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이와 반복> 288쪽 까지 읽었다. 1장 차이 그 자체와 2장 대자적 반복까지이다. 1장은 문자 그대로 즉자적 차이를 개념과 매개의 부족함과 재현의 메마른 빈곤성을 서론과 연결, 약간 더 강도를 더해 정리해 주는 것으로 드러내 주고 있고 2장은 즉자적 차이가 대자적으로 연관되는 가운데 어떻게 경험되어지는 국면인지 그 차이의 반복이 데카르트와 칸트의 논리, 니체, 키엘케고르의 그것과 그리고 프로이트의 무의식과는 또 어떻게 연관되고 구별되는 것인지를 매우 정교하고 구체적인 논리로 포괄해 주고 또 그것을 때로는 폐부 깊숙이 찌르며 섬밀하게 쪼개어 준다. 서론과 1장은 비교적 일반적인 논리로 하지만 이쯤해서는 그 강도가 심화되어 동원되는 주변논리와 철학자들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이는 이해가 쉽지 않을 정도로 난해한 부분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본격적인 심화논리들이 3장부터는 더욱 치밀하고 정교하게 전개되는 것으로 보여 나 같은 일반인들을 다시 긴장 시킨다.
1장과 2장에는 이미 많은 내용들이 변별되고 전개되고 있는데 그 미세한 부분들을 나름대로 다시 소화하고 정리하는 것은 나의 교양철학의 범위에서는 당연히 버겁고 힘겨운 작업이다. 읽기를 따라가다가 그 흐름에서 인상적인 느낌이나 차이나는 자극과 같은 흥미위주의 문장으로 추적하는 순박한 기술로 오늘의 정리도 대체해 본다. 이것도 전문가가 아닌 쫓기지 않는 허접한 자유인(?)의 여유임을 자위하면서---.
1,2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전통철학이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 설정하고 끊임없이 부정하고 무화시켜야만 하는 일자로서의 존재에 대비된 생성, 즉 비-존재를 ?-존재로 명기해야 될 것이라고 말한 1장 6절중의 부분이다. 니체이후의 현대철학을 생성 대 역사라는 대립 항으로 간단히 파악할 수 있다면 이 도식은 더 편리한 대칭항으로 하면 존재 대 비-존재의 구도가 된다. 존재와 비존재, 사실은 존재에 대비해서 현상적으로는 비-존재가 더 중요한 항이 되는데 여전히 존재에 대비해서 그 생성의 무한한 유동성을 존재에 종속적인 이미지를 주기 쉬운 비-존재로 명명되면 언제든지 이 비-존재는 전통철학이 수행해 왔듯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 전달되기 쉽고 철학의 작업은 바로 그 부정적인 공간을 몰아내고 무화시켜야 하는 그 대상으로서의 비가 된다. 그 비-존재의 ‘비(非)’는 ‘부정적인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며 ‘다른 어떤 것’정도가 아니라 들뢰즈에 이르러서는 존재자의 삶의 내용과 확장이 생기되는 존재의 사실상 전부의 공간으로 격상되는데 비-존재는 그러므로 ‘비’가 아니라 ‘?-존재’로 달리 명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

“존재는 본연의 차이 그 자체이다. 존재는 또한 비-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존재는 부정적인 것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문제 틀의 존재, 문제와 물음의 존재이다. 본연의 차이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그렇기 때문에 비-존재는 차라리 (비)-존재라 적어야 하고, 그보다는 ?-존재라고 적는 편이 훨씬 낫다.(159쪽)
이렇게 되면 ‘비’는 존재의 허상이나 열등한 무로서의 대칭성이 아니라 무한한 물음과 적극적 탐구, 절대적인 긍정의 무한공간으로서 격상된다. 곧 본질을 전복시키는 침범으로서의 허상, ‘시뮬라크르'(simulacre)인 것이다. 곧 들뢰즈에게서는 지젝이 지적해 주었듯이 존재/생성의 문제가 아니라 생성 없는 존재/생성의 문제로 전복된다. 이런 전복을 극명하고도 통쾌하게 기호화해 주는 것은 단연 존재라는 낱말 앞에 부착된 저 부호‘?’이다.
무한한 광역의 공간을 향하여 무한한 질문과 생기적 추동을 예표하는 ? 부터는 이제 개체존재, 생성과 분화, 유동하는 차이와 반복은 모든 공간을 침투하고 채워내는 유목적 분배와 발산으로 만개할 수 있게 된다. 그 유목적 확장과 충만, 그렇다면 그 팽창해 오른 공간운동을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담아내는 생성의 우주론이 이번에는 필연적으로 요청될 것인데--- <차이와 반복>은 바로 이에 대한 응답이었던 것이다.
이런 거대 형이상학, 질료와 역사에 대비 존재와 초월을 포월하는 고전적인 형이상학이 아니라 거꾸로 존재와 초월을 무화시키는 물질과 표상의 형이상학, 들뢰즈는 지금 이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 형이상학이 존재의 힘을 사물(허상) 뒤에 숨겨진 초월적 본질 ‘존재’에 위계적으로 설정, 혼돈의 우주와 허상(사물)에 그 시대에 필요한 의미 있는 질서를 구축해 내기를 노렸다면 존재를 무화시키는 전복의 형이상학은 개체존재 내부의 생성적 역능으로 그 힘을 대신하며 디지털 문명사회의 유목적 지평을 열고자 한다. 개체존재가 고유한 성격으로 발산 하는(하고 있는)차이와 개체 존재의 자기 확신으로 인한 자기 확장운동을 지칭하는 반복이 그 내적 엔진인 것이다. 이렇게 거꾸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전통철학은 존재의 힘이 위에서 아래로 투사되지만 들뢰즈는 아래에서 안에서 스며 나오고 치고 나오는 유물론적 역학구조를 띤다.(이에 대해 한편, 알랭 바디우는 생성론 바탕아래의 하이데거, 사르트르의 던져지고 투여된 수동적 존재론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들뢰즈의 기본적 존재론 그 저변을 보고 들뢰즈의 개체존재는 충분히 주체적일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들뢰즈의 철학이 이렇게 거대의 국면을 포월하는 형이상학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차이와 반복은 키엘케고르의 낭만적 반복에 비교해서는 훨씬 세속적으로 풀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키엘케고르의 반복은 신앙적이어서 인격적이고 내재론적이다. 존재론적 감격을 터전으로 해서 스스로 인격적 윤리성을 띠는 종교성을 포함하는 성격인데 들뢰즈에 와서는 이 개체존재의 자각적 내재적 힘이 도덕적인 범주를 넘어 개체존재의 확장의지 일반으로 확대된다. 곧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유목적으로 흩어지고 발산되는 욕망 일반으로 까지 포월하는 전방위적인 범주로 넘쳐나는 것이다. 전통 존재론의 배후에는 형상이나 신이 있어 필연적으로 논리와 개념의 도그마에 빠져 생성 없는 존재론으로 심화되는 만큼 그것을 전복, 생성의 세계관을 담고자 하는 들뢰즈에게는 신과 같은 고정된 위격을 용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기에서는 키엘케고르가 아니라 니체가 그 중심공간에 배치되어야 한다. 신을 부정하다 못해 반(anti)-신인 니체, 하지만 신이라고 하는 절대관념을 포월하는 파토스가 부재해도 그에 못지않은 원초적 의지, 역능적 야성을 포함, 대체, 지시해 주고 있는 그 니체의 세속적 초인의지의 운동이 들뢰즈의 유물론적 우주론의 적합한 베이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2장까지 오는 동안에도 곳곳에 반복적으로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재해석과 그에 기초한 역능적 발산을 기술하고 있지 않은가?(이 지점에서도 나는 <들뢰즈의 니체>로 우회해 보아야겠지만 당장 그 책이 내손에 없고 또 다른 책들이 밀려 있으므로 다음기회로 미룬다.)

‘영원회귀’라는 자유발산의 원초적인 힘과 의지, 그리고‘회귀’라고 하는 동일적 운동, 결국 무한한 야성적 발산도 일말의 그 발산의 중심적 균형을 따라 돌고 도는데 그 원환적 운동은 운동하는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의미에서의 회귀이지 그 회귀는 단순한 기계적 반복이 아니다. 반복된다는 운동적 동일성이 존재하지만 그 운동의 내용은 “변신과 가면들로 연출되는”스스로를 변형할 수 있는 자기창조적인 에너지이다. 이것이 들뢰즈가 이해하는 니체의 영원회귀라면 이 영원회귀의 운동력, 내재적 세계관이야 말로 들뢰즈가 노리는 생성우주론의 매혹적인 내적 기제로 내장될 수 있지 않은가? 이 존재의 근본 운동력으로 하면 어떤 일자나 신을 가정하지 않더라도 존재의 운동을 전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한편, 그렇게 과월되는 전체 운동에서 일말의 균형이 포함된 질서를 향한 일의적 믿음을 잠재적으로 경험할 수가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들뢰즈의 관심은 생성 없는 존재에 대비된 생성이 어떻게 디지털 문명을 소화해야 하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장착 가능하고 철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지를 그리고 그 생성론 중심의 전도된 열린 개방성의 생성 세계관이 절대긍정으로 용인되는 가운데 대중적으로 사유될 수 있는지를 열어 보이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작업을 다시 정리하자면 그래서 들뢰즈의 존재론은 ?-존재론이며 그럼으로써 존재에 씌여졌던 왕관은 유목적 아니키즘, 그 비-존재의 범주로 중심이 넘어가는 전복된 존재론인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들뢰즈에게 그의 가장 까다로웠던 논적이었다고 하는 알랭 바디우의 이름으로 섣부른 태클을 걸어 보자.(나는 지금 어떤 학술적 흐름이나 정합성의 순서를 따라 내 나름의 글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읽은 책들을 중심으로 그 감흥과 자극, 생각의 도전들과 충격들을 나 자신의 언어로 정리하면서 때늦은 교양철학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극대화하기를 꾀하는 어떤 즐거운 욕망을 실현하고자 할 뿐이다. 엊그제 바디우의 책 몇 쪽을 읽었으므로 그 자극을 보다 생산적으로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을 이런 식으로 끼워 정리해 보는 것이다.) 들뢰즈 비평서인 바디우의 <존재의 함성>은 (특히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매우 난해한 문장들로 되어 있는데 그 책의 전반부에 나오는 질문중의 하나는 바로 바디우가 주창하는 주체의 문제로 읽혀진다.
바디우가 보기에는 차이와 반복 같은 내적 힘으로 유지되는 들뢰즈의 존재론은 개체존재가 보다 분명한 주체화로 보장될 때에나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개체존재는 그 개체존재가 충분히 주체적인 존재자인가? 바로 이것이 바디우가 던지는 질문 중의 하나로 보인다. (들뢰즈의 기본 개념조차도 버거운 나 같은 일반인은 당장 텍스트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급급해 이런 질문을 경험해 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도 희미하게나마 의문시해 본 회의들을 바디우는 고도의 철학논리와 사유로 정면으로 제기한다. 대가의 회의와 질문에 편승해 그 대가의 질문이 이렇게 나의 회의인양 금방 나도 철학자가 된 듯한 동일시의 착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가소로운 경험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바디우가 보기에는 들뢰즈처럼 그렇게 개체존재가 하나의 개념적 존재에 붙들리지 않고 유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충분한 주체로서의 개체존재가 될 수 없다. 우선 들뢰즈의 개인은 그 사유하는 힘, 의지자체가 역능적으로 생성된다고 하지만 그 역능도 사실은 사유의 조건들로부터 구조적으로 기인하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자율적이지가 않다. 그 사유는 외형적으로는 욕망으로 촉발되는 것처럼 언표되고 있지만 그 분화하는 욕망의 근저는 분명 들뢰즈의 이론에서는 내재성의 강제에 의해 밀쳐진 것으로 분명 수동성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가 자신의 비평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들뢰즈 자신의 문장들을 우선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사유 안에서는 결코 사유될 수 없는 사유인 외부의 사유가 점령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정화된 자동장치이다.”(<영화2.시간-이미지>원서.233쪽) “사람들은 분명히 그리고 실제적으로 오로지 선택된 것만을 선택한다”(같은 책.232쪽) 이런 실존주의적인 존재론을 바탕에 깔고도 생성의 효과와 자기창조적인 능동성을 주목, 전체적으로 강조하다보니 많이 나아가 들뢰즈는 존재의 기계적인 응용으로까지 긍정하고 용인할 수 있는데 이렇게 까지 과월하게 되면 차이와 반복의 개체존재는 “욕망하는 기계”로 까지 치닫게 된다. 곧 지젝이 우려하는 바와 같이“기계-되기”의 관계이다.

이 지점에서 지젝이 잘 지적해 주고 있듯이 그렇게 되면 심지어 개체존재의 반복과 의식은 일정부분 기계가 떠안게 되는 현상적 전복도 발생한다. (실제로 유전공학이나 생물과 기계장치가 응용적으로 결합되고 있는 것은 지금의 과학현실이다.) 그러면 지젝의 질문처럼 그렇게 “다시금, 기계에 의해서도 조종되는 인간은 자신의 움직임을 계속 자발적인 것으로 “경험”할 것인가?”(지젝,<신체없는 기관>. 김지훈 박재철 이성민역. 도서출판b.43쪽) 라는 역전된 회의도 더욱 분명하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바디우는 들뢰즈의 이 수동성을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제기하고 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들뢰즈가 제시하는 내용들 속에서 자율성에 대한 격려를, 또 욕망의 생산물들로 대지를 가득 채워 나가는 당당한 개별자의 아니키적 이상에 대한 격려를 보게 된다고 확신하는데, 사실 이들은 들뢰즈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올바른 방향을 벗어나 있다. 이들은 들뢰즈가 욕망과 관련하여 만들어 낸 개념(그 유명한 "욕망하는 기계들"), 더 나아가 의지나 선택과 관련하여 만들어 낸 말 그대로의 기계적인machinique개념을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취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사실 이때의 개념은 사유나 행위의 원천이 우리일 수 있다고 고려하는 일을 아주 철저하게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모든 것은 언제나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 오며, 심지어 모든 것은 언제나 이미 그곳에, 즉 일자라는 무한하며 비인간적인 원천 안에 미리부터 존재한다.”(<존재의 함성>,박정태역. 이학사.51쪽)
이러한 하이데거, 사르트르의 실존적 존재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들뢰즈의 개체존재는 그러므로 그 차이와 반복을 건강한 힘으로 생산하고 작동시킬 수 있는 주체화된 존재인가? 그리고 그렇게 들뢰즈의 개체존재가 충분한 주체화의 지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 확장되는 것이라면 그 확대 속에서 규정되고 묻게 되는 그 차이와 반복의 생성이라는 것은 결국은 생성이 아니라 변화를 모방하고 쫓아가는(쫓기는) 문자 그대로의 어떤 허상에 속하는 환영이 아닌가? 하는 질문도 가능해 진다. 그렇다면 사물이 존재의 환영이며 허상이라고 설정하는 플라톤을 뒤집고 극복하기를 노리는 들뢰즈 자신도 그 자신이 결과적으로는 그 허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상의 바다에 허약하게 빠져 표류하고 말게 되는 것이 아닌가? 바디우의 회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독설적 비평이 물론 개체존재의 강렬한 주체화를 언표, 해체주의의 아나키적 과월을 극복, 진리의 윤리를 묻고자 하는 바디우 특유의 개성에서 촉발된 의문이겠지만 상당히 의미있는 질문으로 여겨지기에 이렇게 덧붙여 보는 것이다.
한편, <차이와 반복> 역자인 김상환 교수는 이 텍스트의 전체내용에서 2장 4절, 반복을 정신분석의 영역을 아우르면서 정리해 준 대목을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다고 해설에서 밝히고 있는데 나로서는 도무지 그 말의 뜻을 잘 실감할 수 없다. 역자는 그 이유를 “현대 인문학의 새로운 지반이자 아직도 개척해야 할 대륙으로 남아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자신의 철학적 개념들을 동원하여 깔끔하게 재해석하는 작업”을 한 들뢰즈의 솜씨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나와 같은 일반인의 눈에는 그 대가의 솜씨가 먼 산과 같이 아직은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