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이와 반복> 3장 사유의 이미지 부분을 읽었다. 289쪽부터 368쪽까지이다. 그리고 그 틈새 사이로 알랭 바디우의 <사도바울>을 완독했고 이어 <조건들> 102쪽 까지 읽었다. 들뢰즈와 바디우야말로 서로 접점에 있고 접점에 있는 만큼 많이 다른 쪽의 사유로 나간 대칭에 있는 분들로 이 두 철학자를 동시에 읽어 나가며 경험할 수 있는 역동적인 맛은 그러므로 남다를 수가 있겠다. 나야 이런 양가적 축복들을 미리부터 충분히 아우를 판단력이 없으나 들뢰즈를 읽다보면 다른 바디우에 대해 자연히 구미가 당기고 그 바디우와 중첩시키면 들뢰즈는 들뢰즈대로 바디우는 바디우대로 더 이해가 편해지고 분명해 지니 그렇게 2중의 텍스트읽기는 저절로 자극되어 누려지게 된다.
<차이와 반복>의 역자는 지금 내가 읽은 3장이 전체 내용 중 사람의 신체에 비유하면 가슴부분에 해당된다고 상세히 해설해 주고 있는데 그것이 왜 가슴에 해당되는지는 읽고나서도 얼른 그 느낌이 일치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나로서도 3장은 매우 흥미 있는 내용으로 읽혀졌다. 문장도 전혀 어려운 부분들이 없었고 내용의 논점자체도 나 같은 일반인에게 매우 유쾌하고 의미 있는 사유의 자극으로 일깨워 질 수 있는 내용들로 감칠맛 나고 기름지다. (철학이 이렇게 두렵고 건조한 규정개념과 대면하는 어떤 노동이 아니라 삶과 의식의 마주침, 어떤 성찰로 발화되는 생산적인 유희로 경험된다면 철학이 일반인에게 너무나 멀다고 하는 인문학적 현실은 가장 우선적으로 폐기되어야 할 장벽이 아닐까?)
3장의 주 논점은 언어와 개념의 불완전성을 지적, 정리하고 그럼으로써 생성의 범주를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인식능력 이론의 기초 개념, 즉 그 지반을 물어 보고자 하는 데에 있다. 언어와 논리 실증적 개념들은 개체존재의 유동하고 사방으로 또는 안팎으로 발산하고 운동하는 차이와 반복들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표상해 줄 수 있을까?
현대철학에 있어서의 이러한 일련의 흐름 즉, 철학개념의 빈곤성에 대한 자각은 이미 키엘케고르에게서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고 그 기존문법에 대한 기호적 표출로는 하이데거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이데거의 특히 <존재와 시간>에서부터는 익숙하지 않던 이상한 이음선들, 괄호문자들이 사태를 이루며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문장과 함께 뒤섞이는 기호들 자체가 우선 문법언어의 어떤 한계를 희화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시간에 던져진 존재의 미세 내용들이 기존의 문법적 언어들로는 몸에 맞지 않는 것처럼 이미 불편해진 것이다. 그런 그림들은 용암들처럼 이미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폭발전의 화산의 그림을 쉽게 떠오르게 한다.
그러한 기호적 언어에 대한 불편이 들뢰즈에 이르러서는 전통적인 기술들의 문장들을 이즈러지게 뒤틀다 못해 아예 노골적으로 기호와 존재에 대한 층위의 차이로 이원화되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곧 존재의 생성, 역능, 그 전방향의 신비는 재현적 논리나 개념 언어는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 그 한계로는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다는 비평적 정리, 회의가 그것이다.
언어에 기초한 사유개념, 철학들은 사유전개의 공통감을 지향하고 그 공통감에 대한 함의를 자본으로 지식개념의 권위를 확보 사물과 자연의 혼돈에 균형을 잡아 사물과 현상을 구원할 더욱 엄밀한 지적 체계로 건축되기를 노리지만 개념으로 봉합되고 봉쇄되는 그 안을 향해서 형식적으로는 규정 잡는 대신에 그 바깥은 그럴수록 무가 되고 허위와 허상으로 부정되어 져야만 하는 배타적 이분법으로 경직화 된다. 곧 전통철학 고기토적 인식론의 기본 패러다임이다. 그렇게 인식과 의식을 기능적으로 분리한다고 해도 그렇다면 과연 개념의 안만 사유이고 그 바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사유의 타자, 혼돈의 허상, 끊임없이 부정되어야 할 대상들인가? 먼저 개념이라고 하는 봉합작업 자체, 실증적 인식 그 자체가 충분한 인식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하는 의문을 생래적으로 포함함으로 이런 회의들은 쉽게 증폭될 수 있다. 실증적 과학의 편의로 분절적으로 사유를 그렇게 재단, 구축한다고 할 때 그 논리는 필연적으로 인위적인 형식논리의 범주를 띠게 되고 그 형식의 경직성은 벌써부터 너무나 크고 많은 구멍들을 무한하게 발생시켜 인식의 불완전성을 노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크고 엉성하게 설긴 형식 그물로는 차이와 반복, 존재의 감격이나 흩어지는 욕망. 다변한 역능들을 다 걸러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사실상 사유라고 우리가 인정해 온 개념안의 사유는 공인된 사유라고 하는 그 공준의 허상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어서 사유라고 인정될 뿐 사실 그 사유는 진정한 사유는 다 빠져 나가고 유실되고만 빈 공간의 사유가 아닌가? (바로 이러한 사유의 빈곤을 기존의 개념들과 인식들을 등차 시키며 정교하게 변별해 내는 내용들이 이 3장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사유는 개념이라고 하는 어떤 허위적 공준을 매개로 통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외설적 마주침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사유와 인식이라고 하는 도덕적 이미지를 고집해야 할 것이 아니라 비-철학으로 돌파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철학이 자신의 차이나 참된 시작을 발견하는 장소는 선-철학적 이미지와 합의하는 곳이 아니라 그 이미지에 대항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곳일 것이고, 이런 싸움은 비-철학이라는 비난도 듣게 된다. 이를 통해 철학은 어떤 이미지 없는 사유 안에서 자신의 본래적인 반복을 찾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치러야 할 대가는 크다. 가령 엄청난 파괴와 도덕적 퇴폐들이 따를 것이다. 철학은 역설 이외에는 어떠한 동맹자도 없이 버텨야 하고, 공통감의 요소는 물론이고 재현의 형식마저 포기하는 완고함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유가 사유하기 시작할 수 있고 또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선-철학적 이미지와 그 공준들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할 때뿐이다.”(296쪽)
이렇게 철학이 재현적 논리나 개념을 모험을 불사하고서라도 넘어가며 돌파하게 되면 그렇다면 철학은 시가 되고 예술이 되고 역설과 은유, 논리위의 논리로 까지 폭발하고 벌어진다. 운동하는 생성을 중핵으로 떠안아야만 하는 들뢰즈의 철학으로서는 고기토적 인식의 엄밀성은 그것이 그렇게 엄밀화 될수록 점점 형식논리로 산성화 되고 악성화 되는 악순환으로 좁혀지는 것으로 파악될 뿐이므로 인식의 다른 층위를 이렇게 필연적으로 불러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철학은 기존의 수평면 평화위에 ‘절대적 필연성의 발톱’‘원천적 폭력의 발톱’‘불법 침입의 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지고 부서져야 한다. 다른 측면으로 정리하면 이제 사유는 스스로 존재를 표상하거나 고착적으로 규정짓는 최전선에서 내려와 존재를 분만하는 2차적이고 소극적인 기능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는 유동하고(하고 있는) 운동하는(하고 있는) 유목적 생성이므로.

이렇게 사유의 빈곤이 정리된다고 한다면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철학자는 당연히 바디우이다. 바디우야말로 사유의 한계를 진리에 대비되어 잠정적인 기능으로 제한되이 설정하는 철학자가 아닌가? 이 지점, 사유의 제한점에 대한 인식에서는 들뢰즈의 문장이나 바디우의 문장은 서로 혼동될 정도로 서로 마주친다. 바디우의 <조건들>에는 다음과 같은 정리들이 널려 있다.
“철학적 사고의 재난은 철학이 스스로를 진리들의 압류가 아니라 진리의 상황인 것처럼 제시할 때 생겨난다(---)철학은 스스로를 진리성의 가득참으로 제시하면서, 진리들의 다수성, 진리들의 공정의 이질성을 포기한다.”(알랭 바디우,<조건들>.이종영역. 새물결.92쪽)
그리고 <사도 바울>에서는 이런 문장도 쉽게 볼 수 있다. “사건은(진리는) 언어를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는 실재의 지점과도 같다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이미 확립된 언어들 속에서는 사건(진리)이 수용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사건은 진정 명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사도 바울> 현성환역. 새물결.93쪽)
이런 바디우의 위 문장들은 한편 또 들뢰즈의 문장과 너무나 이렇게 닮아 있다.
“---이념들은 문제들이지만, 문제들은 단지 인식능력들이 우월하거나 월등한 실행에 이를 수 있는 조건들만을 가져다줄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념들은 어떤 양식이나 공통감을 매체로 하지 않는다.”(<차이와 반복> 325쪽)
들뢰즈는 논리 실증주의의 언어가 존재의 생성을 표상해 주지 못한다고 하는 의미에서 언어의 빈곤성을 말하고 바디우는 진리라고 사유의 중핵적 상층은 합리적인 논리에 대비해서는 이질적이어서 논리 언어에 의해 담길 수 없다는 차원에서 이렇게 사유의 기능을 제한하고 있지만 어쨌든 언어의 빈곤성을 말한다는 의미에서는 두 사람의 사유는 다 공히 같은 공통점에 서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는 인식을 같이 하지만 두 사람의 전제와 구성은 서로 판이한 차원임은 두 말할 것이 없겠다. 언어의 빈곤성을 이렇게 공통으로 확인하면서도 들뢰즈는 사유가 차이와 반복으로 운동하는 생성으로 찢어지고 폭발되어야 한다는 전제적 의미에서 빈곤을 말하고 바디우는 선철학적으로 진리가 존재한다고 하는 강렬한 신념에 의해 그 진리는 사유의 심화나 연장에 의해 규정되고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는 순수사건으로서 강력한 이질성의 외설적 충격으로 논리나 언어의 층위위에 투여되고 주어지는 차원이라는 전혀 다른 의도로 사유의 제한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점점 더 흥미를 더해 가는 대가들의 텍스트들이다. 이 두 사람은 향후 어떤 건축물로 자신들의 철학을 심화시켜 피력했을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천천히 마디와 매듭을 쉬어가며 나름대로 확인해 볼 일이다.
바디우의 인상적인 다음의 문장을 옮겨보며 또 한 매듭을 마름한다.
“지식은 여기서 생산적인 목적을 위해 모방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이성적 순서이기도 하고 스피노자의 기하학적 방법이기도 한 이 방법을 지식의 픽션이라고 부른다. 진리성은 그러한 픽션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조건들>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