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철학의 절대 문외한인 나는 요즘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와 <차이와 반복> 한글 번역본을 읽고 있다. 항시 위트로 자국어로 다시 번역되어야 할 책으로 이런 주요 철학자의 주저들이 거론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하물며 나같이 겨우 교양철학의 겉멋으로 읽고자 하는 직장인에게는 그 기본개념 자체들이 이미 폭력적인 침범으로 경험된다. “---모든 사유는 침략이 된다.”라고 하는 <차이와 반복>의 머리말의 문장은 이미 존재가 발산하고 무한히 생성 생동하는 그 기본전제를 처음부터 못 박는 들뢰즈 본연의 의미를 발포한 것이겠지만 그 ‘침략’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러므로 나에게는 문자 그대로 그 으스스한 인상으로 들려진다.

그렇게 쓰나미 같이 쇄도하는 폭력적인 혼돈이 두려워 기댈 언덕을 찾아 구원을 요청해 보곤 했는데 그 기대에 이정우의 철학아카데미편의 <현대철학의 모험>이 잡혔다. 그 책이 얼마나 잘된 책인지 평가할 능력이 내게는 전혀 없으나 나같이 무작정 맨몸으로 대양에 뛰어든 돈키호테에게는 고맙기 그지없는 친절한 안내서로 경험되기에는 충분했다. 당장 기본 개념에서부터 길을 잃어버리는 초보자의 눈높이에서 흐름을 잘 짚어 주었고 집필자들이 다 충실한 전공자들이어서 문외한에게도 이해가 되도록 쉽게 되어 있어서 좋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덕분에 가려웠던 곳들 구석구석이 잘 긁히는 고마운 경험들도 한다) 기왕에 거기에다 알랭 바디우의 <존재의 함성>도 같이 펴들고 있는데 들뢰즈에 대한 그 바깥, 대척점에서 비평과 다른 전제의 차이들도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물론 지젝의 <신체없는 기관>도 따로 대기시켜 놓고---.


이제 막 읽기 시작했지만 특히 들뢰즈와 바디우의 격론들은 존재에 대한 시간의 전복, 전통의 동일성에 대한 해체와 다의성의 우위, 그 역전된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보다 유목적인 기능성으로 세계와 사물을 포월 하고자 하는 현대철학의 주요 내용들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고 존재에 대한 일의성을 뒤로 두고 그 잠재적 표면으로서의 사건, 변화와 생성, 그 무한한 분화의 문제에 천착, 그 사유의 현대적 우주론에 몰두한 들뢰즈에 대해 보다 분명한 기본적인 이해를 하게하고 있다.

특히 그로인한 ‘차이’(Différence)에 대한 개념이해는 문외한인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고맙기 그지없는 사전소득이 아닐 수 없다. 차이는 고정된 이데아로 인한 불변의 존재에 대비된 지속 중에 있는 변화로 생성되고 있는 가변적 개체존재를 이름이 아닌가? 결코 동일자로 포월될 수 없는 내 외면을 향해 끊임없이 발산해 나가는 유동적 존재, 모든 개체 존재가 다 그렇게 유동적이므로 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결코 같을 수 없이, 다른 유동적 순수 차이 그것을, 전통철학의 개념과 대비되는 그 존재의 성격성을 담아‘차이’라고 개념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극적이고 국지전적인 뉘앙스를 전달해 주기 쉬운 그 차이는 결국 모든 존재일반을 일컫는 (이를테면 하이데거의‘존재’에 해당되는) 존재의 중심개념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 중요한 개념을 <차이와 반복>이나 역자의 해설에 의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다른 우회도로(<현대철학의 모험>)에서 어렵게 얻어져야만 할까? 심한 의문이 든다. 이런 심각한(?) 사태가 한 사람의 독자의 무식의 탓으로만 돌려질 수 있을까? 만일 이러한 사전지식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나 같은 독자들이 이 중요한 ‘차이’에 대한 기본 개념을 손쉽게 오독하여 같음에 대한 일상적인 다름의 의미로 이해했다면 어떤 기만적 과정으로 그 힘겨운 긴 읽기가 농락당한 것으로 전락되고 말았을까?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들뢰즈 스스로 말하는 일말의 우려처럼 차이가 그렇게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라는 그런 류의“아름다운 영혼”의 일상적 상식 범주에서 이해된다면 그런 유희적 상대주의야말로 “겉모습에 사로잡힌 신비화”로 끔찍하게 퇴행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나와 같은 완전 초보자는 항시 그런 끔찍한 함정에 노출되어 있는 수준에서 아직도 1mm만큼도 빼지 못한 채 그런 퇴행을 반복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천여 페이지가 넘는 분량들을 힘겹게 읽어가다 지쳐 놓아버렸던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도 다시 생각이 난다. 정작 700여 쪽을 읽어내고서도 씨름하고 있는 이 책 제목이 왜 ‘존재와 무’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안개 속에서 표류하고 있었던 그 한심했던 경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있게 해 주는 자기동일적인 것의 본연의 자세, 즉 즉자(卽自)를 의미하는 말인 것은 어렴풋이라도 감을 잡겠는데 그런데 ‘무’(le néant)는 왜 무일까? 아무것도 없다는 어떤 허무주의적인 진공을 언표 한다기에는 샤르트르가 규명하고 있는 인간은 부정작용과 타인의 요구적 시선의 인력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해 나가는 과정의 역동적 존재이고 그리고 그렇게 규명되는 그의 존재론은 심지어는 강한 사회적 실천으로 까지 치고 나가게 하는 강렬한 면도 엿보이는데 왜 ‘무’라고 했을까? 하는---


결국 이런 혼란들도 10개월여 간의 긴 표류 속에서 겨우 감을 잡는다. 그것도 지극히 기본적인 개괄적인 개념이해의 수준의 원위치에서---.


그 ‘무’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의 무(無)가 아니라 전통철학의 불변의 실재적 존재개념에 대칭해서 자기동일성에 붙잡힐 수 없이 원초적 ‘있음’에 부정적으로 생성적으로 벗어나고 그 모순에 자기기만과 그리고 타인의 시선들의 융합에 끊임없이 다른 타자적‘나’의 존재로 유동하는 그 ‘생성’을 지칭한 ‘무’가 아닌가? 현전적으로는 활발한 역동성으로 생성 변화되고 있는 살아 유동하는 개체존재이지만 불변하는 실재존재에 대비해서는 일정한 동일자에 고정될 수 없이 분산되고 흩어지며 다른 ‘나’를 만들어가는 그 붙들리지 않는 무정형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샤르트르는 무라고 언표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국 그 없다고 규정된 무는 사실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준동하는 현상적인 유였던 것이다. (한편 그 무는 해석자의 입장과 시각에 따라 그렇게 활발하게 외연으로의 생성과 형성 중에 있지만 결국 동일자적 관점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허무한 것’으로 해석되어 허무주의가 되기도 하고 동일자적 관점이 아니라 준동하고 있는 그 생성에 의미와 관점을 투사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또 같은 텍스트에서 매우 역동적인 의미와 지향적 건강성의 목적존재, 행동주의철학으로도 상반되이 경험될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면 샤르트르의 철학도 관념과 공간의 철벽을 뚫고 생성과 지속, 시간을 우위에 두고 거꾸로의 철학을 심화시켜 기계문명 이후의 존재와 세계를 전복적 사유로 새롭게 규명하고 해석하기를 노렸던 니체이후의 긴 주제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 정도만의 전체 이해도만 마련되어도 그렇다면 나는 다시 거의 포기했던 <존재와 무>로 돌아갈 수 있다. 발산과 분화, 그 흩어지는 단파적 파토스만으로는 유기적 흥미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는 해체주의 이전의 나인지라 단순히 실존주의라는 한 경향적 흐름에 포월되는 그 이상의 바깥, 전체흐름이 이해되면 더 적극적인 읽기를 향한 동기가 촉발되지 않는가?

(그렇게 중첩되고 복잡한 고유 연관 관계 중에 유기적으로 뒤엉켜 있는 철학 텍스트들을 오직 그 텍스트만을, 그것도 한글 번역본에 붙들린 제한된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는 치기어린 만용을 일삼고 있었으니 나는 도대체 어떤 독자인가?)


하지만 이제 겨우 개괄적 기본 개념을 그것도 핵심적인 용어들 몇 개만을 교양철학의 수준에서 기본적으로 건졌을 뿐인데 마음은 설레인다. 하이데거, 샤르트르, 들뢰즈, 바디우, 메머드급 거대철학자들이, 그들이 사용하는 논리와 용어들이 더 이상 나에게도 외계인들과 그들만이, 그들의 세계에서만 유통되는 암호들이 아닌 것이다.


몇 개의 문장, 한 마디로 정리되고 표현되는 개괄적 지식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더 심하게 폭력적일 때가 있다는 것도 이번의 표류 과정에서 실감했다. 이런 성장통(?)을 치루고 있는 나에게 이제는 기본개념들을 하나씩 더욱 견고히 타고 넘어 그 개념의 우주론적 유포 안에서 아울러지는 그 미세하고 광대한 변화와 차이들을 하나하나 노려 볼만한 만용적 용기도 경험해 보는 것이 가능할까? 소비되는 시간이 그만큼 무겁더라도---어차피 교양철학의 일환이니 더욱 편한 마음으로 즐긴다는 유희적 전제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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