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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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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에세이들 중에서 ‘적을 만들다’라는 제목의 글은 여전히 평범한 풍모의 문체들이다. 하지만 그 평범의 편안함 속에서도 역시 그를 읽는 재미는 조금도 반감되지 않는데,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그 에세이의 도입 부분이다.

 

 

언젠가 에코가 뉴욕에서 택시를 탔는데 파키스탄 출신의 운전기사가 이탈리아인임을 알아보고 뜬금없이 묻더란다.

 

“이탈리아의 적은 누구냐?”고.

“적이라니? 이탈리아에는 적이 없다. 우리의 마지막 전쟁은 반세기 훨씬 이전에 일어났고, 더욱이 하나의 적과 전쟁을 시작해서 다른 적과 전쟁을 마쳤다. 황당스럽게 적은 무슨 적이냐?”

 

시덥지 않은 말투로 대꾸하고는 호텔에 도착한 에코,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고 한다.

“지난 60년간 진정한 적들을 두지 않았던 것이야말로 이탈리아가 지닌 불행들 중 하나가 아닌가? 이탈리아의 통일은 오스트리아가, 다시 말해 시인 조반니 베르케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락부락하고 불쾌한 알레마니족”인 오스트리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무솔리니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불완전한 승리가, 도갈리 전투와 아두와 전투에서 에티오피아에게 당한 굴욕이, 그리고 유대인 금권 정치가 이탈리아에 부당한 제재를 가했다고 주장했고 이들에 대한 복수를 부추기면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글은 계속된다.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적을 만들다>>,12,13쪽)

 

무언가와 싸워야만 되는, 싸워야만 하는 욕망의 좌파는 특히 마땅하게 존재해야만 하는 적을 구축하고 그 기축을 중심으로 원주율처럼 선회하며 ‘정치’를 기획한다. 아니, 그에 붙은 ‘정치’란 것, 개념 자체가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바꾸고 지키고 유지하고 그 무엇으로부터 승격시켜 나간다는 대립적 구성력, 힘을 내용의 과정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무엇에 대하여 상응하거나 대응하여 발생시킨 욕망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만일 적들이 없다면 정치란 단어, 무수한 욕망을 투영하고 실어 나르는 그 매혹적인 로망으로서의 기표, 그 자체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여 최근 번역 출간된 <<철학과 사건>>에서 알랭 바디우의 이런 진술을 읽어볼 수 있는 것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정치는 언제나 모순의 성격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실험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상속받은 정치적 전통 속에서 중요한 점은 적들ennemis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반대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들이 있습니다.”(13,14.)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글, ‘적에 대한 그리움’ 역시 이런 맥락에서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가 있다.

“적이란 무엇인가? 적은 칼 슈미트에게 사회적인 범주가 아니라 실존적인 범주이다. 슈미트는 적이란 범주에 ”존재의 합당한 기원성“을 부여한다. 나의 적이 내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규정한다. 적은 확고한 정체성을 만들어 준다. 적은 형상으로 나타난 우리 자신의 문제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나 자신의 척도와 나 자신의 한계와 나 자신의 형상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 적과 투쟁적으로 씨름할 수밖에 없다.”” (<<문학과 사회>>,2015 여름호,466,467.)

 

칼 슈미트는 과연 인용구의 해석처럼 실존적인 범주로서만 적을 말했을까? 그에게 그 혐의 없는 뉘앙스로만 읽히는 적을 기술했을까? 더 찬찬이 숙고해 볼 일이지만 어쨌든 그 슈미트도 적이 없는 유실인간에 대해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통해 이런 문장을 쏟아낸다.

 

“어떤 국민이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서 자신을 유지할 힘이나 의사를 잃는다고 해서 이 세계에서 정치적인 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약한 국민만이 사라질 뿐이다.” (70.)

 

약한 국민, 정치를 상실한---.아닌게 아니라 오늘 역사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수여된 최대의 화두는 바로 이 정치를 욕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이 정치가 작동되지 않는 정치의 실종 사태가 아닌가? 권력의 실종이 아닌가? 역사 이후의 공간이라는 것은 결국은 이러하게 연체동물들만이 부유하는 ‘액체’공간으로의 변이가 아닌가?

 

하여 한병철은 위의 글에서 이 문제를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유주의에서 적은 사라진다. 적 대신에 ”경쟁자“가 등장하고 이는 정체성을 확립시켜줄 수 없다.---전 지구적 신자유주의는 점점 더 많은 안전성과 구속력을 해체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어떤 일자리도 안정적이지 않다.”(문학과 사회,2015.여름호.467.)

 

바디우 또한 <<철학과 사건>>에서 같은 문제를 이렇게 거론하고 있다.

“난점은 오늘날 이 적이라는 문제가 절대적으로 확실치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확실치 않습니다. 우선 세계적인 수준에서 볼 때,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는 매우 명확한 객관적 틀이었던 어떤 이원성을 종결시켰습니다.---다음으로 국가의 내부에서 볼 때, 계급이라는 여건은 우리의 사회가 중간계급(중산층)이 계속 확장되는 사회라는 생각을 위하여 제거됩니다. 중간계급이 민주주의적 정치의 진정한 버팀목이라는 생각이 도처에서 부과됩니다. 말하자면, 거대한 중간계급이 있고, 그 주변에---매우 부유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소집단이,---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의 매우 가난하고, 심하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14.)

 

결국 오늘의 딜레마는 이러하게 적이 사라짐으로 적이 모호해짐으로 어떤 ‘이원성’의 변증법적 분할이 더 이상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가? ‘역사 이후’의 공간, 자신의 ‘역사적’ 장소가 없는 무 장소의 문제가 아닌가? 적이 안개 속에서 산포되고 증발됨으로써 그로서 근대 이전의 로망이 걸리지 않는 무정치의 교착상태가 아닌가? 그럼으로써 적으로 인해 포착되고 발화되던 내부의 열정과 ‘행동’을 더 이상 의미 있게 설명할 수 없는 사태가 아닌가? 결국 이러한 무정치의, 정치가 작동되지 않는 사태는 그 공회전으로 말미암아 현대인으로 하여금 현저하게 “행동역량의 감소”를 초래했고 그 역량의 축소는 또한 현저하게 “존재하기 위한 노력의 감소”로 발전하게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가장 우려할만한 반-문명적 참상이 아닌가?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어떤 보편의 문맥으로 기술한 다음의 말은 결국 순수 생물학적인 국면에서도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욕구와 실존적 상황이 그들에게 요청하는 지능을 개발한다. 욕구가 멈추는 곳에 지능은 쉰다.”

 

그렇다면 당연히 오늘날의 가장 큰 화두는 당연히 이 정치의 발명, 다시 욕구를 발화시키고 증폭시켜낼 수 있는 적의 발명이 아닌가? 없는 적이라도 만들어내야만 더 이상의 의미 있는 생존이 가능해진다는 곤궁하고 긴박한 상황이 요청하는 그 정치의 화두가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늘 상 확인할 수 있듯, 이렇게 절박한 그리움에 의해 요청되는 '적'도 야누스의 얼굴처럼 가역성, 양면성을 지닌다. 정작 의미 있는 생존을 위해서는 적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적을 설정하고 발명하고 경험해나가면서 결국 그 ‘적’의 성공적인 경험자는 삶의 활력과 의미, 어떤 ‘활동’으로 구원되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구원된 바로 그 구원의 자유의 힘에 의해서 쉽게 또 어떤 폭력과 배제자로 변형되는 이율배반을 이름이다.

 

먼저, 이 ‘적이 그리운’ 곤궁의 지점에서 쉽게 출몰하는 것은 손쉬운 대체물, 적이 참칭되는 희화적인 사태가 아닌가? 여전히 누군가는 손쉽게 스스로에게도 기만적인 편 가르기, 진영 논리의 협착된 독설가, 적대적인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 지점에서 오늘도 자신의 정체성을 구원하고자 광신적인 수준의 근본주의자가 되고, 또 극단적인 경우, 바로 시리아로의 직행을 감행하기도 한다.

 

 

이 변곡의 지점을 또한 한병철은 최근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는 미셸 우엘벡을 사례적으로 들며 이러하게 지적해 두고 있는데 역시 꽤나 문제적이고 시사적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베크는 짧은 시간 동안 연달아 겪은 죽음들이 소설 <<복종>>을 쓰게 되었다고 이야기 했다. 그는 원래 고수하던 무신론으로는 자신이 사랑했던 개와 부모의 죽음을 극복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 상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소설의 주인공 프랑수아도 어떤 구속력을 향한 동경에 이끌려 의미를 찾아 떠난다. 소설의 원래 제목은 복종이 아니라 ‘개종’이었다고 한다. 소설의 초고를 보면 서술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으로 나온다. 최종본에서 그는 타락하고 소진된 서양을 등지고 무슬림이 된다.” (한병철,위의 책,467,468.)

 

자유가 바로 폭력이 되는, 개종에서 쉽게 복종이 되는 이 곤혹스러운 이율배반이야말로 인간의 몸에 ‘등에’처럼 들러붙은 낡고도 영원성의 지위를 지닌 딜레마가 아닌가? 이 심급의 딜레마의 그림자야말로 정치를 상상하고 기획하던 정치 철학, 정치 신학자, 수많은 현자들을 무수히도 괴롭히던 괴물이 아닌가?

 

하여 한병철은 이에 관련하여 또한 다음과 같은 교과서적인 미문 답안을 제출하고 있는데 역시 이 지점에서 숙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삶의 형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파도 좌파도 아니며 어떤 폭력과 배제의 형태를 띠지 않으면서 구속성과 연결성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또 그것은 시스템이 일으킨 손상만을 손보는 치유의 형식으로의 비교秘敎를 넘어서 영성의 가능성이 펼쳐질 수 있어야 하며, 셰어링sharing을 넘어서 진정한 증여와 공유가 가능한 삶의 형식이어야 한다.”(한병철,위의 책.468.)

 

지젝의 어떤 글에 대한 반론의 목적으로 쓰여진, 워낙 짧은 글에서의 마무리라 한병철의 처방전은 원론적으로 함축적이고 추상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안이 사인인 만큼 이 짧은 문장에 만족할 수 없다.

 

먼저 ‘적’의 지위가 어느 정도 폭력과 배제의 형태 너머에 있는 성좌임은 이미 칼 슈미트도 고전적인 어투이지만 이렇게 적시해 놓고 있지 않았는가? 곧 그가 구분한 사적인 적과 공적인 적이 그것---.

 

“적이란 공적인 적만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인간의 전체, 특히 전체 국민과 관련되는 것은 모두 공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독일어는 다른 언어와 마찬가지로 사적인 ‘적’과 공적인 ‘적’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오해나 곡해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자주 인용되는 구절인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5:44,누가복음6:27)는 라틴어로는 ‘사적(私敵)을 사랑하라(diligite inimicos vestros)'이며, 그리스어로는 ‘너희들의 에히도로스 모두를 사랑하라’이고, ‘너희들의 공적(hostes)을 사랑하라’는 아니다. 즉 정치적인 적을 문제로 삼지는 않는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42,43.)

 

 

역시 슈미트의 매력은 ‘적’의 위계, 지위를 명징하게 통찰한 것에 있지 않는가?

“정치상의 적이 도덕적으로 악할 필요는 없으며, 미학적으로 추할 필요도 없다. 경제적인 경쟁자로서 등장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어쩌면 적과 거래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게 보일 수도 있다. 적이란 바로 타인, 이방인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으로 족하다”(위의 책,39.)

 

하지만 여전히 슈미트가 말하는 적은 그 좌표를 상대적으로 훨씬 위계적으로 통찰해 낸 것 외에 전반적으로는 아무래도 국가주의의 히브리스가 민낯으로 표출되기 이전의 개념으로, 배제의 문제를 충분히 극복한 것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또한 그러하게 그의 언어는 사안에 대하여 법학자의 과학주의의 멘탈로 외부 분절적인 성향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좀 더 한병철의 ‘영성적인 가능성’을 존중하는 입장이라면 적극적으로 참고해야 할 접근은, 이를테면, 플라톤의 ‘대화’편 같은 데에서 나타나는 고대 철학의 보다 통합적인 감성이 아닐까? 방대한 플라톤의 <<법률>>의 초반부, 국가 대 국가 간의 전쟁을 대비하는 태세에 관해 논한 부분에는 반갑게도 이런 대화편이 수록되어 있다.

 

 

아테네인: 어떻습니까? 마을 안의 가정(oikia) 대 가정[의 관계]에도, 그리고 개인 대 개 인[의 관계]에도 동일한 것이 여전히 타당한가요?

클레이나스: 동일한 것이 타당합니다.

아테네인: 하지만, 저 자신(hautos) 대 자기[의 관계]를 [의 관계]로 생각해야만 하나요? 아니면 이번에는 우리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요?

클레이스: ---논의(logos)를 정당하게도 그 근원(arkhe)으로 이끌어 가심으로써 선생께서는 한결 더 명확하게끔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는 모두에게 공적으로도 들이고, 사사로이도 저마다 저들 자신들에게 들이라고 방금 우리가 말 하게 된 것이 옳은 것이라는---.

---선생이시여! 이 경우에도, 저 자신을 이기는 것이 모든 이김(승리)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이며 최선의 것이지만, 저 자신에게 지는 것은 모든 것 중에서도 가 장 부끄러운 것인 동시에 최악의 것입니다. 이것들이 실은 우리 각자 안에 우리 자신을 상대로 하는 전쟁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법률>> 1권,626c-e)

 

결국 헬라철학의 통합적 사고, 적에 대한, 비대칭의 대립에 대한 더 적극적인 통합적 사고야말로 이 경우에서의 고전적 모범이 아닐까? (그래서 한나 아렌트도 그 시대, 시민권의 멘탈리티, 공공적인 공론의 공간, 그 공간의 복권을 자신의 과제로 삼지 않았는가?)

누군가가 말했듯 플라톤의 ‘대화’는 또 다른 국면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말 걸기 하는 테크네와 그 감성이 아닌가?

 

곧 플라톤에게서, 이질적이고 타자적인 ‘적’은 먼저 국가 간, 공동체 간에 대립하는 외부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문제이기 이전에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 음영처럼 붙어 존재하는 어떤 극복 대상의 총합이다. 곧 헤겔식으로 비약하면 그 적이 바로 부정성의 다른 이름으로도 포착되는 것이다. 그렇게 주체 안의, 이러한 일말의 ‘영성’적인 성격의 통합으로 한다면, 라캉, 지젝이 그토록 복원하고자 하는 대립성의 이원적 구조는 저러하게 먼저 외부의 대립적 대항으로 설정되기 이전에 주체의 안과 그 밖을 선회하는 분할선으로 기입되면서 재구성되는 것이 아닌가? 저러하게 먼저 정치가 주체의 통합적 공간 안에서 가동되는 기제로 작동 되는 것이 아닌가?

 

랑시에르가 말하고 있듯, 정치의 본질이 “사회가 사회 자체에 대해 갖는 차이를 현시하는 불일치하는 주체화 양식들에 있다”라고 한다면 먼저 정치가 내 안에 저러한 불일치가 서로 환원할 수 없는 두 개, 아니면 복수로 혼재되는 것이 통합적으로 포착되는 그 원점에서 통각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방인은 난민처럼 타자로 배제선 밖에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에게 배제선 밖의 난민이며 국경은 그러하게 이미 내 안의 분열과 분할로 이미 운명적으로 아프게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 지점에서 주체는, 다음의 슈미트의 지적처럼 바로 분열의 주체의 자리에서 바로 국경, 경계인으로 내려(올라)가며, 바로 그러한 감산의 지점에서 일말 신학적 대상자의 지위, 즉 정치의 요청인의 위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 지점에서 신학자와 정치가는 내밀하게 조우한다.)

 

“진정한 정치이론이란 모두 인간을 ‘악한 것’으로 전제하는, 즉 결코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위험하고’ 역동적인 존재로 간주한다는, 기묘하고도 많은 사람들을 확실히 불안하게 하는 확인이다. 이러한 것은 어느 정치사상가에게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좋은 세상의 선한 인간들 사이에서는 물론 평화, 안전, 만인과의 조화만이 지배한다. 여기서 성직자나 신학자는 정치학자나 정치가와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존재이다. 원죄의 부정이 사회심리학적, 개인심리학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는 트뢸치와 세이아르가 무수한 분파, 이단자, 낭만파,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의 예를 들어 지적했다. 신학적 사유와 정치적 사유의 전제 사이의 방법론적 관련은 이와 같이 명백하다.”(<<정치적인 것의 개념>>82,86.)

 

연결해서 이 지위의 뷰-포인트에서 우리는 2014년도에 국역된 기욤 르 블랑의 <<안과 밖>>을 이와 병치하여 더욱 의미 있게 통합적으로 읽을 수 있겠다.

 

“국가는 안도 밖도 아닌, 안이면서 밖인 국경에서의 삶들을 필요로 한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국민 정체성의 핵인 국가적 내재성의 환상을 이해할 수 있다.---국가는 다만 “상상의 공동체”가 아니라, 권력관계들과 국경의 활용에 의존하는 실질적인 정치적 공동체다.” (<<안과 밖>>,20,21,189.)

 

 

그렇다면 저 타자, 난민이요 이방인이기도 한 나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저 이질적인 부정성, 그 ‘적’을 어떻게 맞이하고 환대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이 질문이야말로 적실성을 갖는 핵심적인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닌가? 이 질문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에 따라서 문자 그대로 정치가 ‘치안’이 될 것인지 ‘정치적’인 것이 될 것인지 그 성격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서동진이<<변증법의 낮잠>>에서 남기고 있는 글은 또한 여기에서 의미 있게 읽힐 수 있다.

 

“부정이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왜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들이 회심이나 개종이 라고 부르는 절차와 같은 어떤 것을 감행하는 것이다.---모순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세계를 모순적으로서 바라본다는 것은 세계의 악이라든가 고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추궁하는 것이다.(<<변증법의 낮잠>>,227,228.)

 

 

결국 이러하게 적은 자신이자 타자요 재 탐색된 부정성의 이름으로도 다가 올수 있는 것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이런 이원 대립적인 경계선의 복권을 통하여 다시 정치가 활성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적의 재 포착은 앞의 <<안과 밖>>을 번역한 박영옥의 말처럼 우리를 다시 어떤 가능성의 공간속으로 인도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타자들을 자기 안에 환대하면서, 자기 자신을 타자로, 외국인으로 발견할 가능성을 겨냥”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또한, 어떤 통렬한 역전, 환대에 도달, 자신과 세계를 바꾸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국가(자신)와 외국인(이질적인 부정성)의 관계를 뒤집어서 외국인(이질적인 부정성)을 국가의 위험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국가 갱신의 조건으로 고려해야 하지 않는가?”(<<안과 밖>>,218.괄호는 많은물소리 삽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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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의 외부는 없(있)다!

-봉준호의 <설국열차>에 대한 인문학적 후기

 

 

 

 

이 영화가 던지는 사유의 논점 중의 하나는 바로 마지막 장면, 열차의 외부에 대한 기대와 상상력일 것이다. 결국 폭주하는, 특히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로는 더 이상의 의미 있는 생존과 번영이 불가능한 만큼 프레임을 아예 열차의 바깥, 제로베이스로 옮기는 것이 가장 타당한 선택안이라는 영화의 메시지를 이름이다. 이 기획이 그만큼 급진적이라는 것은 이미 봉 감독이 두 아이만 남기고 모든 탑승객,(특히 앵글로색슨계의 백인들)이 멸절되는 잔인한 참사의 설정을 통해 충분히 말해 놓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러한 극단적인 묵시론적 파국의 네러티브를 말한 사람은 봉 감독이 처음이 아니다. 멀리는 기독교를 위시한 종교들의 종말론적 묵시록들이 있었고 그리고 그러한 상징들과 환상의 범례들을 시대의 매듭마다 유사하게 성속을 끊임없이 변주, 재해석한 ‘파국의 지형’도들이 있었다. 우선 이러한 맥락에서 그 중에서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미셸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우엘벡은 역시 현 상황(작품에서는 탈-근대, 탈-권위의 세계관으로 인한 의식과 윤리의 무중력 상태에서 유실되고 황폐화되는 액체 인간---)에 대한 어떤 대안으로 아예 유전자 공학을 통해 현 인류의 바깥, 즉 새로운 인종을 창안하자는 발상까지 거론하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바깥’의 상상력은 물론 그만큼 내부가 절망적이라는 이유 있는 통찰과 해석에 상응해 있는 것이어서 그러므로 그것은 문자 그대로 거의 자기 처벌과 자기 살해의 고통과 각오 없이는 누구든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국면을 함의하고 있다고 하겠다. 영화의 끝, 희망이라는 것이 겨우 극한의 기후 속에 북극곰을 마주한 채 맨몸으로 마주선 두 아이(아담과 이브?)의 지난하고도 허망한(?)풍광이라는 설정은 바로 그러한 상상의 곤혹스러움을 정직하게 은유하는 그림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외부에 대한 벽, 문을 여는 것이 왜 그러하게 급진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모험인가? 그것은 필시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대적으로 윌포드의 프레임(자본주의)이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치력, 즉 합리성, 즉 기능성에 있을 것이다. 그 기능성의 맹위가 사실은 인간의 본성에 터한 가장 근본적으로 합치되는, 근원성을 띠는 형태라는 인식에서도 그 외부를 상상하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그를 두고 감히 합리적이라는 명예(?)의 아우라를 덧씌우는 것도 그 보수적 세계관이 사실 인간의 본성에 가장 잘 들어맞는 적실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경제적으로 때려눕힌 역사적 사실 또한 이러하게 자본주의가 인간 내면에 작동하는 욕망의 원리를 그만큼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 아닌가? 우선 우리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 사실을 이 지점에서 다시 곤혹스럽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여기에서 합리(경제)적이라는 사실이 곧 정의로운 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평자의 단서를 냉정히 존중하고서---.

 

이런 맥락을 현실적으로 존중하는 입장이라면, 사실 콘트롤 타워, 엔진을 탈취, 정복하자는 혁명의 논리나 균등을 말하는 사회주의의 논리는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듯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윤리, 즉 감성의 문제에 가깝다. 현실의 시스템을 바꾸고 생산성을 변혁 관리할 어떤 구조의 힘이라기보다는 불평등의 야만을 그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발동시키고 충족시켜 주는데 작동되는 감성에 속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윤리적 감성에 속한다는 것은 동원의 힘 외에, 관념의 힘 외에 그 이후의 시스템을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별개의 국면으로 무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증명해 주듯 재구성의 권력, 즉 경제의 기능 문제로 연결되지 않는 감성은 곧바로 권력과 경제의 진공상태를 불러오고 그 공간에서 예외없이 항시 승리하는 쪽은 지배와 권력욕에 기반한 징그러운 권력유지의 기술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작금의 유럽식 사회주의가 직면한 딜레마가 보여주는 것처럼 복지나 기회의 균등 또한 전체적으로는 경제를 만성적인 불황에 빠트릴 수가 있는 요인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혁명이나 분배가 상대적으로 감성적이라는 사실에 우리가 적극적인 이유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윌포드의 달콤한 논리에 급소를 맞은 우직한 파이터처럼 흔들리는 커티스의 동요는 사실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의 이유 있는 동요이기도 하다.

 

그에 터하여 영화가 쉽게 권력의 분배나 복지의 균등 가능성을 말해 주지 못하는 이유 또한 바로 이러한 난관을 잘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물론 이 설정은 정치공학의 임계점을 넘어서 버린 오늘날의 금융자본으로 인해 더 이상 분배로 작동되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교착상태를 은유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의 노동마저 배제하는 기계화와 모듈화의 공정으로 더욱 막강해진 자본의 공학에 더 이상 기회의 균등이나 분배 따위는 없다!)

 

사안이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시선을 약간 옮길 필요를 느낀다. 커티스로 대표되는 혁명의 진영과 윌포드로 대표되는 보수자본의 양 진영이라는 판에 박힌 고전적 설정은 서사적 풍광기 이외에 사실상 의미가 없는(길리엄과 윌포드의 공모관계는 사실 양진영이 서로의 적대로 인해 유지되는 필요충족율의 역설적 양면을 은유한 것으로 전혀 반전의 설정이 될 수 없다. 하여 그 은밀한 적대적 공모는 권력탈취 후의 이를테면 커티스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도 결국은 예외가 될 수 없는 동어반복의 문제다.) 것으로 그 모두를 정신분석적 권력의 시선,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보는 관점을 이름이다. 우리가 정의와 윤리를 사유할 때에도 본성을 고려할 때 그만큼 더 유리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입장에 있는 관객이라면 더욱 이 관점을 좋아할 것이다.

 

그쯤 해두고 이제 예의 그 열차의 ‘외부’를 상상하는 마지막 장면으로 가보자. 앵글로 색슨계의 백인으로 상징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문명이 파괴되고 멸절된 자리---새로운 인류의 희망인 비 백인계의 아담과 이브가 살아남았다. 하지만 열차의 외부에 서있는 그 가능성이 그만큼 희망적일까? 그냥 간단히 말해 이런 맥락에서 사안이 그렇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불리하도록 황망하고 어려운 자연과 생존조건, 저 쉽지 않은 환경과 싸워 생존을 보장받으려면 인류는 더더욱 그것을 개선시키고 변개시킬 권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권력형 문명을 추구하지 않을까? (아니면 문명의 위계를 버리고 수렵문화로 겨우 생존을 유지하는 원시 생태계의 수준에서 만족하는 편을 택하는 방법도 있겠다.)

 

그렇다고 한다면 단순히 인종과 공간만 바뀌는 물리적 변환이 추문적이라면, 이 지점에서 상상할 수 있는 외부는 이를테면 슬라보예 지젝같은 철학자가 말하는 또 다른 성격의 ‘외부’가 아닐까? 저 ‘외부’가 지리적 공간의 외부가 아니라 정신분석적 외부의 공간을 이르는 그 ‘외부’를 이름이다. 오늘날 라캉을 호출하며 인간의 무의식 내부에 존재하는 결여와 근원적인 구멍의 결핍을 거론하는 탈-해체론의 철학자들의 고민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면 그들이 열어젖히는 외부를 숙고해 보는 것은 또 어떨까?  설국열차의 물리적 외부와는 달리 정신분석이 지시하는 외부는 인간의 마음의 변환을 기획하는 저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좀 다를 수 있다. 곧 똑같이 권력관계의 자장에서 벗어난 지점, 새로운 권력이 창출되고 새로운 욕망이 발명되는 혁명적 지점을 호출하되 후자의 외부는 보다 정신이나 내면의 재건축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 좌표가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냥 간단히 말해 오늘날 지젝은 인간이 의미 있게 계속 생존하려면 누구나가 인민이(외부) 되어야 할 것을 주문하고 있지 않는가? 그 인민의 자리로서, 단순한 사회과학적 담론, 계급 위계로서의 인민이 아니라 경제적 위계나 권력의 위계와는 상관없이 누구나가, 내가 결국은 치명적인 결여와 곤궁의 빈 구멍을 지닌 한 연약한 인간이라는 자각, 그 외부, 자신안의 ‘외부’로 내려간 인민이 되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내가 아무것도 아닌, 무의 존재를 넘어서 ‘없음’보다 더 없는 마이너스의 자각을 통해 의미 있는 삶의 욕망을 발생시키고 그 부정의 낮음의 보편성으로 해서 권력관계의 위계를 넘어설 수 있는 공감과 연대로 재구성되는---.

 

이러한 보편의 공간이 존재할 수 있다면, 이러한 내적 혁명으로서의 공간은 그야말로 권력이되 그 권력의 힘이 더 이상 지배와 위계로 작동되지 않는 의미 있는 외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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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신학적 언어의 복권은 필연적인 흐름으로 보인다. 철학을 말하고 윤리를 기입하기 이전에 욕망이 걸리지 않는, 다시 말해 정치가 발생할 수 없는 후기 근대의 타자의 부재, 부유하는‘액체’형 무정치 공간이 이제 다시 신학을 욕망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필연으로의 회귀는  철학이 자초한 것이며 하여 손을 내민 쪽 역시 철학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 미셸 앙리 스스로가 발설하고 있듯 이제 “철학과 신학은 경쟁자들이 아니”(471)라 더 적극적으로 성적 관계 수준으로 올라가는 공모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무엇의 계기를 산출하게 하는 폭력적 시원을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오늘날의 철학에 비해 신학은 특성상 항구적으로 결정론적인 전제, 뚜렷한 고체의 경계면을 가지고 있다. 전제가 없는 사유는 그 무엇을 느끼고 설정할 수 있는 준거점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지만 탄력을 기축할 수 있는 신학적 사고는 그 고체의 근거 면에 반사되어 화학적인 반응이나 감각을 발생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윤리라는 것도 결국은 바로 이 정치의 가능성, 활성화 뒤에나 가능한, 권력 이후의 게임이라고 믿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오늘날의 이 ‘정치적인 것의 귀환’현상을 반길 것이다.   


그렇다면 앙리의 신학적 철학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그것은 먼저 내가 여기 존재한다고 하는 삶의 수동성을 현상학적으로 느끼고 파악하는 그 ‘살’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바디우 식의 표현으로 하자면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수동적 양태의 ‘도래’요 발생된 ‘사건’이 아닌가?  “최초의-지성체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낳는 절대적인 삶의 내적 운동에 속하며 자기-생성의 과정이 완성되는 방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삶은 자신의 것이며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는 삶이라는 조건에서 자기 안에 도래하면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낳는다.”(43)


키에르케고르를 충실히 안으로 기대어 앙리는 먼저 자신을 현상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무구에 대한 애초의 정념적인 불안으로 이해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무중력의 무화 상태에서 인간은 최초의 불안을 경험하게 되고 그 불안은 자신이 구체적으로 자신의 물질적 신체에 제한되어 있다고 하는 ‘애매한’ 종합에서 그리고 남녀의 신체적 성차에서 더욱 실재적으로 심화된다. 현상적으로 주어져 느끼는 이 필연적인 심리적 곤궁과 결핍의 불안이야말로 존재에 앞서는 외설적이고 초월적인 것으로서 피할 수 없는 삶의 전제라는 것이 앙리 현상학의 중심 정초 논제다.


왜 이것을 앙리는 중심 전제로 정초하는가? 이 초월론적 경험을 시원적 전제로 해서 인간은 비로소 그 밤의 부정적 힘을 가능성으로 자각하며 스스로의 권력을 발생,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이라고 하는 이 시원적 상태가 인식 이전에 현존한다는 기본 전제야말로 자신의 의식을 구조화하고 그 불안이 모순과 불일치의 애매한 불안인 한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용출시키는 계기로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기축점으로서 앙리 철학에서는 기본 코기토인 것이다. 이 전제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증여된 여기-있음을 불안과 모순, 결핍, 즉 ‘살’로 느끼며 그와 함께 스스로의 가능성의 계기를 산출하고 심화시켜 나아간다.


이 증여되어 수동적으로 느끼는 심리적 물질, 이것이 살이며 이 피할 수 없는 현상학적 토대는 그래서 바로 앙리에게서는 신학으로 변환되는 회전점으로 전유된다. 이 부정할 수도 변할 수도 없는 이 물질적 전제야말로 모든 사유가 개시되는 흔들 수 없는 계기라는 말이다. 결정론적인 신학의 기능을 떠 앉은 이 고체적 공간의 계기에서 비로소 인간은 그 삶에 대한 말하기가 가능해질 것이며 욕망이 발생하는 고유의 화학작용이 점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앙리는 이 전제, 밤의 기축점으로 해서 정작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사실상의 언어, 즉 욕망의 유능한 가능성을 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를 따라 불안을 느끼는 시원적 경험에서 인간이라면 예외자 배제자가 존재할 수 없는 만큼 그 유능한 욕망이 또한 모든 사람, 어느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가능할 것이라는 비밀의 문을 개방하고자 한다. 키에르케고르가 가슴 설레며 말했듯 그 배제자 없는 불안이야말로 배제자 없는 ‘보편’의 마법이 걸리는 최고의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불안을 올바르게 배운 사람은 최고의 것을 배운 사람이다”(임춘갑역, <불안의 개념>,309.)


“---각자를, 가장 미천한 가장 무의미한 각자를 그 자신의 것인 환원 불가능한 단독적인 개인성 안에서, 본질적으로 여기 혹은 저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발견되는 초월론적인 자기의 조건 안에서 유지하나, 이 어딘가 quelque partr가 극복되어야 하거나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될 수 있거나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만이 인간을 무에서 건져낸다.”(460,강조는 저자)


특히 이 키에르케고르의 자산을 더욱 내밀화한 가능성의 보편은 현상학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함께 미셸 앙리가 왜 유럽에서는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는 철학자인지 알게 해 주는 지점으로 나는 읽었다. 하여간 나는 2000년도에 나온 이 의미 있는 철학서가 왜 이제야 번역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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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품을 분석하면 그것이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헛소리로 가득 차 있는 기묘한 물건”(지젝,<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국역본 338쪽에서 재인용)이라는 말을 마르크스가 한 적이 있지만 그러한 신학적 변덕들이 어디 상품, 물신을 둘러싼 영역 뿐 이겠는가? 아니 인간은 아예 기본적으로 그 자신의 유한성으로 인해 내부와 외부 경험하는 것들의 모든 위계에서 사실상 전부 신학적 의미와 함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근 무심코 읽은 야스퍼스의 <기술시대의 의사>를 나는 이러한 의미의 연장에서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인상적으로 흥미를 경험한 부분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더 나아가 환자는 본래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고자 한다. 의사의 권위란 환자에게는 자신의 숙고나 책임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소망하는 고정점이다.---환자는---알고자 하지 않는다.---그가 욕구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안정이다.

환자로서의 인간은 때로 이성적이지 않고 비이성적이거나 반이성적이기 때문에, 이상적인 의료관계는 어쩔 수 없이 전도될 수밖에 없다.”(야스퍼스,<기술시대의 의사>,김정현역,책세상,2010,13쪽)

 

 

 

 

명백히 우리는 저 문장을 환자와 의사라는 특수한 의료행위의 국면을 넘어 인간 실존의 조건을 지시하는 훨씬 일반화된 범주로 물론 확대하여 읽을 수 있다. 오늘날 비교적 대중적으로 읽히고 있는 신학자 알리스트 맥그라스도 이런 문장을 쓰고 있지 않은가?

“타락된 죄인의 본성에는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을 믿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는 듯하다.---사람들은 분명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확고하고 세련되며 권위 있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게 된다.”(맥그라스,<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신상길 정성욱 역,한국장로교출판사,2002,172,176쪽)

 

유한과 결여의 제한과 한계에 대항한 반사적 비상구, 이른바 대상a와 같은 애착과 원환으로도 절대와 완전에 대한 이상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 사물의 내 외면의 이상을 채울 능력의 부재에 대한 결여를 손쉽게 대체하고 보상할 대상물을 인간은 저러한 방식으로 생래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란 저러하게 불안한 조건에서의 방식이므로 인간은 사실 모든 인식과 경험에서 사물과 대상들을 그편에서 일정부분 이상 왜곡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허구적으로 굴절시켜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이러한 사태에서 인간 존재에서 외부의 위계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이며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주체의 결여와 그에 대한 외부의 어떤 우위를 말하는 라캉에 대해서도 우리는 얼마만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동의할 수 있을까를 기본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한 편, 들뢰즈는 <들뢰즈의 니체>에서 또 이런 문장으로 니체를 해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이 죽은 후 그는 자기 자신을 짊어지며 ‘인간적인’가치들이라는 짐을 지고 나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받아들인다고 자부한다. 그때부터 그는 ‘더 높은 인간들’의 새로운 신이다.”(들뢰즈,<들뢰즈의 니체>,박찬국 역,철학과 현실사,68쪽)

 

 

 

 

오늘날 신의 부재를 말하는 의미는 일찍 니체가 간파했듯이 단순한 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만 하면 되는 그러한 조악하고 손쉬운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생각보다 훨씬 기본적으로 신학적인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신이라고 하는 이름의 기표를 부정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사태에 엉기고 얽힌 보다 근본적인 절차와 문제로 인식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마치 덩굴식물들처럼 그 무엇의 지탱물을 통해야만 의식이 구조화될 수 있는 유한의 존재인 인간이 신이 살해됨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무한, 신의 지위를 책임지고 떠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의 죽음으로 저절로 신적 존재로 진보하거나 격상된 것이 아닌 만큼 저절로 그 스스로는 필연적으로 니체가 은유하고자 했던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낙타의 운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는가? 유한이 감당할 수 없는 무한을 감당해야만 하는 부담과 억압, 그 역할극이라도 떠안아야만 하는 공허와 무력감 ---이전에는 없던 황폐한 반복, 우울증은 어떤 문학평론가가 재치 있게 말했듯 이러하게 신이 죽고 인간이 우주의 중심으로 등극함으로 부터 본격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2.

이 지점에서, 신의 죽음이후 새로운 신이 된(신의 역할극을 떠안게 된) 인간에게 절박하게 필요해진 것은 그렇다면 이 주체의 허구와 부담, 무거운 짐을 해소하고 줄여 줄 새로운 외부의 발명이다. 니체 이후 신은 이미 죽고 없으므로 그 신의 지위가 기능하던 또 다른 방식의 외부가 다시 필연적으로 필요해진 것이다. 신이라는 지위와 위계에 의해 유지, 작동되던 내적 기제를 다시 활성화 할 신학적 기획이 다시 필요해진 것이다.

 

오늘날 탈-해체론의 진영에서 유물론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다시 말하는 일말의 저의는 무엇인가? 저마다 새로운 ‘유물론적 은총론’을 기획하고자 하는 저의들이야말로 이런 국면에서 본다면 또 다른 노골적인 신학적 요구에 대한 이미 예정된 응답들이 아닌가?

 

 

 

 

물론 이 변덕(?)의 지점에서 기독교의 유신론 신학과 가장 기능적으로 유사한 형태의 기획은 바디우의 은총론일 것이다. 존재 자체가 인식론과 이성의 위계를 넘어서는 반 철학, ‘사건’의 도래에 의존해야만 설명이 되는 반전과 충실의 존재를 그는 말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그 은총이 역동적으로 생성되고 작동될 수 있어서 가장 기독교에 가까운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사실상 ‘사건’은 바로 신과 그리스도의 기능과 위계를 지닌다.

 

이에 비한다면 지젝은 좀 남다르게 읽힌다. 그의 외부는 이미 정신분석적으로 결여라고 하는 부정성으로 내속 메커니즘 안에 장치되어 있다. 결여라고 하는 잔여, 합리적인 이성에 포획되거나 포착될 수 없는 원시적 추문과 잉여가 하향 내속 초월 그 자체로 이미 들러붙어 있어서 그에 대한 변증법적 반사운동으로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아닌 주인의 방식으로서 주체를 역동화 한다. 그에게서 삶은 또 다르게 주인의 책임이 변증법적 운동에 전가되어 다이내믹해 지지만 한 편, 칸트가 말하는 숭고의 감정은 잘 경험되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지젝의 역동은 내부에서 발화하고 폭발하는 메커니즘에 의한 운동으로 상대적으로 빤히 들여다보이고 읽힌다. 하여 감성적인 낭만이나 감격, 바디우적인 탈구와 위트, 고전적 감성의 우발적 찬탄은 그만큼 기대하기 힘들다. 그는 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훨씬 철저한 유물론자이며 그러한 논리적 귀결로도 그는 과학적이고 절차적이다. 대신 그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내부의 균열을 자산으로 한 변증법적 작용을 내면에서 촉발시킨다.

 

3.

이와는 한 편, 이와 관련해 굳이 같이 언급하자면 니체는 신의 이름을 맹렬히 부정했지만 의미 생성이 충분한 위계의 권위와 상관관계를 지닌다는 것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통찰을 처음부터 잘 보여 주었다. 그에게는 주인이 부정되지만 한 편으로 주인이 없다면 자유도 없다는 모순적 이율배반적인 국면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주인도 없을뿐더러 자유도 얻지 못하였다. 나는 지금 추억이라는 기쁨 이외에는 한 순간도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니체,<짜라투스트라--->,정강석역,삼성판세계사상전집21,1982,38쪽)

 

또한 그에게는 신(권위)을 설정하지 않는 의식의 평면지대에서는 그 무엇을 걸만한 지렛대의 부재의 사태와 다름 아니어서 더 이상 인간이 동경도 꿈도 어떤 의미 있는 ‘충동’의 생성을 경험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고 본다.

“욕될지어다! 이제는 인간이 인간 너머로 동경의 화살을 쏠 수가 없을뿐더러 그의 활줄이 울리지 않을 때가 온다.”(위의 책,41쪽)

 

 

 

 

그 역시 사실상 가장 신학적인 자신의 의식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지 않는가? 그를 읽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내면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인에 대한 기표와 기호만 히스테리컬하게 모순적으로 다를 뿐 그는 무신론 영역에서의 영낙 없는 바울이다. 결국 그는 의식의 배열과 위계를 경유, 다소 이를테면 이교적인 지혜를, 이율배반적인 인식, 인간의 내적 모순을 관통, 우발성과 필연성의 긍정을 설정,‘살아 있는 것을 풀어주기’생성의 음악과 리듬을 따라‘자유롭게 놓아주기’와 같은 ‘지혜’의 방식으로 주체의 짐을 경쾌하게 해제시키고 있지만 어쨌든 그 또한 신학적 변덕의 범주에서 절대로 달아날 수 없었던 것이다.

 

4.

결국 인간의 주체는 훨씬 모순적이고 무능하다고 읽어야 할까. 과거 이성의 권위로 신앙의 히브리스를 맹렬하게 해명, 결국 신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처단하는 해프닝을 벌였지만 이성 또한 그에 못지않은 히브리스를 이미 내장하고 있었다는 섬뜩한 사실을 부메랑으로 체득된 것을 보면 신앙이든 이성이든 사실상 그 모든 범주가 애초에 신학적이던 인간 앞에서는 구분의 의미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 모든 것들이 사실상 인간의 한계와 그 위험성을 지시, 소중하게 직면하게 해주는 것으로 인간 스스로의 본연의 사태의 본질적 참상의 얼굴이 아니었던가? 하여 이러한 사태들은 결국 우리 인간의 존재에 대해 다시 숙고해 볼 것을 요청하며 인간이 불완전한 조건에 있는 한 어떤 방식이든 우리로 하여금 다시 신학적 작업을 욕망하도록 강요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국면에서 역시 최근 출간된 재독 한인 철학자 한병철의 책 <권력이란 무엇인가>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읽힌다.(이 책은 이 고원의 김남시 님이 번역했다)

이 책에서 비로소 우리는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서 불안한 인간의 내외부에서 권력에 대한 오해의 맹목적 불신의 지대에서 벗어나 주체에게 올바른 권력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가가 해명되는 훨씬 진전된 통찰과 조우할 수 있다.

 

 

 

 

 

곧 권력은 인간을 억압하는 역기능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유와 역학적으로 깊은 상관관계를 지닌다는, 니체를 관통하는 통찰이다.

“오히려 권력은 그 속에서 물체 스스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장 場,Feld처럼 작용한다”

(한병철,<권력이란 무엇인가>,김남시 역,문학과 지성사,2011,18쪽)

사실 저자의 이러한 통찰은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오늘날 프로이트와 라캉을 어느 정도라도 용인한다면 인간의 내,외면에는 온갖 다양한 기제와 힘들이 혼재된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화학 정글 지대인데 그 혼재를 일정한 의미와 욕구의 공간으로 재편, 자유를 경험하려면 당연히 일종의 신학적 작업, 내적 의식의 권력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간 반가운 책이 아닐 수 없다.

 

5.

어쨌든 오늘날 우리는 정신분석, 특히 라캉, 지젝을 필두로 한 슬로베니아 패밀리의 도움으로 인간의 한계와 불완전성에 대한 이해를 상대적으로 더 잘 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또한 그에 터해 인간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일정부분 힘과 권위를 필요로 하는 신학적인 존재인가에 대한 보다 균형적인 이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 그 편에서 세공되는 인간 자체의 결함과 결여에 대한 이해에서도 그것이 반드시 과거처럼 인간으로서의 어떤 굴종을 용인하고 반-휴머니즘적 사실을 폭력적으로 인정해야만 하는 어떤 혐오나 굴종의 일 만이 아니라는 사실에도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인간의 결함과 위험한 한계의 결여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주체의 생성과 건축의 길을 탄력적으로 열게 하고 역설적으로 무한한 자유와 도약으로 직진하게 하는 충동의 기제, 소중한 발원지의 확보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러한 이해와 인식을 기반으로 다시 우리는 외부의 권위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 그리고 올바른 힘과 권위가 필요하다면 그 권능을 어떻게 유능하게 경험하고 사용할 것인가? 라고 하는 깊은 신학적 질문들을 다시 반복할 필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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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루이 랑베르>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그리고 그에 연동되어, 전에 읽었던 아감벤의 <장치란 무엇인가?> <세속화 예찬>을 다시 찬찬히 읽었다.   

 

 



 

 

먼저 발자크와 발저의 소설은 학교생활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데에 흥미를 일으킨다. 푸코나 아감벤이 권력과 접속되어 있는 광의의‘장치’를 규정하며 들고 있는 예시들의 주요 얼굴중의 하나인 바로 그 학교를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항시 이 학교는 문제적 사유를 제기하는 쪽에서의 손쉬운 지시물인가? 우선 나는 좀 길지만 아감벤이 규정하는 장치의 개념을 여기에 옮겨본다. 

  



 

 

 

 

 

 

 

 

 

 

 

 

“푸코가 말하는 장치는 이미 아주 넓은 부류인데 이것을 더 일반화해 나는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지도, 규정, 차단, 주조, 제어, 보장하는 능력을 지닌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장치라고 부를 것이다. 따라서 감옥, 정신병원, 판옵티콘, 학교, 고해, 공장, 규율, 법적 조치 등과 같이 권력과 명백히 접속되어 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인터넷서핑〕, 컴퓨터, 휴대전화, 등도, 그리고(왜 아니겠는가마는) 언어 자체도 권력과 접속되어 있다. 언어는 가장 오래된 장치인지도 모른다. 수천 년도 전에 영장류는(어떤 결과가 될 것인지는 아마 알지 못한 채로) 무심코 언어라는 장치에 포획됐다.”(<장치란 무엇인가?>,양창렬역, 33쪽.)  

물론 아감벤의 정의는 역시 또 하나의 구별되는 그 부분에 대한 규정을 넘어 질문 그 자체를 지향한다. 완벽할 수 없는 그 질문에서야말로 오늘날 특히 중요해진 장치에 대한 숙고를 수행할 수 있으리라. 이 장치 속에 포로된, 아니 장치 그 자체인 학교의 매트릭스 안에서 사람은 어떻게 길들여지고 어떻게 자신의 주체를 변전해 갈 것인가? 계속되는 아감벤의 말처럼 오늘날 우리가 이 “장치들과 맞대결할 때 채택해야 할 전략이 단순할 수 없”을 것임에 우선 동의해 놓고서---

<루이 랑베르>에서 발자크는 역시 작품에서 자신의 대리인인 학생, 랑베르를 내세워 장치를 장치로써 맞닥뜨리지 않는다. 장치로서의 학교, 그것도 엄격한 구획과 규율의 기숙학교 생활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개념의 위격과 체계를 범주로 주체와 외면이 손쉽게 구획된 객관적이고 서사적 관점이 아니라 더 깊은 내속으로 들어가 그 의식의 흐름들을 오히려 위주로 두는 입장에서 사건들을 진술하는 편을 택한다. 곧 자기 고백적 방식이다. 이러한 주체 중심의 안의 형식으로서의 전개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그리고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도 마찬가지다. 이미 장치로서의 안이 아닌 장치에 포획되기 이전의 순수 존재로서의 자기 인식에 의식의 근거를 두는 것으로 담화를 발전시킨다. 그것은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장면들처럼 의례적인 공공적 시민들, 국가 사회적 몸짓들을 저만치 메인거리에 두고 오히려 그러한 메인사태를 배경으로 삼아 뒷골목에서 발화되고 있는 흥미진진한 유령, 좀비, 마술, 마법들의 이야기를 화면의 중심으로 근거지우는, 이를테면 그러한 역전된 그림을 연상시킨다.  

“형벌을 받는 도중에 미소 짓는 순교자처럼 그는 자신의 사유가 펼쳐지는 하늘로 피신했다. 아마도 이러한 내적인 삶이 그 자신이 굳게 믿는 신비의 세계를 보게 했으리라”(<루이 랑베르>, 송기정역,44쪽)  


“사유의 본질 탐구에 몰두했던 그는 학교 수업을 게을리 했고 선생님들이 내준 숙제를 경멸했다”(위의 책,49쪽)

흔히 하는 말로 제도권적인 사회, 체계로는 담을 수 없는 생각을 하고 그 장치로서 측정할 수 없는 정신세계, 사유의 진전을 일삼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날것으로 묘사하고 발전시키는 영역을 창조하고 개척한다는 의미에서의 자기 고백적 시점을 이름이다. 이들의 찬탄스러운 내적 도발에 비한다면 장치들은 얼마나 왜소하고 또 남루한 얼굴들인가?  

 



 

 

 

 

 

 

 

 

 

 

 

하여 개인이란 무엇인가? “개인에 대한 탐구가 바로 국가, 사회에 대한 탐구가 아니겠는가?”책의 표지 장식용 문구처럼 발자크의 개인은 훨씬 블랙홀 처럼 신비하고 거대한 국면을 갖는다. 역시 그 개인(인간)의 얼굴에 휘감겨 있는 그 무엇의 아우라에 대한 가장 가까운 이름을 연상시키자면, 이를테면 아감벤이 <세속화 예찬>에서 흥미롭게 명명한 ‘게니우스(genius)’쯤 될까? 나는 얼른 다시 아감벤의 책들을 펴 그가 새롭게 규정하고 창조한(?) 인간을 재유추해 보는 것으로 랑베르를 읽는다.

“그러나 이 가장 내밀하고 인격적인 신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비인격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넘어서고 초과하는 것의 화신이다.---게니우스〔라는 단어에〕내포된 인간의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아’이자 개인적 의식일 뿐만 아니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비인격적, 전개체적(preindividuale) 요소가 늘 함께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뜻이다.---게니우스의 이 멀리할 수 없는 현전은 우리가 실체적인 동일성에 갇히는 것을 막으며, 우리 자신 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자아의 자만을 산산이 깨뜨려버린다.---비의식이라는 지대의 문턱에서 자아는 자신의 특성을 내려놓고 감동해야 한다. 정념은 우리와 게니우스 사이에 뻗어 있는 줄타기용 줄로, 우리의 곡예하는 삶은 그 위를 걷고 있다. 심지어 외부 세계에 대해 우리가 놀라기 전에 우리를 경탄하고 놀라게 만드는 것은 영원히 미성숙하고 무한히 청춘인 어떤 부분, 개체화의 문턱에서마다 머뭇거리는 어떤 부분이 우리내부에 현전한다는 사실이다.”(<세속화 예찬>,12-19쪽)                 

“게니우스는 결코 자아라는 형식을 띨 수 없으며, 하물며 저자라는 형식을 띨 수도 없다. 게니우스를 전유하려는 시도, 게니우스로 하여금 게니우스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하게끔 강제하려는 자아 혹은 인격적 요소의 시도는 모두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위의 책,16쪽.)           

 

 


 

 

 

 

 

 

 

 

 

 

 

그리고 흥미를 주는 아감벤의 계속되는 문장 역시 인상적이다.

“이 때문에 게니우스와의 마주침은 두렵다. 자아와 게니우스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는 삶은 시적이라지만, 게니우스가 모든 면에서 우리를 초과하고 넘어설 때 생겨나는 느낌은 공황상태이다. 우리 자신이 견딜 수 있다고 믿는 것보다 무한히 거대한 그 무엇인가가 우리를 엄습해 올 때의 공황상태, 이 때문에 대개의 인간들은 비인격적인 자신의 일부 앞에서 공포로 뒷걸음질 치거나, 위선자처럼 그것에 사소한 위상만을 부여하려고 한다.”(위의 책,17쪽)

멋진 글이 아닐 수 없다. 루이 랑베르의 내면에 대해 아감벤의 이러한 해명보다 더 좋은 해설을 접해 보기는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장치를 넘어서 생성되고 분출되는 더 큰 잉여와 잔여, 그 앞에서 종종 사람들은 공포와 고착, 퇴행으로 우회하거나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서 보는 것처럼 그 초과를, 그 알 수 없는 아우라에 대하여 심지어 신비적으로 숭배하게 되는 기괴한 태도까지 유발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작품들에서 일련적으로 연계되는 병리적인 결과들이 얼른 떠오른다. 먼저 ,<루이 랑베르>의 랑베르는 결국 작품 속에서 학교를 떠나 정신병원으로 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고 <벤야멘타 하인학교>에서는 저자 자신이 역시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된다.(그의 정신 병력은 지금도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다고 하지만) 또한 도스토옙스키에게서 역시 우리는 평생에 걸친 그의 사적으로 일말의 병리적 내면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아니 정상과 병리, 장치와 그것의 내,외부의 선을 분절하는 사유형태, 이유를 다시 사유해야 하는 지점에서 그 천재들의 '병리'들을 다시 재판단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편, 이렇게 본다면 발자크는 랑베르에서 비정상적인 극한까지 발전한 병리적 국면에서도 그 절대 극점에 대해 부정하지 않고 그 병리에서 기괴하게도 랑베르의 창조적인 천재성을 보존하는 혼재로 여지를 남겨 두고 있는데--- 그 역시 어쨌든 게니우스가 극단적으로 충돌시킬 수 있는, 그 경계의 지점, 창조와 병리의 위태한 경계선을 상징적으로 지시해 주는 것으로 읽힌다.

어쨌든 문학평론가 정여울씨가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관련된 어떤 글에서 말했듯“인간은 결코 이성의 총합에 그치지 않는”것인가? “의식만큼이나 무의식이, 이성만큼이나 욕망이, 논리만큼이나 불합리가 인간을 움직이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식적인 의혹과 질문으로 랑베르, 그리고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주인공 야콥 폰 군텐,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를 모두 추억해둔다.   

 

 


 

물론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 <루이 랑베르>에 이어 같이 읽은 발자크의 <나귀가죽>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다른 정리가 필요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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