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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현상학 뉴아카이브 총서 6
미셸 앙리 지음, 박영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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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물질 현상학>을 읽어 내려가면서 떠오른 것은 뜬금없게도 신학자 칼 바르트였다. 그가 그리스도인의 핵심 윤리 과제인 ‘성화’를 설명하면서 칼빈에게서 빌려 온 개념인 ‘동요(動搖,die Unruhe)'가 바로 그것이다. 윤리란 의지의 연속 작용이나 칸트적 이념과 같은 목적, 당위성의 전범보다는 어떤 권력적인 충격과 물질적인 의식적 힘에 의해 역동적으로 밀리고 흔들린 효과에 의해 비로소 거론될 수 있다고 통찰한 그 기독교 정통주의적 발상을 이름이다.(이에 관해서는 <로마서 강해>나 2010년도에 출간된 이정석의 <하나님의 흔드심-칼 바르트의 성화론>을 보라.)


그러고 보니 이 책, 앙리의 텍스트에도 동일하게 이 ‘동요’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는 데 그것은 분명 의식이 살아 있는 힘이어야 한다는 이해에서 이미 양자 간 발상에서 일말의 친근성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기사 앙리의 절반 이상은 이미 신학이 아닌가?

“그런데 이 소여들 그 자체가 손상을 입히는 것은 다만 흔들리고 불완전한 이 소여들의 토대 위에 세워진 이성성만이 아니라 소여들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론적인 동요의 결과이다.”(122.)


그러니까 결국 앙리도 인간의 의식이란 생성이나 운동만이 아니라 자신을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세우게 하고 자신의 제한과 곤궁의 아픔과 영광 속에 직면하게 하는 살아있는 흐름이자 ‘인상’이요 힘의 과정이라고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사유에서 “삶을 인식할 수 없는 무능”(<육화, 살의 철학>,127.)을 넘어 욕망이 가능하고 향후 스스로의 수동성에서 역동적으로 운동하게 하는 인식의 토대, 통로를 열어 놓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우선 이러한 앙리의 과제에서 볼 때 후설은 인식의 토대를 정초하는 소중한 과업을 열어젖힌 형편을 뒤로 두고 그 사유의 성격이 이성적이고 인식론적인 경향성에 편향되어 있는 한계를 지닌다고 반성된다. 의식의 토대요 출발점인, ‘내가 지금 여기에서 생각하고 존재 한다’는 소여성에 대해 후설의 사유는 그리스적 이성성으로 그 소여성을 구성적으로 기술하고 설명할 수 있을 뿐 그 소여성이 나타나게 되는 나타남 자체, 더 나아가 즉 그 나타남을 느끼게 하는 정감이나 실질적 인상을 밝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소여성이 단순히 일반적인 의식을 개화시키는 코기토로서의 인식론적 기능뿐 아니라 제한과 좌절,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이 운명적임에 한해 그에 대해 소중하게 리비도를 폭발시키는 욕망의 발전소, 가능성의, 삶과 그 정감의 촉발점으로까지 보다 유능하게 정초되고 해명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로 앙리는 후설이 전개한 지향성을 중심으로 한 인식론적 사유에서 그 성격을 달리하는 사유로 전환, 과월 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현상학에서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국면에서 의식의 토대를 구현하고자 하지만 그리스적 사유의 고전적 구성의 경향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질료’라는 협의의 세계에서, 더 살아 있는 현실로 내려가 정감으로 느끼고 고통 하는 심리적 느낌이자 실체인 ‘살’이자 ‘물질’이라는 보다 능산적인 사유의 현상학으로 과월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앙리는 키르케고르에 기반 하여 키르케고르의 변증법, 즉 정념적인 변증법을 내속화 하는 사유로 이 통로를 증폭시키고자 한다. 


즉 보다 유능한 가능성을 “꾀어”내기 위해서 더 깊은 죽음, 부정의 사유로 내려가 키르케고르를 안으로 기대어 후설의 소여성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운명과 피할 수 없는 제한, 곤궁의 죽음으로까지 초월화, 그것을 절대화 하는 것으로 이 ‘과월’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하여 이 지점, 제2장 '현상학의 방법'에서 앙리는 후설과는 다른 초월의 얼굴을 분명하게 변별,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이 부분은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웠다.


후설에서의 초월은 주체에게 주어진 코기토적 수동의 심리적 조건이 인식-구성적으로 파악되는 의미에서 내속적인 초월이다. 하여 그 주어진 상황의 소여성은 역시 인식-구성적 상황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이러한 인식-구성적 주어짐의 상황 구조 속에서 이해되는 초월은 그 상황이 다만 주체에는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주체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주체의 능력 밖이라는 의미에서 초월이라는 지위가 부여되는 것으로, 그 초월이 이를테면 신학적 의식에서 운위되는 인격적 타자의 유신론적인 위격은 아니다. 이러한 이성적 초월이라는 개념은 그것이 주체의 의지 밖에 있는 외설적 국면이라 하더라도 곧 역시 이성적이고 인식론적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한계를 지닌다. 이러한 유물론적 일원론의 인식론적 초월에서는 사유의 시원적 개시점인 소여성도 후설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구성적인 차원이 되고 만다. 처음부터 의식에 대해 피와 살의 살아 있는 어떤 힘의 세계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인식-구성적으로 이해한 만큼 그 소여성도 결국 그 범주에서 소극적인 이해에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앙리 또한 주체의 소여성이 주체의 의지 밖에서 주어지는 구성적 초월이라는 철학적 초월 개념에는 후설과 같다. 하여 후설과 같이 초월에 대한 이성적 위계에서는 차이가 없다. 곧 앙리에게서도 초월은 이성 밖의 절대 타자의 신적 위격의 그것이 아니라 절대 의식 경험 안에서의 안과 밖, 뫼비우스의 띠처럼 구성되고 작동되는 내부적 단층으로서의 자기-내의 생성, 초월인 것이다. 하지만 앙리는 키르케고르의 얼굴을 내면화하여 이 소여성의 초월에서 정념적인 정감성을 안으로 내장, 결정적으로 차원이 다른 초월을 발화시킨다. 곧 이 초월적인 소여를 더 역동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변증법이 걸리도록 죽음의 사유의 장으로 현상학의 토대 자체를 아예 근본적으로 옮기는 것이다. 곧 그리스적 사유에서 울림과 진동, 동요를 가져오는 정념적인 변증법의 자리, 키르케고르의 장, 진자 속으로 차원을 바꾸어 정념적인 작동을 제대로 활성화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하게 키르케고르의 정념적인 변증법의 구성력으로 하면 소여성은 다만 주어지는 수동성이 작동되는 구성을 넘어 더 깊은 인간의 불안과 무의 근원에 연결되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거의 결정론적인 신학적 인식으로 까지 승격된다. 인식-구성적인 범주에서 과월하여 내가 지금 여기에서 불안과 무의 심연에 절대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라고 하는 피와 살을 느끼는 문자 그대로 ‘심리적 물질’의 중심에 정초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하게 소여성이 키르케고르의 ‘불안’의 효과처럼 결정론적인 ‘물질’로 경험되게 되면 소여성은 어떤 인식론적 구성에서 더 적극적으로 수동적인 범주의 ‘증여’, ‘자기-증여’로 더욱 역동화, 치환된다.

항상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자신의 힘과 다른 힘이며, 이 힘 안에서 봄은 자기-촉발이며, 그런 방식으로 자기가 보는 것을 느끼며, 자기가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본다videmus”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보는 것을 느낀다sentimus nos videre"라고 말해야 한다. 이 자기-촉발은 본래적인 현상성이며, 자기-증여로서 본래적인 증여이며, 예를 들어 봄이 자기 자신을 주는 자기-증여이다. 다만 이 자기-증여만이 구조적으로 ‘관계함’에 이질적이다. 자기-증여는 그 자체로 이 ‘관계함’이 아니며, 절대적으로 그것의 배제이다. 자기-증여는 자기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존재한다.-초월성이 아니라 근본적인 내재성이다. 이 근본적인 내재성의 지반 위에서만 초월성으로서의 어떤 것이 가능하다.”(159.)


이렇게 소여가 절대적인 소여로, 그리하여 자기-증여로 치환되면 주체의 정념은 역시 내용이 달라진다. 코기토로서의 인식론적인 범주인 후설적 ‘개체’에서 그야말로 키르케고르의 절대 앞에 서 있는 ‘단독자’의, 보다 신학적이고 충동적인 정념으로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곧 구성되고 인식된 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근원 지층의 심리적 조건 속에서 스스로 배제되고 그 배제의 효과에 의해 주어지고 증여된 존재로 자신의 ‘여기 있음’의 운명이 더욱 피와 살과 짐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념의 스펙터클한 자기-내 생성의 초월 역학 구조는 거의 신학적이고 결정론적인 국면에 상응하는 효과를 창조해 개체로 하여금 더 유능하게 피와 살로 흔들리고 동요되어 더 자각적으로 깨어난 존재에 이르게 하지 않는가? 

“cogitatio는 진정으로 실존이 아니다. 다시 말해 실존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이성성을 설립하기에 적합한 실존이 아니다. 그것은 cogitatio가 ‘단독적’이기 때문이다. cogitationes에 첨가되는 이 ‘단독적’이라는 관형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어지는 이 강의 전체에서 cogitationes의 자격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결국 그것을 철학적 문제의 지평에서 제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이 말에 경멸적인 방식으로 붙게 되는 이 관형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이것으로서, 순간적인 것 이상의 사실성 안에서, 비존재로 미끄러지도록 정해진 체험의 한 조각 그 자체에 한정된 환원 불가능한 성격을 표시한다. 단독성singuralite의 개념은 여기서 개체성individualite과 등가이며, 개체성은 시간 안에 자신의 자리에 의해 사물의 개체성 혹은 단독성을 정의하는 개체화의 원리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123.)


개체에서 단독자로, 앙리의 초월의 정념적인 효과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 이상 개체이기를 그치고 개체를 넘어선 단독자는 인식론적 범주에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심리적 ‘살’로서의 토대인 이를테면 키르케고르의 부정성, 초월의 무에 매 순간 접속되는 관계로 그 접속되는 불안과 무가 살아있는 느낌을 증여하는 인상인 만큼 매 순간 역사를 초월하여 항상 죽고 항상 새로이 경험되는 결의와 결단을 되돌려 받는다. 인식은 이 세계와 역사의 범주, 즉 ‘상기’ 와 ‘재현’이라고 하는 구성된 개념의 세계를 되돌려 받지만 강렬한 초월은 그 동요와 정념의 경험과 인상을 통해 ‘반복’을 추동시킬 만한 심리적 힘을 효과로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면은 물론 이미 키르케고르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이 명칭을 그대로 보존한 채, ‘제1의 철학’이란 이름 밑에서 이교 세계의 전체 학문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 제1의 철학의 본질은 내재성, 혹은 그리스적인 명칭으로는 상기想起라고 한다.) 그러고 나서 ‘제2의 철학’이란 이름 밑에서 그 본질이 초월 내지는 반복反復**인 철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임춘갑역, <불안의 개념>,37.)


앙리가 키르케코르를 내속적으로 욕망하고 현상학의 사유에서도 신학을 한 몸으로 욕망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유를 넘어설 수 있는 정념적인 초월의 가능성 때문이 아닌가?


어쨌든 이러하게 앙리는 현상학의 전제 자체를 아예 정념성의 변증법의 안으로 옮겨 결국 욕망과 에로스적 충동까지 스펙터클하게 가능한 현상학을 재 정초하고자 한다. 그러하게 키르케고르와 동일한 올림의 언어로 그 부정성을 변증법적인 ‘가능성’으로 보며 이 가능성을, 앙리는 자신의 현상학적 ‘초월’로 휘발시켜 폭발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미처 이 좁은 페이퍼에서는 정리할 수는 없지만 앙리는 그 부정성의 보편으로 해서는 현상학을 더욱 현상적이게 해서 역시 공-정념, 인식의 외피를 뚫고 진동의 울림으로 공명되는 공동체의 이념과 타자에 대해서도 유능하게 말을 걸고자 하는데, 이것이 또한 보기 좋게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편으로 신학적인, 그것도 기독교 정통주의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특히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앙리의 이와 같은 기획과 초월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번역자는 <육화, 살의 철학> 해설에서 출판된 앙리의 신학적 현상학에 대해서 프랑스 국내에서도 신학 쪽이나 현상학 쪽, 양자에게 일말의 비토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재치 있는 에피소드로 보고해 주고 있는데 신학 쪽에서 기독교를 잘못 이해했다는 평가를 되돌려 받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기독교적 논리의 맥락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앙리적 맥락에도 해당된다.


간단히 말해 먼저, 의식에 관한 이해에서 신학의 입장은 다르다. 앙리는 후설의 인식론 범주의 의식을 다룰 뿐인 고전 현상학의 한계를 문제 삼아 인상과 정념으로서의 의식으로 대체하고자 하지만 신학은 그 의식이 바울의 신학에서처럼 인상과 정념을 넘어 일종의 권력 상태라고 이해한다.(에베소서,2:1,2) 단순히 구성되어 주어진 의식을 시원으로 경험하고 그것을 의지적으로 변별하고 또 다시 구성해 낸다는 흐름과 그리고 앙리의 의식과 같은 정감, 정념적인 운동을 넘어 내면을 잠식, 점령, 황폐화 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는 또 새로운 권력으로 굴복시켜 휘황하게 활황화 될 수도 있는 그러한 권력의 가능 형식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의식이 그러하게 권력의 형태로 생성되고 흐르고 유동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또 그 권력의 변동과 사건을 현상학은 어떻게 사유되고 어떻게 구성할되어야 할 것인가? 전통적인 기독교의 이해처럼 그 의식이 권력이라면 그 권력을 전복하고 의미 있게 개시하려면 과연 초월도 어떤 위계와 단층적 구조로 구축 되어야 할 것인가? 신학은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그 자신 고유의 교의학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 하는 편에 서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앙리도 여전히 기독교의 이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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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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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드 로 주연의 2001년작 전쟁영화 ‘에너미 앳더 게이트’에는 이런 흥미로운 대사가 나온다. 영화에서 러시아 공산당 정치위원으로 나오는 다닐로프(조셉 파인즈)가 동지에서 연적관계로 발전해 버린 불세출의 저격수 바실리(주드 로)에게 내뱉는 말--- 
“나는 평생 사람과 세상이 공평해야 한다고 믿고 그 신념을 위해 싸워왔지. 하지만 아무리 싸워도 별수 없이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하더군. 누구는 아름다운 여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만큼 매력적이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지. 누구는 총을 잘 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게 서툴지---”    

마르크스가 정의로운 세상을 위하여 계급적 질서와 위계를 구성하게 하는 소유 관계를 부정한다고 할 때 모든 소유문제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여 ‘공산당 선언’에서도 철폐와 전복의 대상으로서의 소유를 그냥 소유로 지시하지 않고 ‘부르주아적 소유’로 명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분열과 위계적 차이, 굴곡의 불공정성 자체를 아예 부정해 버린다면 그야말로 인간은 자신의 생존에서 꼭 필요한 욕망과 의미 있는 충동, 추동의 자리 자체를 부정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반대로 강고한 차이의 장치에서 불공정한 게임에서 욕망과 충동이 발생하고 제대로 추동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는가? 하여 문학평론가 정여울 씨도 최근의 한 칼럼에서 지젝을 인용하며 이러한 역설적 국면을 재치 있게 진술하고 있다. 

“엄격한 부모가 자유방임적인 부모보다 훨씬 창조적인 아이를 길러낸다고 하는 것은 동서양 부모들의 공통된 합의사항이다. 지젝은 이렇게 설명한다. 엄격한 부모아래 있는 아이는 겉으로는 복종하더라도 내적으로는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훨씬 교활한 것은 포스트모던한 자유방임, 비 권위주의적 아버지의 명령이라고 한다. 예컨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정말 원하는 대로 하거라!’는 식으로 말하는 부모가 훨씬 교묘한 독재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의 내적인 자유를 강탈하고, 아이의 할 일뿐 아니라 스스로 원해야 할 것과 느낌까지 명령하는 것이다. 엄격한 금지가 오히려 내면의 빈 공간을 만들고, 그 내면의 공터에서 창조적 질문이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저 유명한 칸트의‘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도 이런 문장을 병렬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 안에 역설적인 것이 담겨 있다. 즉 ‘시민적인 자유’의 정도를 확장하면 할수록 그것이 시민들의 ‘정신적인 자유(Freiheit des Geistes)'에 유리해 보이지만 실은 정신적 자유에 오히려 엄청난 제약을 가져오게 된다. 그와 반대로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감소시키게 되면 오히려 시민들이 자신의 전반적인 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처럼 딱딱한 껍질 안에 자연에 의해 가장 소중하게 간직되고 있는 맹아인 ’자유로운 사고로의 경향과 사명’---”(칸트,「칸트의 역사철학」,이한구편역,서광사,22.)   

 
탈-권위, 해체주의는 동일성의 차이로 인한 그 폭력성을 제거하느라 모든 차이와 위계에 대해 부정의 혐의를 덮어씌웠지만 정작 돌아오게 된 것은 그 고귀한 평등을 느낄 심리적 토대, 경계선마저 희석시켜 평등이라는 정의 설정 자체가 감성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사태가 아닌가? 그러한 결과로 오늘날 포스트모던 이후의 무공간의 현대인은 다시 자신의 내부를 경계 짓고 창조해야만 하는 원점의 원시인적 딜레마에 재 직면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여 우리는 다시 내부와 외부에서 어떤 식으로든 분절을 긋고 자신의 공간을 재 구원해야만 하는 문제에 되돌아오게 된다.       

“장소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외부로부터 분리된 내부를 창조하는 것이다.---내부에 있다는 것은 당신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E.렐프,「장소와 장소상실」,김덕현외,논형,116)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저 의미 있는 장소를 위해 다시 근대적 계급, 계몽의 추문적 기획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저 장소를 구원하기 위해 포스트모던한 감성과 논리자체까지 무작정 부정할 필요는 또한 더더욱 없을 것이다. 어차피 서로의 사유들은 적대적으로 은밀히 공모하여 서로를 살해하고 그 시체들 위에서 더욱 유능한 사유에 이르게 하는 이율배반적 상응의 토대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계급적 평등, 사회과학적 평등을 확보하고서도 주체의 리비도 활성화를 위해서 어떤 불평등의 위계를 용인할 것이며 어떤 내 외부의 구조적 위상 공간을 인정, 옥석을 가릴 것인가? 오늘날 어떠한 곳에 어느 곳에 이러한 불평등의 자리를 위치지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위에 인용한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의 첫 문장은 또한 의미 있게 다가온다.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 미성년 상태의 책임을 마땅히 스스로 져야 하는 것은, 이 미성년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을 경우이다.”(칸트,위의 책,13.) 

칸트의 저 유명한 계몽에 대한 정의에서 걸려 있는 것은 역시 계몽의 보편적인 성격이다.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승격되는 저 계몽이란 것이 반드시 지적 재능이나 소수의 인식노동자들만이 독점할 수 있는 지식 체계나 정보가 아니라 누구나 필요를 자각하고 동기부여가 된다면 도달 가능한 인간 성장의 소명에 관한 문제이다. 지식과 정보이기 이전에 이해하고 통합하는 인격적 성장을 동반하는 것으로 누구든지 알고자하는 앎에 대한 호기심, 의지, 에로스가 발동된다면 도달 가능한 것이다. 그러하게 도달 가능한 성년이라면 성년에 이르지 못한 책임은 당연히 위계적 차이, 지성의 문제가 아닌 욕망의 결핍에 있다는 것이 칸트의 지적이다. 이로써 칸트의 비난이 함의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와 문명의 진보에서 동어반복 될 수 있는 계급과 위계의 재구성 함정을 극복하는 것이며 그 편으로써 인간 성장이라고 하는 성년 개념에서 ‘부르주아적 소유’의 권력성을 감산, 그것을 이를테면 마르크스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부연, 칸트적 기획을 추론 정리하자면 곧 계몽은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로 열려 있는 보편과 정의의 성장 게임이다. 하지만 그 게임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은 각자의 리비도 활성의 강도, 욕망의 여하에 따라 계몽 승격되는 량과 질이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후자의 불평등은 불평등이되 애초의 공정한 토대위에서의 사후적 욕망의 문제이므로 평등과 정의의 문제를 유발시키지 않는 보편에 속한 불평등이다. 

역시 칸트다운 문장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한편, 이 지점에서 또 유쾌하게 떠오르는 것은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진술한 문장이다. 

 

 

 


“나는 한 사람의 능력이 다른 사람의 능력보다 열등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능력이 똑같이 발휘되지는 않았다고 가정할 것이다.---그러므로 나는 동어반복의 자리를 약간 옮길 것이다. 나는 그가 덜 똑똑하기 때문에 덜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아마 덜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덜 좋은 일을 제공한 것이며, 그가 덜 유심히 보았기 때문에 덜 본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가 그의 일에 주의를 덜 기울였다고 말할 것이다.---그들의 ‘낮은’ 지능이 자연의 효과인지 사회의 효과인지 논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그들은 그들의 욕구와 실존적 상황이 그들에게 요청하는 지능을 개발한다. 욕구가 멈추는 곳에 지능은 쉰다. ---인간은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이다. 어쩌면 지적 성과의 불평등을 설명하기에 충분할 수도 있는 주의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의지가 불평등하게 절박하기만 하면 된다.”(랑시에르,「무지한 스승」,양창렬역,종려,103,104.강조는 많은물소리)

 
역시 이 인용문에서도 핵심으로 거론되는 것은 욕망의 문제다. 선천적 재능이 아니라 욕망이 지능을 활성화시키고 사물을 더 진지하게 숙고하고 자신을 잘 사용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하게 욕망의 문제로 관점을 위치시킴으로 위계와 차이를 생산, 재생산하는 동어반복의 자리를 극복, 어떠한 보편의 성감대를 활성화 시키고자 하는 것이 랑시에르의 의도인 듯하다. 그로써 재생산의 핵심 경험인 교육적 경험에서 애초의 보편을 정초하고 그 편의 유능한 평등의 사유의 어떤 토대를 묻고자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랑시에르의 이 문장에서 우리는 예의 그 보편과 정의에 속한 어떤 불평등의 자리를 확인하게 된다. 아니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랑시에르는 저 불평등한 것(욕망)의 발생장소까지 노골적으로 거론하고 있지 않는가?  

곧 불평등하게 절박한 의지, 욕망의 차이가 그것이다. 욕망을 발생, 구조화시키는 조건인 어떤 결여가 크다면 그야말로 욕망의 생산에서 그러하지 못한 사람보다는 불평등하게 욕망을 더 절박하게 발생시킬 것이 아닌가? 그러하게 강렬하게 발생시킨 욕망의 탄력위에 충동, 에로스가 작동되었다면 지능은 훨씬 제대로 떠들썩하게 활성화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여, 곤궁이야말로 계몽이나 성장게임에서의 도약판, 영혼이 아닌가? 결여와 욕망과의 이와 같은 에로틱한 결혼을 한편, 또 플라톤은 「향연」에서 이렇게 재치 넘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 포로스(계책)와 어머니 페니아(결여)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에로스는 다음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답니다. 우선 그는 늘 가난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섬섬하고 아름다운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며, 오히려 피부가 딱딱하고 거칠며 맨발에 집도 없습니다. 늘 땅바닥에서 요도 없이 누워 있고 문가와 길섶에서 하늘을 지붕 삼아 잠이 들지요. 어머니의 본성을 갖고 있어서 늘 결핍과 함께 삽니다. 그런가 하면 또 아버지를 닮아서 아름다운 것들과 좋은 것들을 얻을 계책을 꾸밉니다. 용감하고 담차고 맹렬하며 늘 뭔가 수를 짜내는 능란한 사냥꾼이지요. 사리분별을 욕망하고 그걸 얻을 기략이 풍부합니다. 전 생에 걸쳐 지혜를 사랑하며, 능란한 마법사요 주술사요 소피스트입니다.”(강철웅역,「향연」,128.)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부르주아적 소유로서의 위계의 전복은 이미 자연스럽게 결정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곧 결여, 곤궁이 클수록 비례하여 욕망이 활성화 된다는 것을 이름이다. 이로써 의미 있는 전복, 가난과 결핍이 더 통렬하게 유리해지는 마법, 정의로운 불평등이 정초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결여의 블랙홀, 스스로의 자신의 무의식 안에 고유하게 특권화 되는 욕망 발전소, 공정 장치로써의 그것을 구원하는 지젝, 라캉의 정신분석적 증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다시 묻지 않을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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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저항 - 푸코, 들뢰즈, 데리다, 알튀세르
사토 요시유키 지음, 김상운 옮김 / 난장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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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각에서 시선을 끌고 있는 이 인상적인 책을 그냥 나는 읽을거리를 서핑하는 가운데 우연히 발견하였다. 검색에서 뜨는 화면에서 우선 책의 외장 디자인에 눈길이 갔고 그리고 저자가 무엇보다 1971년생의 일본의 주목받는 신진 철학자란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기에 더욱 흥미가 불어났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썼기에 어떤 신문의 관련 서평에서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정점에 기념비적 저작”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놓고 있을까? 파리 10대학교 저자의 학위논문 지도교수였던 에티엔 발리바르 마저 해설에서 이와 같은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요시유키의 책은 내용도 흥미롭거니와 그 형식도 빼어나다는 특징이 있다. 〔논의의〕극도의 응축은 그런 솜씨의 징표이다. 이런 응축은 명석함, 특히 논증의 엄격함과 건축술의 힘과 함께 한다. 이 논문에서 넘쳐나는 것은 단 한자도 없다.”

 

저자는 구조주의(여기서는 그 기표의 대명사는 라캉이다)를 우선 권력관계에 닫힌 이론으로 이해한다. 특히 라캉의 주체이론은 주체의 형성이 타자라고 하는 외부, 권력관계의 역학에서만 발생하는 만큼 주체는 그 권력관계에 수동적으로 폐제, 수신인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주체가 그러하게 구조적으로 설정되는 한 주체는 권력의 자장에 운명적으로 갇히게 되어 그 권력에 대해서는 어떠한 저항의 자리도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인식이다. 이 수동성으로 직진하는 주체의 과정을 요시유키는 구조의 대칭 전제인 인간의 유한성 개념으로 시작해 그에 상응하는 프로이트의 ‘받아들임’의 내적 절차, 그리고 그 경로를 따라 어떻게 초월적인 권력의 시선이 정신분석적으로 구조화되고 내면화되는 지를 풀어나가는 것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구조주의 자체가 이러하게 권력의 경제에 끔찍하게 닫혀 버리고 만다면 그렇다면 저항의 전선은 어디에,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푸코, 들뢰즈, 데리다, 알튀세르,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를 이 지점에서 요시유키는 바로 이 국면에서의 저항이라는 아젠다로 요령있게 묶어 불러 세운다.

 

우선 푸코의 권력에 대한 고고학적 진술은 그것이 폭력적 권력에 대한 해제적 시선을 유발시키는 목적과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권력에는 외부가 없다는 편견(?)을 각인시키게 하는 것으로 결국 푸코의 권력이론도 라캉의 닫힌 경제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푸코 후기의 ‘자기배려’로의 전회를 요시유키는 이질적인 불연속성으로서가 아니라 과감하게 예의 그 권력의 닫힘에 대한 의미 있는 연속성, 곧 저항으로 읽는다.

 

이에 비해 들뢰즈-가타리는 수동성이 아니라 주체를 처음부터 비인칭적 역량의 능동성으로 정초한다는 점에서 훨씬 적극적이다. 이들에 어울리는 것은 라캉의 단성적인 장소론보다 ‘특권적 시니피앙’ 팔루스의 초월성으로 직진하지 않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욕망의 다양체의 경제론이다.

 

또한 데리다에게 원초적이고 유일한 기입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기입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입들이 있어서 그 복수적인 ‘산종’이 팔루스의 권력적 단일성을 위협하는 저항으로 작동된다. 라캉의 주체는 우위의 외부가 지시하는 지점으로 기입, 봉합되고 말지만 (‘편지는 수신인에게 반드시 전달된다.) 데리다의 주체는 편지가 수신인에게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는 ’운‘에 가깝고 언제나 “체계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두려운 낯 설음”으로 침입된다. 곧 라캉에게는 유한한 결여가 상징계를 형성 유지하게 하는 구성적 요소이지만 데리다의 그것은 “상징계를 촉발하고 변형시키는 요소”로 직면되는 것이다.

 

한편, 알튀세르 특히 후기의 알튀세르는 요시유키가 가장 비중있게 다루는 유능할 수 있는 저항의 국면을 열어젖힌 철학자로 읽힌다. 생산관계, 즉 지배관계가 자신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그 지배적 이념과 체제를 미시권력 구조로 재생산하는 과정의 자리에 저항의 국면을 확보하는 그 열린 공간을 주목하는 것이다. 주체에는 재생산의 과정에 완전히 굴복되지 않는 ‘계급투쟁의 효과’ , 저항의 효과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 저항의 효과에 의해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복합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고 그 상황에 의해 지배 이데올로기는 변용을 겪는다. 더 적극적으로 어떤 지시적 목적론, 결정론의 연속적 맥락도 부정되는 알튀세르의 ‘마주침’과 우발성의 유물론은 운명론적인 구조에 전면적인 변동을 초래할 수 있는 저항의 소중한 토대이다. 그에게는 맑스에서 더 나아가 경제적인 것에서 정치적 우발성의 우위라는 공식을 채택, 순응이 아니라 혁명으로의 폭발과 변용이 상용 확보되어 있다. 곧 라캉과 정반대로 구조가 우위가 아니라 알튀세르에게는 우발성이 구조보다 우위에 역전되어 있는 것이다.

 

                           

 

요시유키의 논리는 섬예하고 텍스트를 들여다보고 구성하는 눈은 정밀하고 우아하다. 구석의 저변까지 미세하게 훑는 저인망의 시각은 경건하고 고결하기까지 하다. 누군가가 재치 있게 표현했듯 그의 글은 디자인이 잘 빠진 대학입시 종합반 강의의 전범과도 같다. (학습용으로 제격으로 나는 그 매력에 끌려 한 달 내내 손에 들고 다니며 출퇴근 시간에 네 번을 연속해서 읽었다. 나 같은 일반 독자, 학습자에게는 요시유키는 흔치 않게 마주칠 수 있는 선물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받은 만족을 배신할 틈새는 처음부터 제법 커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구조주의, 특히 라캉의 주체이론이 권력관계의 자장에 갇혀 버린다는 이해가 선뜻 동의되지 않는다. 과연 라캉의 주체론이 그러하게 쉽게 사회과학적 담론으로 전치될 수 있는 물리적 국면인가? 저자는 라캉이 관력관계에 대책 없이 갇혀 버린다는 명제를 채택, 그 대칭의 축에 걸어 그 반사적 탄력으로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을 요령 있게 불러내고 그들을 유쾌하게 우아한 칼날로 발라내는데 보기 좋게 성공하고 있지만 정작 그 설정의 도식 자체가 논증의 세련된 격과는 별도로 어울리지 않게 좀 조악해 보인다는 것이다.

 

라캉의 주체이론, 그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정신분석적 권력을 과연 성급히 세속화(?)하여 우리가 반드시 극복되고 저항해야만 하는 어떤 사회과학적 권력으로 읽어도 될까? 라캉의 주된 목적 중의 하나는 그러하게 주체는 그러한 외부, 타자와의 거울관계에서 비로소 욕망이 추동되며 그러한 동력학에 의해 리비도가 에로스로 발생되고 폭발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하게 걸리는 정신분석적 권력이야말로 오히려 주체의 경험에서 자유를 가능하게 하고 그 무엇에 복종하거나 저항하거나 내적 힘으로 밀려 올려 진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차원의 권력을 요시유키처럼 지나치게 유물론적인 물질의 국면으로 전치, 단순한 공분의 대상으로 지시, 오독해 버리면 그 논리는 무엇을 향하건 리비도의 활성 자체를 문제 삼는 오버로 직진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요시유키 처럼 어떤 ‘권력’을 극복의 대상으로 지시한다고 할 때 애초 이 권력의 자장에서 비껴나 자유 할 수 있는 그 어떤 비권력적 사유가 가능한지도 분명해 보이지가 않는다. 우선 저자 자신이 저항의 기제로 차례로 열거한 무 규정, 다양체 복수의 기입들을 통한 단일적 권력의 극복과 파쇄 또한 그 자체가 또 다른 국면의 권력의 지위를 점하는 좌표가 아닌가? 그리고 또한 권력적 구조, 단일성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하는 비인칭적 역능, 개방성은 저자의 믿음처럼 또한 그러하게 논리적으로 비권력적으로 설정된다고 하더라도 (포스트구조주의 자체가 오늘날 해제되고 있는 지금의 현상이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과연 그 사유의 탈권력적 구조로 인해 권력적 주체를 무장 해제시키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새로운 것을 구성하고 창출할 수 있는 동력으로 (관념을 넘어)실제 작동되는 역능이 보장되는 국면인지도 의심스럽다. 곧 요시유키의 주체에 대한 프레임에는 이러한 '니힐리즘'의 혐의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의 사유성과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부연하자면, 요시유키가 대별해 내는 비권력의 권력, 그 규정될 수 없는 권력은 논리의 성격상 사유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렇다면 손쉽게 논의의 경계를 훌쩍 벗어나 오히려 이를테면 근거 없는 뉴 에이지류와 같은 유령적인 것으로 신비화되는 국면으로 방전될 우려가 있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그것은 기본 리비도를 향한 구축점을 유동적으로 희석시켜 결과적으로 권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주체를 해제, 주체를 경계선이 부재한 유실인으로 되돌려 ‘지금 여기에 있는’ 주체의 현존과 자유 자체마저 침식하는 사태로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곧 다양체로서의 비권력은 저항에 대한 보상과 환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실질적인 실체로 규정, 작동되는 현물이 아니라 현물은 없고 권력에 대한 대항의 로망이라는 일말의 윤리적 감성만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오독은 또 있어 보인다. 라캉의 결여가 그 무엇에 거울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결여인 한에 상응되는 타자에 의해 상징계로 성급하게 봉합되고 만다는 것에서 요시유키는 어떤 고착적인 운명론의 위험을 제기하지만 그 지점에서 열려있는 실재계와의 외밀한 조우는 주체를 항상적으로 불완전하게 열어놓는, 항상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저항의 자리, 일말의 혁명적 계기를 남기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이유때문인지 요시유키는 구조주의에서 라캉의 실재계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저항이 그렇게도 중요하다면 알튀세르만 하더라도 요시유키에 반하여 들뢰즈 식의 감성으로 독해할 것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라캉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요시유키의 논증과는 달리 우리가 알튀세르를 현존에 대한 우발성, 부재의 우위로 읽을 수 있다고 할 때 부재가 오히려 우위로 승격 배치되는 그 발상이나 도식 자체가 라캉의 외부의 우위라는 초월적(권력적) 도식을 더욱 유능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독해로 말이다.

 

그리고 알튀세르의 ‘부재’, 그리고 ‘아무것도 없음’이라고 하는 공백이라는 것도 그 겨냥하는 지점이 아무것도 없는 빈 지점인 한에서 모든 것을 세우고 건축할 수 있는 적극적인 권력의 혁명적 호출의 조건, 지형으로 알튀세르가 제출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것 역시 라캉의 아무것도 아닌 결여, 죽음충동의 그것과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알튀세르를 더욱 알튀세르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물론 알튀세르는 이 구도를 충분히 자신의 텍스트에서 남겨놓고 있다.

“이러한 미끄러짐을 통해서 스피노자는 모든 인식이론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세계“를 이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것’, 자연의 이론조차 없는 이러한 것으로서 승인하도록 해 주는 길을 연다. 즉 총체화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산 속에서 체험되는 유일독특한(unique) 그 속에 우리가 ”던져져“ 있고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우리의 모든 환상들을 주조해 내는 ”주어진 것“(제조물들)으로서 체험되는 유일독특한 총체(---)로서 ”세계“를 승인하도록 해 주는 길을 여는 것이다.”(「철학적 맑스주의」 ,서관모 백승욱 편역, 새길아카데미,56.)

 

                          

 

 

스피노자를 인용, 오마주하는 이 본문의 탈 총체화는 데리다, 들뢰즈의 다양체나 ‘산종’과는 분명 다른 국면을 안고 있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오히려 총체화의 일원론적 권력에서 모든 총체화의 비정통성의 권력을 전면적으로 부정함으로 더 강렬하게 창조적으로 작동되는 유일독특한 신성한 “세계”, 그 세계를 떠안은 주체를 이름이다. 이러한 전복된 방식으로 또 다르게 강렬해 지는 권력적 주체! 이것이야말로 저항을 진정으로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방식의 라캉식 권력형 주체가 아닌가?

 

이 지점에서 데리다와 구별되는 것은 스피노자가 배경으로 함의하고 있는 독특한 신의 이름이다.

““나는 신에서 시작한다”고, 또는 전체(le Tout)에서, 또는 유일독특한(unique) 실체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나는 그 어느 것에서도 시작하지 않는다”(je ne commence par rien)고 말하는 것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위의 책,51.)

 

자연도 아닌, 신을 향하는 것도 아닌, 그리하여 신이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는 그 ‘아무것도 아닌’ 외부의 무의 장소야말로 모든 것이 그로써 전격적으로 가능한 혁명적 건축이 발생할 수 있는 현존에 대한 우위의 공간으로 알튀세르는 거듭 제출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즉 이것은 라캉적 내,외부적 도식에서 외부, 부재를 더 강조함으로써 저항이 단순한 윤리적 감성이 아니라 권력적으로 작동되게 하는 장치의 사유로 확보되는 사태를 이름이 아닌가?(이 지점은 또한 명백하게 유한의 빈 구멍 '결여'를 그리스도, 신의 좌표로도 상응화하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 지젝을 생각나게 한다.)

 

이러한 공백의 공학을 통해서 알튀세르는 오히려 더욱 진짜 초인, 영웅을 초대하고자 한다.

“찢긴 인류 자체를 통일하기 위해 ”신공국“의 기초를 쌓도록 해 주는 이는 전혀 없다.”(위의 책,203.)

 

이러한 알튀세르를 우리가 어떻게 포스트구조주의의 방식으로 읽을 수 있을까? 그의 한 텍스트는 이렇게 장엄하게 마무리 되고 있다.

“예전에 별로 이름 없는 어느 데카르트주의자가 말했다. ”우리는 거대한 공기층 아래에서 살고 있지만 그 무게를 느끼지 못 한다“고. 오늘날 우리는 수미일관하지 못하고 모순적인(모순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엄청난 이데올로기 층 아래 살고 있으며, 자연히 그 무게를 느끼지도 못한다.---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그것에 인종하는 이 금찍한 조건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진짜 영웅주의가, 이 점〔대단한 영웅주의자라는 점〕에서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사람이며 항상 현재적이고 현대적인 마키아벨리의 영웅주의가 필요하다”(위의 책,204.)

 

그러므로 저항은 구조주의적 권력 발생 관계를 비껴나야만 한다고 하는 어떤 감성적 전치에서가 아니라 더 유능한 권력, 더 감산됨으로 성숙해지고 계몽되는 구조와 지형, 공간의 창출과 이동에서 오히려 비로소 현물로 가능해지는 것으로, 그러하게 읽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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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 대하여 동문선 현대신서 86
말렉 슈벨 지음, 서민원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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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책을 구입했는데, 저자 말렉 슈벨이란 분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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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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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에 관해 분분한 비평과 관점들의 차이에 대해 몇 몇 검색을 통하거나 이 고원에서의 관련 글들을 통해 확인했다. 물론 소설을 읽기 전 까지만 해도 별 관심을 갖지 않다가 그것을 단 숨에 읽고 나서 갑자기 관심이 생겼다고 해 두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소설을 별로 읽지 않는 나의 성향에서는 물론 신경숙의 작품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저께 고등학생인 딸아이의 책상머리에 바로 문제의 <엄마--->가 놓여있기에 호기심에서도 처음 집었는데 중간에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틈 빼고는 그냥 그 공간 안에서 단 숨에 다 읽어버렸다. 아니 그냥 단 숨에 읽히는 소설이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는지 모른다. 간결하게 문장이 평이한 문체로 단박단박 끊어져 있고, 그리고 역시 그 평이의 궤도 안 속으로‘엄마’라고 하는 이미지가 무슨 강박처럼 계속적으로 단순 반복됨으로 결국은 그 모성적 신비의 중첩에 독자의 마음이 무쇠라도 허물어져 내리도록 장치되어 있으니 단 숨에 읽혀지는 것이 전혀 무리가 아니다. 그러한 단순 반복은 요즘 소녀시대 류의 팝 음악 속에나 보이는 중독성 리듬과 박자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면서도 그 리듬에 자연스레 느낌과 생각을 맡겼고 그것을 편하게 즐기고 있는 나를 또한 느꼈다. 
  

어쨌든 신경숙은 우선 글이 읽히는 신경과 대중적 성감대적 요령을 잘 학습, 그것을 손쉽게  타격을 잘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엘리트 코스를 통해 직진한 전문적이라는 포스가 느껴지는 그 일말의 밀실 냄새가 나지 않는 것 같아서 신선하기까지 했고, 그러한 국면이야말로 시골에서 상경,‘공순이’의 자아 경계와 자기 저변을 관통, 마침내 자신의 글이라는 이름을 올리는데 성공한, 한 사람의 개성에 대한 아름다움으로 느껴져서도 좋았다. 정해진 코스의 선택된 소수자가 아니라 그 위계의 분절선 마저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리는 듯한 그 평이하고도 찐득, 질박한 감수성의 미감은 분명 그 희소성 차원에서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희귀종’의 개성적 권위를 점할 수 있다고 주장해도 누가 뭐랄 수 있을까? 
  

그리고 특유의 여성적, 신경숙만의 미끄러운 감수성, 그 렌즈에 의해 재배가 재편집되는 모성에 대한 기억 영상과 존재감, 역추적은 또 어떤가? 정확히 작가와 같은 나이, 같은 시절을 보낸 나에게도 그녀의 렌즈를 따라 가보는 모성애를 향한 탐색은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또 다른 세계로의 낯 선 여행 그 자체였다. 페미니즘적 대결적 성차에서 또 다른 성차의 세계만으로도 이렇게 기존의 묵고 침잠된 이미지가 새롭게 경험, 복권되고 있는 국면, 그러하게 세계차를 가능하게 해 주는 마술로 작동되고 있다면 그 힘, 자체만으로도 이미 그녀의 문체는 성공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이런 점을 긍정한다면 논란이 되고 있는 복수 화자에 관한 담론이나 인칭의 전도 같은 것도 스토리의 흐름을 더욱 산뜻한 차이로 격상시키는, 일종의 ‘넛지효과’쯤으로도 보아 넘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문제가 소설에서 보여져야할 인식의 파괴력이나 인간과 세계를 더욱 유능하게 해석하고 대결시키는 치열성과 그에 연관된 전문적 역량이라면, 그 함량의 국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이라면 또한 그녀에게서 어떤 결여를 맹렬히 변별하는 시각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부로의 섬예한 문제제기로서의 설정과 문체가 아니라 이미지를 선정적으로 벌여놓거나 사적인 전회를 향하여 무난한 풍경기로서 봉합되고 마는 전체 흐름이 이러한 국면에서는 손쉬운 표적이 되는 것은 분명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독자가 그냥 편하게 그녀의 글을 따라가게 하는 것은 낮은 하향적 초월의 얼굴, 엄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엄마의 권위의 그늘로 자수성가에 성공한 화자의 형제들의 편한 얼굴들이 아닌가? 성장기에 성공한 자녀들의 얼굴로 인해 엄마의 희생의 존엄이 구조적으로 구원되는 방식의 풍경기적 설정은 그런 경관임에 한해 상대적으로 전혀 그 희생의 존엄이 담보되지 못하는 수많이 또 다르게 희생되고 스러지는 탈신비의 어머니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고 하는 비판을 또한 즉시로 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여전히 산티아고와 같은 우아한 격자의 여행은커녕 지방, 귀향인사도 어려운 경제적 불구자들, 실종된 엄마를 찾는 사례금을 삼백으로 할 것인가 오백으로 할 것인가 하는 형제간의 팔자 좋은(?) 논의는 고사하고 만성적자에 가계 빚에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이를테면 ‘하우스 푸어’아니면 몸과 마음, 어느 한 쪽에 절단이라도 난 곤궁과 결여가 득실거릴 수 있는 가족에 비한다면 작품속의 작가에 약사에 괜챦은 토목기사로 구성된 가족 면면들은 지나치게 또한 유년기의 결여로부터 손쉽게 보상받고자 하는 자위적 경관이 아닌가? 그러하게 안전한 경관기적 세계관으로 작가가 할 수 있는 국면이란 그렇다면 잃어버린 그 무엇에 대한 향수를 자극, 고무시키거나 고작 색다른 감수성 공간을 변별, 돌파하는 퇴행적 작업이 아니고는 또 무엇일 수 있겠는가? 하는 의혹들을 이름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녀의 희귀종 문체라고 하는 것도 누구나 은폐하고 싶은 전 시대의 가족사, 성장기에 저마다가 축적시킨 핍절한 자의식이 그녀로 해서 어떤 내밀한 치장이나 무늬, 통하는 미술로도 역전, 반전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 짜릿한 면죄부로도 작동되고 있는 형국이므로 그녀의 문체가 아닌가? 그런 연유로 해서 그녀가 그렇게 잘 팔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나는 신경숙을 읽은 첫 경험에서부터 사실 좀 얼얼한 기분이다. 그에 대해 아무리 평가절하를 해도 지워지지 않는, 끈적한 질감의 그 무엇이 남는 것을 느낀다. 통속인지 전문인지 그 손쉬운(?) 구분선으로 해서도 잘 정리되지 않는 끈적한 그 무엇이 여전히 나에게 남았다고 한다면 내가 너무 그녀를 좋게 본 결과, 어떤 기시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문체로 인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자의 도구, 맨 몸의 힘, 즉 어떤 보편에의 용기와 입지전적인 소망의 질료감 같은 것에 살짝 데인 것과 같은 어떤 그런 유쾌한 느낌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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