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의 <루이 랑베르>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그리고 그에 연동되어, 전에 읽었던 아감벤의 <장치란 무엇인가?> <세속화 예찬>을 다시 찬찬히 읽었다.   

 

 



 

 

먼저 발자크와 발저의 소설은 학교생활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데에 흥미를 일으킨다. 푸코나 아감벤이 권력과 접속되어 있는 광의의‘장치’를 규정하며 들고 있는 예시들의 주요 얼굴중의 하나인 바로 그 학교를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항시 이 학교는 문제적 사유를 제기하는 쪽에서의 손쉬운 지시물인가? 우선 나는 좀 길지만 아감벤이 규정하는 장치의 개념을 여기에 옮겨본다. 

  



 

 

 

 

 

 

 

 

 

 

 

 

“푸코가 말하는 장치는 이미 아주 넓은 부류인데 이것을 더 일반화해 나는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지도, 규정, 차단, 주조, 제어, 보장하는 능력을 지닌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장치라고 부를 것이다. 따라서 감옥, 정신병원, 판옵티콘, 학교, 고해, 공장, 규율, 법적 조치 등과 같이 권력과 명백히 접속되어 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인터넷서핑〕, 컴퓨터, 휴대전화, 등도, 그리고(왜 아니겠는가마는) 언어 자체도 권력과 접속되어 있다. 언어는 가장 오래된 장치인지도 모른다. 수천 년도 전에 영장류는(어떤 결과가 될 것인지는 아마 알지 못한 채로) 무심코 언어라는 장치에 포획됐다.”(<장치란 무엇인가?>,양창렬역, 33쪽.)  

물론 아감벤의 정의는 역시 또 하나의 구별되는 그 부분에 대한 규정을 넘어 질문 그 자체를 지향한다. 완벽할 수 없는 그 질문에서야말로 오늘날 특히 중요해진 장치에 대한 숙고를 수행할 수 있으리라. 이 장치 속에 포로된, 아니 장치 그 자체인 학교의 매트릭스 안에서 사람은 어떻게 길들여지고 어떻게 자신의 주체를 변전해 갈 것인가? 계속되는 아감벤의 말처럼 오늘날 우리가 이 “장치들과 맞대결할 때 채택해야 할 전략이 단순할 수 없”을 것임에 우선 동의해 놓고서---

<루이 랑베르>에서 발자크는 역시 작품에서 자신의 대리인인 학생, 랑베르를 내세워 장치를 장치로써 맞닥뜨리지 않는다. 장치로서의 학교, 그것도 엄격한 구획과 규율의 기숙학교 생활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개념의 위격과 체계를 범주로 주체와 외면이 손쉽게 구획된 객관적이고 서사적 관점이 아니라 더 깊은 내속으로 들어가 그 의식의 흐름들을 오히려 위주로 두는 입장에서 사건들을 진술하는 편을 택한다. 곧 자기 고백적 방식이다. 이러한 주체 중심의 안의 형식으로서의 전개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그리고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도 마찬가지다. 이미 장치로서의 안이 아닌 장치에 포획되기 이전의 순수 존재로서의 자기 인식에 의식의 근거를 두는 것으로 담화를 발전시킨다. 그것은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장면들처럼 의례적인 공공적 시민들, 국가 사회적 몸짓들을 저만치 메인거리에 두고 오히려 그러한 메인사태를 배경으로 삼아 뒷골목에서 발화되고 있는 흥미진진한 유령, 좀비, 마술, 마법들의 이야기를 화면의 중심으로 근거지우는, 이를테면 그러한 역전된 그림을 연상시킨다.  

“형벌을 받는 도중에 미소 짓는 순교자처럼 그는 자신의 사유가 펼쳐지는 하늘로 피신했다. 아마도 이러한 내적인 삶이 그 자신이 굳게 믿는 신비의 세계를 보게 했으리라”(<루이 랑베르>, 송기정역,44쪽)  


“사유의 본질 탐구에 몰두했던 그는 학교 수업을 게을리 했고 선생님들이 내준 숙제를 경멸했다”(위의 책,49쪽)

흔히 하는 말로 제도권적인 사회, 체계로는 담을 수 없는 생각을 하고 그 장치로서 측정할 수 없는 정신세계, 사유의 진전을 일삼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날것으로 묘사하고 발전시키는 영역을 창조하고 개척한다는 의미에서의 자기 고백적 시점을 이름이다. 이들의 찬탄스러운 내적 도발에 비한다면 장치들은 얼마나 왜소하고 또 남루한 얼굴들인가?  

 



 

 

 

 

 

 

 

 

 

 

 

하여 개인이란 무엇인가? “개인에 대한 탐구가 바로 국가, 사회에 대한 탐구가 아니겠는가?”책의 표지 장식용 문구처럼 발자크의 개인은 훨씬 블랙홀 처럼 신비하고 거대한 국면을 갖는다. 역시 그 개인(인간)의 얼굴에 휘감겨 있는 그 무엇의 아우라에 대한 가장 가까운 이름을 연상시키자면, 이를테면 아감벤이 <세속화 예찬>에서 흥미롭게 명명한 ‘게니우스(genius)’쯤 될까? 나는 얼른 다시 아감벤의 책들을 펴 그가 새롭게 규정하고 창조한(?) 인간을 재유추해 보는 것으로 랑베르를 읽는다.

“그러나 이 가장 내밀하고 인격적인 신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비인격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넘어서고 초과하는 것의 화신이다.---게니우스〔라는 단어에〕내포된 인간의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아’이자 개인적 의식일 뿐만 아니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비인격적, 전개체적(preindividuale) 요소가 늘 함께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뜻이다.---게니우스의 이 멀리할 수 없는 현전은 우리가 실체적인 동일성에 갇히는 것을 막으며, 우리 자신 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자아의 자만을 산산이 깨뜨려버린다.---비의식이라는 지대의 문턱에서 자아는 자신의 특성을 내려놓고 감동해야 한다. 정념은 우리와 게니우스 사이에 뻗어 있는 줄타기용 줄로, 우리의 곡예하는 삶은 그 위를 걷고 있다. 심지어 외부 세계에 대해 우리가 놀라기 전에 우리를 경탄하고 놀라게 만드는 것은 영원히 미성숙하고 무한히 청춘인 어떤 부분, 개체화의 문턱에서마다 머뭇거리는 어떤 부분이 우리내부에 현전한다는 사실이다.”(<세속화 예찬>,12-19쪽)                 

“게니우스는 결코 자아라는 형식을 띨 수 없으며, 하물며 저자라는 형식을 띨 수도 없다. 게니우스를 전유하려는 시도, 게니우스로 하여금 게니우스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하게끔 강제하려는 자아 혹은 인격적 요소의 시도는 모두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위의 책,16쪽.)           

 

 


 

 

 

 

 

 

 

 

 

 

 

그리고 흥미를 주는 아감벤의 계속되는 문장 역시 인상적이다.

“이 때문에 게니우스와의 마주침은 두렵다. 자아와 게니우스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는 삶은 시적이라지만, 게니우스가 모든 면에서 우리를 초과하고 넘어설 때 생겨나는 느낌은 공황상태이다. 우리 자신이 견딜 수 있다고 믿는 것보다 무한히 거대한 그 무엇인가가 우리를 엄습해 올 때의 공황상태, 이 때문에 대개의 인간들은 비인격적인 자신의 일부 앞에서 공포로 뒷걸음질 치거나, 위선자처럼 그것에 사소한 위상만을 부여하려고 한다.”(위의 책,17쪽)

멋진 글이 아닐 수 없다. 루이 랑베르의 내면에 대해 아감벤의 이러한 해명보다 더 좋은 해설을 접해 보기는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장치를 넘어서 생성되고 분출되는 더 큰 잉여와 잔여, 그 앞에서 종종 사람들은 공포와 고착, 퇴행으로 우회하거나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서 보는 것처럼 그 초과를, 그 알 수 없는 아우라에 대하여 심지어 신비적으로 숭배하게 되는 기괴한 태도까지 유발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작품들에서 일련적으로 연계되는 병리적인 결과들이 얼른 떠오른다. 먼저 ,<루이 랑베르>의 랑베르는 결국 작품 속에서 학교를 떠나 정신병원으로 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고 <벤야멘타 하인학교>에서는 저자 자신이 역시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된다.(그의 정신 병력은 지금도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다고 하지만) 또한 도스토옙스키에게서 역시 우리는 평생에 걸친 그의 사적으로 일말의 병리적 내면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아니 정상과 병리, 장치와 그것의 내,외부의 선을 분절하는 사유형태, 이유를 다시 사유해야 하는 지점에서 그 천재들의 '병리'들을 다시 재판단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편, 이렇게 본다면 발자크는 랑베르에서 비정상적인 극한까지 발전한 병리적 국면에서도 그 절대 극점에 대해 부정하지 않고 그 병리에서 기괴하게도 랑베르의 창조적인 천재성을 보존하는 혼재로 여지를 남겨 두고 있는데--- 그 역시 어쨌든 게니우스가 극단적으로 충돌시킬 수 있는, 그 경계의 지점, 창조와 병리의 위태한 경계선을 상징적으로 지시해 주는 것으로 읽힌다.

어쨌든 문학평론가 정여울씨가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관련된 어떤 글에서 말했듯“인간은 결코 이성의 총합에 그치지 않는”것인가? “의식만큼이나 무의식이, 이성만큼이나 욕망이, 논리만큼이나 불합리가 인간을 움직이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식적인 의혹과 질문으로 랑베르, 그리고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주인공 야콥 폰 군텐,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를 모두 추억해둔다.   

 

 


 

물론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 <루이 랑베르>에 이어 같이 읽은 발자크의 <나귀가죽>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다른 정리가 필요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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