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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평점 :
움베르토 에코의 에세이들 중에서 ‘적을 만들다’라는 제목의 글은 여전히 평범한 풍모의 문체들이다. 하지만 그 평범의 편안함 속에서도 역시 그를 읽는 재미는 조금도 반감되지 않는데,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그 에세이의 도입 부분이다.
언젠가 에코가 뉴욕에서 택시를 탔는데 파키스탄 출신의 운전기사가 이탈리아인임을 알아보고 뜬금없이 묻더란다.
“이탈리아의 적은 누구냐?”고.
“적이라니? 이탈리아에는 적이 없다. 우리의 마지막 전쟁은 반세기 훨씬 이전에 일어났고, 더욱이 하나의 적과 전쟁을 시작해서 다른 적과 전쟁을 마쳤다. 황당스럽게 적은 무슨 적이냐?”
시덥지 않은 말투로 대꾸하고는 호텔에 도착한 에코,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고 한다.
“지난 60년간 진정한 적들을 두지 않았던 것이야말로 이탈리아가 지닌 불행들 중 하나가 아닌가? 이탈리아의 통일은 오스트리아가, 다시 말해 시인 조반니 베르케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락부락하고 불쾌한 알레마니족”인 오스트리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무솔리니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불완전한 승리가, 도갈리 전투와 아두와 전투에서 에티오피아에게 당한 굴욕이, 그리고 유대인 금권 정치가 이탈리아에 부당한 제재를 가했다고 주장했고 이들에 대한 복수를 부추기면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글은 계속된다.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적을 만들다>>,12,13쪽)
무언가와 싸워야만 되는, 싸워야만 하는 욕망의 좌파는 특히 마땅하게 존재해야만 하는 적을 구축하고 그 기축을 중심으로 원주율처럼 선회하며 ‘정치’를 기획한다. 아니, 그에 붙은 ‘정치’란 것, 개념 자체가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바꾸고 지키고 유지하고 그 무엇으로부터 승격시켜 나간다는 대립적 구성력, 힘을 내용의 과정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무엇에 대하여 상응하거나 대응하여 발생시킨 욕망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만일 적들이 없다면 정치란 단어, 무수한 욕망을 투영하고 실어 나르는 그 매혹적인 로망으로서의 기표, 그 자체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여 최근 번역 출간된 <<철학과 사건>>에서 알랭 바디우의 이런 진술을 읽어볼 수 있는 것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정치는 언제나 모순의 성격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실험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상속받은 정치적 전통 속에서 중요한 점은 적들ennemis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반대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들이 있습니다.”(13,14.)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글, ‘적에 대한 그리움’ 역시 이런 맥락에서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가 있다.
“적이란 무엇인가? 적은 칼 슈미트에게 사회적인 범주가 아니라 실존적인 범주이다. 슈미트는 적이란 범주에 ”존재의 합당한 기원성“을 부여한다. 나의 적이 내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규정한다. 적은 확고한 정체성을 만들어 준다. 적은 형상으로 나타난 우리 자신의 문제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나 자신의 척도와 나 자신의 한계와 나 자신의 형상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 적과 투쟁적으로 씨름할 수밖에 없다.”” (<<문학과 사회>>,2015 여름호,466,467.)
칼 슈미트는 과연 인용구의 해석처럼 실존적인 범주로서만 적을 말했을까? 그에게 그 혐의 없는 뉘앙스로만 읽히는 적을 기술했을까? 더 찬찬이 숙고해 볼 일이지만 어쨌든 그 슈미트도 적이 없는 유실인간에 대해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통해 이런 문장을 쏟아낸다.
“어떤 국민이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서 자신을 유지할 힘이나 의사를 잃는다고 해서 이 세계에서 정치적인 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약한 국민만이 사라질 뿐이다.” (70.)
약한 국민, 정치를 상실한---.아닌게 아니라 오늘 역사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수여된 최대의 화두는 바로 이 정치를 욕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이 정치가 작동되지 않는 정치의 실종 사태가 아닌가? 권력의 실종이 아닌가? 역사 이후의 공간이라는 것은 결국은 이러하게 연체동물들만이 부유하는 ‘액체’공간으로의 변이가 아닌가?
하여 한병철은 위의 글에서 이 문제를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유주의에서 적은 사라진다. 적 대신에 ”경쟁자“가 등장하고 이는 정체성을 확립시켜줄 수 없다.---전 지구적 신자유주의는 점점 더 많은 안전성과 구속력을 해체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어떤 일자리도 안정적이지 않다.”(문학과 사회,2015.여름호.467.)
바디우 또한 <<철학과 사건>>에서 같은 문제를 이렇게 거론하고 있다.
“난점은 오늘날 이 적이라는 문제가 절대적으로 확실치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확실치 않습니다. 우선 세계적인 수준에서 볼 때,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는 매우 명확한 객관적 틀이었던 어떤 이원성을 종결시켰습니다.---다음으로 국가의 내부에서 볼 때, 계급이라는 여건은 우리의 사회가 중간계급(중산층)이 계속 확장되는 사회라는 생각을 위하여 제거됩니다. 중간계급이 민주주의적 정치의 진정한 버팀목이라는 생각이 도처에서 부과됩니다. 말하자면, 거대한 중간계급이 있고, 그 주변에---매우 부유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소집단이,---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의 매우 가난하고, 심하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14.)
결국 오늘의 딜레마는 이러하게 적이 사라짐으로 적이 모호해짐으로 어떤 ‘이원성’의 변증법적 분할이 더 이상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가? ‘역사 이후’의 공간, 자신의 ‘역사적’ 장소가 없는 무 장소의 문제가 아닌가? 적이 안개 속에서 산포되고 증발됨으로써 그로서 근대 이전의 로망이 걸리지 않는 무정치의 교착상태가 아닌가? 그럼으로써 적으로 인해 포착되고 발화되던 내부의 열정과 ‘행동’을 더 이상 의미 있게 설명할 수 없는 사태가 아닌가? 결국 이러한 무정치의, 정치가 작동되지 않는 사태는 그 공회전으로 말미암아 현대인으로 하여금 현저하게 “행동역량의 감소”를 초래했고 그 역량의 축소는 또한 현저하게 “존재하기 위한 노력의 감소”로 발전하게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가장 우려할만한 반-문명적 참상이 아닌가?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어떤 보편의 문맥으로 기술한 다음의 말은 결국 순수 생물학적인 국면에서도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욕구와 실존적 상황이 그들에게 요청하는 지능을 개발한다. 욕구가 멈추는 곳에 지능은 쉰다.”
그렇다면 당연히 오늘날의 가장 큰 화두는 당연히 이 정치의 발명, 다시 욕구를 발화시키고 증폭시켜낼 수 있는 적의 발명이 아닌가? 없는 적이라도 만들어내야만 더 이상의 의미 있는 생존이 가능해진다는 곤궁하고 긴박한 상황이 요청하는 그 정치의 화두가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늘 상 확인할 수 있듯, 이렇게 절박한 그리움에 의해 요청되는 '적'도 야누스의 얼굴처럼 가역성, 양면성을 지닌다. 정작 의미 있는 생존을 위해서는 적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적을 설정하고 발명하고 경험해나가면서 결국 그 ‘적’의 성공적인 경험자는 삶의 활력과 의미, 어떤 ‘활동’으로 구원되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구원된 바로 그 구원의 자유의 힘에 의해서 쉽게 또 어떤 폭력과 배제자로 변형되는 이율배반을 이름이다.
먼저, 이 ‘적이 그리운’ 곤궁의 지점에서 쉽게 출몰하는 것은 손쉬운 대체물, 적이 참칭되는 희화적인 사태가 아닌가? 여전히 누군가는 손쉽게 스스로에게도 기만적인 편 가르기, 진영 논리의 협착된 독설가, 적대적인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 지점에서 오늘도 자신의 정체성을 구원하고자 광신적인 수준의 근본주의자가 되고, 또 극단적인 경우, 바로 시리아로의 직행을 감행하기도 한다.
이 변곡의 지점을 또한 한병철은 최근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는 미셸 우엘벡을 사례적으로 들며 이러하게 지적해 두고 있는데 역시 꽤나 문제적이고 시사적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베크는 짧은 시간 동안 연달아 겪은 죽음들이 소설 <<복종>>을 쓰게 되었다고 이야기 했다. 그는 원래 고수하던 무신론으로는 자신이 사랑했던 개와 부모의 죽음을 극복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 상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소설의 주인공 프랑수아도 어떤 구속력을 향한 동경에 이끌려 의미를 찾아 떠난다. 소설의 원래 제목은 복종이 아니라 ‘개종’이었다고 한다. 소설의 초고를 보면 서술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으로 나온다. 최종본에서 그는 타락하고 소진된 서양을 등지고 무슬림이 된다.” (한병철,위의 책,467,468.)
자유가 바로 폭력이 되는, 개종에서 쉽게 복종이 되는 이 곤혹스러운 이율배반이야말로 인간의 몸에 ‘등에’처럼 들러붙은 낡고도 영원성의 지위를 지닌 딜레마가 아닌가? 이 심급의 딜레마의 그림자야말로 정치를 상상하고 기획하던 정치 철학, 정치 신학자, 수많은 현자들을 무수히도 괴롭히던 괴물이 아닌가?
하여 한병철은 이에 관련하여 또한 다음과 같은 교과서적인 미문 답안을 제출하고 있는데 역시 이 지점에서 숙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삶의 형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파도 좌파도 아니며 어떤 폭력과 배제의 형태를 띠지 않으면서 구속성과 연결성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또 그것은 시스템이 일으킨 손상만을 손보는 치유의 형식으로의 비교秘敎를 넘어서 영성의 가능성이 펼쳐질 수 있어야 하며, 셰어링sharing을 넘어서 진정한 증여와 공유가 가능한 삶의 형식이어야 한다.”(한병철,위의 책.468.)
지젝의 어떤 글에 대한 반론의 목적으로 쓰여진, 워낙 짧은 글에서의 마무리라 한병철의 처방전은 원론적으로 함축적이고 추상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안이 사인인 만큼 이 짧은 문장에 만족할 수 없다.
먼저 ‘적’의 지위가 어느 정도 폭력과 배제의 형태 너머에 있는 성좌임은 이미 칼 슈미트도 고전적인 어투이지만 이렇게 적시해 놓고 있지 않았는가? 곧 그가 구분한 사적인 적과 공적인 적이 그것---.
“적이란 공적인 적만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인간의 전체, 특히 전체 국민과 관련되는 것은 모두 공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독일어는 다른 언어와 마찬가지로 사적인 ‘적’과 공적인 ‘적’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오해나 곡해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자주 인용되는 구절인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5:44,누가복음6:27)는 라틴어로는 ‘사적(私敵)을 사랑하라(diligite inimicos vestros)'이며, 그리스어로는 ‘너희들의 에히도로스 모두를 사랑하라’이고, ‘너희들의 공적(hostes)을 사랑하라’는 아니다. 즉 정치적인 적을 문제로 삼지는 않는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42,43.)
역시 슈미트의 매력은 ‘적’의 위계, 지위를 명징하게 통찰한 것에 있지 않는가?
“정치상의 적이 도덕적으로 악할 필요는 없으며, 미학적으로 추할 필요도 없다. 경제적인 경쟁자로서 등장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어쩌면 적과 거래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게 보일 수도 있다. 적이란 바로 타인, 이방인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으로 족하다”(위의 책,39.)
하지만 여전히 슈미트가 말하는 적은 그 좌표를 상대적으로 훨씬 위계적으로 통찰해 낸 것 외에 전반적으로는 아무래도 국가주의의 히브리스가 민낯으로 표출되기 이전의 개념으로, 배제의 문제를 충분히 극복한 것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또한 그러하게 그의 언어는 사안에 대하여 법학자의 과학주의의 멘탈로 외부 분절적인 성향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좀 더 한병철의 ‘영성적인 가능성’을 존중하는 입장이라면 적극적으로 참고해야 할 접근은, 이를테면, 플라톤의 ‘대화’편 같은 데에서 나타나는 고대 철학의 보다 통합적인 감성이 아닐까? 방대한 플라톤의 <<법률>>의 초반부, 국가 대 국가 간의 전쟁을 대비하는 태세에 관해 논한 부분에는 반갑게도 이런 대화편이 수록되어 있다.
“아테네인: 어떻습니까? 마을 안의 가정(oikia) 대 가정[의 관계]에도, 그리고 개인 대 개 인[의 관계]에도 동일한 것이 여전히 타당한가요?
클레이나스: 동일한 것이 타당합니다.
아테네인: 하지만, 저 자신(hautos) 대 자기[의 관계]를 적 대 적[의 관계]로 생각해야만 하나요? 아니면 이번에는 우리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요?
클레이스: ---논의(logos)를 정당하게도 그 근원(arkhe)으로 이끌어 가심으로써 선생께서는 한결 더 명확하게끔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는 모두에게 공적으로도 적들이고, 사사로이도 저마다 저들 자신들에게 적들이라고 방금 우리가 말 하게 된 것이 옳은 것이라는---.
---선생이시여! 이 경우에도, 저 자신을 이기는 것이 모든 이김(승리)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이며 최선의 것이지만, 저 자신에게 지는 것은 모든 것 중에서도 가 장 부끄러운 것인 동시에 최악의 것입니다. 이것들이 실은 우리 각자 안에 우리 자신을 상대로 하는 전쟁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법률>> 1권,626c-e)
결국 헬라철학의 통합적 사고, 적에 대한, 비대칭의 대립에 대한 더 적극적인 통합적 사고야말로 이 경우에서의 고전적 모범이 아닐까? (그래서 한나 아렌트도 그 시대, 시민권의 멘탈리티, 공공적인 공론의 공간, 그 공간의 복권을 자신의 과제로 삼지 않았는가?)
누군가가 말했듯 플라톤의 ‘대화’는 또 다른 국면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말 걸기 하는 테크네와 그 감성이 아닌가?
곧 플라톤에게서, 이질적이고 타자적인 ‘적’은 먼저 국가 간, 공동체 간에 대립하는 외부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문제이기 이전에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 음영처럼 붙어 존재하는 어떤 극복 대상의 총합이다. 곧 헤겔식으로 비약하면 그 적이 바로 부정성의 다른 이름으로도 포착되는 것이다. 그렇게 주체 안의, 이러한 일말의 ‘영성’적인 성격의 통합으로 한다면, 라캉, 지젝이 그토록 복원하고자 하는 대립성의 이원적 구조는 저러하게 먼저 외부의 대립적 대항으로 설정되기 이전에 주체의 안과 그 밖을 선회하는 분할선으로 기입되면서 재구성되는 것이 아닌가? 저러하게 먼저 정치가 주체의 통합적 공간 안에서 가동되는 기제로 작동 되는 것이 아닌가?
랑시에르가 말하고 있듯, 정치의 본질이 “사회가 사회 자체에 대해 갖는 차이를 현시하는 불일치하는 주체화 양식들에 있다”라고 한다면 먼저 정치가 내 안에 저러한 불일치가 서로 환원할 수 없는 두 개, 아니면 복수로 혼재되는 것이 통합적으로 포착되는 그 원점에서 통각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방인은 난민처럼 타자로 배제선 밖에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에게 배제선 밖의 난민이며 국경은 그러하게 이미 내 안의 분열과 분할로 이미 운명적으로 아프게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 지점에서 주체는, 다음의 슈미트의 지적처럼 바로 분열의 주체의 자리에서 바로 국경, 경계인으로 내려(올라)가며, 바로 그러한 감산의 지점에서 일말 신학적 대상자의 지위, 즉 정치의 요청인의 위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 지점에서 신학자와 정치가는 내밀하게 조우한다.)
“진정한 정치이론이란 모두 인간을 ‘악한 것’으로 전제하는, 즉 결코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위험하고’ 역동적인 존재로 간주한다는, 기묘하고도 많은 사람들을 확실히 불안하게 하는 확인이다. 이러한 것은 어느 정치사상가에게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좋은 세상의 선한 인간들 사이에서는 물론 평화, 안전, 만인과의 조화만이 지배한다. 여기서 성직자나 신학자는 정치학자나 정치가와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존재이다. 원죄의 부정이 사회심리학적, 개인심리학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는 트뢸치와 세이아르가 무수한 분파, 이단자, 낭만파,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의 예를 들어 지적했다. 신학적 사유와 정치적 사유의 전제 사이의 방법론적 관련은 이와 같이 명백하다.”(<<정치적인 것의 개념>>82,86.)
연결해서 이 지위의 뷰-포인트에서 우리는 2014년도에 국역된 기욤 르 블랑의 <<안과 밖>>을 이와 병치하여 더욱 의미 있게 통합적으로 읽을 수 있겠다.
“국가는 안도 밖도 아닌, 안이면서 밖인 국경에서의 삶들을 필요로 한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국민 정체성의 핵인 국가적 내재성의 환상을 이해할 수 있다.---국가는 다만 “상상의 공동체”가 아니라, 권력관계들과 국경의 활용에 의존하는 실질적인 정치적 공동체다.” (<<안과 밖>>,20,21,189.)
그렇다면 저 타자, 난민이요 이방인이기도 한 나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저 이질적인 부정성, 그 ‘적’을 어떻게 맞이하고 환대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이 질문이야말로 적실성을 갖는 핵심적인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닌가? 이 질문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에 따라서 문자 그대로 정치가 ‘치안’이 될 것인지 ‘정치적’인 것이 될 것인지 그 성격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서동진이<<변증법의 낮잠>>에서 남기고 있는 글은 또한 여기에서 의미 있게 읽힐 수 있다.
“부정이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왜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들이 회심이나 개종이 라고 부르는 절차와 같은 어떤 것을 감행하는 것이다.---모순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세계를 모순적으로서 바라본다는 것은 세계의 악이라든가 고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추궁하는 것이다.(<<변증법의 낮잠>>,227,228.)
결국 이러하게 적은 자신이자 타자요 재 탐색된 부정성의 이름으로도 다가 올수 있는 것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이런 이원 대립적인 경계선의 복권을 통하여 다시 정치가 활성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적의 재 포착은 앞의 <<안과 밖>>을 번역한 박영옥의 말처럼 우리를 다시 어떤 가능성의 공간속으로 인도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타자들을 자기 안에 환대하면서, 자기 자신을 타자로, 외국인으로 발견할 가능성을 겨냥”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또한, 어떤 통렬한 역전, 환대에 도달, 자신과 세계를 바꾸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국가(자신)와 외국인(이질적인 부정성)의 관계를 뒤집어서 외국인(이질적인 부정성)을 국가의 위험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국가 갱신의 조건으로 고려해야 하지 않는가?”(<<안과 밖>>,218.괄호는 많은물소리 삽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