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의 <루이 랑베르>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그리고 그에 연동되어, 전에 읽었던 아감벤의 <장치란 무엇인가?> <세속화 예찬>을 다시 찬찬히 읽었다.   

 

 



 

 

먼저 발자크와 발저의 소설은 학교생활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데에 흥미를 일으킨다. 푸코나 아감벤이 권력과 접속되어 있는 광의의‘장치’를 규정하며 들고 있는 예시들의 주요 얼굴중의 하나인 바로 그 학교를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항시 이 학교는 문제적 사유를 제기하는 쪽에서의 손쉬운 지시물인가? 우선 나는 좀 길지만 아감벤이 규정하는 장치의 개념을 여기에 옮겨본다. 

  



 

 

 

 

 

 

 

 

 

 

 

 

“푸코가 말하는 장치는 이미 아주 넓은 부류인데 이것을 더 일반화해 나는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지도, 규정, 차단, 주조, 제어, 보장하는 능력을 지닌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장치라고 부를 것이다. 따라서 감옥, 정신병원, 판옵티콘, 학교, 고해, 공장, 규율, 법적 조치 등과 같이 권력과 명백히 접속되어 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인터넷서핑〕, 컴퓨터, 휴대전화, 등도, 그리고(왜 아니겠는가마는) 언어 자체도 권력과 접속되어 있다. 언어는 가장 오래된 장치인지도 모른다. 수천 년도 전에 영장류는(어떤 결과가 될 것인지는 아마 알지 못한 채로) 무심코 언어라는 장치에 포획됐다.”(<장치란 무엇인가?>,양창렬역, 33쪽.)  

물론 아감벤의 정의는 역시 또 하나의 구별되는 그 부분에 대한 규정을 넘어 질문 그 자체를 지향한다. 완벽할 수 없는 그 질문에서야말로 오늘날 특히 중요해진 장치에 대한 숙고를 수행할 수 있으리라. 이 장치 속에 포로된, 아니 장치 그 자체인 학교의 매트릭스 안에서 사람은 어떻게 길들여지고 어떻게 자신의 주체를 변전해 갈 것인가? 계속되는 아감벤의 말처럼 오늘날 우리가 이 “장치들과 맞대결할 때 채택해야 할 전략이 단순할 수 없”을 것임에 우선 동의해 놓고서---

<루이 랑베르>에서 발자크는 역시 작품에서 자신의 대리인인 학생, 랑베르를 내세워 장치를 장치로써 맞닥뜨리지 않는다. 장치로서의 학교, 그것도 엄격한 구획과 규율의 기숙학교 생활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개념의 위격과 체계를 범주로 주체와 외면이 손쉽게 구획된 객관적이고 서사적 관점이 아니라 더 깊은 내속으로 들어가 그 의식의 흐름들을 오히려 위주로 두는 입장에서 사건들을 진술하는 편을 택한다. 곧 자기 고백적 방식이다. 이러한 주체 중심의 안의 형식으로서의 전개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그리고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도 마찬가지다. 이미 장치로서의 안이 아닌 장치에 포획되기 이전의 순수 존재로서의 자기 인식에 의식의 근거를 두는 것으로 담화를 발전시킨다. 그것은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장면들처럼 의례적인 공공적 시민들, 국가 사회적 몸짓들을 저만치 메인거리에 두고 오히려 그러한 메인사태를 배경으로 삼아 뒷골목에서 발화되고 있는 흥미진진한 유령, 좀비, 마술, 마법들의 이야기를 화면의 중심으로 근거지우는, 이를테면 그러한 역전된 그림을 연상시킨다.  

“형벌을 받는 도중에 미소 짓는 순교자처럼 그는 자신의 사유가 펼쳐지는 하늘로 피신했다. 아마도 이러한 내적인 삶이 그 자신이 굳게 믿는 신비의 세계를 보게 했으리라”(<루이 랑베르>, 송기정역,44쪽)  


“사유의 본질 탐구에 몰두했던 그는 학교 수업을 게을리 했고 선생님들이 내준 숙제를 경멸했다”(위의 책,49쪽)

흔히 하는 말로 제도권적인 사회, 체계로는 담을 수 없는 생각을 하고 그 장치로서 측정할 수 없는 정신세계, 사유의 진전을 일삼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날것으로 묘사하고 발전시키는 영역을 창조하고 개척한다는 의미에서의 자기 고백적 시점을 이름이다. 이들의 찬탄스러운 내적 도발에 비한다면 장치들은 얼마나 왜소하고 또 남루한 얼굴들인가?  

 



 

 

 

 

 

 

 

 

 

 

 

하여 개인이란 무엇인가? “개인에 대한 탐구가 바로 국가, 사회에 대한 탐구가 아니겠는가?”책의 표지 장식용 문구처럼 발자크의 개인은 훨씬 블랙홀 처럼 신비하고 거대한 국면을 갖는다. 역시 그 개인(인간)의 얼굴에 휘감겨 있는 그 무엇의 아우라에 대한 가장 가까운 이름을 연상시키자면, 이를테면 아감벤이 <세속화 예찬>에서 흥미롭게 명명한 ‘게니우스(genius)’쯤 될까? 나는 얼른 다시 아감벤의 책들을 펴 그가 새롭게 규정하고 창조한(?) 인간을 재유추해 보는 것으로 랑베르를 읽는다.

“그러나 이 가장 내밀하고 인격적인 신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비인격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넘어서고 초과하는 것의 화신이다.---게니우스〔라는 단어에〕내포된 인간의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아’이자 개인적 의식일 뿐만 아니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비인격적, 전개체적(preindividuale) 요소가 늘 함께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뜻이다.---게니우스의 이 멀리할 수 없는 현전은 우리가 실체적인 동일성에 갇히는 것을 막으며, 우리 자신 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자아의 자만을 산산이 깨뜨려버린다.---비의식이라는 지대의 문턱에서 자아는 자신의 특성을 내려놓고 감동해야 한다. 정념은 우리와 게니우스 사이에 뻗어 있는 줄타기용 줄로, 우리의 곡예하는 삶은 그 위를 걷고 있다. 심지어 외부 세계에 대해 우리가 놀라기 전에 우리를 경탄하고 놀라게 만드는 것은 영원히 미성숙하고 무한히 청춘인 어떤 부분, 개체화의 문턱에서마다 머뭇거리는 어떤 부분이 우리내부에 현전한다는 사실이다.”(<세속화 예찬>,12-19쪽)                 

“게니우스는 결코 자아라는 형식을 띨 수 없으며, 하물며 저자라는 형식을 띨 수도 없다. 게니우스를 전유하려는 시도, 게니우스로 하여금 게니우스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하게끔 강제하려는 자아 혹은 인격적 요소의 시도는 모두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위의 책,16쪽.)           

 

 


 

 

 

 

 

 

 

 

 

 

 

그리고 흥미를 주는 아감벤의 계속되는 문장 역시 인상적이다.

“이 때문에 게니우스와의 마주침은 두렵다. 자아와 게니우스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는 삶은 시적이라지만, 게니우스가 모든 면에서 우리를 초과하고 넘어설 때 생겨나는 느낌은 공황상태이다. 우리 자신이 견딜 수 있다고 믿는 것보다 무한히 거대한 그 무엇인가가 우리를 엄습해 올 때의 공황상태, 이 때문에 대개의 인간들은 비인격적인 자신의 일부 앞에서 공포로 뒷걸음질 치거나, 위선자처럼 그것에 사소한 위상만을 부여하려고 한다.”(위의 책,17쪽)

멋진 글이 아닐 수 없다. 루이 랑베르의 내면에 대해 아감벤의 이러한 해명보다 더 좋은 해설을 접해 보기는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장치를 넘어서 생성되고 분출되는 더 큰 잉여와 잔여, 그 앞에서 종종 사람들은 공포와 고착, 퇴행으로 우회하거나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서 보는 것처럼 그 초과를, 그 알 수 없는 아우라에 대하여 심지어 신비적으로 숭배하게 되는 기괴한 태도까지 유발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작품들에서 일련적으로 연계되는 병리적인 결과들이 얼른 떠오른다. 먼저 ,<루이 랑베르>의 랑베르는 결국 작품 속에서 학교를 떠나 정신병원으로 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고 <벤야멘타 하인학교>에서는 저자 자신이 역시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된다.(그의 정신 병력은 지금도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다고 하지만) 또한 도스토옙스키에게서 역시 우리는 평생에 걸친 그의 사적으로 일말의 병리적 내면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아니 정상과 병리, 장치와 그것의 내,외부의 선을 분절하는 사유형태, 이유를 다시 사유해야 하는 지점에서 그 천재들의 '병리'들을 다시 재판단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편, 이렇게 본다면 발자크는 랑베르에서 비정상적인 극한까지 발전한 병리적 국면에서도 그 절대 극점에 대해 부정하지 않고 그 병리에서 기괴하게도 랑베르의 창조적인 천재성을 보존하는 혼재로 여지를 남겨 두고 있는데--- 그 역시 어쨌든 게니우스가 극단적으로 충돌시킬 수 있는, 그 경계의 지점, 창조와 병리의 위태한 경계선을 상징적으로 지시해 주는 것으로 읽힌다.

어쨌든 문학평론가 정여울씨가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관련된 어떤 글에서 말했듯“인간은 결코 이성의 총합에 그치지 않는”것인가? “의식만큼이나 무의식이, 이성만큼이나 욕망이, 논리만큼이나 불합리가 인간을 움직이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식적인 의혹과 질문으로 랑베르, 그리고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주인공 야콥 폰 군텐,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를 모두 추억해둔다.   

 

 


 

물론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 <루이 랑베르>에 이어 같이 읽은 발자크의 <나귀가죽>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다른 정리가 필요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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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사물과 물건, 상품들의 경험에서 전 공정을 반죽하는 경이, 기쁨의 신비와 같은 뭉클함을 잃어버렸다. 거의 모든 것을 자동화된 기계장치에 의하거나 아니면 타인들의 노동에 의한 완제품을 그냥 간단한 화폐교환 절차동작(그것도 단순한 버튼 터치로)만으로 소유하고 점유할 수 있게 되면서 그 사물이 주는 소리와 음악, 존재감의 고유한 함성으로부터는 점점 소외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편이의 유목국으로 해서 인간은 더 많고 다채로운 물건들을 향유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더 많은 변화와 차이, 기능들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물량을 대량으로 증폭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소중한 그 무엇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그러한 자유의 수요에 부응한 대량복제품들은 한편, 이미 자연의 질감과 유리되기 시작했고 온통 미끄러운 표백미와 화학 처리된 표면과 얼굴들은 존재의 가벼움으로 경량화 되면서 더욱 사람들로부터 가까이 밀착되는 것과 동시에 정서적으로는 멀어지게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야누스의 양면처럼 그 선택의 무한한 자유 속에서 오히려 인간은 사물을 해석하고 지배하는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사물의 무 존재감에 눌리고 그 유실의 바다에 빠져 같이 화학적 표면과 기능이 되어 버리는 역 전이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물을 사물로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소금처럼 꼭 필요한 최소한의 수동적 체험공간마저 지워버리는 편이의 중독에서 이제는 스토리가 없는, 얼굴이 없는 사물들만 홍수로 경험하게 되면서 사물의 경험에서 인간은 사실상 사물의 죽음들만 대량으로 맛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알랭 드 보통의 문제의식도 이와 다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는 많은 물건을 실제로 손에 넣을 수는 있지만, 그런 물건들의 제조와 유통 과정이 어떠한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소외과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이, 감사, 죄책감을 경험할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한다.”(39쪽)  

 



 

하여 작가는 이 책에서 이 편이들의 유목국에서 어떤 한 종류의 반란을 시도해 보고자 하는 것일까?

물론 매우 포스트모던한 작가에게 이러한 제국이니 반란이니 하는 거대함의의 극단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다만 적극적인 문제의식은 유희와 놀이정도로만 속여 두고 그냥 질문으로만 던져놓을 뿐이다. 그렇긴 해도 사물과 사태에 대해 관통해 볼만한 재치와 재능, 삶의 호기심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기동성과 현장성, 취재적 발랄한 시선은 신세대 인문주의자의 특기, 일단 상품이 생산되고 움직이는 물류현장을 발로 뛰며 추적해 본다. 물론 여기에 시선의 쾌락이자 권력, 카메라맨의 동승은 필수옵션---.작전은 무리 없이 적중하고 있다.

 

이른 새벽, 대지, 거대창고, 공중, 항공기, 기업, 로켓발사현장에 이르기 까지 숨 가쁘게 달려가며 사물의 이동과 경위를 또 다른 방식의 서사적 접근으로 훑어주고 있는데 문장은 경쾌하고 묘사는 위트와 재치가 넘쳐난다. “콜라주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역동적이고 논쟁이라 하기에는 너무 다채롭고 매력적인 문체---”라고 한 LA타임즈의 비평은 책의 바로 이러한 성격을 잘 포착해 주고 있어 책 표지에 장식 인쇄되어 있는 것일까? 
 

 

저자의 믿음처럼 신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물과 그 사물을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노동을 추적하는 저자의 서사적 시선은 이를테면 신이 부재한 세상에서의 일종의 순례기라고나 할까? 어쨌든 보통의 색다른 보고서를 통해 우리는 사물과 상품, 또한 일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경험해 볼 수 있다.

물론 잃어버린 사물, 물건의 신비를 보상하고자 하는 어떤 대안적 시선이 단지 보통과 같은, 시종 그 사물이 제작되고 유통되는 과정의 공간적이고 시각적인 이음새를 연결하는 방식과 같은 유물론적 시선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좀 단순해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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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가이사 - 바울과 누가의 저작에 나타난 복음과 로마 제국
김세윤 지음, 박문재 옮김 / 두란노키즈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김세윤 교수의 <그리스도와 가이사>
 
일말의 아쉬운 정황의 논의들
 

김상재
 
 




저자가 친히 밝혔듯이 이 책은 복음에 대하여 정치적 해석의 틈을 불허하는 전통적인 정통적 견해를 재천명하고 있다. 특별히 새로운 해석이나 기획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들에게 익숙했던 복음주의의 시각이나 논리를 반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저자 스스로의 말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명백하고 친숙한 것”이다. 그 불변의 해석원리를 다만 텍스트나 그 텍스트가 출현하게 된 정황을 따라 조근 조근 성실하게 추적, 정리해 놓고 있는데 그 건조한(?) 작업이 얼마나 신실한지 독자들로서는 어떤 경건미 마저 느끼게 할 정도이다.

저자의 생각은 어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복음과 사회변화의 관계는 항상 역설적이고 변증법적인 관계를 지닌다는 데에 있다. 즉 정치적 해석을 불허할 정도로 영적인 갱신에 초점이 맞추어진 그 원래의 해석이 진정한 사회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외연으로의 힘을 촉발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다. 오히려 원 해석보다는 변화에 대한 명제를 우위에 두고 텍스트를 적용에다 맞추게 되면 결국 복음의 힘은 그만큼 희미해지고 결국은 복음적 믿음도 설명할 수 없는 무척추의 사회적 기획물에 그치고 만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고자 한다. 무수히도 반복된 그 역설적 원리를 저자는 다시 자신의 무기인 해석학적 기술로 공고히 다져두고 있다.

그러면 왜 이런 반복이 또 필요한가? 물론 저자 스스로 밝혔듯이 오늘날 증폭된 바울에의 관심 때문이다. 증폭되고 있는 그 관심의 진앙지는 알다시피 먼저 철학 쪽이다. 구조주의 이후로 주체의 해체를 기획해 온 결과 그 주체의 헤제를 분별하고 판단할 주체의 근원적인 자리마저 설명하지 못할 무정형의 위기에 내몰리자 다시 주체의 위치를 되묻는 반사로 회귀하는 가운데 다시 바울이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바울은 기독교의 대명사에 지나지 않는 어떤 상징에 가깝다. 기독교의 주체를 재 규명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내면적 기초와 좌표를 설명한 바울의 서신들이야 말로 그들의 구미에 찰떡처럼 맞는 텍스트들이어서 바울인 것이다.

그리고 이번의 바울에 대한 르네상스(?)는 이전보다 다른 양상이어서 더욱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다. 과거 전통적인 철학처럼 폐쇄적이고 경직된 논리 실증주의적 렌즈를 넘어 타 학문과의 이종교배로 융합된 새로운 시각으로의 접근이다.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관통한 사유를 내속화시킨 유연성을 가지고 정신분석의 성과(쟈끄 라캉)를 심화시켜 이성의 범주 위 아래를 휘 저으며 매우 긍정적인 해석으로 바울을 거명하면서 그들의 본래 목적인 주체의 모티브를 훑고자 한다. 먼저,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이 1997년에 출간되었고(우리 말 번역은 2008년) 슬라보예 지젝이 연속적으로 “까다로운”주체를 묻는 기획 가운데 바울을 심도 있게 들먹이고 있다. 그뿐인가? 최근에는 이탈리아의 조르주 아감벤이 또한 가세하여 일종의 로마서 주석서인 <남겨진 시간>을 출간하면서 일련의 붐을 다투듯 연장시키고 있다. 신학적 렌즈의 특수한 영역에서가 아니라 세속의 현대철학, 현대 인문학계의 중심, 가장자리에서 지금 이렇게 바울의 문제가 증폭되었던 때가 일찍이 있었던가?  


 


이런 정황을 배경으로 저자는 이 책을 들고 나왔다고 한다.
그들의 바울은 명백히 성서 본문을 오, 악용하는 것이며 적어도 신학적인 관점에서는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바탕에 깔린 생각이다. 특히 무엇보다도 주체의 문제를 의도하며 반제국적 문제를 위시, 보다 보편적인 주체를 논하는 가운데 기획되고 있는 그 정치적 성격의 해석이 가능하냐? 하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 것이다. 책에는 역시 그들의 생각이나 본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바로 그 정치적 해석이 가능하냐고 하는 것은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의 핵심이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와 가이사>는 이러한 문제제기들에 대해 어느 정도 신학적인 응답으로서의 어울리는 적실성을 가지고 있을까?
우선 필자는 저자의 이 책에 적어도 이 문제제기적 입장으로 좁혀 본다면 유감스럽게도 거의 점수를 주기가 어렵다고 본다.

먼저 저자는 앞에 거명한 철학적 저술들의 문제의 본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줄 정도로 좀 본류적 문제제기에서 어긋난 응답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들의 정치적 기획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 본연의 문제라기보다는 주체의 모티브를 분석하고 탐구하는 가운데 총체적인 문제의 부분적인 함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들은 당장 독자들로 하여금 혁명적 전사로 들고 일어나 자신과 환경을 변화시키라는 류의 충동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건강한 주체의 자리, 그 존재적 총체적 자리를 정신분석적이고 존재론적 탐구로 사유하고자 할 뿐이다. 그중 물론 바디우와 지젝은 마르크스적인 렌즈를 응용하고 있는 철학자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기획은 어떤 구체적인 정치프로그램을 주창하는 실천 운동의 일환으로 바울을 거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존재론적으로 건강한 주체적 의식을 묻는 도구로서의 마르크스를 선택한 것뿐이다. 단적으로 그들은 마르크스 뿐만이 아니라 프로이트, 라캉의 정신분석까지 징그럽게 소화해 낸 복잡한 철학자들이 아닌가? 

현대철학의 복잡다난한 관심 가운데 표명된 한 접근을 저자는 너무 정치적이라는 판단의 좁은 필터로만 읽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그들의 시각에 대한 반응이라면 그들의 본의, 주체의 문제를 탐구하고자 하는 저들의 문제들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바울의 본문, 그편의 해석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적실성을 띠지는 않을까?

어쨌든 저자의 이번의 책이 적어도 최소한의 의미에서라도 그들에 대한 응답을 의식했던 것이었다면 예의 그 주체적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나왔어야 했으며 하여 정치적 해석을 불허한다고 하는 논의의 범위에 충실하고서라도 그 본류의 문제에 대하여 일종의 인문학적 성격을 포괄해 주는 논지의 신학저술이어야 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의미를 벗어났어도 아닌게 아니라 <그리스도와 가이사>의 본문들에서는 인문학적 후광을 거의 느낄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에 대한 접근과 저술의 동기는 매우 경건하게도 오직 주경 신학적 범주를 넘어서지를 않는다. 우리가 복음적이어서 성격의 텍스트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학은 항상 세속적인 인문학의 문제제기까지 해석해 주고 대안을 제시해 주는 위치를 점하고 있어야 할 것이라는 기본 과제를 존중한다면 그 문제를 비켜 갈 수는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정치적 해석이 아니라 항시 텍스트의 원 해석을 확보해야 할 것이라는 기본 논리에서도 저자가‘세계적인’ 신학자라면 저들의 문제에 대해 터치를 해주는 최소한의 제스처라도 보여 주여야만 하지 않았을까?   

물론 정치적 해석이 아닌 성서 텍스트로서의 구원론, 그리스도론은 철학적 문제제기가 아니라도 우리들에게는 항구적으로 소중한 진리이다. 그것도 해석학적 기술이 세계적인 위치에 있는 분의 재정리는 많은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 자기 위치와 자리를 묻는 고유의 자리의 권위를 회의할 복음주의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책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시대적 도전에 의한 반응의 일환으로 나와서 그 저술이 역시 그 텍스트의 정황을 묻는 질문에서 평가되는 선에서 자유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또한 그 정황에서의 적실성을 책임 있게 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다소 건조한 모습을 보인 저자는 정치적 해석을 부정하는 논의를 마치고 이번에는 계시록의 묵시문학적 렌즈를 응용,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충실과 그 내용을 또한 다른 방식으로 촉구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의 입장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사상이 뼈대로 규명되고 있다. 그 심적 우주론의 질서를 집으로 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권위를 촉구하고 자 하는 것이다.  

역시 흥미를 끄는 것은 종말론과 그 정황에 대한 해석이다. 교회가 처한 시대적 정황이 달라진 만큼 지금은 그 동안 관심이 협착 되고 부정된 현세에서 보다 책임 있는 현세에의 충실을 위한 신앙의식, 내지는 패러다임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바울시대의 임박한 종말론 만에서 복음화를 위해 지연되고 있는 여지의 종말론을 균형으로 아울러야 한다는 것을 이름이다. 임박한 종말론에서 우주와 세계를 심판하시는 대주재로서의 통치개념을 보완, 지연된 종말론의 여지로 종말론의 압박을 극복, 그 나라의 현실에서의 실현을(정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가능케 할 비전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유연함과 해석이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종말론의 문제, 아니 정치적 해석의 논의를 떠나서 ‘하나님의 나라’ 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것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본다. 정치의 문제를 어떤 구체적인 참여나 실천, 운동 내지는 프로그램으로만 이해하는 협소개념을 떠나 사실 내가 나의 문제와 함께 삶의 외연을 확장해 가는 것 자체가 삶, 즉 정치적인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거듭났다면 새로운 존재가 된 그 자각, 자의식의 체험 자체가 이미 처음부터 정치적인 함의를 띠고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새롭게 거듭나 특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내면이 달라진 존재인데 그 달라진 의식의 편으로 자연히 환경은 재구성되고 재편 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신앙은 기본적으로 삶과 밀접하게 붙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읽어낼 수가 있다.

삶은 이미 처음부터 그렇게 구원론에 붙어 있었던 것인데 다만 신학적 해석의 오류에 의해서 그 점이 왜곡되고 협소하게 되었던 것이고 그리고 신학적 논의의 유통과정 속에서 불필요하게 ‘정치’라는 개념이나 규정 속에서 과도하게 휩쓸려 부정된 면이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삶에 대한 해석을 근원부터 막아왔던 폐해를 넘어 본래의 해석으로 돌아가야 하는 의미에서도 저자의 정리는 설득력이 크다.

또한 그런 면에서 역시 삶이라는 일원론적 개념보다는 원 해석에서는 여기와 저기, 이 세대와 다가오는 세대, 정치에 대한 부정을 통해 더욱 건강한 주체와 사회적 변화가 가능해지는 복음의 변증법적인 역설을 존중해야 할 것이라는 저자의 재천명 또한 특히 지금 삶이 없는 우리의 현실에서 울리는 바가 크다. 그 점에서 독자들은 이전의 복음주의 해석에서, 같은 원리였지만 잘 느껴 보지 못했던 삶에 대한 새로운 균형의 시각을 훨씬 선명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의 그 불변의 가치는 항시 항구적인 권위를 지닌다고 하겠다. 체스터턴의 말처럼 정통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이자 진정한 진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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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시간 -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강의
조르조 아감벤 지음, 강승훈 옮김 / 코나투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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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삶을 발명한다”!
바디우의 <사도 바울>에 나오는 문장이다. 물론 이 역학점 에서의 그리스도는 언어와 그리스적 이성의 인식의 맨틀을 뚫고 들어오는 어떤 충격으로서의 ‘도래’를 상징하는 그 무엇이다. 이 도래적 충격을 통해서 비로소 삶은 유한의 제한된 시공에서 영원이라고 하는 무한적 전망에 발화된 전격적인 의미의 윤리적 우주를 만난다. 한편, 키엘케고르는 이 행복한 경험을 ‘순간’이라는 비언어적 언어로 호명하고 있는데 이 ‘순간’의 경험으로 인간은 ‘인식’의 “맹목적인”(역시 바디우의 표현이다)‘---이다’라고 하는 서술과 규칙 언어를 탈구하여 역사와 영원이 만나는 행복의 지평을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바로 이 도래적 지점과 근본적으로 연관이 있는 아감벤의 메시아니즘을 일단 인식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일말의 어려움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 어려움은 이‘순간’이라는 용어를 둘러 싼 그 무엇들이 어떤 개념이 아니라 기독교적 체험에 관계된 좀 특수한 범주의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키엘케고르의 방식으로 우회하면 그 체험은 해석학적 인식으로 공유될 수 있는 방식에서는 좀 벗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키엘케고르가 볼 때는 “영원한 것과 역사적인 것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한 역사적인 것은 다만 기연에 지나지 않는다.” 막연히 수평적으로 공간의 표면위로 흐르는 기계적 시간과 그 시간을 나름대로 포획하고 체계화하려는 관념적 세계로서의 인식론적‘역사’는 충분히 인격적인 시간이 아닌, ‘나’아닌 소외된, ‘나’의 외항에 무심한 간격을 가진 객관적으로 산포된 채 잔혹하게 발전하는 관념, 외적 시간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도덕적 중력과 가치범주에 의해 재단되고 주물화 된다고 하더라도 그 주형의 시간은 문자 그대로 관념적인 체계로서 나의 참여가 온전히 투사될 수 없는 건조한 거리의 시간이다. 그 동공화된 비 중력 지대는 나를 둘러 포위하고 끊임없이 나를 유실시키고 있지만 나의 존재의 힘과 그 의미로 포획될 수 없는 지나치게 공공적이거나 주체적 힘으로 가로지를 수 없는 비인격적으로 단절되고 분절되는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거대유실 공간인 것이다. 이 영원의 신비가 박탈된 메마른 시간, 고도제한의 늪에 걸려있는 그 겨르롭고 권태한 절대적 유한의 고통을 과연 인간은 견뎌낼 수 있을까?

이 현세적 인식론적 시간은 그러므로 비 인식론적 시간, 의미 수행론적이고, 그 의미인 한에 행위수행적인 주체의 시간에 의해 역전되고, 충돌, 만나고 화해될 필요가 있다. ‘나’라고 하는 유한의 고도제한의 제약을 가지고서도 나를 초월하여 연장되고 펼쳐지는 현세적 외적 시간을 의미화 시키고 존재의 힘으로 포월해 내고 ‘나’의 인격적 의미와 전망으로 투과시켜 낼 수 있는 기적 같은 ‘기술’사유형식, 가치의 전환점은 그렇다면 이 세계 내에서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것이 만일 가능하고 그것이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면 그러면 그 사유형식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고 향유될 수 있을까?

아감벤은 과감히 이 질문에, 이 지점에 메시아니즘, 즉 ‘남겨진 시간’이라는 특이한 시간관을 들고 나온다. 바울의 ‘---이 아닌 것처럼’의 그 절묘한 단절과 역설적 화해, 균형을 가로지르는 황금분할적 가치적 시각과 그 패러다임이 인간의 의식 속에서 작동되는 비/언어적 방식이라고 하는 바울의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 바울의 메시아니즘, 더 정확히는 아감벤의 메시아니즘, 그 남겨진 시간은 그러면 어떤 시간인가? 우선 이해를 우회하여 메시아적 시간이 아닌 반 메시아적 시간을 먼저 체크해 보는 손쉬운 편을 택해 그 시간을 반사해 보자.


먼저 전술된 바와 같이 인격적 의미와 충만으로 중력화 되지 못한 기계적이거나 인식론적 시간은 메시안적 시간이 아니다. 그냥 간단히 아감벤의 이런 문장을 옮겨 본다.

“‘시간’을 계산하는 시계에 사용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세적 시간은 ‘Jetzt-Zeit'라고 부르자.---Jetzt-Zeit에 있어서는 황홀하고 수평적인 시간성이 감추어지고 평준화 되어 버린다. 벤야민은 이 부정적인 함의를 뒤집어 그 단어에 호 뉸 카이로스 ho nyn kairos가 바울로가 지니고 있는 것과 동일한 메시안적 시간의 패러다임이라는 성격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다.”(235.)

역사 자체에 궁극의 절대의 권위를 부여, 역사와 영원을 역사내적 시간에 종합, 일치시키려는 급진적 마르크스주의자의 혁명적 시간도 메시아적 시간이 아니다. 아감벤에 의하면 무력한 권태의 시간에 반하여 세계내적 목적을 가지고 자극적 충동을 추동하는 계급투쟁적 시간은 마르크스 자체를 향해서도 최악의 오독일 뿐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남겨진 시간의 의미는 아니다.(60.)

이와 연동하여 지젝의 시간도 충분한 메시아적 시간은 아니다.(메시아니즘과 관련이 있는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는 <남겨진 시간> 의 3년 후인 2003년도에 출간된 것으로 그 책의 내용은 아감벤에 대한 일말의 비평도 담고 있다. 여기서는 아감벤의 관점으로 많은물소리가 그를 역으로 독해해 보는 일말의 기획을 포함한다. 이 기획에는 물론 많은물소리의 이해와 관점도 반영되어 있다.)

아감벤의 역설적 시간은“---이 아닌 것처럼”이라는 언표가 말해주듯 역사에 대해 일말의 유예와 공간적 거리를 우선 설정한다. (그럼으로써 그 다음의 연속적인 역설을 통해 영원과의 행위수행적인 참여를 좁히며 더 큰 책임의 현재를 노린다.) 신과의 역설적 관계에서 그 거리가 우선 왜 설정되며 그 거리를 통해 무슨 의식적 변동이 작동될 수 있는가? 아감벤의 ‘거리’는 역시 어떤 인식론적 시간, 관조의 유예공간은 아니다. 그 거리는 신의 주권적 넘침과 은총이 발생, 그 이월의 힘으로 존재의 변화와 감격이 생성, 호환되는 신적 공간이 ‘순간’으로 체험되는 소중한 충돌의 후속공간이다. 그 신의 존재와 유한의 존재가 충돌하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틀리며 호환되는 가운데 유한한 인간은 더욱 유한하다고 하는 존재의 한계적 저층을 자각하고 동전의 양면처럼 배면에 배착되어 있는 신의 영광을 투과하고서는 양면으로 동시에 자신의 존재감에 대하여 신적인 신성이 경험된 결과로 나타난 ‘거리’인 것이다. 인식론적 이해로 하면 하나의 관념적 관조로 읽혀 질 수 있지만 이처럼 인식을 초월한 초월적 인식으로 하면 그 거리는 ‘별것도 아닌’공간이 아니라‘많은 것’이 발생하고 일어나 뒤집힐 수 있는 역동적인 함의의 결과, 존재의 소유권이 재배치되는 거래공간인 것이다.

하면, 바로 이 지점, 아감벤의 ‘거리’가 어떤 인식론적인 대상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초월적 존재자가 교차된 특별한 의미의 장소로 읽히느냐의 차이는 신의 전능성에 대한 믿음. 즉 신관의 성격에 따라 달려 있다. 신의 신성을 인식하는 강도가 클수록 그 거리에서는 ‘특별하게 엄청난 것들이’이 발생하는 도래적 발화점의 후속공간으로 이해되고 그 강도가 약할수록 신의 역동성이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지점에서‘별로 생길 것이 없는’(인간의 주체적 책임이나 인식론적 긴장이 채워지는), 오성의 공간으로 읽혀 질 것이다.



전자 즉, 신의 신성이 경험되는 지점이 노리는 것은 물론 이 경우, 은총이라고 하는 초 인식론적 파토스의 생성점이다. 곧 바디우가 말하는 ‘넘침’의 숭고한 자리이다. 초월적 존재나 세계의 존재의 인격적 넘침의 능동적 힘으로 해서 인간은 수동성이라고 하는, 책임의 짐을 극복하는 어떤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데 이 의식의 역학적 좌표에서 그것이 정초되는 것이다. ‘나’보다도 더 초월적인 인격적인 거대 존재의 힘에 감격으로 압도되고 그 존재가 살아있는 힘으로 나를 가로지를 때 향후, 소명의 존재감격을 향유하게 되고 그 감격에 따라 자신에게 우연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역사적 자리에 대해서는 뒤집힌 소명의 자기감격을 자각적으로 체험, 이후 더욱 견고한 자기정체성을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곧 역사와 영원이 이렇게 해서 조우한다)

한편, 그러한 역학 장치에 의해 생산, 증폭되는 이 존재의 근원저층의 자산은 의식의 역동성을 투과하며 곧 역사내적 현실에 대해서도 개체존재를 그 충만한 의미의 존재감으로 자신의 역사적 공간에서 행위 수행적으로 더욱 의미 있게 밀어 올릴 것이다. 또한 이렇게 ‘새롭게’된 존재의 행위수행적 참여는 ‘나’란 존재가 그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전적으로 책임지고 소유할 수 있다고 하는 광범위한 자기 억압과 어떤 의식적 집착을 벗어나 그 모든 것을 향유하되, 눌릴 수 있는 ‘소유권’의 방식이 아니라 눌리지 않고 향유하되 더 큰 책임 의식을 일으키는‘사용권’, 곧 겸허의 자유를 경험하는 방식을 포함하며 그럼으로써 더욱 역사에 대한 참여적인 동인을 작동시킨다. 곧 ‘---이 아닌 것처럼’더 크게 존재한다는 아감벤의 역설은 기본적으로 이런 국면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보다 강하다”(76.)

이렇게만 보더라도 사실상,(의식역학적으로 읽는다면)아감벤의 시간과 그 유예적 거리를 이해하는 것은 우선 기본적으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근원적으로 작동시키는‘은총’이라고 하는 신적인 세계에 관계된 체험적 개념을 공유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은총이야말로 ‘---이 아닌 것처럼’의 역설을 작동시키는 살아있는 의식의 힘인 것이다.

그런데 이에 반해, 이런 역학구조망을 갖는 함의에 비해 지젝의 시간에서는 그 사유의 성격상 이 ‘은총’의 중핵적 파토스가 잘 보이지 않는다. 먼저 지젝의 신은 이렇게 은총과 ‘넘침’을 뿜어내는 존재의 힘이라기보다는 인간과 같이 결여와 결핍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인식론적 대상의, 확대된 그 무엇이다.

“우리 인간은 신의 도움에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우리가 신을 도와야 한다---창조개념 자체가 신의 자기 응축(Self-contraction)을 암시한다. 신이 우선 신 자신 속으로 물러나 자신의 전능함을 제약한 것은 ‘무’를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신은 먼저 ‘무’를 창조했고 이어 그로부터 세상을 창조했다. 세상을 창조함으로 세상에 자유를 준 것이고, 세상이 돌아가게 만든 것이고. 세상에 개입할 권한을 포기한 것이다”(<죽은 신을 위하여>,222.)

같은 ‘신성’에 대한 기술이라도 지젝의 신학 기제에서는 이와 같이 신성에 대한 감격이 인간화로 반환되고 있으며 그러한 자기 이유로 다시 신은 인간의 얼굴로 역전되는 방식으로 인지된다.(이런 전복의 방식으로 기독교의 내적 추동적 의식을 논리적으로 신학화하고 그 것으로 자신의 유물론적 기획의 기제의 근저로 삼고자 한다.) 인간이 신의 자기수축 공간에 기입되는 저러한 주체적 발동을 초청하는 신관의 방식에서는 아감벤이 말하고자 하는 그 ‘거리’의 전제적 조건인 존재의 감격이나 추동, 호환이 발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절대와 결여의 양층적 배합의 구도가 아니라 지젝식의, 결여와 (또 다른 역설로 반환된) 결여의 만남에서는 당연히 바울적 의미에서의 영원, 키엘케고르적 의미의 ‘순간’이 발생하는 그 조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와 영원의 만남이 아니라 역사와 (역사의 성격의 국면을 약간 상회하는 다른 형이상학적)또 다른 국면의 의식 장치와의 만남일 뿐이다. 존재의 감격이 발촉 되지 않는 그 만남에는 그러므로 오직 인간의 인식론적 투여와 책임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인데 지젝의 유물론적 의식의 자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기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건(바디우의)을 만드는 주체의 결단 없이는 사건도 없다.(사건의 시간이 무르익기를 기다린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진정한 혁명은, 언제나 절대적 ‘현재’-‘지금’이라는 무조건적 시급함-속에서 발생한다. 진정한 혁명에서는 예정론과 근원적 책임감이 겹쳐진다---오히려 행위를 향한 극단적 충동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이제는 그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행위’의 결과를 끌어내야 한다-는 참을 수 없는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죽은 신을 위하여>, 219.강조는 지젝 스스로 한 것)

하여 아감벤의 탈각적‘거리’에 대해 “과도한 형식주의”라고 읽고 있는 지젝의 비평(지젝,175.)은 아감벤의 그것으로 볼 때는 일단 어긋나 보이고 또한 그 ‘거리’에 대해“메시아적 경험의 순수한 형식적 구조”라고 평한 부분, 그리고 그에 터하여 “아무런 내용도 들어 있지 않”다고 한 독해는 그가 기본적으로 사안을 자신의 유물론적 기획을 향하여 지나치게 인식론적 렌즈로만 보고 있다는 반증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게 시각, 또 다른 유물론적 시간과 현실을 치열하게 기입하고자 하는 지젝에게 이런 문장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일까?

“사도 바울이 말하는 거리는, 세속적 정념의 무익함을 깨달은 초연한 관찰자가 취하는 거리가 아니라, 철저하게 관여하는 투사가 투쟁에 적절치 않은 구분들을 무시하는 데서 나오는 거리다.”(<죽은 신을 위하여>,233.) 같은 거리에서 아감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이와 같이 지젝에게는 그냥 중요하지 않는 인식론적 거리, 별로 의미 있는 그 무엇이 일어날 것이 없는, 오히려 인간 주체가 투입되는 무 중력적 지대로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위한 참을 수 없는 부담, 지금 ‘이 시간’에 대한 책임과 주체적 소유권이 강렬하게 투사되어야만 하는 과도한 긴장의 시간은 아감벤이 볼 때에는 역사와 영원이 행복하게 만나는 충분한 지점은 아니다. 아마도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이 <죽은 신을 위하여>보다 더 늦게 출간되어 그를 역으로 비평할 일이 있었어도 아감벤은 그러한 요지로 비평하지 않았을까? 그에게는 ‘넘침’의 존재의 감격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이런 유물론적 투사의 시간에 반해 한편,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에서 보여지는 메시아 대망주의의 시간도 남겨진 시간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역사적 재림이라고 하는 그 종말의 초점에 함몰되면 또 한편의 소중한 남겨진 현실은 일직선으로 탈 역사적 조악에 빠져 버릴 것이므로 그것이 바울의 남겨진 시간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메시아적 시간과 종말론적 시간의 혼동”일 뿐이며 그럼으로써 그것은 “메시아적 고지에 대한 방심할 수 없는 오독”(107.)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하듯 아감벤의 시간은 이 모든 시간의 저 너머, 혹은 그 시간을 가로지르며 있다. 그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이미 그 시간은 앞의 반사경에 의해 어느 정도 분명해진 만큼 이제부터는 중복을 피하고 좀 더 편하게 반 메시아적 시간에 보완하여 그를 따라가 보자.

먼저, 그 시간은 존재의 권력욕구(소유권)가 기본적으로 탈각된 보다 존재론적 시간이다. 아감벤의 논리로 하면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혁명은 바로 이 존재의 소유권의 조정여하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인간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주체적 소유권을 주장할수록 자신과 모든 세계는 객관의 괴리감으로 밀려나 전적인 상실을 경험하게 되고 그 소유권을 부정하고 무화함으로써 자신과 세계를 모두 얻고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아감벤이 애써 언표 하고자 하는 모토는 바로 이와 같은 역설의 종교율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이전부터 있었던 메시아적인 사용과 소명이외의 것이 아니다”(52,53.)

잃음으로써 얻는다고 하는 이 상호호환의 거래관계는 물론 잃음으로써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전제를 가정하는 것이고 그 전제위의 더 큰, 어떤 것은 잘 보이지 않는 이성의 저 너머로 숨어 있는 초월적인 범주로 설정되는 것을 또한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초월은 인식론적 세계로는 보이지 않는데, 어쨌든 그 세계와 충돌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부르심’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아감벤은 바울이 자신의 편지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언급이 전무한 것을 주목하고 바울의 그리스도에 관한 인지를 재 기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특이한 인지, 즉 인간 예수가 아니라 초 역사적 권위의 “예수라는 구세주”로서의 인지를 이름이다. 바로 바울이 인지한 이 초역사적 권위와의 만남이‘부르심’이 발촉되는 자리인 것이다.

이 초역사적 권위와 역사적 유한의‘나’가 만날 때 (유한이 초월을 기입하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유한이 초 역사에 압도되어 오히려 그 초월적 세계로 기입되어 버린다. 그렇게 더 큰 의지에 기입되고 만 유한적 존재는 한편, 그 무한적 권위에 질식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포월하고 조망하는 권위를 가로지르며 자신의 유한함과 한계를 자각하게 되고 동시에 세계를 포월하는 그 시각을 비전하는 감격적 내면을 획득하게 되며 향후 새로운 세계성을 경험하게 된다. 무한을 투과하면서 자신의 존재성이 유한성에 대한 자각으로 깨어지는 한편, 그 역설적 가역성으로는 무한적 시각의, 존재의 신적 감격성을 획득하면서 인격적 힘에 의해 더 크게 증폭된 자기 정체성을 향유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의 신은 성능이 좋고 강력한 여과 장치와 같은 기능을 한다. 유한에 대한 각인과 기억만 통렬하게 남기고 존재를 신적인 차원으로 팽창시켜 배출시키는---)

이렇게 ‘무한’에 의해 투과될 때 인간은 비로소 가장 겸허한 저층의 자기 인식을 또한 향유로써 소유하게 되고, 그 낮은 겸허의 하한선에서는 또 상한의 신적 영광을 비전하며 그 반사되는 역광으로 또한 가장 상층의 무한적 존재의 영광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곧 겸허의 최저층과 신적 영광의 최상층을 자신의 내면, 한 공간 면에서 향유할 수 있는 사유형식이 이렇게 해서 가능해 지는 것이다. 바로 이 특이한 의식에서 이전의 자신에 대한 유한적 소유권은 기각되고 허물어지게 되고 이후 더 큰 의지, 신의 권한에 따라 자신의 소유권을 반환하는 조건으로, 신의 타자적 소유권, 그 인격적 힘의 우주망 속에 자신을 무화시킴으로 신적 역사를 투사할 수 있는 탈각적 향유의 권리(사용권)를 역설적으로 얻게 된다.

신적 권위에 발촉된 수동적 은총이 인간을 단순히 관조의 숙명적 배면으로 퇴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더 상승되고 재창조된 정체감으로 현실에 대한 태도와 전망을 더욱 건강하게 몰입하게 한다는 아감벤의 통찰은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 전 우주에 대한 무한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탈구하고, 사용권이라고 하는 유쾌한 자기자유의 감격으로 해서는 삶의 열정에서 더욱 큰 삶의 동기를 추동해 내고 한편, 그러면서도 자신을 스스로 침식시킬 수 있는 과도한 집착이나 불필요한 긴장들은 이로써 치유되고 극복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야말로 인간 내면의 혁명이 아닌가? 곧 부르심을 경험하기 전보다 이후에 삶에서 더 많은 열정과 영원적 의미, 전망으로 추동되면서도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내’가 그 모든 것을 해야만 하고 해내어야만 한다는 그 집착과 불안,‘자의식’을 무화시킬 수 있는 행복의 방식이라면 이야말로 혁명적 거래가 아닌가? 아감벤에 의하면 이 거래를 노리고자 하는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회개, 개심’이며 이 내적 혁명은 바로 이 소유권의 양도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혁명적 변환을 통한 자기 정체성은 어떤 정치적 자각도 아니며 급진적 마르크스주의자가 말하는 계급의식과도 다른 양상의 자각인데 이 존재감은 한편, 유예된 시간, 종말의 시간에 의해 의미적으로 수축된 시간,(역사적 종말로 지시되고 있지만 현실의 시선을 압류해 버리는 역사적 종말이 아니라 종말로 설정된 그 ‘끝’에 의해 현실이 더욱 의미화 되고 긴장화 된 시간)에 의해 더욱 적극적인 의미와 목적으로 투사되면서 그 존재의 힘으로 해서 결국 정치적 함의까지 포함하기에 이른다. 존재의 진정성을 확보한 존재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정치적이지 않은가?

“바울로의 편지 중에서 직접 실제적인 정치적 유산과 같은 것을 제시해야 한다면, 필자는 남겨진 자들이라는 관념이야말로 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100.)

곧 그러면 다시 중복하여 메시아(그리스도)의 권위, 존재적 힘 앞에서 모든 역사와 공간을 향하여 소유권이 양도된, 사용권의 자유로 이행된 시간이야말로 아감벤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의 시간이며 그 자유의 시간을 근저로 하여 그 시간이 또한 역사적 시간 속에서‘끝’에 의해 수축된 남겨진 시간으로 경험되고 수행되어 지금 ‘이 시간’현재에 특별한 목적과 의미가 투사되는 시간이 바로 메시아니즘의 그것이라는 것이다. 소유권이 재 조율되며 신적 의미에 투과된 시간이 이렇게 역사적 현실을 대상지로 만나면 한편, 그 시간은 사실상 존재적 충실에 의해 이렇게 지금 ‘이 시간’을 향해서는 확대되어 거의 유물론적 시간으로 까지 상승하게 되는데 사실 아감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시간은 바로 이‘현실’에의 진리적 충실이라고 하는 최고조의 시간이다. 아감벤은 이 메시아니즘의 시간을 이미지라고 하는 의식의 범주로 설명하는 발터 벤야민의 특유한 사유의 글을 이렇게 옮기며 자신의 본문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그 부분은 아감벤을 자극한 주요 문장이었으am로 여기에도 그대로 옮겨 본다.

“그것은 진정한 역사시간, 진리의 시간의 탄생과 합치된다. 과거가 현재에 빛을 비춘다거나 또는 현재가 과거에 빛을 비춘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란 과거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하나의 성좌배열적인 관계 속에서 지금과 전광석화처럼 결합하는 것이다.---그것은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지적인 것이다.---읽혀지는 이미지, 즉 인식가능성의 지금에 있어서의 이미지는 모든 독해의 기저에 존재하는 이 위기적이고 위험한 순간의 각인을 최고도로 유지하고 있다.Benjamin 1999a,463.”(238.)

이쯤되면 물론 존재가 어떤 특정의 정치적 계급의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존재의 자각과 시간의 충실은 사실상 정치적인 의미와 거의 분리가 불가능할 정도의 ‘충실’이 되고 있지 않는가? ‘남겨진’이라고 하는 긴장과 존재적 충실이라는 고탄력은 서로 배합되어 시간 자체를 의식의 수축된 힘에 의해 중력적으로 휘어지게 하고 확대, 변용되게 해 더욱 최고조의 시간으로 밀어 올린다고 하는 현대물리학적 발상을 응용한 이러한 사유 또한 어쨌든 신선하고 획기적인 통찰이라고 하겠다.

한편, 이에 또 이해를 위해 덧붙여져야 하는 것은 ‘제6일 에이스 에우아게리온 테우Ⅱ’의 ‘신앙의 언어’부분에서 밝힌 언어의 어떤 폭력성을 통한 인간 무화에 관한 부분이다. 신앙의 진실에의 충실과 같은 비언어적 범주는 지시적 논리, 그리스적 언어의 구멍을 관통하여 신앙의 언어를 창조해 내며 행위수행적인 언어로 올라간다. 곧 “존재와 본질의 저편에”설정, 변화의 힘을 수반할 수 있는 언표적 언어가 그것인데 여기에서 역시 인지되는 것은 이성적 언어의 한계와 그에 관계된 언어의 어떤 권력적 의미에 대한 회의이다. 역사적 언어는 지시하고 재단, 편집, 규정할 뿐 그 말이 처한 현실과 일치시켜 주지는 않는다. 그 언어로만 하면 그것은 역사적 현실과 언제나 기본적으로 간격을 생산하고 고착화 시킨다. 근원적 내용을 마모시키고 은유의 실제적 힘을 첨삭시키며 그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에 대해서도 객관의 건조한 권위로 결박하고 가두어 버린다. 그런데 여기에 신적 근원을 관통한 신앙언어는 역사적 언어의 근원간격을 돌파하고 지시와 규정을 넘어서 모든 현실적인 관계와 밀착되게 하며 또, 변화와 효과의 인격적 힘을 행위적으로 수행할 수가 있다. 바울의 언어가 독특하고 행위수행적인 국면을 띠는 것은 바로 이 메마름을 넘어선 그 어떤 초 언어적 차원의 범주이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아감벤에게는 그리스적 개념 언어는 부족하다. 그 너머에 더 본원적이고 현실과 일치시킬 수 있는 인격적 힘을 응축하는 언어가 기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메시아니즘의 응축된 의식의 확장에는 기본적으로 이 일치의 본원성, 또한 기본적으로 함의될 수 있는 그 무엇이 내장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에 연관하여 한편, 바디우도 철학은 진리를 창조하거나 소유하는 장치가 아니라 다만 사건의 의해 발생한 진리를 사후적으로 규명하고 담아낼 뿐이라는 견해의 연장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쓰고 있는데 아감벤과 관련하여 인용할 만하다.

“지식이라는 형상은 그 자체가 율법의 형상과 마찬가지로 예속의 형상이다. 그와 결합되어 있는 지배의 형상은 실제로는 하나의 협잡이다. 지배자를 축출하고 아들들의 평등을 정초해야 한다”(<사도바울>,117.)

바디우에서는 인식의 범주로 인한 것이 아닌, 인식의 너머에서 도래적으로 주어지는 그 진리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소유를 주장할 수 없는, 이성 밖이라고 하는 공영의 지대에서 발생되어 누구에게나 보편의 권리로 향유된다고 하는 그 ‘보편’이라고 하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자의식적 지식을 평가절하 하는 논리에서 저러한 문장을 쓰고 있지만 어쨌든 언어의 한계를 인지한다는 의미에서는 두 사람 다 상동하는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인간의 자의식적 권위를 무화하고자 하는 지점에서는 이해를 같이한다는 말이다.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한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율법이든, 스스로 개념을 지시하고 규정, 지식 권력적 차이를 축적해 간다고 하는 지성의 범주에서든 그 과정에서 작동되는 인간의 자의식과 그 권력적 의미를 포착하고 진리적 영역은 항시, 그 그러한 권력적 협잡의 권위와의 역학관계에서 반드시 그 협작적 권위를 무화시키는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통찰에서 상동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의식이 탈각되는 기획을 향하여 권력기제에 대한 무화의 기제 방식을 아감벤은 인간의 도덕의지(율법)와 소유권을 둘러싸고 있는 주체의 권력적 의식에서 그것을 주로 무화하고자 하고 바디우는 그것을 지식의 권위에서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 모든 방식에서 인간의 권위를 탈각한 지점 위에서 모든 이에게 차별이 없이 보편적으로 분배될 수 있는 자유와 은총의 지점은 도덕의 권위나 지식의 권위가 아닌 도래적 그 무엇을 통해서만이 경험될 수 있고 그 지점에서만이 모든 인간의 것에 배어있는 권력적 협잡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하는 보편근원에 대한 지점에서는 이해를 같이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세계내적 권위의 근원적 허위를 공개하고 그 허위를 메우고 치유할 수 있는, 언어 너머의 보편적 지점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 비밀의 공개는 메시아적 시간에서의 율법의 기능정지와 모든 권력의 실질적인 비정통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184.)

“죄란 정확히 무엇일까? 죄란 자율성, 자동성으로서의 욕망의 삶이다.”(<사도 바울>,153.

(어떤 억압기제로도 지배하고 작동될 수 있는)도덕과 율법의 권위도 비정통적인 것이며 (차이를 생산하며 우월적 자의식을 촉발시킬 수 있는)지식의 권위도 비정통적이며 오직 존재, 그 자체가 무화되고 부정된 역설로 저층에 의해 근원 겸허로 재조정되어,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상대적 우월권을 주장할 수 없는, 절대 평등의 내적 기초에서만이 존재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그 메시아적 지점을 두 사람의 사유는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물론 바디우는 자신의 바울에서, 차이 없이 누구에게나 통한다고 하는 그 보편의 소통점에서 <사도 바울>을 정초해 나갔고 아감벤은 또한 자신의 바울에서 그 지점을 존재의 탈각된 자리, 메시아적 시간의 그 특이한 삶의 질감 내용으로 이끌어 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아감벤의 메시아니즘에는 이런 역설로 재창조된 존재의 힘이 기본적으로 설정되어 있어(지젝과는 다르고) 그럼으로써 그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모든 비정통적 권위가 폭로되는, 일종의 정치적인 함의까지 포월하게 되며, 이 역사 내에서는 그런 정열의 이유로 이후의 윤리적 세계가 아울러 유물론적 렌즈로까지 이행되기도 하는 것으로 읽혀 질수 있겠다.


이렇게 되면 지젝의 표현처럼 신학은 가공할만한 우군을 자기 편으로 확보하게 되는 것일까? 또 이렇게 되면 신학에서 본회퍼가 수행했던 기독교의 세속화, 비종교화는 아감벤에 이르러 타영역과의 이종교배를 통하여 또 다른 국면으로 구체, 광역화 되는 것이며 그로써 역시 지젝이 <죽은 신을 위하여>의 서두에서 일말의 어떤 조롱조로 말했던 경우처럼, 기독교의 수명은 다시 늘어나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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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와 반복> 3장 사유의 이미지 부분을 읽었다. 289쪽부터 368쪽까지이다. 그리고 그 틈새 사이로 알랭 바디우의 <사도바울>을 완독했고 이어 <조건들> 102쪽 까지 읽었다. 들뢰즈와 바디우야말로 서로 접점에 있고 접점에 있는 만큼 많이 다른 쪽의 사유로 나간 대칭에 있는 분들로 이 두 철학자를 동시에 읽어 나가며 경험할 수 있는 역동적인 맛은 그러므로 남다를 수가 있겠다. 나야 이런 양가적 축복들을 미리부터 충분히 아우를 판단력이 없으나 들뢰즈를 읽다보면 다른 바디우에 대해 자연히 구미가 당기고 그 바디우와 중첩시키면 들뢰즈는 들뢰즈대로 바디우는 바디우대로 더 이해가 편해지고 분명해 지니 그렇게 2중의 텍스트읽기는 저절로 자극되어 누려지게 된다.

<차이와 반복>의 역자는 지금 내가 읽은 3장이 전체 내용 중 사람의 신체에 비유하면 가슴부분에 해당된다고 상세히 해설해 주고 있는데 그것이 왜 가슴에 해당되는지는 읽고나서도 얼른 그 느낌이 일치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나로서도 3장은 매우 흥미 있는 내용으로 읽혀졌다. 문장도 전혀 어려운 부분들이 없었고 내용의 논점자체도 나 같은 일반인에게 매우 유쾌하고 의미 있는 사유의 자극으로 일깨워 질 수 있는 내용들로 감칠맛 나고 기름지다. (철학이 이렇게 두렵고 건조한 규정개념과 대면하는 어떤 노동이 아니라 삶과 의식의 마주침, 어떤 성찰로 발화되는 생산적인 유희로 경험된다면 철학이 일반인에게 너무나 멀다고 하는 인문학적 현실은 가장 우선적으로 폐기되어야 할 장벽이 아닐까?)

3장의 주 논점은 언어와 개념의 불완전성을 지적, 정리하고 그럼으로써 생성의 범주를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인식능력 이론의 기초 개념, 즉 그 지반을 물어 보고자 하는 데에 있다. 언어와 논리 실증적 개념들은 개체존재의 유동하고 사방으로 또는 안팎으로 발산하고 운동하는 차이와 반복들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표상해 줄 수 있을까?

현대철학에 있어서의 이러한 일련의 흐름 즉, 철학개념의 빈곤성에 대한 자각은 이미 키엘케고르에게서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고 그 기존문법에 대한 기호적 표출로는 하이데거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이데거의 특히 <존재와 시간>에서부터는 익숙하지 않던 이상한 이음선들, 괄호문자들이 사태를 이루며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문장과 함께 뒤섞이는 기호들 자체가 우선 문법언어의 어떤 한계를 희화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시간에 던져진 존재의 미세 내용들이 기존의 문법적 언어들로는 몸에 맞지 않는 것처럼 이미 불편해진 것이다. 그런 그림들은 용암들처럼 이미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폭발전의 화산의 그림을 쉽게 떠오르게 한다.

그러한 기호적 언어에 대한 불편이 들뢰즈에 이르러서는 전통적인 기술들의 문장들을 이즈러지게 뒤틀다 못해 아예 노골적으로 기호와 존재에 대한 층위의 차이로 이원화되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곧 존재의 생성, 역능, 그 전방향의 신비는 재현적 논리나 개념 언어는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 그 한계로는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다는 비평적 정리, 회의가 그것이다.

언어에 기초한 사유개념, 철학들은 사유전개의 공통감을 지향하고 그 공통감에 대한 함의를 자본으로 지식개념의 권위를 확보 사물과 자연의 혼돈에 균형을 잡아 사물과 현상을 구원할 더욱 엄밀한 지적 체계로 건축되기를 노리지만 개념으로 봉합되고 봉쇄되는 그 안을 향해서 형식적으로는 규정 잡는 대신에 그 바깥은 그럴수록 무가 되고 허위와 허상으로 부정되어 져야만 하는 배타적 이분법으로 경직화 된다. 곧 전통철학 고기토적 인식론의 기본 패러다임이다. 그렇게 인식과 의식을 기능적으로 분리한다고 해도 그렇다면 과연 개념의 안만 사유이고 그 바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사유의 타자, 혼돈의 허상, 끊임없이 부정되어야 할 대상들인가? 먼저 개념이라고 하는 봉합작업 자체, 실증적 인식 그 자체가 충분한 인식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하는 의문을 생래적으로 포함함으로 이런 회의들은 쉽게 증폭될 수 있다. 실증적 과학의 편의로 분절적으로 사유를 그렇게 재단, 구축한다고 할 때 그 논리는 필연적으로 인위적인 형식논리의 범주를 띠게 되고 그 형식의 경직성은 벌써부터 너무나 크고 많은 구멍들을 무한하게 발생시켜 인식의 불완전성을 노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크고 엉성하게 설긴 형식 그물로는 차이와 반복, 존재의 감격이나 흩어지는 욕망. 다변한 역능들을 다 걸러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사실상 사유라고 우리가 인정해 온 개념안의 사유는 공인된 사유라고 하는 그 공준의 허상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어서 사유라고 인정될 뿐 사실 그 사유는 진정한 사유는 다 빠져 나가고 유실되고만 빈 공간의 사유가 아닌가? (바로 이러한 사유의 빈곤을 기존의 개념들과 인식들을 등차 시키며 정교하게 변별해 내는 내용들이 이 3장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사유는 개념이라고 하는 어떤 허위적 공준을 매개로 통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외설적 마주침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사유와 인식이라고 하는 도덕적 이미지를 고집해야 할 것이 아니라 비-철학으로 돌파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철학이 자신의 차이나 참된 시작을 발견하는 장소는 선-철학적 이미지와 합의하는 곳이 아니라 그 이미지에 대항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곳일 것이고, 이런 싸움은 비-철학이라는 비난도 듣게 된다. 이를 통해 철학은 어떤 이미지 없는 사유 안에서 자신의 본래적인 반복을 찾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치러야 할 대가는 크다. 가령 엄청난 파괴와 도덕적 퇴폐들이 따를 것이다. 철학은 역설 이외에는 어떠한 동맹자도 없이 버텨야 하고, 공통감의 요소는 물론이고 재현의 형식마저 포기하는 완고함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유가 사유하기 시작할 수 있고 또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선-철학적 이미지와 그 공준들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할 때뿐이다.”(296쪽)

이렇게 철학이 재현적 논리나 개념을 모험을 불사하고서라도 넘어가며 돌파하게 되면 그렇다면 철학은 시가 되고 예술이 되고 역설과 은유, 논리위의 논리로 까지 폭발하고 벌어진다. 운동하는 생성을 중핵으로 떠안아야만 하는 들뢰즈의 철학으로서는 고기토적 인식의 엄밀성은 그것이 그렇게 엄밀화 될수록 점점 형식논리로 산성화 되고 악성화 되는 악순환으로 좁혀지는 것으로 파악될 뿐이므로 인식의 다른 층위를 이렇게 필연적으로 불러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철학은 기존의 수평면 평화위에 ‘절대적 필연성의 발톱’‘원천적 폭력의 발톱’‘불법 침입의 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지고 부서져야 한다. 다른 측면으로 정리하면 이제 사유는 스스로 존재를 표상하거나 고착적으로 규정짓는 최전선에서 내려와 존재를 분만하는 2차적이고 소극적인 기능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는 유동하고(하고 있는) 운동하는(하고 있는) 유목적 생성이므로.




이렇게 사유의 빈곤이 정리된다고 한다면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철학자는 당연히 바디우이다. 바디우야말로 사유의 한계를 진리에 대비되어 잠정적인 기능으로 제한되이 설정하는 철학자가 아닌가? 이 지점, 사유의 제한점에 대한 인식에서는 들뢰즈의 문장이나 바디우의 문장은 서로 혼동될 정도로 서로 마주친다. 바디우의 <조건들>에는 다음과 같은 정리들이 널려 있다.


“철학적 사고의 재난은 철학이 스스로를 진리들의 압류가 아니라 진리의 상황인 것처럼 제시할 때 생겨난다(---)철학은 스스로를 진리성의 가득참으로 제시하면서, 진리들의 다수성, 진리들의 공정의 이질성을 포기한다.”(알랭 바디우,<조건들>.이종영역. 새물결.92쪽)

그리고 <사도 바울>에서는 이런 문장도 쉽게 볼 수 있다. “사건은(진리는) 언어를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는 실재의 지점과도 같다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이미 확립된 언어들 속에서는 사건(진리)이 수용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사건은 진정 명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사도 바울> 현성환역. 새물결.93쪽)

이런 바디우의 위 문장들은 한편 또 들뢰즈의 문장과 너무나 이렇게 닮아 있다.

“---이념들은 문제들이지만, 문제들은 단지 인식능력들이 우월하거나 월등한 실행에 이를 수 있는 조건들만을 가져다줄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념들은 어떤 양식이나 공통감을 매체로 하지 않는다.”(<차이와 반복> 325쪽)

들뢰즈는 논리 실증주의의 언어가 존재의 생성을 표상해 주지 못한다고 하는 의미에서 언어의 빈곤성을 말하고 바디우는 진리라고 사유의 중핵적 상층은 합리적인 논리에 대비해서는 이질적이어서 논리 언어에 의해 담길 수 없다는 차원에서 이렇게 사유의 기능을 제한하고 있지만 어쨌든 언어의 빈곤성을 말한다는 의미에서는 두 사람의 사유는 다 공히 같은 공통점에 서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는 인식을 같이 하지만 두 사람의 전제와 구성은 서로 판이한 차원임은 두 말할 것이 없겠다. 언어의 빈곤성을 이렇게 공통으로 확인하면서도 들뢰즈는 사유가 차이와 반복으로 운동하는 생성으로 찢어지고 폭발되어야 한다는 전제적 의미에서 빈곤을 말하고 바디우는 선철학적으로 진리가 존재한다고 하는 강렬한 신념에 의해 그 진리는 사유의 심화나 연장에 의해 규정되고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는 순수사건으로서 강력한 이질성의 외설적 충격으로 논리나 언어의 층위위에 투여되고 주어지는 차원이라는 전혀 다른 의도로 사유의 제한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점점 더 흥미를 더해 가는 대가들의 텍스트들이다. 이 두 사람은 향후 어떤 건축물로 자신들의 철학을 심화시켜 피력했을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천천히 마디와 매듭을 쉬어가며 나름대로 확인해 볼 일이다.

바디우의 인상적인 다음의 문장을 옮겨보며 또 한 매듭을 마름한다.

“지식은 여기서 생산적인 목적을 위해 모방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이성적 순서이기도 하고 스피노자의 기하학적 방법이기도 한 이 방법을 지식의 픽션이라고 부른다. 진리성은 그러한 픽션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조건들>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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