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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저항 - 푸코, 들뢰즈, 데리다, 알튀세르
사토 요시유키 지음, 김상운 옮김 / 난장 / 2012년 6월
평점 :
요즘 일각에서 시선을 끌고 있는 이 인상적인 책을 그냥 나는 읽을거리를 서핑하는 가운데 우연히 발견하였다. 검색에서 뜨는 화면에서 우선 책의 외장 디자인에 눈길이 갔고 그리고 저자가 무엇보다 1971년생의 일본의 주목받는 신진 철학자란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기에 더욱 흥미가 불어났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썼기에 어떤 신문의 관련 서평에서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정점에 기념비적 저작”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놓고 있을까? 파리 10대학교 저자의 학위논문 지도교수였던 에티엔 발리바르 마저 해설에서 이와 같은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요시유키의 책은 내용도 흥미롭거니와 그 형식도 빼어나다는 특징이 있다. 〔논의의〕극도의 응축은 그런 솜씨의 징표이다. 이런 응축은 명석함, 특히 논증의 엄격함과 건축술의 힘과 함께 한다. 이 논문에서 넘쳐나는 것은 단 한자도 없다.”
저자는 구조주의(여기서는 그 기표의 대명사는 라캉이다)를 우선 권력관계에 닫힌 이론으로 이해한다. 특히 라캉의 주체이론은 주체의 형성이 타자라고 하는 외부, 권력관계의 역학에서만 발생하는 만큼 주체는 그 권력관계에 수동적으로 폐제, 수신인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주체가 그러하게 구조적으로 설정되는 한 주체는 권력의 자장에 운명적으로 갇히게 되어 그 권력에 대해서는 어떠한 저항의 자리도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인식이다. 이 수동성으로 직진하는 주체의 과정을 요시유키는 구조의 대칭 전제인 인간의 유한성 개념으로 시작해 그에 상응하는 프로이트의 ‘받아들임’의 내적 절차, 그리고 그 경로를 따라 어떻게 초월적인 권력의 시선이 정신분석적으로 구조화되고 내면화되는 지를 풀어나가는 것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구조주의 자체가 이러하게 권력의 경제에 끔찍하게 닫혀 버리고 만다면 그렇다면 저항의 전선은 어디에,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푸코, 들뢰즈, 데리다, 알튀세르,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를 이 지점에서 요시유키는 바로 이 국면에서의 저항이라는 아젠다로 요령있게 묶어 불러 세운다.
우선 푸코의 권력에 대한 고고학적 진술은 그것이 폭력적 권력에 대한 해제적 시선을 유발시키는 목적과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권력에는 외부가 없다는 편견(?)을 각인시키게 하는 것으로 결국 푸코의 권력이론도 라캉의 닫힌 경제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푸코 후기의 ‘자기배려’로의 전회를 요시유키는 이질적인 불연속성으로서가 아니라 과감하게 예의 그 권력의 닫힘에 대한 의미 있는 연속성, 곧 저항으로 읽는다.
이에 비해 들뢰즈-가타리는 수동성이 아니라 주체를 처음부터 비인칭적 역량의 능동성으로 정초한다는 점에서 훨씬 적극적이다. 이들에 어울리는 것은 라캉의 단성적인 장소론보다 ‘특권적 시니피앙’ 팔루스의 초월성으로 직진하지 않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욕망의 다양체의 경제론이다.
또한 데리다에게 원초적이고 유일한 기입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기입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입들이 있어서 그 복수적인 ‘산종’이 팔루스의 권력적 단일성을 위협하는 저항으로 작동된다. 라캉의 주체는 우위의 외부가 지시하는 지점으로 기입, 봉합되고 말지만 (‘편지는 수신인에게 반드시 전달된다.) 데리다의 주체는 편지가 수신인에게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는 ’운‘에 가깝고 언제나 “체계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두려운 낯 설음”으로 침입된다. 곧 라캉에게는 유한한 결여가 상징계를 형성 유지하게 하는 구성적 요소이지만 데리다의 그것은 “상징계를 촉발하고 변형시키는 요소”로 직면되는 것이다.
한편, 알튀세르 특히 후기의 알튀세르는 요시유키가 가장 비중있게 다루는 유능할 수 있는 저항의 국면을 열어젖힌 철학자로 읽힌다. 생산관계, 즉 지배관계가 자신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그 지배적 이념과 체제를 미시권력 구조로 재생산하는 과정의 자리에 저항의 국면을 확보하는 그 열린 공간을 주목하는 것이다. 주체에는 재생산의 과정에 완전히 굴복되지 않는 ‘계급투쟁의 효과’ , 저항의 효과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 저항의 효과에 의해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복합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고 그 상황에 의해 지배 이데올로기는 변용을 겪는다. 더 적극적으로 어떤 지시적 목적론, 결정론의 연속적 맥락도 부정되는 알튀세르의 ‘마주침’과 우발성의 유물론은 운명론적인 구조에 전면적인 변동을 초래할 수 있는 저항의 소중한 토대이다. 그에게는 맑스에서 더 나아가 경제적인 것에서 정치적 우발성의 우위라는 공식을 채택, 순응이 아니라 혁명으로의 폭발과 변용이 상용 확보되어 있다. 곧 라캉과 정반대로 구조가 우위가 아니라 알튀세르에게는 우발성이 구조보다 우위에 역전되어 있는 것이다.
요시유키의 논리는 섬예하고 텍스트를 들여다보고 구성하는 눈은 정밀하고 우아하다. 구석의 저변까지 미세하게 훑는 저인망의 시각은 경건하고 고결하기까지 하다. 누군가가 재치 있게 표현했듯 그의 글은 디자인이 잘 빠진 대학입시 종합반 강의의 전범과도 같다. (학습용으로 제격으로 나는 그 매력에 끌려 한 달 내내 손에 들고 다니며 출퇴근 시간에 네 번을 연속해서 읽었다. 나 같은 일반 독자, 학습자에게는 요시유키는 흔치 않게 마주칠 수 있는 선물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받은 만족을 배신할 틈새는 처음부터 제법 커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구조주의, 특히 라캉의 주체이론이 권력관계의 자장에 갇혀 버린다는 이해가 선뜻 동의되지 않는다. 과연 라캉의 주체론이 그러하게 쉽게 사회과학적 담론으로 전치될 수 있는 물리적 국면인가? 저자는 라캉이 관력관계에 대책 없이 갇혀 버린다는 명제를 채택, 그 대칭의 축에 걸어 그 반사적 탄력으로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을 요령 있게 불러내고 그들을 유쾌하게 우아한 칼날로 발라내는데 보기 좋게 성공하고 있지만 정작 그 설정의 도식 자체가 논증의 세련된 격과는 별도로 어울리지 않게 좀 조악해 보인다는 것이다.
라캉의 주체이론, 그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정신분석적 권력을 과연 성급히 세속화(?)하여 우리가 반드시 극복되고 저항해야만 하는 어떤 사회과학적 권력으로 읽어도 될까? 라캉의 주된 목적 중의 하나는 그러하게 주체는 그러한 외부, 타자와의 거울관계에서 비로소 욕망이 추동되며 그러한 동력학에 의해 리비도가 에로스로 발생되고 폭발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하게 걸리는 정신분석적 권력이야말로 오히려 주체의 경험에서 자유를 가능하게 하고 그 무엇에 복종하거나 저항하거나 내적 힘으로 밀려 올려 진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차원의 권력을 요시유키처럼 지나치게 유물론적인 물질의 국면으로 전치, 단순한 공분의 대상으로 지시, 오독해 버리면 그 논리는 무엇을 향하건 리비도의 활성 자체를 문제 삼는 오버로 직진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요시유키 처럼 어떤 ‘권력’을 극복의 대상으로 지시한다고 할 때 애초 이 권력의 자장에서 비껴나 자유 할 수 있는 그 어떤 비권력적 사유가 가능한지도 분명해 보이지가 않는다. 우선 저자 자신이 저항의 기제로 차례로 열거한 무 규정, 다양체 복수의 기입들을 통한 단일적 권력의 극복과 파쇄 또한 그 자체가 또 다른 국면의 권력의 지위를 점하는 좌표가 아닌가? 그리고 또한 권력적 구조, 단일성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하는 비인칭적 역능, 개방성은 저자의 믿음처럼 또한 그러하게 논리적으로 비권력적으로 설정된다고 하더라도 (포스트구조주의 자체가 오늘날 해제되고 있는 지금의 현상이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과연 그 사유의 탈권력적 구조로 인해 권력적 주체를 무장 해제시키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새로운 것을 구성하고 창출할 수 있는 동력으로 (관념을 넘어)실제 작동되는 역능이 보장되는 국면인지도 의심스럽다. 곧 요시유키의 주체에 대한 프레임에는 이러한 '니힐리즘'의 혐의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의 사유성과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부연하자면, 요시유키가 대별해 내는 비권력의 권력, 그 규정될 수 없는 권력은 논리의 성격상 사유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렇다면 손쉽게 논의의 경계를 훌쩍 벗어나 오히려 이를테면 근거 없는 뉴 에이지류와 같은 유령적인 것으로 신비화되는 국면으로 방전될 우려가 있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그것은 기본 리비도를 향한 구축점을 유동적으로 희석시켜 결과적으로 권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주체를 해제, 주체를 경계선이 부재한 유실인으로 되돌려 ‘지금 여기에 있는’ 주체의 현존과 자유 자체마저 침식하는 사태로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곧 다양체로서의 비권력은 저항에 대한 보상과 환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실질적인 실체로 규정, 작동되는 현물이 아니라 현물은 없고 권력에 대한 대항의 로망이라는 일말의 윤리적 감성만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오독은 또 있어 보인다. 라캉의 결여가 그 무엇에 거울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결여인 한에 상응되는 타자에 의해 상징계로 성급하게 봉합되고 만다는 것에서 요시유키는 어떤 고착적인 운명론의 위험을 제기하지만 그 지점에서 열려있는 실재계와의 외밀한 조우는 주체를 항상적으로 불완전하게 열어놓는, 항상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저항의 자리, 일말의 혁명적 계기를 남기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이유때문인지 요시유키는 구조주의에서 라캉의 실재계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저항이 그렇게도 중요하다면 알튀세르만 하더라도 요시유키에 반하여 들뢰즈 식의 감성으로 독해할 것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라캉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요시유키의 논증과는 달리 우리가 알튀세르를 현존에 대한 우발성, 부재의 우위로 읽을 수 있다고 할 때 부재가 오히려 우위로 승격 배치되는 그 발상이나 도식 자체가 라캉의 외부의 우위라는 초월적(권력적) 도식을 더욱 유능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독해로 말이다.
그리고 알튀세르의 ‘부재’, 그리고 ‘아무것도 없음’이라고 하는 공백이라는 것도 그 겨냥하는 지점이 아무것도 없는 빈 지점인 한에서 모든 것을 세우고 건축할 수 있는 적극적인 권력의 혁명적 호출의 조건, 지형으로 알튀세르가 제출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것 역시 라캉의 아무것도 아닌 결여, 죽음충동의 그것과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알튀세르를 더욱 알튀세르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물론 알튀세르는 이 구도를 충분히 자신의 텍스트에서 남겨놓고 있다.
“이러한 미끄러짐을 통해서 스피노자는 모든 인식이론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세계“를 이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것’, 자연의 이론조차 없는 이러한 것으로서 승인하도록 해 주는 길을 연다. 즉 총체화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산 속에서 체험되는 유일독특한(unique) 그 속에 우리가 ”던져져“ 있고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우리의 모든 환상들을 주조해 내는 ”주어진 것“(제조물들)으로서 체험되는 유일독특한 총체(---)로서 ”세계“를 승인하도록 해 주는 길을 여는 것이다.”(「철학적 맑스주의」 ,서관모 백승욱 편역, 새길아카데미,56.)
스피노자를 인용, 오마주하는 이 본문의 탈 총체화는 데리다, 들뢰즈의 다양체나 ‘산종’과는 분명 다른 국면을 안고 있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오히려 총체화의 일원론적 권력에서 모든 총체화의 비정통성의 권력을 전면적으로 부정함으로 더 강렬하게 창조적으로 작동되는 유일독특한 신성한 “세계”, 그 세계를 떠안은 주체를 이름이다. 이러한 전복된 방식으로 또 다르게 강렬해 지는 권력적 주체! 이것이야말로 저항을 진정으로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방식의 라캉식 권력형 주체가 아닌가?
이 지점에서 데리다와 구별되는 것은 스피노자가 배경으로 함의하고 있는 독특한 신의 이름이다.
““나는 신에서 시작한다”고, 또는 전체(le Tout)에서, 또는 유일독특한(unique) 실체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나는 그 어느 것에서도 시작하지 않는다”(je ne commence par rien)고 말하는 것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위의 책,51.)
자연도 아닌, 신을 향하는 것도 아닌, 그리하여 신이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는 그 ‘아무것도 아닌’ 외부의 무의 장소야말로 모든 것이 그로써 전격적으로 가능한 혁명적 건축이 발생할 수 있는 현존에 대한 우위의 공간으로 알튀세르는 거듭 제출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즉 이것은 라캉적 내,외부적 도식에서 외부, 부재를 더 강조함으로써 저항이 단순한 윤리적 감성이 아니라 권력적으로 작동되게 하는 장치의 사유로 확보되는 사태를 이름이 아닌가?(이 지점은 또한 명백하게 유한의 빈 구멍 '결여'를 그리스도, 신의 좌표로도 상응화하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 지젝을 생각나게 한다.)
이러한 공백의 공학을 통해서 알튀세르는 오히려 더욱 진짜 초인, 영웅을 초대하고자 한다.
“찢긴 인류 자체를 통일하기 위해 ”신공국“의 기초를 쌓도록 해 주는 이는 전혀 없다.”(위의 책,203.)
이러한 알튀세르를 우리가 어떻게 포스트구조주의의 방식으로 읽을 수 있을까? 그의 한 텍스트는 이렇게 장엄하게 마무리 되고 있다.
“예전에 별로 이름 없는 어느 데카르트주의자가 말했다. ”우리는 거대한 공기층 아래에서 살고 있지만 그 무게를 느끼지 못 한다“고. 오늘날 우리는 수미일관하지 못하고 모순적인(모순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엄청난 이데올로기 층 아래 살고 있으며, 자연히 그 무게를 느끼지도 못한다.---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그것에 인종하는 이 금찍한 조건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진짜 영웅주의가, 이 점〔대단한 영웅주의자라는 점〕에서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사람이며 항상 현재적이고 현대적인 마키아벨리의 영웅주의가 필요하다”(위의 책,204.)
그러므로 저항은 구조주의적 권력 발생 관계를 비껴나야만 한다고 하는 어떤 감성적 전치에서가 아니라 더 유능한 권력, 더 감산됨으로 성숙해지고 계몽되는 구조와 지형, 공간의 창출과 이동에서 오히려 비로소 현물로 가능해지는 것으로, 그러하게 읽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