. 그래서 라깡이며 그래서 들뢰즈, 지젝인가?) 어쨌든 이렇게 고도로 개별화된 전문 개념, 상상력들이 인간을 이해하고 그 내면을 자극, 살아있는 의미의 범주까지 기능적으로 찌르고 포월 해 준다면 나 같은 일반 독자들도 이제 더 큰 의미와 동기, 욕망들을 경험하며 철학 읽기를 즐길 수 있겠다.

들뢰즈에 자극되어 키엘케고르의 <반복>을 정리해 보고 나니 이번에는 <차이와 반복>의 문장들이 키엘케고르와의 유기적 연결로 전혀 새로운 의미들로 다가온다. 전편의 글에서 나는 “전공자들도 서너 번을 읽어야 한다는 본문들인데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난해하다---”라는 말을 첫 문장으로 사용했는데 먼저 이 문장을 서둘러 취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본문들이 너무 쉽게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왠 횡잰가? 들뢰즈를 통해서는 마술처럼 키엘케고르가 제 모습을 드러내었고 이번에는 그 키엘케고르를 통해서는 <차이와 반복>의 문장들이 너무 쉽게 튀어 나온다. 83쪽 서론까지 읽으면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며 겁도 없이 진도를 나갔었나? 그렇다면 당연히 다시 첫 문장으로부터 시작이다. 재차 서론 부분을 처음부터 다시 정독하며 오늘은 그 서론도 돌파, 131쪽까지 나갔다. 기본 개념들에 대한 이해를 그것도 사전적 해설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전체 흐름에서 절실했던 문제의식들의 유기적 구조로 이해하기를 노려 본 결과가 이런 축복을 불러올 줄이야---. 안개가 걷히니 길이 보이고 쉬워진 것일까? (물론 기본 문장적인 이해에서)

83쪽의 서론부분까지는 키엘케고르가 제기했던 그 ‘반복’의 문제, 그리고 개체존재가 도저히 동일자로 묶일 수 없는 그 유동적 순수차이, 살아 형성되고 생성진행중인 존재의 차이를 개괄적으로 정리하고 그 차이와 반복이 일반성의 범주와 어떻게 구별 되는가?에 대한 기본적 분석이다.(전혀 어렵거나 난해한 문장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역동적으로 유동하며 침범하는 생성적 사유의 감격을 기술한 첫 부분의 생경한 문장들이다. 들뢰즈에게서는 철학이 더 이상 관념과 그 입체적 구조미를 넓히고 첨예화시켜 나가는 매개적 메마른 규정적작업의 일환 속에 묶이는 것이 아니다.(나는 반복과 대칭으로서 항시 부정적 의미, 논리기능적인 파악과 인식의 차원으로 언표되는‘매개’나 그 매개적 결과, 현상으로 나타나고 인식되는 ‘재현’같은 용어들도 키엘케고르를 읽으면서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기본 암호들이 해독되지 않으면 들뢰즈의 텍스트 읽기도 표류당하는 고문, 그 자체로 끝나고 말 것이다.) 철학은 곧 추리소설이며 공상과학과 같은 침범이다! 일반적인 규칙과 틀을 규정하는 개념의 구체화에 대비, 살아있어 생성, 본래의 존재의 내용까지 변화가 가능한 형성, 확장되어 나가는 그 차이와 반복을 강조한 진술들이었지만 그 포문을 연 기술들이 매개적 사고에 깊이 물들어 있는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인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사유는 내생적 개념의 우주 안으로 점점 견고하게 규정적으로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들’과 ‘여기들’을 항상 새롭고 항상 다르게 분배하는 무궁무진하게 생겨나는”안과 밖으로 창조적 감격으로 유동해 나가는 창조적인 생성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유는 봉쇄되는 개념에 붙들리지 않고 논리적인 규정을 넘어 자기창조, 연극, 무대의 드라마와 같은 상상력의 영역으로 까지 짜릿하게 상승하는 엔진을 얻는다

 

 

“허상은 모상(模像)이 아니다. 허상은 원형들마저 전복하는 가운데 전복하는 가운데 모든 모상들을 전복한다. 즉 모든 사유는 침략이 된다.”

이와 같이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스스로를 발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n승’의 역량으로 스스로를 고양시키는 능력이다.

먼저 들뢰즈는 이 서론에서 반복은 일반성, 규칙적 되풀이, 자연법칙, 습관, 단순한 회귀, 도덕적 관습, 개념적으로는 개념의 내포현상과 봉쇄, 동일성, 부정적 조건, 무의미한 반복등과 같은 구체적인 현상들과 어떻게 차이가 있는 차원인지를 구별해 준다. 그리고 왜 반복이 될 수 없는 그러한 동일성을 지향하는 외적 범주들은 삶을 창조적으로 자극하고 생성해 내지 못하는 형식 범주들인지를 논증함으로 차이와 반복의 그 생성적인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정리해 준다.




그런데 이 논증의 과정에서 어디서 많이 본 사르트르의 얼굴이 보인다.


“반복이란 것은 그야말로 자신을 구성해 가는 가운데 스스로 위장하는 것, 스스로 위장함으로써만 자신을 구성하는 어떤 것이다. 반복은 가면들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가면에서 저 가면으로 옮겨 가면서, 변이형들과 더불어 그리고 변이형들 안에서 자신을 형성한다.”(60쪽)


그렇다. 이것은 거의 사르트르의 언어를 옮겨 놓은 것과 같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이런 문장들을 반복적으로 풀어 놓지 남기지 않았던가?

 

 

“---이리하여 자기가 아니 있는 것으로 있음으로써, 자기가 있는 것으로 아니 있는 이 전체는 자기 이탈이라는 철저한 노력에 의해서 도처에 자기 존재를 하나의 다른 것으로서 만들어 내 놓을 것이다. 즉 하나의 부서진 전체의 사방에 흐트러진 즉자존재, 항상 다른 곳에, 항상 거리를 두고 결코 자기 자신에 아니 있으며, 그러하나 이 전체의 끊임없는 폭발에 의해서 존재에로 유지되어 있는 사방에 흐트러진 즉자존재, 이러한 것이 타인들의 존재이며 타인으로서의 나 자신의 존재일 것이다.”(<존재와 무1>,손우성역.삼성출판사. 500쪽)   

내가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는 철학자는 사르트르가 유일해서 그런지 특별히 인상적으로 이런 진술들이 눈에 잡힌다. 그런데 내 눈이 그렇게 빈궁한 철학 텍스트경험으로 인한 경박한 마음으로 해서만 그 문장이 뚜렷하게 잡힌 것은 아닌 것 같다. 지젝의 <신체없는 기관>에도 이런 문장이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과정을 가리키기 위해 들뢰즈가 엄격히 금했던 “초월”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픈 유혹을 느낀다. 여기서 들뢰즈는 어떤 과정은 사건을 발생시킴으로써 자신의 역사적 조건들을 초월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건 아닌가? 초월이란 용어를 이런 의미에서 이미 사용한 이는 사르트르(들뢰즈의 은밀한 준거점 중 하나)인데 그는 주체가 종합의 행위 속에서 그 자신의 조건들을 어떻게 초월할 수 있는가를 논의했다.” (<신체없는 기관> 김지훈 박재철 이성민역. 도서출판b.33쪽)

그러니까 들뢰즈는 반복을 키엘케고르가 설명한 것 보다는 훨씬 포괄적으로 탐구 심화시키고 그 반복을 더 큰 원주율로 해서 현대적인 형이상학의 범주로 정교화 하기를 노리는 것이다. 존재의 감격인 차이와 반복이 키엘케고르를 기점으로 니체의 영원회귀와 더불어 이렇게 사르트르의 ‘있는 것으로 아니 있고 아니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대자, 대타존재의 그 존재론을 (‘은밀한 준거점’으로) 포괄한다면 논증하고 채워야만 하는 그 사유와 범위는 어떻게 벌어지고 어디까지 확대될까?  

이렇게 보면 한편, 키엘케고르의 반복은 들뢰즈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원론적이고 깊숙한 계곡처럼 시원하고 좁다고 해야 할까? 시원하지만 좁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키엘케고르의 반복은 거의 종교,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의 차원에서 기본적으로 물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신앙과, 논리를 초월하는 논리, 논리위의 논리와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상에 서있다.) 그렇게 상대적으로 좁은 한편, 매우 기독교의 ‘믿음의식’적이므로 그가 말하는 반복은 또한 상대적으로 더 깊고 탄력적인, (신적인) 존재감을 느끼게 할 수 있겠다. 들뢰즈 류와 같은 정교한 구체논리가 줄 수 있는 확장된 사유의 포만감은 선사해 주지 못하지만 대신 상대적으로 역동적 감격을 훨씬 높은 강도로 느끼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곧 키엘케고르에서는 반복에 대한 원론적 파토스를 산바람처럼 맛볼 수 있는 대신 추상성의 의혹을 경험하고 들뢰즈의 확장논리에서는 그 추상성의 의혹이 그만큼 해소되는 대신 키엘케고르의 원시적 감격은 상대적으로 잔잔하게 가라앉는 느낌을 경험하게 할 수 있겠다. 나는 벌써 서론을 약간 벗어나고 있는데 이미 들뢰즈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고 있지 않는가? (이것은 시적 논리와 산문적 논리의 차이로 인한 것인가? 아니면 나만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일까?)

어쨌든 안개가 물러가고 날이 밝아 사물들이 어느 정도 정돈이 되었으니 이제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진도를 나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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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 83쪽 까지 읽었다. 서론:반복과 차이 부분이다. 전공자들도 서너 번을 읽어야 한다는 본문들인데 나같은 문외한에게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난해하다. 다만 머릿속에 잡히는 것은 니체와 키엘케고르가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던 ‘반복’의 문제는 더욱 매우 중요한 철학주제이며 중요한 그만큼 개척자들이 던져 준 그 주제와 내용을 그러므로 보다 현대적인 차원으로 정교하고 세밀하게 체계적으로 규명, 엄밀하게 사유,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이고 그런 흐름에서 들뢰즈의 존재론이 의미있게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들뢰즈의 존재론은 키엘케고르의 단순한 재해석에 국한되지 않고 거대한 포월성을 노린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반복개념은 뒤로하고도 문제를 던졌던 키엘케고르의 반복은 무엇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키엘케고르의 반복과 들뢰즈의 반복은 어떤 차이가 있고 키엘케고르의 그 반복을 들뢰즈에게서는 어떻게 계승되고 어떤 방식으로 심화되고 있는가? 이제 겨우 서론을 읽었는데 섣부른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그렇다면 일단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또 길을 잃어버리기 전에) 키엘케고르에게로 돌아가 보자. 반복이라는 그 개념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겸---.특히 그 반복의 문제를 제시한 키엘케고르의 <반복>은 분량도 많지 않은 만만히 얇은 책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 책은 2006년 9월에 내가 두 번을 정독했던 책이다. 어쨌든 들뢰즈와 유기적으로 선을 이어  다시 펴 재 정독해 본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키엘케고르의 잘 들어맞고 있는 예언이다.

“그 누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이 문제(반복)가 근대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387쪽)


405쪽에는 또 이런 문장도 있다.

 

 

 

 

 

 

 


“반복은 마땅히 반복되어야만 하는 새로운 범주이다. 근대철학에 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고대 그리스 철학에 조금이라도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범주가 곧 엘레아 학파(존재)와 헤라클레이토스 학파(운동,생성)간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것이며 매개라고 잘못 명명되어 온 것이 다름 아닌 반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키엘케고르의 반복개념은 (들뢰즈의 차이개념을 어느 정도 이해한 덕분인지) 비교적 쉽다. 우선 역자(손재준; 삼성출판사, 1983년판 <세계사상전집>19)의 친절한 해설을 편하게 옮겨 보자.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고 기계적이 되기 쉬운 그날그날의 일상적 생활을, 언제나 새로운 결의와 각오를 지니고 살아가는 생활태도와 마음가짐, 이것을 가리켜 키엘케고르는 특히 ‘반복’이라고 칭했다. 때문에 반복이라는 개념은 ---‘윤리적 실존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인 동시에 ‘윤리적 세계관의 핵심’인 것이다.”


세계관? 핵심? 그렇다! 반복은 되풀이를 뜻하는 단순한 어떤 동작이나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자기 확신적 감격을 의미하는 너무나 비중 있는 개념, ‘윤리적 세계관의 핵심’으로 언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키엘케고르는 그 <반복>을 통해 관념과 합리주의, 그 외면의 체계적 질서의 의식의 기능성에 메말라버렸던 존재의 신비와 그 감격적 힘, 생동하는 윤리적 힘을 들고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 존재를 구원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이런! 들뢰즈의 차이라는 개념에서 기만당할 뻔 했던 함정을 나는 또 보기 좋게 반복한 것이다. 2년 전에 그 텍스트를 읽을 때에는 그냥 존재의 감격을 진술해 준 몇 줄 문장을 건진 것을 다행으로 알고 밑줄을 긋고는 그래도 의미있게 읽었다고 자위하며 ‘역시 키엘케고르! 운운하며 두 번이나 정독했었는데---오 마이 갓! 그 허망함에 힘이 다 빠진다.)


“나는 다시금 나 자신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나는 반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제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472쪽)

반복이란 어쨌든 키엘케고르에게서는 잃어버린 나를 찾은 존재의 감격! 그 자체를 이르는 개념이다. “인생은 내가 보다 더 사랑했던 것을 나에게도 주었습니다. 나 자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473쪽) 자기 확신과 감격에서는 창조적인 삶의 에너지가 스스로 발산되는데 그 발산되는 생성과 운동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써 개체 존재를‘반복’으로 명명했던 것이다. 그 생성의 창조적 힘은 너무나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 힘은 모든 만물과 사태들을 의미화 시키는 매혹적인 인격적 능력, 감격으로 까지 지반되고 올라간다. “도취의 잔이 다시금 내 손에 쥐어졌습니다. 벌써 그 향기가 내 코를 찌르고 있습니다.”(474쪽) 


물론 이 반복은 플라톤으로부터 발생, 적체된 합리주의적 전통에 대비된 것이다. 사유와 존재를 분절된 논증의 기능성으로만 엄밀하게 체계화 시키는 전통철학으로 하면 (생성적 존재에 대비해서)현실은 형식적 현실이 되어 버리고 존재는 그 창조적 감격이 말라 형식적 존재로 비어 버린다. 그런 체계사유에서는 개체존재도 항시 그 외적 체계나 엄밀 과학의 구조의 위격에 투사되어 자신의 근원 자아와 대면하는 인격적 촉발이 그만큼 흐릿해 질 수 밖에 없다. 존재의 생성과 기쁨은 촉발되지 못하고 기능성과 합리적 표상의 구조물 속에서 녹아나 엷어져 그 존재는 유실되고 말라버리는 것이다. 그 형식존재의 내적 기제에서 자기치유와 생산의 반복의 차원이 발생될 리는 만무하다. 합리적인 표상의 개체 존재는 그런 무능한 존재로 퇴행되는 것이다. 그런 유사존재에서는 외형적으로는 반복과 유사하지만 전혀 반복이 아닌 건조한‘습관’만이 생산되는데 곧 그것은 운동과 생성이 아니라 엘레아학파의 상기(相起:anamnesis)라고 명명되는 그러한 공전(空轉)의 개념이다.


그 반복이 아닌 실증논리의 상기적 차원에서는 존재가 비록 존재라는 이름으로 설정되고 유통되지만 그 존재는 유사존재, 존재의 겉모습, 존재의 감격을 만들지 못하는 메마른 허영과 같은 것이다. “나는 쉬지 않고 성실하고 끈기있게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도 남는 것이 없군요.”(452쪽) (그런데도 한편, 인간은 그 상기의 마력에 깊이 물들고 길들여져 그 상기적 차원을 막연하게 동경하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런데도 나는 당신(상기적 세계관)없이는 못살 것 같군요.”(446쪽) -<반복>에서 연애에 빠진 청년을 멘토링하는 교양 있는 신사는 이런 유사반복의 허영적 존재를 잘 표상해 주는 장치가 아닌가?)


상기(습관)에서는 그러므로 자기 확신의 자리가 없다. 근원자아와 대면되지 않는 피상적 자아는 중심적 자아가 처음부터 없으므로 항시 그 자아는 필연적으로 스스로 어떤 허영적 외면에 투사되고 휘둘리게 된다. 무대와 시장, 그것을 치장하는 문화나 학문의 근엄 권위, 교양의 겉 멋, 새로운 자극과 같은 외적 허영과 권위에 끊임없이 휘둘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휘둘림’이 내면에 더 큰 구멍을 만드는 것은 그렇게 휘둘리면서도 양심이나 근원적 자기확신같은 그런 환상이나 관념의 이상을 인간이 내재적으로 경험하게 되는데---도달할 수 없는 이상은 환상으로 살아있되 그 이상의 형식과 겉 껍데기일 뿐인 상기, 즉 습관의 범주만 반복하고 있다는 그 채워지지 않는 그 빈 공간을 휘둘림, 외적 투사가 필연적으로 팽창시켜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스스로 메마르게 앙상해져 가는 악순환의 고리에 기계적으로 묶인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 스스로의 전체 내용에서 ‘허영심 이상의 더 깊은 근거를 찾지 못한 채’ 집을 찾지 못한 불안한 존재로 실존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삶은 그렇게 해서 무의미하고 매너리즘, 자기창조와 생산적인 인격적 힘이 없는 내적 무능 의 늪! 그 자체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곧 ‘겉멋의 신비주의’이다.


바로 이 좌절과 마름 속에서 키엘케고르가 반복을 들고 나온 것이다.

“나는 다시 나 자신이 되었습니다.---나를 결박하고 있던 올가미들은 모두 끊겨져 나간 것입니다. 마술의 힘으로 나의 마음속에 들어 와서 나를 나 자신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던 마법의 주문이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습니다.---나는 이제야 나 자신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473쪽) 좌절이 극복된 그 극적인 자기발견의 감격, 그 지속적인 감격은 존재의 힘이며 윤리적 에너지를 포함하는 존재의 기쁨! 핵심! 그 자체이다.


“반복은 어떤 윤리관이라도 해결해 준다. 반복은 모든 교의적 문제에 없어서는 안 될 전제이다.”(406쪽)  

이렇게 존재의 감격, 반복을 주창하면서 심지어 키엘케고르는 이런 재미있는 문장까지 남겨 놓는다.


“(헤겔의)매개(Mediation)라는 말은 외국어이다. 그에 반해 반복(Gjentagels)이라는 훌륭한 말은 덴마크어이다. 이런 철학적 용어를 가지고 있는 덴마크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내는 바이다.”(406쪽)  

 



 

그렇다면 이 반복은 어떻게 경험되는 것인가? 윤리적인 실존의 핵심적인 이 부분은 어떻게 마련되는가? 이 부분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극적인 부분은 어떤 고난도의 지적 이해력이나 그 능력을 요구하고 있어서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영역에서 운위되는 것이어서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그 종교적 차원을 경험적으로 알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간단하고 쉬운 문제이겠지만---) 우선 이 차원을 이해하려면 먼저 시인이 되어야 한다. (합리적인 사유가 극한까지 발전한 관념론의 해체가 키엘케고르의 주 과제이므로 그래서 그는 그 스스로가 자신의 철학을 논리실증적인 논문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반복>과 같이 시적인 감성으로 기술했던 것을 이제야 알겠다. 물론 니체도)  


“반복은 언제 나타나는 것일까요?---인간의 언어로는 그것을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사고할 수 있는’인간적인 일체의 확실성과 개연성이 그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했을 때, 그것은 나타났습니다.”(467쪽)

 

반복은 인간이 그 자신의 한계성이 끝까지 밀려간 그 이후의 지점에서 나타난다. 근원자아가 아닌 허영과 자극, 외적 근엄, 겉멋의 신비주의가 깨어지고 극한 혼돈으로 스러질 때 그 지점에서 경험되어 지는 것이다. 키엘케고르는 이 범주를 구약성서의 욥의 경우를 들어 설명한다. 인간의 외면적 위업과 내면적 경지의 정상에서 닥쳐온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는 운명적인 절대고난! 이때 삶의 근원적 혼란에서 습관의 형식기제들은 뿌리를 드러내고 아무런 현실적인 내용이나 해석력을 얻지 못하는 절대무능, 오히려 존재의 내용을 더욱 논리적으로 혼란하게 흔들게 할 뿐이다. 존재의 근거를 설명할 수 있는 그 어떤 표상들도 존재하지 않는 무중력의 혼돈! 그 지점에서 약간 더 밀려 나가면 존재는 합리적 관념 그 이상의 발화점에 맞닥뜨려 촉발되고 그 지점에 걸려 나선처럼 뒤집힌다. 그렇게 전복된 역광은 이후에 반사적 힘으로 튀어 오르는데 이것은 곧 종교적 차원의 어떤 ‘거듭남’이다. 이전의 무능과 한계의 하한선이 낮아지고 내려간 만큼 그 역광의 힘으로 이제는 거꾸로 존재가 그 메말랐던 무의미의 거대진공을 블랙홀처럼 흡수하며 충만한 감격으로 번개처럼 변환되어 상승해 버리는데 그 내용은 가공할 만한 범주를 채워 낸다.


극적인 역전극---! 무가 유가 되고 빈공간은 넘치는 생명의 발원지가 되는 존재의 감격은 바로 이 극적인 반전의 정오에서 유출되어 넘친다. 가장 낮은 저점의 존재의 자기발견적 겸손을 기점으로 가장 최상위의 존재의 기쁨과 영광의 고도를 누리는, 그러면서도 그 영광에 대하여는 주권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겸손적 자유!(이것이 진짜 자유가 아닌가?), 이로써 반복으로서의 존재는 근원적 의식 좌표를 찾고 제 자리를 얻는다. 곧 반복은 인간 심연의 최저층과 최상층을 충만으로 채우며 의식으로는 최저층의 무한에 대한 자각을 깔고 그 역광의 반사로는 절대에 이르는 신적인 영광을 아우르는 거대 폭의 내면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런 가공할만한 범주를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거대 자유’라는 표현으로 유통해도 될까? 곧 유한의 겸손한 좌표에서 의미와 감격적 힘으로는 무한의 영광에 이르러, 존재의 내면에 감각 이상의 만족으로 침입될 수 없는 상기(습관)가 확장해 놓은 빈 우주적 공간을 마침내 인격적 힘으로 흥건하게 채워내는 힘을 포함하는 거대자유!---.


“반복의 사랑에는 상기의 사랑에서처럼 기대에 대한 불안이 없으며 탐험에 따른 불안한 모험도 없다.---순간에 대한 지극히 복된 확실성만이 있을 뿐이다.--- 반복은 축복받은 우리의 일용양식으로서 우리를 배부르게 해 준다.---요컨대 반복을 선택한 사람만이 참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388쪽)     

 

좀더 쉬운 예로 정리해 보면 이런 이야기도 될 수 있을까? 같은 두 사람의 직장인이 있다고 하자. 두 사람 다 학력이나 실력 역량들이 엇비슷한데 그 중 A는 남다른 정열과 감격으로 일상의 업무를 소화해 내고 B는 그냥 매사의 태도가 매너리즘적이다. 외적으로는 우열을 구별하기 힘든 A와 B인데 내적으로는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는 이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알고 보니 쉽게 매너리즘에 빠지는 B는 별 어려움 없이 바로 입사한 케이스 였고 A는 긴 백수생활을 통해 아픔과 좌절 고통을 뼈저리게 느낀 케이스, 그 차이였던 것이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A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삶의 최고의 감격적인 기회도 될 수 있음을 온 몸으로 깨달을 줄 안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졌던 그 고통을 통하여 자신을 얻고 자기의 발견, 즉 반복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자신의 존재가 가장 소중하고 귀한 자각적 존재임을 알고 그 확신과 감격에서 삶의 성장과 창조적인 동기를 무한하게 경험해 낼 줄 안다.


물론 이 비유는 키엘케고르가 설명하는 반복에 대한 종교적 범주로 올라가는 기술에 비하면 좀 소극적이고 약간 더 일상적인 이해가 될 것이지만 역광으로 뒤집힌 반복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는 있지 않을까? 

어쨌든 이와 같이 키엘케고르의 반복은 논리적 합리성을 넘어 초월적인 ‘예외’의 성격을 띤다. 그도 그럴 것이 감격이 없는 존재의 에너지가 합리적인 논리 세계관으로 인한 상기(습관)로 말미암은 열매였기에 그 상기적 차원을 깨고 일깨우는‘깨움’은 당연히 상기의 세계관 바깥, 즉 초월의 영역에서 주어져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 역학관계로 보면 상기에 대비해서는 초월은 논리를 초월하지만 그 초월이야말로 해법적으로는 ‘실증’그 자체가 아닌가? (그러면 그렇게 개념과 논리를 벗어나면 그 반복은 은유적 신비주의와 어떻게 구별이 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규명과 더욱 정교한 논리는 들뢰즈에게서 볼수 있을 것이다. 이미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차이와 반복>서론에서 그는 이런 문장을 기술해 놓고 있다.

 

 

"반복을 추상적으로 설정하는 데 만족하여 그것의 내부를 비워버린다면, 우리는 하나의 개념이 왜 그리고 어떻게 자연적으로 봉쇄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며, 일반성과 혼동되지 않는 반복이 나타나도록 할 수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거꾸로 반복의 문자적 내면을 발견할 때, 우리는 외피로서의 외면적 반복을 이해할 방법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성의 질서를 되찾을 방법도(또 키엘케고르의 소망을 따르자면, 단독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을 화해시킬 방법도) 갖게 된다”(77쪽; 김상환역 <차이와 반복> 민음사))

 

어쨌든 들뢰즈의 언어를 이해하기 전에 이렇게 키엘케고르로 먼저 우회해 본 것은 백번 잘한 것으로 자평된다. 이렇게 다시 보니 ‘이전에 <반복>을 두 번씩이나 정독했다’느니 하는 치기어린 교양인척 하는 허영적 ‘습관’을 넘어 키엘케고르의 거대모습이 새삼 분명하게 보이고 그리고 유기적으로 들뢰즈의 반복을 훨씬 분명하게 이해해 볼 자산을 마련하는 횡재를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길을 잃지 않으려고 건조한 철학용어들을 정신없이 쫓아가 보다 이런 뜻하지 않게 광대한 삶에 대한 정리와 성찰도 또한 성찬으로 만끽해 보지 않는가? 이것으로도 이미 소시민의 지루한 책읽기는 그 보상이 넘친다.


연속되는 의문은 그렇다면 들뢰즈는 어떤 내용으로 이 반복의 문제와 그리고 이 반복과 (언뜻 지금으로서는) 구분이 잘 안가는 차이의 문제를 규명했으며 어떤 논리와 어떤 범주로 반복의 내부를 채워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반복을 그렇게 문자적 내면으로 채워 낸다고 할 때 그 상기와 재현을 넘는 반복 고유의 ‘상기를 깨는’ 그 대칭적 의미가 그만큼 손상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가져 본다. 논리적으로 담길수록 반복은 그 고유의 자리가 상기적으로 희석될 수 있는 특이한 면을 반복 스스로가 포함하고 있으므로---. 물론 들뢰즈가 전개하는 문자적 내면이 단순한 실증적 논리의 차원이 아님을 잘 알지만---그렇다면 들뢰즈는 어떤 상상력과 논리로 그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었을까? 그 질문들이 그 정교한 사유의 범주를 나같은 문외한이 나름대로라도 충분히 느끼고 해독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뒤엉겨 있다는 것은 당연한 고백이고---.


결국 이 두려운 험산준령들 난맥들에 대한 내 나름의 도전도 반복으로 하면 최선의 접근과 태도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반복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일수록 그만큼 깊이가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이 반복이라는 사실과 또 인생이 반복한다는 이 사실 때문에 인생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자이며---


다만 반복을 즐기면서 조용히 자기 길을 걸어 갈 뿐이다.”(388.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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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의 절대 문외한인 나는 요즘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와 <차이와 반복> 한글 번역본을 읽고 있다. 항시 위트로 자국어로 다시 번역되어야 할 책으로 이런 주요 철학자의 주저들이 거론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하물며 나같이 겨우 교양철학의 겉멋으로 읽고자 하는 직장인에게는 그 기본개념 자체들이 이미 폭력적인 침범으로 경험된다. “---모든 사유는 침략이 된다.”라고 하는 <차이와 반복>의 머리말의 문장은 이미 존재가 발산하고 무한히 생성 생동하는 그 기본전제를 처음부터 못 박는 들뢰즈 본연의 의미를 발포한 것이겠지만 그 ‘침략’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러므로 나에게는 문자 그대로 그 으스스한 인상으로 들려진다.

그렇게 쓰나미 같이 쇄도하는 폭력적인 혼돈이 두려워 기댈 언덕을 찾아 구원을 요청해 보곤 했는데 그 기대에 이정우의 철학아카데미편의 <현대철학의 모험>이 잡혔다. 그 책이 얼마나 잘된 책인지 평가할 능력이 내게는 전혀 없으나 나같이 무작정 맨몸으로 대양에 뛰어든 돈키호테에게는 고맙기 그지없는 친절한 안내서로 경험되기에는 충분했다. 당장 기본 개념에서부터 길을 잃어버리는 초보자의 눈높이에서 흐름을 잘 짚어 주었고 집필자들이 다 충실한 전공자들이어서 문외한에게도 이해가 되도록 쉽게 되어 있어서 좋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덕분에 가려웠던 곳들 구석구석이 잘 긁히는 고마운 경험들도 한다) 기왕에 거기에다 알랭 바디우의 <존재의 함성>도 같이 펴들고 있는데 들뢰즈에 대한 그 바깥, 대척점에서 비평과 다른 전제의 차이들도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물론 지젝의 <신체없는 기관>도 따로 대기시켜 놓고---.


이제 막 읽기 시작했지만 특히 들뢰즈와 바디우의 격론들은 존재에 대한 시간의 전복, 전통의 동일성에 대한 해체와 다의성의 우위, 그 역전된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보다 유목적인 기능성으로 세계와 사물을 포월 하고자 하는 현대철학의 주요 내용들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고 존재에 대한 일의성을 뒤로 두고 그 잠재적 표면으로서의 사건, 변화와 생성, 그 무한한 분화의 문제에 천착, 그 사유의 현대적 우주론에 몰두한 들뢰즈에 대해 보다 분명한 기본적인 이해를 하게하고 있다.

특히 그로인한 ‘차이’(Différence)에 대한 개념이해는 문외한인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고맙기 그지없는 사전소득이 아닐 수 없다. 차이는 고정된 이데아로 인한 불변의 존재에 대비된 지속 중에 있는 변화로 생성되고 있는 가변적 개체존재를 이름이 아닌가? 결코 동일자로 포월될 수 없는 내 외면을 향해 끊임없이 발산해 나가는 유동적 존재, 모든 개체 존재가 다 그렇게 유동적이므로 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결코 같을 수 없이, 다른 유동적 순수 차이 그것을, 전통철학의 개념과 대비되는 그 존재의 성격성을 담아‘차이’라고 개념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극적이고 국지전적인 뉘앙스를 전달해 주기 쉬운 그 차이는 결국 모든 존재일반을 일컫는 (이를테면 하이데거의‘존재’에 해당되는) 존재의 중심개념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 중요한 개념을 <차이와 반복>이나 역자의 해설에 의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다른 우회도로(<현대철학의 모험>)에서 어렵게 얻어져야만 할까? 심한 의문이 든다. 이런 심각한(?) 사태가 한 사람의 독자의 무식의 탓으로만 돌려질 수 있을까? 만일 이러한 사전지식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나 같은 독자들이 이 중요한 ‘차이’에 대한 기본 개념을 손쉽게 오독하여 같음에 대한 일상적인 다름의 의미로 이해했다면 어떤 기만적 과정으로 그 힘겨운 긴 읽기가 농락당한 것으로 전락되고 말았을까?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들뢰즈 스스로 말하는 일말의 우려처럼 차이가 그렇게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라는 그런 류의“아름다운 영혼”의 일상적 상식 범주에서 이해된다면 그런 유희적 상대주의야말로 “겉모습에 사로잡힌 신비화”로 끔찍하게 퇴행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나와 같은 완전 초보자는 항시 그런 끔찍한 함정에 노출되어 있는 수준에서 아직도 1mm만큼도 빼지 못한 채 그런 퇴행을 반복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천여 페이지가 넘는 분량들을 힘겹게 읽어가다 지쳐 놓아버렸던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도 다시 생각이 난다. 정작 700여 쪽을 읽어내고서도 씨름하고 있는 이 책 제목이 왜 ‘존재와 무’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안개 속에서 표류하고 있었던 그 한심했던 경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있게 해 주는 자기동일적인 것의 본연의 자세, 즉 즉자(卽自)를 의미하는 말인 것은 어렴풋이라도 감을 잡겠는데 그런데 ‘무’(le néant)는 왜 무일까? 아무것도 없다는 어떤 허무주의적인 진공을 언표 한다기에는 샤르트르가 규명하고 있는 인간은 부정작용과 타인의 요구적 시선의 인력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해 나가는 과정의 역동적 존재이고 그리고 그렇게 규명되는 그의 존재론은 심지어는 강한 사회적 실천으로 까지 치고 나가게 하는 강렬한 면도 엿보이는데 왜 ‘무’라고 했을까? 하는---


결국 이런 혼란들도 10개월여 간의 긴 표류 속에서 겨우 감을 잡는다. 그것도 지극히 기본적인 개괄적인 개념이해의 수준의 원위치에서---.


그 ‘무’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의 무(無)가 아니라 전통철학의 불변의 실재적 존재개념에 대칭해서 자기동일성에 붙잡힐 수 없이 원초적 ‘있음’에 부정적으로 생성적으로 벗어나고 그 모순에 자기기만과 그리고 타인의 시선들의 융합에 끊임없이 다른 타자적‘나’의 존재로 유동하는 그 ‘생성’을 지칭한 ‘무’가 아닌가? 현전적으로는 활발한 역동성으로 생성 변화되고 있는 살아 유동하는 개체존재이지만 불변하는 실재존재에 대비해서는 일정한 동일자에 고정될 수 없이 분산되고 흩어지며 다른 ‘나’를 만들어가는 그 붙들리지 않는 무정형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샤르트르는 무라고 언표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국 그 없다고 규정된 무는 사실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준동하는 현상적인 유였던 것이다. (한편 그 무는 해석자의 입장과 시각에 따라 그렇게 활발하게 외연으로의 생성과 형성 중에 있지만 결국 동일자적 관점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허무한 것’으로 해석되어 허무주의가 되기도 하고 동일자적 관점이 아니라 준동하고 있는 그 생성에 의미와 관점을 투사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또 같은 텍스트에서 매우 역동적인 의미와 지향적 건강성의 목적존재, 행동주의철학으로도 상반되이 경험될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면 샤르트르의 철학도 관념과 공간의 철벽을 뚫고 생성과 지속, 시간을 우위에 두고 거꾸로의 철학을 심화시켜 기계문명 이후의 존재와 세계를 전복적 사유로 새롭게 규명하고 해석하기를 노렸던 니체이후의 긴 주제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 정도만의 전체 이해도만 마련되어도 그렇다면 나는 다시 거의 포기했던 <존재와 무>로 돌아갈 수 있다. 발산과 분화, 그 흩어지는 단파적 파토스만으로는 유기적 흥미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는 해체주의 이전의 나인지라 단순히 실존주의라는 한 경향적 흐름에 포월되는 그 이상의 바깥, 전체흐름이 이해되면 더 적극적인 읽기를 향한 동기가 촉발되지 않는가?

(그렇게 중첩되고 복잡한 고유 연관 관계 중에 유기적으로 뒤엉켜 있는 철학 텍스트들을 오직 그 텍스트만을, 그것도 한글 번역본에 붙들린 제한된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는 치기어린 만용을 일삼고 있었으니 나는 도대체 어떤 독자인가?)


하지만 이제 겨우 개괄적 기본 개념을 그것도 핵심적인 용어들 몇 개만을 교양철학의 수준에서 기본적으로 건졌을 뿐인데 마음은 설레인다. 하이데거, 샤르트르, 들뢰즈, 바디우, 메머드급 거대철학자들이, 그들이 사용하는 논리와 용어들이 더 이상 나에게도 외계인들과 그들만이, 그들의 세계에서만 유통되는 암호들이 아닌 것이다.


몇 개의 문장, 한 마디로 정리되고 표현되는 개괄적 지식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더 심하게 폭력적일 때가 있다는 것도 이번의 표류 과정에서 실감했다. 이런 성장통(?)을 치루고 있는 나에게 이제는 기본개념들을 하나씩 더욱 견고히 타고 넘어 그 개념의 우주론적 유포 안에서 아울러지는 그 미세하고 광대한 변화와 차이들을 하나하나 노려 볼만한 만용적 용기도 경험해 보는 것이 가능할까? 소비되는 시간이 그만큼 무겁더라도---어차피 교양철학의 일환이니 더욱 편한 마음으로 즐긴다는 유희적 전제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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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치유
맥스 루케이도 지음, 최종훈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머리만 볼록하고 몸이 없는 올챙이처럼 오늘날 일부 신앙인의 내면이 미숙한 기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지적한 사람은 복음주의의 교황으로 불리웠던 존 스토트였다. 건전한 신학, 확고한 정통과 그 교리, 신앙교육의 틀, 그 자존감과 자기 정체성은 철벽처럼 단단한데 그 속에 그 신앙이 어떻게 삶의 원칙과 해석으로 내려오는지, 그 견고한 정통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문화적 삶속에서 어떤 의식과 질서로 통합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생각이 없다. 그런 함몰에서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넘어 세상에 까지 통할 수 있는 생각과 삶, 경쟁력 있는 영향력이 생산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세상이나 세상의 영역과 문화에 대해 대비적으로 선을 가르고 그 공허하고 메마른 세속성을 이길 수 있는 이분법적 믿음은 그 역동성이 살아 있고 보장이 폭이 클수록 좋다. 우리가 믿음에서 그러한 확고한 정통적인 믿음의 방식이 아니면 어디서 어디로부터 탈 해체를 추구하고 그 꿈을 극한까지 밀고 가는 오늘날 디지털 문명의 바다를 통합하고 의미로 해석해 낼 전망과 힘을 경험해 낼 수 있을까? 정통은 역시 정통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도 정통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혁명이요 진정한 의미의 진보일 수 있다라고 갈파한 G.체스터턴의 말은 황금처럼 무게가 살아있는 진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이렇게 정통을 정통이라는 명분과 주어진 권위라고 하는 안전판 안에서 안주, 그렇게 믿고 반복하면 그 정통이 정통이 될 수 있을까? 정통이라는 범위설정과 그 체계적 믿음에 대한 확신과 이해, 전통에 대한 공감과 주장만 확보하면 그리스도인의 외면에 붙어있는 삶의 차원도 자동적으로 성숙하게 되거나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는 경쟁력이 저절로 생산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양가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고 하는 그 절대의식은 부정에 대한 절대부정을 통한 절대 긍정, 그 역동적인 의식만으로도 그 믿음을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을 이기는 절대생명이 될 수 있고 음부의 권세를 뒤집는 궁극적인 좌표로 경험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의 절대성은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영적인 변환이자 근원적인 변환으로 그 권능이 절대적이지만 물리적인 표층에 까지 다 미세하게 영향을 미치는 해석의 영역까지 일직선까지 다 포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변환된 그 영적 권능이 그 권능의 질서아래에서 그 권능의 외면에 붙은 부정성의 현실까지 전인적으로 변개시키는 데에는 그만큼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또 그 변환의 폭과 크기와 전인성이 신앙인 개인의 세계관 가치관 내면에 대한 깊이와 내용에 따라 제한되고 그 차원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앙은 신앙인의 내용과 행동을 변화시키지만 그 과정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조악한 과정이 아닌 만큼 그 변환의 과정에는 믿음의식의 타율적 질서 안에서도 인간이 소화하고 책임질 부분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믿음이다. 이를테면 같은 믿음이라도 다른 제자들과는 상대적으로 준비된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관심을 확대하고 의식이 훈련되고 증가된 만큼 그 마음의 영역의 크기대로 쓰임 받고 변화되는 그런 차원의 인간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절대와 현실의 포괄적인 균형에 대한 긴장과 이해가 없이 믿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이성을 극복하고 경계하다 못해 이성을 부정하는 극단에 까지 이르면 얼마든지 신앙도 그 절대적인 권위의 이름과는 달리 병들 수가 있고 파괴적인 에너지로 발전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신앙을 해석하고 소화하는 인간의 책임이다.


이런 의미의 이해에서도 현대기독교는 특히 신앙을 어떤 면에서는 과거의 정통적 이해와 함께 또 다른 차원으로 그 근본성에 대한 믿음을 더 깊은 이해와 공감으로 추구하면서 동시에 그 신앙을 삶과 내면으로 통합시키는 적용의 지점을 예민하게 주시하려는 경향으로 심화되고 있다. 영성에 대한 관심이 그렇고 보다 전인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건강성에의 의지와 노력들이 그 단적인 예들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오늘의 교회의 최대의 화두는 단연‘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맥스 루케이도의 책 <일상의 치유>도 그런 이해의 흐름에서 의미가 적지가 않는 글들로 보여 진다. 이렇게 중요해진 ‘적용’에 관해 루케이도는 이 책에서 적어도 좋은 사례 내지는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신앙의 적용을 생각하면 찰스 M.쉘돈의 베스트 셀러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류의 손쉬운(?)질문법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데에 보다 기능성 있는 발상과 접근이 요구된다. 이미 100년 전에 출판된 이후로 3천 만부 이상 팔린 대단한 책 중의 하나인<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은 모든 사안과 방식에 내가 만약 예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라는 대담한 도전과 질문을 촉구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는데 신앙의 적용 면에서는 그 포괄적인 공감은 좀 멀어 보여 한계를 보여 왔다. ‘내가 예수라면?’이라고 하는 직접적인 질문은 교회 밖으로의 삶으로 까지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생각, 양심에 대하여 일깨우고 깊은 문제의식을 던져 주는 데에는 훌륭할 수 있지만 인간과 예수님의 마음을 바로 직접적으로 대입하는 발상에만 치중한 나머지, 말씀과 현실 그 중간지대에 존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다변한 삶에 대한 응용과 창조성에 대한 사고와 자극을 주는 기능점을 만족시켜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을 예수님의 윤리적 언행에 직접 대입해 버리면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를 초기 1세기 사회상에 적용된 윤리에만 국한될 수 있고 또 예수님의 행동에 대한 그러한 직접적인 대입은 고도의 훈련된 고차원의 수도자나 실천 가능한 특별한 내면과 의식을 투사해야 하는 부담(?)과 거리를 줄 수 있어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결국 그 ‘예수의 삶’을 포기하게 될 가능성을 넓혀 놓을 수도 있다. 결국 신앙인의 삶이라는 것이 ‘나’와 ‘예수님’이라는 차이와 거리만큼 멀게 만 느껴지게 하고 적용의 내용을 그렇게 부담을 줄 수밖에 없는 윤리와 결단을 주로 해 버리면 또 그 방식은 적용의 중요성을 일깨우고도 그만큼 적용의 시도나 발상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부작용을 한편으로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도 극복과 대안, 루케이도의 방식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능적 삶을 자극하고 탐구하여 한결 더 생산적으로 나간 것으로 보인다. 신앙이 뚜렷하고 남다른 윤리적 각성과 그 일차적 실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각성과 더불어 신앙의 감격과 확신이 믿음의 질서 속에서 그 믿음에 붙은 외면과 전인적으로 통합, 흔들릴 수 없는 자기 확신과 기능성, 자기 정체성에 대한 보다 건강한 믿음으로 경험되고 그 경험들이 삶의 목적과 가치관. 방향성으로 내면화되고 체현되는 형태와 그것이 구체적인 삶의 스킬로 나아가게 한다면 신앙은 바로 삶,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루케이도가 이 책에서 삶을 강조하는 그만큼 신앙의 ‘적용’은 생산적인 범주로 포괄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 윤리도 어떤 형태의 억압과 의무로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와 자기 창조의 동기로 경험이 되는 자기치유의 누림으로 변환이 되는 것이 아닌가?)

 

루케이도는 이 책에서 신앙인의 자기확신적 삶을 둥근 공을 가장 멀리 효율적으로 날릴 수 있는 적타점을 일컫는‘스윗스팟’(Sweet spot)에 비유하며 바로 신앙인의 삶의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신앙언어로의 단순한 치환과 대입의 삶을 넘어 자본주의의 시장원리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삶의 정글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그 전인적 생산성을 보장할 수 있는 경쟁력으로서의 신앙인을 구체화시키며 적용을 촉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곧 그에게 신앙인은 전인적으로 가장 유능한 사람과 다름이 아니다. 스윗스팟을 경험하는 신앙의 삶은 성장을 꾀하는 사람이나 개인과 경영의 원리, 어떤 영역이든 통할 수 있는 삶의 건강한 원리가 될 수 있다. 곧 그에게서의 신앙의 내용은 ‘나’와는 거리가 멀고 좀 특수한 영역에 있는 거리감 있는 세계가 아니라 내가 나의 자리에서 편하고 부드럽게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그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감동과 친밀, 그 자체이다.


루케이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적용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이 일면 영원의 관점에서 오늘날 한시적일 수 있는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에 지나치게 투사되고 함몰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받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삶을 말하는 그의 발상과 생각의 건강성만큼은 높은 점수를 줄만하다. 단조로울 수 있는 기계적 일상이 루케이도의 믿음처럼 이렇게 감동과 치유로 경험될 수 있다면 이미 그리스도인은 그 나라, 그 의와 화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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