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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사물과 물건, 상품들의 경험에서 전 공정을 반죽하는 경이, 기쁨의 신비와 같은 뭉클함을 잃어버렸다. 거의 모든 것을 자동화된 기계장치에 의하거나 아니면 타인들의 노동에 의한 완제품을 그냥 간단한 화폐교환 절차동작(그것도 단순한 버튼 터치로)만으로 소유하고 점유할 수 있게 되면서 그 사물이 주는 소리와 음악, 존재감의 고유한 함성으로부터는 점점 소외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편이의 유목국으로 해서 인간은 더 많고 다채로운 물건들을 향유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더 많은 변화와 차이, 기능들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물량을 대량으로 증폭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소중한 그 무엇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그러한 자유의 수요에 부응한 대량복제품들은 한편, 이미 자연의 질감과 유리되기 시작했고 온통 미끄러운 표백미와 화학 처리된 표면과 얼굴들은 존재의 가벼움으로 경량화 되면서 더욱 사람들로부터 가까이 밀착되는 것과 동시에 정서적으로는 멀어지게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야누스의 양면처럼 그 선택의 무한한 자유 속에서 오히려 인간은 사물을 해석하고 지배하는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사물의 무 존재감에 눌리고 그 유실의 바다에 빠져 같이 화학적 표면과 기능이 되어 버리는 역 전이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물을 사물로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소금처럼 꼭 필요한 최소한의 수동적 체험공간마저 지워버리는 편이의 중독에서 이제는 스토리가 없는, 얼굴이 없는 사물들만 홍수로 경험하게 되면서 사물의 경험에서 인간은 사실상 사물의 죽음들만 대량으로 맛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알랭 드 보통의 문제의식도 이와 다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는 많은 물건을 실제로 손에 넣을 수는 있지만, 그런 물건들의 제조와 유통 과정이 어떠한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소외과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이, 감사, 죄책감을 경험할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한다.”(39쪽)

하여 작가는 이 책에서 이 편이들의 유목국에서 어떤 한 종류의 반란을 시도해 보고자 하는 것일까?
물론 매우 포스트모던한 작가에게 이러한 제국이니 반란이니 하는 거대함의의 극단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다만 적극적인 문제의식은 유희와 놀이정도로만 속여 두고 그냥 질문으로만 던져놓을 뿐이다. 그렇긴 해도 사물과 사태에 대해 관통해 볼만한 재치와 재능, 삶의 호기심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기동성과 현장성, 취재적 발랄한 시선은 신세대 인문주의자의 특기, 일단 상품이 생산되고 움직이는 물류현장을 발로 뛰며 추적해 본다. 물론 여기에 시선의 쾌락이자 권력, 카메라맨의 동승은 필수옵션---.작전은 무리 없이 적중하고 있다.
이른 새벽, 대지, 거대창고, 공중, 항공기, 기업, 로켓발사현장에 이르기 까지 숨 가쁘게 달려가며 사물의 이동과 경위를 또 다른 방식의 서사적 접근으로 훑어주고 있는데 문장은 경쾌하고 묘사는 위트와 재치가 넘쳐난다. “콜라주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역동적이고 논쟁이라 하기에는 너무 다채롭고 매력적인 문체---”라고 한 LA타임즈의 비평은 책의 바로 이러한 성격을 잘 포착해 주고 있어 책 표지에 장식 인쇄되어 있는 것일까?
저자의 믿음처럼 신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물과 그 사물을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노동을 추적하는 저자의 서사적 시선은 이를테면 신이 부재한 세상에서의 일종의 순례기라고나 할까? 어쨌든 보통의 색다른 보고서를 통해 우리는 사물과 상품, 또한 일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경험해 볼 수 있다.
물론 잃어버린 사물, 물건의 신비를 보상하고자 하는 어떤 대안적 시선이 단지 보통과 같은, 시종 그 사물이 제작되고 유통되는 과정의 공간적이고 시각적인 이음새를 연결하는 방식과 같은 유물론적 시선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좀 단순해 보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