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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치유
맥스 루케이도 지음, 최종훈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머리만 볼록하고 몸이 없는 올챙이처럼 오늘날 일부 신앙인의 내면이 미숙한 기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지적한 사람은 복음주의의 교황으로 불리웠던 존 스토트였다. 건전한 신학, 확고한 정통과 그 교리, 신앙교육의 틀, 그 자존감과 자기 정체성은 철벽처럼 단단한데 그 속에 그 신앙이 어떻게 삶의 원칙과 해석으로 내려오는지, 그 견고한 정통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문화적 삶속에서 어떤 의식과 질서로 통합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생각이 없다. 그런 함몰에서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넘어 세상에 까지 통할 수 있는 생각과 삶, 경쟁력 있는 영향력이 생산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세상이나 세상의 영역과 문화에 대해 대비적으로 선을 가르고 그 공허하고 메마른 세속성을 이길 수 있는 이분법적 믿음은 그 역동성이 살아 있고 보장이 폭이 클수록 좋다. 우리가 믿음에서 그러한 확고한 정통적인 믿음의 방식이 아니면 어디서 어디로부터 탈 해체를 추구하고 그 꿈을 극한까지 밀고 가는 오늘날 디지털 문명의 바다를 통합하고 의미로 해석해 낼 전망과 힘을 경험해 낼 수 있을까? 정통은 역시 정통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도 정통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혁명이요 진정한 의미의 진보일 수 있다라고 갈파한 G.체스터턴의 말은 황금처럼 무게가 살아있는 진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이렇게 정통을 정통이라는 명분과 주어진 권위라고 하는 안전판 안에서 안주, 그렇게 믿고 반복하면 그 정통이 정통이 될 수 있을까? 정통이라는 범위설정과 그 체계적 믿음에 대한 확신과 이해, 전통에 대한 공감과 주장만 확보하면 그리스도인의 외면에 붙어있는 삶의 차원도 자동적으로 성숙하게 되거나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는 경쟁력이 저절로 생산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양가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고 하는 그 절대의식은 부정에 대한 절대부정을 통한 절대 긍정, 그 역동적인 의식만으로도 그 믿음을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을 이기는 절대생명이 될 수 있고 음부의 권세를 뒤집는 궁극적인 좌표로 경험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의 절대성은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영적인 변환이자 근원적인 변환으로 그 권능이 절대적이지만 물리적인 표층에 까지 다 미세하게 영향을 미치는 해석의 영역까지 일직선까지 다 포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변환된 그 영적 권능이 그 권능의 질서아래에서 그 권능의 외면에 붙은 부정성의 현실까지 전인적으로 변개시키는 데에는 그만큼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또 그 변환의 폭과 크기와 전인성이 신앙인 개인의 세계관 가치관 내면에 대한 깊이와 내용에 따라 제한되고 그 차원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앙은 신앙인의 내용과 행동을 변화시키지만 그 과정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조악한 과정이 아닌 만큼 그 변환의 과정에는 믿음의식의 타율적 질서 안에서도 인간이 소화하고 책임질 부분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믿음이다. 이를테면 같은 믿음이라도 다른 제자들과는 상대적으로 준비된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관심을 확대하고 의식이 훈련되고 증가된 만큼 그 마음의 영역의 크기대로 쓰임 받고 변화되는 그런 차원의 인간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절대와 현실의 포괄적인 균형에 대한 긴장과 이해가 없이 믿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이성을 극복하고 경계하다 못해 이성을 부정하는 극단에 까지 이르면 얼마든지 신앙도 그 절대적인 권위의 이름과는 달리 병들 수가 있고 파괴적인 에너지로 발전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신앙을 해석하고 소화하는 인간의 책임이다.
이런 의미의 이해에서도 현대기독교는 특히 신앙을 어떤 면에서는 과거의 정통적 이해와 함께 또 다른 차원으로 그 근본성에 대한 믿음을 더 깊은 이해와 공감으로 추구하면서 동시에 그 신앙을 삶과 내면으로 통합시키는 적용의 지점을 예민하게 주시하려는 경향으로 심화되고 있다. 영성에 대한 관심이 그렇고 보다 전인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건강성에의 의지와 노력들이 그 단적인 예들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오늘의 교회의 최대의 화두는 단연‘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맥스 루케이도의 책 <일상의 치유>도 그런 이해의 흐름에서 의미가 적지가 않는 글들로 보여 진다. 이렇게 중요해진 ‘적용’에 관해 루케이도는 이 책에서 적어도 좋은 사례 내지는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신앙의 적용을 생각하면 찰스 M.쉘돈의 베스트 셀러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류의 손쉬운(?)질문법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데에 보다 기능성 있는 발상과 접근이 요구된다. 이미 100년 전에 출판된 이후로 3천 만부 이상 팔린 대단한 책 중의 하나인<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은 모든 사안과 방식에 내가 만약 예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라는 대담한 도전과 질문을 촉구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는데 신앙의 적용 면에서는 그 포괄적인 공감은 좀 멀어 보여 한계를 보여 왔다. ‘내가 예수라면?’이라고 하는 직접적인 질문은 교회 밖으로의 삶으로 까지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생각, 양심에 대하여 일깨우고 깊은 문제의식을 던져 주는 데에는 훌륭할 수 있지만 인간과 예수님의 마음을 바로 직접적으로 대입하는 발상에만 치중한 나머지, 말씀과 현실 그 중간지대에 존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다변한 삶에 대한 응용과 창조성에 대한 사고와 자극을 주는 기능점을 만족시켜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을 예수님의 윤리적 언행에 직접 대입해 버리면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를 초기 1세기 사회상에 적용된 윤리에만 국한될 수 있고 또 예수님의 행동에 대한 그러한 직접적인 대입은 고도의 훈련된 고차원의 수도자나 실천 가능한 특별한 내면과 의식을 투사해야 하는 부담(?)과 거리를 줄 수 있어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결국 그 ‘예수의 삶’을 포기하게 될 가능성을 넓혀 놓을 수도 있다. 결국 신앙인의 삶이라는 것이 ‘나’와 ‘예수님’이라는 차이와 거리만큼 멀게 만 느껴지게 하고 적용의 내용을 그렇게 부담을 줄 수밖에 없는 윤리와 결단을 주로 해 버리면 또 그 방식은 적용의 중요성을 일깨우고도 그만큼 적용의 시도나 발상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부작용을 한편으로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도 극복과 대안, 루케이도의 방식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능적 삶을 자극하고 탐구하여 한결 더 생산적으로 나간 것으로 보인다. 신앙이 뚜렷하고 남다른 윤리적 각성과 그 일차적 실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각성과 더불어 신앙의 감격과 확신이 믿음의 질서 속에서 그 믿음에 붙은 외면과 전인적으로 통합, 흔들릴 수 없는 자기 확신과 기능성, 자기 정체성에 대한 보다 건강한 믿음으로 경험되고 그 경험들이 삶의 목적과 가치관. 방향성으로 내면화되고 체현되는 형태와 그것이 구체적인 삶의 스킬로 나아가게 한다면 신앙은 바로 삶,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루케이도가 이 책에서 삶을 강조하는 그만큼 신앙의 ‘적용’은 생산적인 범주로 포괄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 윤리도 어떤 형태의 억압과 의무로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와 자기 창조의 동기로 경험이 되는 자기치유의 누림으로 변환이 되는 것이 아닌가?)
루케이도는 이 책에서 신앙인의 자기확신적 삶을 둥근 공을 가장 멀리 효율적으로 날릴 수 있는 적타점을 일컫는‘스윗스팟’(Sweet spot)에 비유하며 바로 신앙인의 삶의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신앙언어로의 단순한 치환과 대입의 삶을 넘어 자본주의의 시장원리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삶의 정글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그 전인적 생산성을 보장할 수 있는 경쟁력으로서의 신앙인을 구체화시키며 적용을 촉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곧 그에게 신앙인은 전인적으로 가장 유능한 사람과 다름이 아니다. 스윗스팟을 경험하는 신앙의 삶은 성장을 꾀하는 사람이나 개인과 경영의 원리, 어떤 영역이든 통할 수 있는 삶의 건강한 원리가 될 수 있다. 곧 그에게서의 신앙의 내용은 ‘나’와는 거리가 멀고 좀 특수한 영역에 있는 거리감 있는 세계가 아니라 내가 나의 자리에서 편하고 부드럽게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그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감동과 친밀, 그 자체이다.
루케이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적용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이 일면 영원의 관점에서 오늘날 한시적일 수 있는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에 지나치게 투사되고 함몰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받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삶을 말하는 그의 발상과 생각의 건강성만큼은 높은 점수를 줄만하다. 단조로울 수 있는 기계적 일상이 루케이도의 믿음처럼 이렇게 감동과 치유로 경험될 수 있다면 이미 그리스도인은 그 나라, 그 의와 화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