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이와 반복> 131쪽 까지 읽었다. ‘반복’의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키엘케고르의 <반복>을 재차 정독했는데, 역사와 공간에 대한 시간의 우위, 즉 생성과 변화의 탐구라고 하는 현대철학의 전체 흐름에 잇대어 그렇게 다시 읽어 본 키엘케고르는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키엘케고르와는 전혀 다른 키엘케고르였다는 것은 지난번에 정리한 바와 같다.
그가 심도 있게 다룬 ‘반복’은 철학의 한 건조한 개념, 부분적인 영역이 아니라 그렇게도 절실했던 인간의 조건을 묻는 존재를 향한 중심적인 성찰을 겨냥한 중핵적 표적이었던 것이다. 이로서 철학은 그 담론에서 관념론 지향의 철학에서는 경험해 보기 힘들었던 삶을 향한 직접적 성찰과 조우하는 말 그대로의‘철학’이 되는 것인가? (이런 흐름의 내용의 현대철학이 정신분석과 만나면 이제 철학은 대중적인 감각과 흥미를 촉발시키는 가공할 발화점으로 폭발할 것이다. 그래서 라깡이며 그래서 들뢰즈, 지젝인가?) 어쨌든 이렇게 고도로 개별화된 전문 개념, 상상력들이 인간을 이해하고 그 내면을 자극, 살아있는 의미의 범주까지 기능적으로 찌르고 포월 해 준다면 나 같은 일반 독자들도 이제 더 큰 의미와 동기, 욕망들을 경험하며 철학 읽기를 즐길 수 있겠다.
들뢰즈에 자극되어 키엘케고르의 <반복>을 정리해 보고 나니 이번에는 <차이와 반복>의 문장들이 키엘케고르와의 유기적 연결로 전혀 새로운 의미들로 다가온다. 전편의 글에서 나는 “전공자들도 서너 번을 읽어야 한다는 본문들인데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난해하다---”라는 말을 첫 문장으로 사용했는데 먼저 이 문장을 서둘러 취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본문들이 너무 쉽게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왠 횡잰가? 들뢰즈를 통해서는 마술처럼 키엘케고르가 제 모습을 드러내었고 이번에는 그 키엘케고르를 통해서는 <차이와 반복>의 문장들이 너무 쉽게 튀어 나온다. 83쪽 서론까지 읽으면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며 겁도 없이 진도를 나갔었나? 그렇다면 당연히 다시 첫 문장으로부터 시작이다. 재차 서론 부분을 처음부터 다시 정독하며 오늘은 그 서론도 돌파, 131쪽까지 나갔다. 기본 개념들에 대한 이해를 그것도 사전적 해설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전체 흐름에서 절실했던 문제의식들의 유기적 구조로 이해하기를 노려 본 결과가 이런 축복을 불러올 줄이야---. 안개가 걷히니 길이 보이고 쉬워진 것일까? (물론 기본 문장적인 이해에서)
83쪽의 서론부분까지는 키엘케고르가 제기했던 그 ‘반복’의 문제, 그리고 개체존재가 도저히 동일자로 묶일 수 없는 그 유동적 순수차이, 살아 형성되고 생성진행중인 존재의 차이를 개괄적으로 정리하고 그 차이와 반복이 일반성의 범주와 어떻게 구별 되는가?에 대한 기본적 분석이다.(전혀 어렵거나 난해한 문장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역동적으로 유동하며 침범하는 생성적 사유의 감격을 기술한 첫 부분의 생경한 문장들이다. 들뢰즈에게서는 철학이 더 이상 관념과 그 입체적 구조미를 넓히고 첨예화시켜 나가는 매개적 메마른 규정적작업의 일환 속에 묶이는 것이 아니다.(나는 반복과 대칭으로서 항시 부정적 의미, 논리기능적인 파악과 인식의 차원으로 언표되는‘매개’나 그 매개적 결과, 현상으로 나타나고 인식되는 ‘재현’같은 용어들도 키엘케고르를 읽으면서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기본 암호들이 해독되지 않으면 들뢰즈의 텍스트 읽기도 표류당하는 고문, 그 자체로 끝나고 말 것이다.) 철학은 곧 추리소설이며 공상과학과 같은 침범이다! 일반적인 규칙과 틀을 규정하는 개념의 구체화에 대비, 살아있어 생성, 본래의 존재의 내용까지 변화가 가능한 형성, 확장되어 나가는 그 차이와 반복을 강조한 진술들이었지만 그 포문을 연 기술들이 매개적 사고에 깊이 물들어 있는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인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사유는 내생적 개념의 우주 안으로 점점 견고하게 규정적으로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들’과 ‘여기들’을 항상 새롭고 항상 다르게 분배하는 무궁무진하게 생겨나는”안과 밖으로 창조적 감격으로 유동해 나가는 창조적인 생성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유는 봉쇄되는 개념에 붙들리지 않고 논리적인 규정을 넘어 자기창조, 연극, 무대의 드라마와 같은 상상력의 영역으로 까지 짜릿하게 상승하는 엔진을 얻는다
“허상은 모상(模像)이 아니다. 허상은 원형들마저 전복하는 가운데 전복하는 가운데 모든 모상들을 전복한다. 즉 모든 사유는 침략이 된다.”
이와 같이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스스로를 발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n승’의 역량으로 스스로를 고양시키는 능력이다.
먼저 들뢰즈는 이 서론에서 반복은 일반성, 규칙적 되풀이, 자연법칙, 습관, 단순한 회귀, 도덕적 관습, 개념적으로는 개념의 내포현상과 봉쇄, 동일성, 부정적 조건, 무의미한 반복등과 같은 구체적인 현상들과 어떻게 차이가 있는 차원인지를 구별해 준다. 그리고 왜 반복이 될 수 없는 그러한 동일성을 지향하는 외적 범주들은 삶을 창조적으로 자극하고 생성해 내지 못하는 형식 범주들인지를 논증함으로 차이와 반복의 그 생성적인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정리해 준다.

그런데 이 논증의 과정에서 어디서 많이 본 사르트르의 얼굴이 보인다.
“반복이란 것은 그야말로 자신을 구성해 가는 가운데 스스로 위장하는 것, 스스로 위장함으로써만 자신을 구성하는 어떤 것이다. 반복은 가면들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가면에서 저 가면으로 옮겨 가면서, 변이형들과 더불어 그리고 변이형들 안에서 자신을 형성한다.”(60쪽)
그렇다. 이것은 거의 사르트르의 언어를 옮겨 놓은 것과 같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이런 문장들을 반복적으로 풀어 놓지 남기지 않았던가?
“---이리하여 자기가 아니 있는 것으로 있음으로써, 자기가 있는 것으로 아니 있는 이 전체는 자기 이탈이라는 철저한 노력에 의해서 도처에 자기 존재를 하나의 다른 것으로서 만들어 내 놓을 것이다. 즉 하나의 부서진 전체의 사방에 흐트러진 즉자존재, 항상 다른 곳에, 항상 거리를 두고 결코 자기 자신에 아니 있으며, 그러하나 이 전체의 끊임없는 폭발에 의해서 존재에로 유지되어 있는 사방에 흐트러진 즉자존재, 이러한 것이 타인들의 존재이며 타인으로서의 나 자신의 존재일 것이다.”(<존재와 무1>,손우성역.삼성출판사. 500쪽)
내가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는 철학자는 사르트르가 유일해서 그런지 특별히 인상적으로 이런 진술들이 눈에 잡힌다. 그런데 내 눈이 그렇게 빈궁한 철학 텍스트경험으로 인한 경박한 마음으로 해서만 그 문장이 뚜렷하게 잡힌 것은 아닌 것 같다. 지젝의 <신체없는 기관>에도 이런 문장이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과정을 가리키기 위해 들뢰즈가 엄격히 금했던 “초월”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픈 유혹을 느낀다. 여기서 들뢰즈는 어떤 과정은 사건을 발생시킴으로써 자신의 역사적 조건들을 초월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건 아닌가? 초월이란 용어를 이런 의미에서 이미 사용한 이는 사르트르(들뢰즈의 은밀한 준거점 중 하나)인데 그는 주체가 종합의 행위 속에서 그 자신의 조건들을 어떻게 초월할 수 있는가를 논의했다.” (<신체없는 기관> 김지훈 박재철 이성민역. 도서출판b.33쪽)
그러니까 들뢰즈는 반복을 키엘케고르가 설명한 것 보다는 훨씬 포괄적으로 탐구 심화시키고 그 반복을 더 큰 원주율로 해서 현대적인 형이상학의 범주로 정교화 하기를 노리는 것이다. 존재의 감격인 차이와 반복이 키엘케고르를 기점으로 니체의 영원회귀와 더불어 이렇게 사르트르의 ‘있는 것으로 아니 있고 아니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대자, 대타존재의 그 존재론을 (‘은밀한 준거점’으로) 포괄한다면 논증하고 채워야만 하는 그 사유와 범위는 어떻게 벌어지고 어디까지 확대될까?
이렇게 보면 한편, 키엘케고르의 반복은 들뢰즈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원론적이고 깊숙한 계곡처럼 시원하고 좁다고 해야 할까? 시원하지만 좁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키엘케고르의 반복은 거의 종교,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의 차원에서 기본적으로 물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신앙과, 논리를 초월하는 논리, 논리위의 논리와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상에 서있다.) 그렇게 상대적으로 좁은 한편, 매우 기독교의 ‘믿음의식’적이므로 그가 말하는 반복은 또한 상대적으로 더 깊고 탄력적인, (신적인) 존재감을 느끼게 할 수 있겠다. 들뢰즈 류와 같은 정교한 구체논리가 줄 수 있는 확장된 사유의 포만감은 선사해 주지 못하지만 대신 상대적으로 역동적 감격을 훨씬 높은 강도로 느끼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곧 키엘케고르에서는 반복에 대한 원론적 파토스를 산바람처럼 맛볼 수 있는 대신 추상성의 의혹을 경험하고 들뢰즈의 확장논리에서는 그 추상성의 의혹이 그만큼 해소되는 대신 키엘케고르의 원시적 감격은 상대적으로 잔잔하게 가라앉는 느낌을 경험하게 할 수 있겠다. 나는 벌써 서론을 약간 벗어나고 있는데 이미 들뢰즈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고 있지 않는가? (이것은 시적 논리와 산문적 논리의 차이로 인한 것인가? 아니면 나만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일까?)
어쨌든 안개가 물러가고 날이 밝아 사물들이 어느 정도 정돈이 되었으니 이제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진도를 나가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