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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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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에세이들 중에서 ‘적을 만들다’라는 제목의 글은 여전히 평범한 풍모의 문체들이다. 하지만 그 평범의 편안함 속에서도 역시 그를 읽는 재미는 조금도 반감되지 않는데,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그 에세이의 도입 부분이다.

 

 

언젠가 에코가 뉴욕에서 택시를 탔는데 파키스탄 출신의 운전기사가 이탈리아인임을 알아보고 뜬금없이 묻더란다.

 

“이탈리아의 적은 누구냐?”고.

“적이라니? 이탈리아에는 적이 없다. 우리의 마지막 전쟁은 반세기 훨씬 이전에 일어났고, 더욱이 하나의 적과 전쟁을 시작해서 다른 적과 전쟁을 마쳤다. 황당스럽게 적은 무슨 적이냐?”

 

시덥지 않은 말투로 대꾸하고는 호텔에 도착한 에코,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고 한다.

“지난 60년간 진정한 적들을 두지 않았던 것이야말로 이탈리아가 지닌 불행들 중 하나가 아닌가? 이탈리아의 통일은 오스트리아가, 다시 말해 시인 조반니 베르케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락부락하고 불쾌한 알레마니족”인 오스트리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무솔리니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불완전한 승리가, 도갈리 전투와 아두와 전투에서 에티오피아에게 당한 굴욕이, 그리고 유대인 금권 정치가 이탈리아에 부당한 제재를 가했다고 주장했고 이들에 대한 복수를 부추기면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글은 계속된다.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적을 만들다>>,12,13쪽)

 

무언가와 싸워야만 되는, 싸워야만 하는 욕망의 좌파는 특히 마땅하게 존재해야만 하는 적을 구축하고 그 기축을 중심으로 원주율처럼 선회하며 ‘정치’를 기획한다. 아니, 그에 붙은 ‘정치’란 것, 개념 자체가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바꾸고 지키고 유지하고 그 무엇으로부터 승격시켜 나간다는 대립적 구성력, 힘을 내용의 과정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무엇에 대하여 상응하거나 대응하여 발생시킨 욕망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만일 적들이 없다면 정치란 단어, 무수한 욕망을 투영하고 실어 나르는 그 매혹적인 로망으로서의 기표, 그 자체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여 최근 번역 출간된 <<철학과 사건>>에서 알랭 바디우의 이런 진술을 읽어볼 수 있는 것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정치는 언제나 모순의 성격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실험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상속받은 정치적 전통 속에서 중요한 점은 적들ennemis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반대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들이 있습니다.”(13,14.)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글, ‘적에 대한 그리움’ 역시 이런 맥락에서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가 있다.

“적이란 무엇인가? 적은 칼 슈미트에게 사회적인 범주가 아니라 실존적인 범주이다. 슈미트는 적이란 범주에 ”존재의 합당한 기원성“을 부여한다. 나의 적이 내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규정한다. 적은 확고한 정체성을 만들어 준다. 적은 형상으로 나타난 우리 자신의 문제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나 자신의 척도와 나 자신의 한계와 나 자신의 형상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 적과 투쟁적으로 씨름할 수밖에 없다.”” (<<문학과 사회>>,2015 여름호,466,467.)

 

칼 슈미트는 과연 인용구의 해석처럼 실존적인 범주로서만 적을 말했을까? 그에게 그 혐의 없는 뉘앙스로만 읽히는 적을 기술했을까? 더 찬찬이 숙고해 볼 일이지만 어쨌든 그 슈미트도 적이 없는 유실인간에 대해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통해 이런 문장을 쏟아낸다.

 

“어떤 국민이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서 자신을 유지할 힘이나 의사를 잃는다고 해서 이 세계에서 정치적인 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약한 국민만이 사라질 뿐이다.” (70.)

 

약한 국민, 정치를 상실한---.아닌게 아니라 오늘 역사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수여된 최대의 화두는 바로 이 정치를 욕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이 정치가 작동되지 않는 정치의 실종 사태가 아닌가? 권력의 실종이 아닌가? 역사 이후의 공간이라는 것은 결국은 이러하게 연체동물들만이 부유하는 ‘액체’공간으로의 변이가 아닌가?

 

하여 한병철은 위의 글에서 이 문제를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유주의에서 적은 사라진다. 적 대신에 ”경쟁자“가 등장하고 이는 정체성을 확립시켜줄 수 없다.---전 지구적 신자유주의는 점점 더 많은 안전성과 구속력을 해체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어떤 일자리도 안정적이지 않다.”(문학과 사회,2015.여름호.467.)

 

바디우 또한 <<철학과 사건>>에서 같은 문제를 이렇게 거론하고 있다.

“난점은 오늘날 이 적이라는 문제가 절대적으로 확실치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확실치 않습니다. 우선 세계적인 수준에서 볼 때,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는 매우 명확한 객관적 틀이었던 어떤 이원성을 종결시켰습니다.---다음으로 국가의 내부에서 볼 때, 계급이라는 여건은 우리의 사회가 중간계급(중산층)이 계속 확장되는 사회라는 생각을 위하여 제거됩니다. 중간계급이 민주주의적 정치의 진정한 버팀목이라는 생각이 도처에서 부과됩니다. 말하자면, 거대한 중간계급이 있고, 그 주변에---매우 부유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소집단이,---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의 매우 가난하고, 심하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14.)

 

결국 오늘의 딜레마는 이러하게 적이 사라짐으로 적이 모호해짐으로 어떤 ‘이원성’의 변증법적 분할이 더 이상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가? ‘역사 이후’의 공간, 자신의 ‘역사적’ 장소가 없는 무 장소의 문제가 아닌가? 적이 안개 속에서 산포되고 증발됨으로써 그로서 근대 이전의 로망이 걸리지 않는 무정치의 교착상태가 아닌가? 그럼으로써 적으로 인해 포착되고 발화되던 내부의 열정과 ‘행동’을 더 이상 의미 있게 설명할 수 없는 사태가 아닌가? 결국 이러한 무정치의, 정치가 작동되지 않는 사태는 그 공회전으로 말미암아 현대인으로 하여금 현저하게 “행동역량의 감소”를 초래했고 그 역량의 축소는 또한 현저하게 “존재하기 위한 노력의 감소”로 발전하게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가장 우려할만한 반-문명적 참상이 아닌가?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어떤 보편의 문맥으로 기술한 다음의 말은 결국 순수 생물학적인 국면에서도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욕구와 실존적 상황이 그들에게 요청하는 지능을 개발한다. 욕구가 멈추는 곳에 지능은 쉰다.”

 

그렇다면 당연히 오늘날의 가장 큰 화두는 당연히 이 정치의 발명, 다시 욕구를 발화시키고 증폭시켜낼 수 있는 적의 발명이 아닌가? 없는 적이라도 만들어내야만 더 이상의 의미 있는 생존이 가능해진다는 곤궁하고 긴박한 상황이 요청하는 그 정치의 화두가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늘 상 확인할 수 있듯, 이렇게 절박한 그리움에 의해 요청되는 '적'도 야누스의 얼굴처럼 가역성, 양면성을 지닌다. 정작 의미 있는 생존을 위해서는 적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적을 설정하고 발명하고 경험해나가면서 결국 그 ‘적’의 성공적인 경험자는 삶의 활력과 의미, 어떤 ‘활동’으로 구원되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구원된 바로 그 구원의 자유의 힘에 의해서 쉽게 또 어떤 폭력과 배제자로 변형되는 이율배반을 이름이다.

 

먼저, 이 ‘적이 그리운’ 곤궁의 지점에서 쉽게 출몰하는 것은 손쉬운 대체물, 적이 참칭되는 희화적인 사태가 아닌가? 여전히 누군가는 손쉽게 스스로에게도 기만적인 편 가르기, 진영 논리의 협착된 독설가, 적대적인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 지점에서 오늘도 자신의 정체성을 구원하고자 광신적인 수준의 근본주의자가 되고, 또 극단적인 경우, 바로 시리아로의 직행을 감행하기도 한다.

 

 

이 변곡의 지점을 또한 한병철은 최근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는 미셸 우엘벡을 사례적으로 들며 이러하게 지적해 두고 있는데 역시 꽤나 문제적이고 시사적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베크는 짧은 시간 동안 연달아 겪은 죽음들이 소설 <<복종>>을 쓰게 되었다고 이야기 했다. 그는 원래 고수하던 무신론으로는 자신이 사랑했던 개와 부모의 죽음을 극복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 상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소설의 주인공 프랑수아도 어떤 구속력을 향한 동경에 이끌려 의미를 찾아 떠난다. 소설의 원래 제목은 복종이 아니라 ‘개종’이었다고 한다. 소설의 초고를 보면 서술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으로 나온다. 최종본에서 그는 타락하고 소진된 서양을 등지고 무슬림이 된다.” (한병철,위의 책,467,468.)

 

자유가 바로 폭력이 되는, 개종에서 쉽게 복종이 되는 이 곤혹스러운 이율배반이야말로 인간의 몸에 ‘등에’처럼 들러붙은 낡고도 영원성의 지위를 지닌 딜레마가 아닌가? 이 심급의 딜레마의 그림자야말로 정치를 상상하고 기획하던 정치 철학, 정치 신학자, 수많은 현자들을 무수히도 괴롭히던 괴물이 아닌가?

 

하여 한병철은 이에 관련하여 또한 다음과 같은 교과서적인 미문 답안을 제출하고 있는데 역시 이 지점에서 숙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삶의 형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파도 좌파도 아니며 어떤 폭력과 배제의 형태를 띠지 않으면서 구속성과 연결성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또 그것은 시스템이 일으킨 손상만을 손보는 치유의 형식으로의 비교秘敎를 넘어서 영성의 가능성이 펼쳐질 수 있어야 하며, 셰어링sharing을 넘어서 진정한 증여와 공유가 가능한 삶의 형식이어야 한다.”(한병철,위의 책.468.)

 

지젝의 어떤 글에 대한 반론의 목적으로 쓰여진, 워낙 짧은 글에서의 마무리라 한병철의 처방전은 원론적으로 함축적이고 추상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안이 사인인 만큼 이 짧은 문장에 만족할 수 없다.

 

먼저 ‘적’의 지위가 어느 정도 폭력과 배제의 형태 너머에 있는 성좌임은 이미 칼 슈미트도 고전적인 어투이지만 이렇게 적시해 놓고 있지 않았는가? 곧 그가 구분한 사적인 적과 공적인 적이 그것---.

 

“적이란 공적인 적만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인간의 전체, 특히 전체 국민과 관련되는 것은 모두 공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독일어는 다른 언어와 마찬가지로 사적인 ‘적’과 공적인 ‘적’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오해나 곡해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자주 인용되는 구절인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5:44,누가복음6:27)는 라틴어로는 ‘사적(私敵)을 사랑하라(diligite inimicos vestros)'이며, 그리스어로는 ‘너희들의 에히도로스 모두를 사랑하라’이고, ‘너희들의 공적(hostes)을 사랑하라’는 아니다. 즉 정치적인 적을 문제로 삼지는 않는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42,43.)

 

 

역시 슈미트의 매력은 ‘적’의 위계, 지위를 명징하게 통찰한 것에 있지 않는가?

“정치상의 적이 도덕적으로 악할 필요는 없으며, 미학적으로 추할 필요도 없다. 경제적인 경쟁자로서 등장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어쩌면 적과 거래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게 보일 수도 있다. 적이란 바로 타인, 이방인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으로 족하다”(위의 책,39.)

 

하지만 여전히 슈미트가 말하는 적은 그 좌표를 상대적으로 훨씬 위계적으로 통찰해 낸 것 외에 전반적으로는 아무래도 국가주의의 히브리스가 민낯으로 표출되기 이전의 개념으로, 배제의 문제를 충분히 극복한 것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또한 그러하게 그의 언어는 사안에 대하여 법학자의 과학주의의 멘탈로 외부 분절적인 성향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좀 더 한병철의 ‘영성적인 가능성’을 존중하는 입장이라면 적극적으로 참고해야 할 접근은, 이를테면, 플라톤의 ‘대화’편 같은 데에서 나타나는 고대 철학의 보다 통합적인 감성이 아닐까? 방대한 플라톤의 <<법률>>의 초반부, 국가 대 국가 간의 전쟁을 대비하는 태세에 관해 논한 부분에는 반갑게도 이런 대화편이 수록되어 있다.

 

 

아테네인: 어떻습니까? 마을 안의 가정(oikia) 대 가정[의 관계]에도, 그리고 개인 대 개 인[의 관계]에도 동일한 것이 여전히 타당한가요?

클레이나스: 동일한 것이 타당합니다.

아테네인: 하지만, 저 자신(hautos) 대 자기[의 관계]를 [의 관계]로 생각해야만 하나요? 아니면 이번에는 우리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요?

클레이스: ---논의(logos)를 정당하게도 그 근원(arkhe)으로 이끌어 가심으로써 선생께서는 한결 더 명확하게끔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는 모두에게 공적으로도 들이고, 사사로이도 저마다 저들 자신들에게 들이라고 방금 우리가 말 하게 된 것이 옳은 것이라는---.

---선생이시여! 이 경우에도, 저 자신을 이기는 것이 모든 이김(승리)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이며 최선의 것이지만, 저 자신에게 지는 것은 모든 것 중에서도 가 장 부끄러운 것인 동시에 최악의 것입니다. 이것들이 실은 우리 각자 안에 우리 자신을 상대로 하는 전쟁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법률>> 1권,626c-e)

 

결국 헬라철학의 통합적 사고, 적에 대한, 비대칭의 대립에 대한 더 적극적인 통합적 사고야말로 이 경우에서의 고전적 모범이 아닐까? (그래서 한나 아렌트도 그 시대, 시민권의 멘탈리티, 공공적인 공론의 공간, 그 공간의 복권을 자신의 과제로 삼지 않았는가?)

누군가가 말했듯 플라톤의 ‘대화’는 또 다른 국면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말 걸기 하는 테크네와 그 감성이 아닌가?

 

곧 플라톤에게서, 이질적이고 타자적인 ‘적’은 먼저 국가 간, 공동체 간에 대립하는 외부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문제이기 이전에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 음영처럼 붙어 존재하는 어떤 극복 대상의 총합이다. 곧 헤겔식으로 비약하면 그 적이 바로 부정성의 다른 이름으로도 포착되는 것이다. 그렇게 주체 안의, 이러한 일말의 ‘영성’적인 성격의 통합으로 한다면, 라캉, 지젝이 그토록 복원하고자 하는 대립성의 이원적 구조는 저러하게 먼저 외부의 대립적 대항으로 설정되기 이전에 주체의 안과 그 밖을 선회하는 분할선으로 기입되면서 재구성되는 것이 아닌가? 저러하게 먼저 정치가 주체의 통합적 공간 안에서 가동되는 기제로 작동 되는 것이 아닌가?

 

랑시에르가 말하고 있듯, 정치의 본질이 “사회가 사회 자체에 대해 갖는 차이를 현시하는 불일치하는 주체화 양식들에 있다”라고 한다면 먼저 정치가 내 안에 저러한 불일치가 서로 환원할 수 없는 두 개, 아니면 복수로 혼재되는 것이 통합적으로 포착되는 그 원점에서 통각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방인은 난민처럼 타자로 배제선 밖에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에게 배제선 밖의 난민이며 국경은 그러하게 이미 내 안의 분열과 분할로 이미 운명적으로 아프게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 지점에서 주체는, 다음의 슈미트의 지적처럼 바로 분열의 주체의 자리에서 바로 국경, 경계인으로 내려(올라)가며, 바로 그러한 감산의 지점에서 일말 신학적 대상자의 지위, 즉 정치의 요청인의 위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 지점에서 신학자와 정치가는 내밀하게 조우한다.)

 

“진정한 정치이론이란 모두 인간을 ‘악한 것’으로 전제하는, 즉 결코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위험하고’ 역동적인 존재로 간주한다는, 기묘하고도 많은 사람들을 확실히 불안하게 하는 확인이다. 이러한 것은 어느 정치사상가에게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좋은 세상의 선한 인간들 사이에서는 물론 평화, 안전, 만인과의 조화만이 지배한다. 여기서 성직자나 신학자는 정치학자나 정치가와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존재이다. 원죄의 부정이 사회심리학적, 개인심리학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는 트뢸치와 세이아르가 무수한 분파, 이단자, 낭만파,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의 예를 들어 지적했다. 신학적 사유와 정치적 사유의 전제 사이의 방법론적 관련은 이와 같이 명백하다.”(<<정치적인 것의 개념>>82,86.)

 

연결해서 이 지위의 뷰-포인트에서 우리는 2014년도에 국역된 기욤 르 블랑의 <<안과 밖>>을 이와 병치하여 더욱 의미 있게 통합적으로 읽을 수 있겠다.

 

“국가는 안도 밖도 아닌, 안이면서 밖인 국경에서의 삶들을 필요로 한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국민 정체성의 핵인 국가적 내재성의 환상을 이해할 수 있다.---국가는 다만 “상상의 공동체”가 아니라, 권력관계들과 국경의 활용에 의존하는 실질적인 정치적 공동체다.” (<<안과 밖>>,20,21,189.)

 

 

그렇다면 저 타자, 난민이요 이방인이기도 한 나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저 이질적인 부정성, 그 ‘적’을 어떻게 맞이하고 환대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이 질문이야말로 적실성을 갖는 핵심적인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닌가? 이 질문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에 따라서 문자 그대로 정치가 ‘치안’이 될 것인지 ‘정치적’인 것이 될 것인지 그 성격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서동진이<<변증법의 낮잠>>에서 남기고 있는 글은 또한 여기에서 의미 있게 읽힐 수 있다.

 

“부정이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왜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들이 회심이나 개종이 라고 부르는 절차와 같은 어떤 것을 감행하는 것이다.---모순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세계를 모순적으로서 바라본다는 것은 세계의 악이라든가 고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추궁하는 것이다.(<<변증법의 낮잠>>,227,228.)

 

 

결국 이러하게 적은 자신이자 타자요 재 탐색된 부정성의 이름으로도 다가 올수 있는 것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이런 이원 대립적인 경계선의 복권을 통하여 다시 정치가 활성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적의 재 포착은 앞의 <<안과 밖>>을 번역한 박영옥의 말처럼 우리를 다시 어떤 가능성의 공간속으로 인도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타자들을 자기 안에 환대하면서, 자기 자신을 타자로, 외국인으로 발견할 가능성을 겨냥”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또한, 어떤 통렬한 역전, 환대에 도달, 자신과 세계를 바꾸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국가(자신)와 외국인(이질적인 부정성)의 관계를 뒤집어서 외국인(이질적인 부정성)을 국가의 위험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국가 갱신의 조건으로 고려해야 하지 않는가?”(<<안과 밖>>,218.괄호는 많은물소리 삽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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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의 외부는 없(있)다!

-봉준호의 <설국열차>에 대한 인문학적 후기

 

 

 

 

이 영화가 던지는 사유의 논점 중의 하나는 바로 마지막 장면, 열차의 외부에 대한 기대와 상상력일 것이다. 결국 폭주하는, 특히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로는 더 이상의 의미 있는 생존과 번영이 불가능한 만큼 프레임을 아예 열차의 바깥, 제로베이스로 옮기는 것이 가장 타당한 선택안이라는 영화의 메시지를 이름이다. 이 기획이 그만큼 급진적이라는 것은 이미 봉 감독이 두 아이만 남기고 모든 탑승객,(특히 앵글로색슨계의 백인들)이 멸절되는 잔인한 참사의 설정을 통해 충분히 말해 놓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러한 극단적인 묵시론적 파국의 네러티브를 말한 사람은 봉 감독이 처음이 아니다. 멀리는 기독교를 위시한 종교들의 종말론적 묵시록들이 있었고 그리고 그러한 상징들과 환상의 범례들을 시대의 매듭마다 유사하게 성속을 끊임없이 변주, 재해석한 ‘파국의 지형’도들이 있었다. 우선 이러한 맥락에서 그 중에서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미셸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우엘벡은 역시 현 상황(작품에서는 탈-근대, 탈-권위의 세계관으로 인한 의식과 윤리의 무중력 상태에서 유실되고 황폐화되는 액체 인간---)에 대한 어떤 대안으로 아예 유전자 공학을 통해 현 인류의 바깥, 즉 새로운 인종을 창안하자는 발상까지 거론하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바깥’의 상상력은 물론 그만큼 내부가 절망적이라는 이유 있는 통찰과 해석에 상응해 있는 것이어서 그러므로 그것은 문자 그대로 거의 자기 처벌과 자기 살해의 고통과 각오 없이는 누구든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국면을 함의하고 있다고 하겠다. 영화의 끝, 희망이라는 것이 겨우 극한의 기후 속에 북극곰을 마주한 채 맨몸으로 마주선 두 아이(아담과 이브?)의 지난하고도 허망한(?)풍광이라는 설정은 바로 그러한 상상의 곤혹스러움을 정직하게 은유하는 그림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외부에 대한 벽, 문을 여는 것이 왜 그러하게 급진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모험인가? 그것은 필시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대적으로 윌포드의 프레임(자본주의)이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치력, 즉 합리성, 즉 기능성에 있을 것이다. 그 기능성의 맹위가 사실은 인간의 본성에 터한 가장 근본적으로 합치되는, 근원성을 띠는 형태라는 인식에서도 그 외부를 상상하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그를 두고 감히 합리적이라는 명예(?)의 아우라를 덧씌우는 것도 그 보수적 세계관이 사실 인간의 본성에 가장 잘 들어맞는 적실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경제적으로 때려눕힌 역사적 사실 또한 이러하게 자본주의가 인간 내면에 작동하는 욕망의 원리를 그만큼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 아닌가? 우선 우리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 사실을 이 지점에서 다시 곤혹스럽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여기에서 합리(경제)적이라는 사실이 곧 정의로운 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평자의 단서를 냉정히 존중하고서---.

 

이런 맥락을 현실적으로 존중하는 입장이라면, 사실 콘트롤 타워, 엔진을 탈취, 정복하자는 혁명의 논리나 균등을 말하는 사회주의의 논리는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듯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윤리, 즉 감성의 문제에 가깝다. 현실의 시스템을 바꾸고 생산성을 변혁 관리할 어떤 구조의 힘이라기보다는 불평등의 야만을 그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발동시키고 충족시켜 주는데 작동되는 감성에 속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윤리적 감성에 속한다는 것은 동원의 힘 외에, 관념의 힘 외에 그 이후의 시스템을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별개의 국면으로 무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증명해 주듯 재구성의 권력, 즉 경제의 기능 문제로 연결되지 않는 감성은 곧바로 권력과 경제의 진공상태를 불러오고 그 공간에서 예외없이 항시 승리하는 쪽은 지배와 권력욕에 기반한 징그러운 권력유지의 기술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작금의 유럽식 사회주의가 직면한 딜레마가 보여주는 것처럼 복지나 기회의 균등 또한 전체적으로는 경제를 만성적인 불황에 빠트릴 수가 있는 요인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혁명이나 분배가 상대적으로 감성적이라는 사실에 우리가 적극적인 이유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윌포드의 달콤한 논리에 급소를 맞은 우직한 파이터처럼 흔들리는 커티스의 동요는 사실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의 이유 있는 동요이기도 하다.

 

그에 터하여 영화가 쉽게 권력의 분배나 복지의 균등 가능성을 말해 주지 못하는 이유 또한 바로 이러한 난관을 잘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물론 이 설정은 정치공학의 임계점을 넘어서 버린 오늘날의 금융자본으로 인해 더 이상 분배로 작동되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교착상태를 은유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의 노동마저 배제하는 기계화와 모듈화의 공정으로 더욱 막강해진 자본의 공학에 더 이상 기회의 균등이나 분배 따위는 없다!)

 

사안이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시선을 약간 옮길 필요를 느낀다. 커티스로 대표되는 혁명의 진영과 윌포드로 대표되는 보수자본의 양 진영이라는 판에 박힌 고전적 설정은 서사적 풍광기 이외에 사실상 의미가 없는(길리엄과 윌포드의 공모관계는 사실 양진영이 서로의 적대로 인해 유지되는 필요충족율의 역설적 양면을 은유한 것으로 전혀 반전의 설정이 될 수 없다. 하여 그 은밀한 적대적 공모는 권력탈취 후의 이를테면 커티스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도 결국은 예외가 될 수 없는 동어반복의 문제다.) 것으로 그 모두를 정신분석적 권력의 시선,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보는 관점을 이름이다. 우리가 정의와 윤리를 사유할 때에도 본성을 고려할 때 그만큼 더 유리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입장에 있는 관객이라면 더욱 이 관점을 좋아할 것이다.

 

그쯤 해두고 이제 예의 그 열차의 ‘외부’를 상상하는 마지막 장면으로 가보자. 앵글로 색슨계의 백인으로 상징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문명이 파괴되고 멸절된 자리---새로운 인류의 희망인 비 백인계의 아담과 이브가 살아남았다. 하지만 열차의 외부에 서있는 그 가능성이 그만큼 희망적일까? 그냥 간단히 말해 이런 맥락에서 사안이 그렇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불리하도록 황망하고 어려운 자연과 생존조건, 저 쉽지 않은 환경과 싸워 생존을 보장받으려면 인류는 더더욱 그것을 개선시키고 변개시킬 권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권력형 문명을 추구하지 않을까? (아니면 문명의 위계를 버리고 수렵문화로 겨우 생존을 유지하는 원시 생태계의 수준에서 만족하는 편을 택하는 방법도 있겠다.)

 

그렇다고 한다면 단순히 인종과 공간만 바뀌는 물리적 변환이 추문적이라면, 이 지점에서 상상할 수 있는 외부는 이를테면 슬라보예 지젝같은 철학자가 말하는 또 다른 성격의 ‘외부’가 아닐까? 저 ‘외부’가 지리적 공간의 외부가 아니라 정신분석적 외부의 공간을 이르는 그 ‘외부’를 이름이다. 오늘날 라캉을 호출하며 인간의 무의식 내부에 존재하는 결여와 근원적인 구멍의 결핍을 거론하는 탈-해체론의 철학자들의 고민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면 그들이 열어젖히는 외부를 숙고해 보는 것은 또 어떨까?  설국열차의 물리적 외부와는 달리 정신분석이 지시하는 외부는 인간의 마음의 변환을 기획하는 저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좀 다를 수 있다. 곧 똑같이 권력관계의 자장에서 벗어난 지점, 새로운 권력이 창출되고 새로운 욕망이 발명되는 혁명적 지점을 호출하되 후자의 외부는 보다 정신이나 내면의 재건축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 좌표가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냥 간단히 말해 오늘날 지젝은 인간이 의미 있게 계속 생존하려면 누구나가 인민이(외부) 되어야 할 것을 주문하고 있지 않는가? 그 인민의 자리로서, 단순한 사회과학적 담론, 계급 위계로서의 인민이 아니라 경제적 위계나 권력의 위계와는 상관없이 누구나가, 내가 결국은 치명적인 결여와 곤궁의 빈 구멍을 지닌 한 연약한 인간이라는 자각, 그 외부, 자신안의 ‘외부’로 내려간 인민이 되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내가 아무것도 아닌, 무의 존재를 넘어서 ‘없음’보다 더 없는 마이너스의 자각을 통해 의미 있는 삶의 욕망을 발생시키고 그 부정의 낮음의 보편성으로 해서 권력관계의 위계를 넘어설 수 있는 공감과 연대로 재구성되는---.

 

이러한 보편의 공간이 존재할 수 있다면, 이러한 내적 혁명으로서의 공간은 그야말로 권력이되 그 권력의 힘이 더 이상 지배와 위계로 작동되지 않는 의미 있는 외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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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현상학 뉴아카이브 총서 6
미셸 앙리 지음, 박영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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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물질 현상학>을 읽어 내려가면서 떠오른 것은 뜬금없게도 신학자 칼 바르트였다. 그가 그리스도인의 핵심 윤리 과제인 ‘성화’를 설명하면서 칼빈에게서 빌려 온 개념인 ‘동요(動搖,die Unruhe)'가 바로 그것이다. 윤리란 의지의 연속 작용이나 칸트적 이념과 같은 목적, 당위성의 전범보다는 어떤 권력적인 충격과 물질적인 의식적 힘에 의해 역동적으로 밀리고 흔들린 효과에 의해 비로소 거론될 수 있다고 통찰한 그 기독교 정통주의적 발상을 이름이다.(이에 관해서는 <로마서 강해>나 2010년도에 출간된 이정석의 <하나님의 흔드심-칼 바르트의 성화론>을 보라.)


그러고 보니 이 책, 앙리의 텍스트에도 동일하게 이 ‘동요’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는 데 그것은 분명 의식이 살아 있는 힘이어야 한다는 이해에서 이미 양자 간 발상에서 일말의 친근성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기사 앙리의 절반 이상은 이미 신학이 아닌가?

“그런데 이 소여들 그 자체가 손상을 입히는 것은 다만 흔들리고 불완전한 이 소여들의 토대 위에 세워진 이성성만이 아니라 소여들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론적인 동요의 결과이다.”(122.)


그러니까 결국 앙리도 인간의 의식이란 생성이나 운동만이 아니라 자신을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세우게 하고 자신의 제한과 곤궁의 아픔과 영광 속에 직면하게 하는 살아있는 흐름이자 ‘인상’이요 힘의 과정이라고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사유에서 “삶을 인식할 수 없는 무능”(<육화, 살의 철학>,127.)을 넘어 욕망이 가능하고 향후 스스로의 수동성에서 역동적으로 운동하게 하는 인식의 토대, 통로를 열어 놓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우선 이러한 앙리의 과제에서 볼 때 후설은 인식의 토대를 정초하는 소중한 과업을 열어젖힌 형편을 뒤로 두고 그 사유의 성격이 이성적이고 인식론적인 경향성에 편향되어 있는 한계를 지닌다고 반성된다. 의식의 토대요 출발점인, ‘내가 지금 여기에서 생각하고 존재 한다’는 소여성에 대해 후설의 사유는 그리스적 이성성으로 그 소여성을 구성적으로 기술하고 설명할 수 있을 뿐 그 소여성이 나타나게 되는 나타남 자체, 더 나아가 즉 그 나타남을 느끼게 하는 정감이나 실질적 인상을 밝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소여성이 단순히 일반적인 의식을 개화시키는 코기토로서의 인식론적 기능뿐 아니라 제한과 좌절,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이 운명적임에 한해 그에 대해 소중하게 리비도를 폭발시키는 욕망의 발전소, 가능성의, 삶과 그 정감의 촉발점으로까지 보다 유능하게 정초되고 해명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로 앙리는 후설이 전개한 지향성을 중심으로 한 인식론적 사유에서 그 성격을 달리하는 사유로 전환, 과월 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현상학에서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국면에서 의식의 토대를 구현하고자 하지만 그리스적 사유의 고전적 구성의 경향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질료’라는 협의의 세계에서, 더 살아 있는 현실로 내려가 정감으로 느끼고 고통 하는 심리적 느낌이자 실체인 ‘살’이자 ‘물질’이라는 보다 능산적인 사유의 현상학으로 과월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앙리는 키르케고르에 기반 하여 키르케고르의 변증법, 즉 정념적인 변증법을 내속화 하는 사유로 이 통로를 증폭시키고자 한다. 


즉 보다 유능한 가능성을 “꾀어”내기 위해서 더 깊은 죽음, 부정의 사유로 내려가 키르케고르를 안으로 기대어 후설의 소여성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운명과 피할 수 없는 제한, 곤궁의 죽음으로까지 초월화, 그것을 절대화 하는 것으로 이 ‘과월’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하여 이 지점, 제2장 '현상학의 방법'에서 앙리는 후설과는 다른 초월의 얼굴을 분명하게 변별,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이 부분은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웠다.


후설에서의 초월은 주체에게 주어진 코기토적 수동의 심리적 조건이 인식-구성적으로 파악되는 의미에서 내속적인 초월이다. 하여 그 주어진 상황의 소여성은 역시 인식-구성적 상황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이러한 인식-구성적 주어짐의 상황 구조 속에서 이해되는 초월은 그 상황이 다만 주체에는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주체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주체의 능력 밖이라는 의미에서 초월이라는 지위가 부여되는 것으로, 그 초월이 이를테면 신학적 의식에서 운위되는 인격적 타자의 유신론적인 위격은 아니다. 이러한 이성적 초월이라는 개념은 그것이 주체의 의지 밖에 있는 외설적 국면이라 하더라도 곧 역시 이성적이고 인식론적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한계를 지닌다. 이러한 유물론적 일원론의 인식론적 초월에서는 사유의 시원적 개시점인 소여성도 후설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구성적인 차원이 되고 만다. 처음부터 의식에 대해 피와 살의 살아 있는 어떤 힘의 세계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인식-구성적으로 이해한 만큼 그 소여성도 결국 그 범주에서 소극적인 이해에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앙리 또한 주체의 소여성이 주체의 의지 밖에서 주어지는 구성적 초월이라는 철학적 초월 개념에는 후설과 같다. 하여 후설과 같이 초월에 대한 이성적 위계에서는 차이가 없다. 곧 앙리에게서도 초월은 이성 밖의 절대 타자의 신적 위격의 그것이 아니라 절대 의식 경험 안에서의 안과 밖, 뫼비우스의 띠처럼 구성되고 작동되는 내부적 단층으로서의 자기-내의 생성, 초월인 것이다. 하지만 앙리는 키르케고르의 얼굴을 내면화하여 이 소여성의 초월에서 정념적인 정감성을 안으로 내장, 결정적으로 차원이 다른 초월을 발화시킨다. 곧 이 초월적인 소여를 더 역동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변증법이 걸리도록 죽음의 사유의 장으로 현상학의 토대 자체를 아예 근본적으로 옮기는 것이다. 곧 그리스적 사유에서 울림과 진동, 동요를 가져오는 정념적인 변증법의 자리, 키르케고르의 장, 진자 속으로 차원을 바꾸어 정념적인 작동을 제대로 활성화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하게 키르케고르의 정념적인 변증법의 구성력으로 하면 소여성은 다만 주어지는 수동성이 작동되는 구성을 넘어 더 깊은 인간의 불안과 무의 근원에 연결되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거의 결정론적인 신학적 인식으로 까지 승격된다. 인식-구성적인 범주에서 과월하여 내가 지금 여기에서 불안과 무의 심연에 절대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라고 하는 피와 살을 느끼는 문자 그대로 ‘심리적 물질’의 중심에 정초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하게 소여성이 키르케고르의 ‘불안’의 효과처럼 결정론적인 ‘물질’로 경험되게 되면 소여성은 어떤 인식론적 구성에서 더 적극적으로 수동적인 범주의 ‘증여’, ‘자기-증여’로 더욱 역동화, 치환된다.

항상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자신의 힘과 다른 힘이며, 이 힘 안에서 봄은 자기-촉발이며, 그런 방식으로 자기가 보는 것을 느끼며, 자기가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본다videmus”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보는 것을 느낀다sentimus nos videre"라고 말해야 한다. 이 자기-촉발은 본래적인 현상성이며, 자기-증여로서 본래적인 증여이며, 예를 들어 봄이 자기 자신을 주는 자기-증여이다. 다만 이 자기-증여만이 구조적으로 ‘관계함’에 이질적이다. 자기-증여는 그 자체로 이 ‘관계함’이 아니며, 절대적으로 그것의 배제이다. 자기-증여는 자기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존재한다.-초월성이 아니라 근본적인 내재성이다. 이 근본적인 내재성의 지반 위에서만 초월성으로서의 어떤 것이 가능하다.”(159.)


이렇게 소여가 절대적인 소여로, 그리하여 자기-증여로 치환되면 주체의 정념은 역시 내용이 달라진다. 코기토로서의 인식론적인 범주인 후설적 ‘개체’에서 그야말로 키르케고르의 절대 앞에 서 있는 ‘단독자’의, 보다 신학적이고 충동적인 정념으로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곧 구성되고 인식된 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근원 지층의 심리적 조건 속에서 스스로 배제되고 그 배제의 효과에 의해 주어지고 증여된 존재로 자신의 ‘여기 있음’의 운명이 더욱 피와 살과 짐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념의 스펙터클한 자기-내 생성의 초월 역학 구조는 거의 신학적이고 결정론적인 국면에 상응하는 효과를 창조해 개체로 하여금 더 유능하게 피와 살로 흔들리고 동요되어 더 자각적으로 깨어난 존재에 이르게 하지 않는가? 

“cogitatio는 진정으로 실존이 아니다. 다시 말해 실존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이성성을 설립하기에 적합한 실존이 아니다. 그것은 cogitatio가 ‘단독적’이기 때문이다. cogitationes에 첨가되는 이 ‘단독적’이라는 관형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어지는 이 강의 전체에서 cogitationes의 자격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결국 그것을 철학적 문제의 지평에서 제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이 말에 경멸적인 방식으로 붙게 되는 이 관형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이것으로서, 순간적인 것 이상의 사실성 안에서, 비존재로 미끄러지도록 정해진 체험의 한 조각 그 자체에 한정된 환원 불가능한 성격을 표시한다. 단독성singuralite의 개념은 여기서 개체성individualite과 등가이며, 개체성은 시간 안에 자신의 자리에 의해 사물의 개체성 혹은 단독성을 정의하는 개체화의 원리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123.)


개체에서 단독자로, 앙리의 초월의 정념적인 효과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 이상 개체이기를 그치고 개체를 넘어선 단독자는 인식론적 범주에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심리적 ‘살’로서의 토대인 이를테면 키르케고르의 부정성, 초월의 무에 매 순간 접속되는 관계로 그 접속되는 불안과 무가 살아있는 느낌을 증여하는 인상인 만큼 매 순간 역사를 초월하여 항상 죽고 항상 새로이 경험되는 결의와 결단을 되돌려 받는다. 인식은 이 세계와 역사의 범주, 즉 ‘상기’ 와 ‘재현’이라고 하는 구성된 개념의 세계를 되돌려 받지만 강렬한 초월은 그 동요와 정념의 경험과 인상을 통해 ‘반복’을 추동시킬 만한 심리적 힘을 효과로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면은 물론 이미 키르케고르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이 명칭을 그대로 보존한 채, ‘제1의 철학’이란 이름 밑에서 이교 세계의 전체 학문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 제1의 철학의 본질은 내재성, 혹은 그리스적인 명칭으로는 상기想起라고 한다.) 그러고 나서 ‘제2의 철학’이란 이름 밑에서 그 본질이 초월 내지는 반복反復**인 철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임춘갑역, <불안의 개념>,37.)


앙리가 키르케코르를 내속적으로 욕망하고 현상학의 사유에서도 신학을 한 몸으로 욕망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유를 넘어설 수 있는 정념적인 초월의 가능성 때문이 아닌가?


어쨌든 이러하게 앙리는 현상학의 전제 자체를 아예 정념성의 변증법의 안으로 옮겨 결국 욕망과 에로스적 충동까지 스펙터클하게 가능한 현상학을 재 정초하고자 한다. 그러하게 키르케고르와 동일한 올림의 언어로 그 부정성을 변증법적인 ‘가능성’으로 보며 이 가능성을, 앙리는 자신의 현상학적 ‘초월’로 휘발시켜 폭발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미처 이 좁은 페이퍼에서는 정리할 수는 없지만 앙리는 그 부정성의 보편으로 해서는 현상학을 더욱 현상적이게 해서 역시 공-정념, 인식의 외피를 뚫고 진동의 울림으로 공명되는 공동체의 이념과 타자에 대해서도 유능하게 말을 걸고자 하는데, 이것이 또한 보기 좋게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편으로 신학적인, 그것도 기독교 정통주의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특히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앙리의 이와 같은 기획과 초월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번역자는 <육화, 살의 철학> 해설에서 출판된 앙리의 신학적 현상학에 대해서 프랑스 국내에서도 신학 쪽이나 현상학 쪽, 양자에게 일말의 비토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재치 있는 에피소드로 보고해 주고 있는데 신학 쪽에서 기독교를 잘못 이해했다는 평가를 되돌려 받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기독교적 논리의 맥락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앙리적 맥락에도 해당된다.


간단히 말해 먼저, 의식에 관한 이해에서 신학의 입장은 다르다. 앙리는 후설의 인식론 범주의 의식을 다룰 뿐인 고전 현상학의 한계를 문제 삼아 인상과 정념으로서의 의식으로 대체하고자 하지만 신학은 그 의식이 바울의 신학에서처럼 인상과 정념을 넘어 일종의 권력 상태라고 이해한다.(에베소서,2:1,2) 단순히 구성되어 주어진 의식을 시원으로 경험하고 그것을 의지적으로 변별하고 또 다시 구성해 낸다는 흐름과 그리고 앙리의 의식과 같은 정감, 정념적인 운동을 넘어 내면을 잠식, 점령, 황폐화 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는 또 새로운 권력으로 굴복시켜 휘황하게 활황화 될 수도 있는 그러한 권력의 가능 형식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의식이 그러하게 권력의 형태로 생성되고 흐르고 유동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또 그 권력의 변동과 사건을 현상학은 어떻게 사유되고 어떻게 구성할되어야 할 것인가? 전통적인 기독교의 이해처럼 그 의식이 권력이라면 그 권력을 전복하고 의미 있게 개시하려면 과연 초월도 어떤 위계와 단층적 구조로 구축 되어야 할 것인가? 신학은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그 자신 고유의 교의학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 하는 편에 서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앙리도 여전히 기독교의 이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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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신학적 언어의 복권은 필연적인 흐름으로 보인다. 철학을 말하고 윤리를 기입하기 이전에 욕망이 걸리지 않는, 다시 말해 정치가 발생할 수 없는 후기 근대의 타자의 부재, 부유하는‘액체’형 무정치 공간이 이제 다시 신학을 욕망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필연으로의 회귀는  철학이 자초한 것이며 하여 손을 내민 쪽 역시 철학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 미셸 앙리 스스로가 발설하고 있듯 이제 “철학과 신학은 경쟁자들이 아니”(471)라 더 적극적으로 성적 관계 수준으로 올라가는 공모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무엇의 계기를 산출하게 하는 폭력적 시원을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오늘날의 철학에 비해 신학은 특성상 항구적으로 결정론적인 전제, 뚜렷한 고체의 경계면을 가지고 있다. 전제가 없는 사유는 그 무엇을 느끼고 설정할 수 있는 준거점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지만 탄력을 기축할 수 있는 신학적 사고는 그 고체의 근거 면에 반사되어 화학적인 반응이나 감각을 발생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윤리라는 것도 결국은 바로 이 정치의 가능성, 활성화 뒤에나 가능한, 권력 이후의 게임이라고 믿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오늘날의 이 ‘정치적인 것의 귀환’현상을 반길 것이다.   


그렇다면 앙리의 신학적 철학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그것은 먼저 내가 여기 존재한다고 하는 삶의 수동성을 현상학적으로 느끼고 파악하는 그 ‘살’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바디우 식의 표현으로 하자면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수동적 양태의 ‘도래’요 발생된 ‘사건’이 아닌가?  “최초의-지성체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낳는 절대적인 삶의 내적 운동에 속하며 자기-생성의 과정이 완성되는 방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삶은 자신의 것이며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는 삶이라는 조건에서 자기 안에 도래하면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낳는다.”(43)


키에르케고르를 충실히 안으로 기대어 앙리는 먼저 자신을 현상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무구에 대한 애초의 정념적인 불안으로 이해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무중력의 무화 상태에서 인간은 최초의 불안을 경험하게 되고 그 불안은 자신이 구체적으로 자신의 물질적 신체에 제한되어 있다고 하는 ‘애매한’ 종합에서 그리고 남녀의 신체적 성차에서 더욱 실재적으로 심화된다. 현상적으로 주어져 느끼는 이 필연적인 심리적 곤궁과 결핍의 불안이야말로 존재에 앞서는 외설적이고 초월적인 것으로서 피할 수 없는 삶의 전제라는 것이 앙리 현상학의 중심 정초 논제다.


왜 이것을 앙리는 중심 전제로 정초하는가? 이 초월론적 경험을 시원적 전제로 해서 인간은 비로소 그 밤의 부정적 힘을 가능성으로 자각하며 스스로의 권력을 발생,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이라고 하는 이 시원적 상태가 인식 이전에 현존한다는 기본 전제야말로 자신의 의식을 구조화하고 그 불안이 모순과 불일치의 애매한 불안인 한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용출시키는 계기로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기축점으로서 앙리 철학에서는 기본 코기토인 것이다. 이 전제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증여된 여기-있음을 불안과 모순, 결핍, 즉 ‘살’로 느끼며 그와 함께 스스로의 가능성의 계기를 산출하고 심화시켜 나아간다.


이 증여되어 수동적으로 느끼는 심리적 물질, 이것이 살이며 이 피할 수 없는 현상학적 토대는 그래서 바로 앙리에게서는 신학으로 변환되는 회전점으로 전유된다. 이 부정할 수도 변할 수도 없는 이 물질적 전제야말로 모든 사유가 개시되는 흔들 수 없는 계기라는 말이다. 결정론적인 신학의 기능을 떠 앉은 이 고체적 공간의 계기에서 비로소 인간은 그 삶에 대한 말하기가 가능해질 것이며 욕망이 발생하는 고유의 화학작용이 점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앙리는 이 전제, 밤의 기축점으로 해서 정작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사실상의 언어, 즉 욕망의 유능한 가능성을 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를 따라 불안을 느끼는 시원적 경험에서 인간이라면 예외자 배제자가 존재할 수 없는 만큼 그 유능한 욕망이 또한 모든 사람, 어느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가능할 것이라는 비밀의 문을 개방하고자 한다. 키에르케고르가 가슴 설레며 말했듯 그 배제자 없는 불안이야말로 배제자 없는 ‘보편’의 마법이 걸리는 최고의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불안을 올바르게 배운 사람은 최고의 것을 배운 사람이다”(임춘갑역, <불안의 개념>,309.)


“---각자를, 가장 미천한 가장 무의미한 각자를 그 자신의 것인 환원 불가능한 단독적인 개인성 안에서, 본질적으로 여기 혹은 저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발견되는 초월론적인 자기의 조건 안에서 유지하나, 이 어딘가 quelque partr가 극복되어야 하거나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될 수 있거나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만이 인간을 무에서 건져낸다.”(460,강조는 저자)


특히 이 키에르케고르의 자산을 더욱 내밀화한 가능성의 보편은 현상학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함께 미셸 앙리가 왜 유럽에서는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는 철학자인지 알게 해 주는 지점으로 나는 읽었다. 하여간 나는 2000년도에 나온 이 의미 있는 철학서가 왜 이제야 번역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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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주드 로 주연의 2001년작 전쟁영화 ‘에너미 앳더 게이트’에는 이런 흥미로운 대사가 나온다. 영화에서 러시아 공산당 정치위원으로 나오는 다닐로프(조셉 파인즈)가 동지에서 연적관계로 발전해 버린 불세출의 저격수 바실리(주드 로)에게 내뱉는 말--- 
“나는 평생 사람과 세상이 공평해야 한다고 믿고 그 신념을 위해 싸워왔지. 하지만 아무리 싸워도 별수 없이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하더군. 누구는 아름다운 여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만큼 매력적이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지. 누구는 총을 잘 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게 서툴지---”    

마르크스가 정의로운 세상을 위하여 계급적 질서와 위계를 구성하게 하는 소유 관계를 부정한다고 할 때 모든 소유문제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여 ‘공산당 선언’에서도 철폐와 전복의 대상으로서의 소유를 그냥 소유로 지시하지 않고 ‘부르주아적 소유’로 명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분열과 위계적 차이, 굴곡의 불공정성 자체를 아예 부정해 버린다면 그야말로 인간은 자신의 생존에서 꼭 필요한 욕망과 의미 있는 충동, 추동의 자리 자체를 부정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반대로 강고한 차이의 장치에서 불공정한 게임에서 욕망과 충동이 발생하고 제대로 추동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는가? 하여 문학평론가 정여울 씨도 최근의 한 칼럼에서 지젝을 인용하며 이러한 역설적 국면을 재치 있게 진술하고 있다. 

“엄격한 부모가 자유방임적인 부모보다 훨씬 창조적인 아이를 길러낸다고 하는 것은 동서양 부모들의 공통된 합의사항이다. 지젝은 이렇게 설명한다. 엄격한 부모아래 있는 아이는 겉으로는 복종하더라도 내적으로는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훨씬 교활한 것은 포스트모던한 자유방임, 비 권위주의적 아버지의 명령이라고 한다. 예컨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정말 원하는 대로 하거라!’는 식으로 말하는 부모가 훨씬 교묘한 독재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의 내적인 자유를 강탈하고, 아이의 할 일뿐 아니라 스스로 원해야 할 것과 느낌까지 명령하는 것이다. 엄격한 금지가 오히려 내면의 빈 공간을 만들고, 그 내면의 공터에서 창조적 질문이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저 유명한 칸트의‘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도 이런 문장을 병렬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 안에 역설적인 것이 담겨 있다. 즉 ‘시민적인 자유’의 정도를 확장하면 할수록 그것이 시민들의 ‘정신적인 자유(Freiheit des Geistes)'에 유리해 보이지만 실은 정신적 자유에 오히려 엄청난 제약을 가져오게 된다. 그와 반대로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감소시키게 되면 오히려 시민들이 자신의 전반적인 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처럼 딱딱한 껍질 안에 자연에 의해 가장 소중하게 간직되고 있는 맹아인 ’자유로운 사고로의 경향과 사명’---”(칸트,「칸트의 역사철학」,이한구편역,서광사,22.)   

 
탈-권위, 해체주의는 동일성의 차이로 인한 그 폭력성을 제거하느라 모든 차이와 위계에 대해 부정의 혐의를 덮어씌웠지만 정작 돌아오게 된 것은 그 고귀한 평등을 느낄 심리적 토대, 경계선마저 희석시켜 평등이라는 정의 설정 자체가 감성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사태가 아닌가? 그러한 결과로 오늘날 포스트모던 이후의 무공간의 현대인은 다시 자신의 내부를 경계 짓고 창조해야만 하는 원점의 원시인적 딜레마에 재 직면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여 우리는 다시 내부와 외부에서 어떤 식으로든 분절을 긋고 자신의 공간을 재 구원해야만 하는 문제에 되돌아오게 된다.       

“장소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외부로부터 분리된 내부를 창조하는 것이다.---내부에 있다는 것은 당신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E.렐프,「장소와 장소상실」,김덕현외,논형,116)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저 의미 있는 장소를 위해 다시 근대적 계급, 계몽의 추문적 기획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저 장소를 구원하기 위해 포스트모던한 감성과 논리자체까지 무작정 부정할 필요는 또한 더더욱 없을 것이다. 어차피 서로의 사유들은 적대적으로 은밀히 공모하여 서로를 살해하고 그 시체들 위에서 더욱 유능한 사유에 이르게 하는 이율배반적 상응의 토대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계급적 평등, 사회과학적 평등을 확보하고서도 주체의 리비도 활성화를 위해서 어떤 불평등의 위계를 용인할 것이며 어떤 내 외부의 구조적 위상 공간을 인정, 옥석을 가릴 것인가? 오늘날 어떠한 곳에 어느 곳에 이러한 불평등의 자리를 위치지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위에 인용한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의 첫 문장은 또한 의미 있게 다가온다.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 미성년 상태의 책임을 마땅히 스스로 져야 하는 것은, 이 미성년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을 경우이다.”(칸트,위의 책,13.) 

칸트의 저 유명한 계몽에 대한 정의에서 걸려 있는 것은 역시 계몽의 보편적인 성격이다.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승격되는 저 계몽이란 것이 반드시 지적 재능이나 소수의 인식노동자들만이 독점할 수 있는 지식 체계나 정보가 아니라 누구나 필요를 자각하고 동기부여가 된다면 도달 가능한 인간 성장의 소명에 관한 문제이다. 지식과 정보이기 이전에 이해하고 통합하는 인격적 성장을 동반하는 것으로 누구든지 알고자하는 앎에 대한 호기심, 의지, 에로스가 발동된다면 도달 가능한 것이다. 그러하게 도달 가능한 성년이라면 성년에 이르지 못한 책임은 당연히 위계적 차이, 지성의 문제가 아닌 욕망의 결핍에 있다는 것이 칸트의 지적이다. 이로써 칸트의 비난이 함의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와 문명의 진보에서 동어반복 될 수 있는 계급과 위계의 재구성 함정을 극복하는 것이며 그 편으로써 인간 성장이라고 하는 성년 개념에서 ‘부르주아적 소유’의 권력성을 감산, 그것을 이를테면 마르크스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부연, 칸트적 기획을 추론 정리하자면 곧 계몽은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로 열려 있는 보편과 정의의 성장 게임이다. 하지만 그 게임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은 각자의 리비도 활성의 강도, 욕망의 여하에 따라 계몽 승격되는 량과 질이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후자의 불평등은 불평등이되 애초의 공정한 토대위에서의 사후적 욕망의 문제이므로 평등과 정의의 문제를 유발시키지 않는 보편에 속한 불평등이다. 

역시 칸트다운 문장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한편, 이 지점에서 또 유쾌하게 떠오르는 것은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진술한 문장이다. 

 

 

 


“나는 한 사람의 능력이 다른 사람의 능력보다 열등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능력이 똑같이 발휘되지는 않았다고 가정할 것이다.---그러므로 나는 동어반복의 자리를 약간 옮길 것이다. 나는 그가 덜 똑똑하기 때문에 덜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아마 덜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덜 좋은 일을 제공한 것이며, 그가 덜 유심히 보았기 때문에 덜 본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가 그의 일에 주의를 덜 기울였다고 말할 것이다.---그들의 ‘낮은’ 지능이 자연의 효과인지 사회의 효과인지 논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그들은 그들의 욕구와 실존적 상황이 그들에게 요청하는 지능을 개발한다. 욕구가 멈추는 곳에 지능은 쉰다. ---인간은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이다. 어쩌면 지적 성과의 불평등을 설명하기에 충분할 수도 있는 주의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의지가 불평등하게 절박하기만 하면 된다.”(랑시에르,「무지한 스승」,양창렬역,종려,103,104.강조는 많은물소리)

 
역시 이 인용문에서도 핵심으로 거론되는 것은 욕망의 문제다. 선천적 재능이 아니라 욕망이 지능을 활성화시키고 사물을 더 진지하게 숙고하고 자신을 잘 사용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하게 욕망의 문제로 관점을 위치시킴으로 위계와 차이를 생산, 재생산하는 동어반복의 자리를 극복, 어떠한 보편의 성감대를 활성화 시키고자 하는 것이 랑시에르의 의도인 듯하다. 그로써 재생산의 핵심 경험인 교육적 경험에서 애초의 보편을 정초하고 그 편의 유능한 평등의 사유의 어떤 토대를 묻고자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랑시에르의 이 문장에서 우리는 예의 그 보편과 정의에 속한 어떤 불평등의 자리를 확인하게 된다. 아니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랑시에르는 저 불평등한 것(욕망)의 발생장소까지 노골적으로 거론하고 있지 않는가?  

곧 불평등하게 절박한 의지, 욕망의 차이가 그것이다. 욕망을 발생, 구조화시키는 조건인 어떤 결여가 크다면 그야말로 욕망의 생산에서 그러하지 못한 사람보다는 불평등하게 욕망을 더 절박하게 발생시킬 것이 아닌가? 그러하게 강렬하게 발생시킨 욕망의 탄력위에 충동, 에로스가 작동되었다면 지능은 훨씬 제대로 떠들썩하게 활성화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여, 곤궁이야말로 계몽이나 성장게임에서의 도약판, 영혼이 아닌가? 결여와 욕망과의 이와 같은 에로틱한 결혼을 한편, 또 플라톤은 「향연」에서 이렇게 재치 넘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 포로스(계책)와 어머니 페니아(결여)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에로스는 다음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답니다. 우선 그는 늘 가난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섬섬하고 아름다운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며, 오히려 피부가 딱딱하고 거칠며 맨발에 집도 없습니다. 늘 땅바닥에서 요도 없이 누워 있고 문가와 길섶에서 하늘을 지붕 삼아 잠이 들지요. 어머니의 본성을 갖고 있어서 늘 결핍과 함께 삽니다. 그런가 하면 또 아버지를 닮아서 아름다운 것들과 좋은 것들을 얻을 계책을 꾸밉니다. 용감하고 담차고 맹렬하며 늘 뭔가 수를 짜내는 능란한 사냥꾼이지요. 사리분별을 욕망하고 그걸 얻을 기략이 풍부합니다. 전 생에 걸쳐 지혜를 사랑하며, 능란한 마법사요 주술사요 소피스트입니다.”(강철웅역,「향연」,128.)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부르주아적 소유로서의 위계의 전복은 이미 자연스럽게 결정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곧 결여, 곤궁이 클수록 비례하여 욕망이 활성화 된다는 것을 이름이다. 이로써 의미 있는 전복, 가난과 결핍이 더 통렬하게 유리해지는 마법, 정의로운 불평등이 정초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결여의 블랙홀, 스스로의 자신의 무의식 안에 고유하게 특권화 되는 욕망 발전소, 공정 장치로써의 그것을 구원하는 지젝, 라캉의 정신분석적 증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다시 묻지 않을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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