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가이사 - 바울과 누가의 저작에 나타난 복음과 로마 제국
김세윤 지음, 박문재 옮김 / 두란노키즈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김세윤 교수의 <그리스도와 가이사>
 
일말의 아쉬운 정황의 논의들
 

김상재
 
 




저자가 친히 밝혔듯이 이 책은 복음에 대하여 정치적 해석의 틈을 불허하는 전통적인 정통적 견해를 재천명하고 있다. 특별히 새로운 해석이나 기획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들에게 익숙했던 복음주의의 시각이나 논리를 반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저자 스스로의 말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명백하고 친숙한 것”이다. 그 불변의 해석원리를 다만 텍스트나 그 텍스트가 출현하게 된 정황을 따라 조근 조근 성실하게 추적, 정리해 놓고 있는데 그 건조한(?) 작업이 얼마나 신실한지 독자들로서는 어떤 경건미 마저 느끼게 할 정도이다.

저자의 생각은 어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복음과 사회변화의 관계는 항상 역설적이고 변증법적인 관계를 지닌다는 데에 있다. 즉 정치적 해석을 불허할 정도로 영적인 갱신에 초점이 맞추어진 그 원래의 해석이 진정한 사회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외연으로의 힘을 촉발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다. 오히려 원 해석보다는 변화에 대한 명제를 우위에 두고 텍스트를 적용에다 맞추게 되면 결국 복음의 힘은 그만큼 희미해지고 결국은 복음적 믿음도 설명할 수 없는 무척추의 사회적 기획물에 그치고 만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고자 한다. 무수히도 반복된 그 역설적 원리를 저자는 다시 자신의 무기인 해석학적 기술로 공고히 다져두고 있다.

그러면 왜 이런 반복이 또 필요한가? 물론 저자 스스로 밝혔듯이 오늘날 증폭된 바울에의 관심 때문이다. 증폭되고 있는 그 관심의 진앙지는 알다시피 먼저 철학 쪽이다. 구조주의 이후로 주체의 해체를 기획해 온 결과 그 주체의 헤제를 분별하고 판단할 주체의 근원적인 자리마저 설명하지 못할 무정형의 위기에 내몰리자 다시 주체의 위치를 되묻는 반사로 회귀하는 가운데 다시 바울이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바울은 기독교의 대명사에 지나지 않는 어떤 상징에 가깝다. 기독교의 주체를 재 규명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내면적 기초와 좌표를 설명한 바울의 서신들이야 말로 그들의 구미에 찰떡처럼 맞는 텍스트들이어서 바울인 것이다.

그리고 이번의 바울에 대한 르네상스(?)는 이전보다 다른 양상이어서 더욱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다. 과거 전통적인 철학처럼 폐쇄적이고 경직된 논리 실증주의적 렌즈를 넘어 타 학문과의 이종교배로 융합된 새로운 시각으로의 접근이다.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관통한 사유를 내속화시킨 유연성을 가지고 정신분석의 성과(쟈끄 라캉)를 심화시켜 이성의 범주 위 아래를 휘 저으며 매우 긍정적인 해석으로 바울을 거명하면서 그들의 본래 목적인 주체의 모티브를 훑고자 한다. 먼저,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이 1997년에 출간되었고(우리 말 번역은 2008년) 슬라보예 지젝이 연속적으로 “까다로운”주체를 묻는 기획 가운데 바울을 심도 있게 들먹이고 있다. 그뿐인가? 최근에는 이탈리아의 조르주 아감벤이 또한 가세하여 일종의 로마서 주석서인 <남겨진 시간>을 출간하면서 일련의 붐을 다투듯 연장시키고 있다. 신학적 렌즈의 특수한 영역에서가 아니라 세속의 현대철학, 현대 인문학계의 중심, 가장자리에서 지금 이렇게 바울의 문제가 증폭되었던 때가 일찍이 있었던가?  


 


이런 정황을 배경으로 저자는 이 책을 들고 나왔다고 한다.
그들의 바울은 명백히 성서 본문을 오, 악용하는 것이며 적어도 신학적인 관점에서는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바탕에 깔린 생각이다. 특히 무엇보다도 주체의 문제를 의도하며 반제국적 문제를 위시, 보다 보편적인 주체를 논하는 가운데 기획되고 있는 그 정치적 성격의 해석이 가능하냐? 하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 것이다. 책에는 역시 그들의 생각이나 본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바로 그 정치적 해석이 가능하냐고 하는 것은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의 핵심이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와 가이사>는 이러한 문제제기들에 대해 어느 정도 신학적인 응답으로서의 어울리는 적실성을 가지고 있을까?
우선 필자는 저자의 이 책에 적어도 이 문제제기적 입장으로 좁혀 본다면 유감스럽게도 거의 점수를 주기가 어렵다고 본다.

먼저 저자는 앞에 거명한 철학적 저술들의 문제의 본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줄 정도로 좀 본류적 문제제기에서 어긋난 응답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들의 정치적 기획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 본연의 문제라기보다는 주체의 모티브를 분석하고 탐구하는 가운데 총체적인 문제의 부분적인 함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들은 당장 독자들로 하여금 혁명적 전사로 들고 일어나 자신과 환경을 변화시키라는 류의 충동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건강한 주체의 자리, 그 존재적 총체적 자리를 정신분석적이고 존재론적 탐구로 사유하고자 할 뿐이다. 그중 물론 바디우와 지젝은 마르크스적인 렌즈를 응용하고 있는 철학자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기획은 어떤 구체적인 정치프로그램을 주창하는 실천 운동의 일환으로 바울을 거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존재론적으로 건강한 주체적 의식을 묻는 도구로서의 마르크스를 선택한 것뿐이다. 단적으로 그들은 마르크스 뿐만이 아니라 프로이트, 라캉의 정신분석까지 징그럽게 소화해 낸 복잡한 철학자들이 아닌가? 

현대철학의 복잡다난한 관심 가운데 표명된 한 접근을 저자는 너무 정치적이라는 판단의 좁은 필터로만 읽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그들의 시각에 대한 반응이라면 그들의 본의, 주체의 문제를 탐구하고자 하는 저들의 문제들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바울의 본문, 그편의 해석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적실성을 띠지는 않을까?

어쨌든 저자의 이번의 책이 적어도 최소한의 의미에서라도 그들에 대한 응답을 의식했던 것이었다면 예의 그 주체적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나왔어야 했으며 하여 정치적 해석을 불허한다고 하는 논의의 범위에 충실하고서라도 그 본류의 문제에 대하여 일종의 인문학적 성격을 포괄해 주는 논지의 신학저술이어야 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의미를 벗어났어도 아닌게 아니라 <그리스도와 가이사>의 본문들에서는 인문학적 후광을 거의 느낄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에 대한 접근과 저술의 동기는 매우 경건하게도 오직 주경 신학적 범주를 넘어서지를 않는다. 우리가 복음적이어서 성격의 텍스트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학은 항상 세속적인 인문학의 문제제기까지 해석해 주고 대안을 제시해 주는 위치를 점하고 있어야 할 것이라는 기본 과제를 존중한다면 그 문제를 비켜 갈 수는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정치적 해석이 아니라 항시 텍스트의 원 해석을 확보해야 할 것이라는 기본 논리에서도 저자가‘세계적인’ 신학자라면 저들의 문제에 대해 터치를 해주는 최소한의 제스처라도 보여 주여야만 하지 않았을까?   

물론 정치적 해석이 아닌 성서 텍스트로서의 구원론, 그리스도론은 철학적 문제제기가 아니라도 우리들에게는 항구적으로 소중한 진리이다. 그것도 해석학적 기술이 세계적인 위치에 있는 분의 재정리는 많은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 자기 위치와 자리를 묻는 고유의 자리의 권위를 회의할 복음주의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책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시대적 도전에 의한 반응의 일환으로 나와서 그 저술이 역시 그 텍스트의 정황을 묻는 질문에서 평가되는 선에서 자유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또한 그 정황에서의 적실성을 책임 있게 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다소 건조한 모습을 보인 저자는 정치적 해석을 부정하는 논의를 마치고 이번에는 계시록의 묵시문학적 렌즈를 응용,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충실과 그 내용을 또한 다른 방식으로 촉구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의 입장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사상이 뼈대로 규명되고 있다. 그 심적 우주론의 질서를 집으로 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권위를 촉구하고 자 하는 것이다.  

역시 흥미를 끄는 것은 종말론과 그 정황에 대한 해석이다. 교회가 처한 시대적 정황이 달라진 만큼 지금은 그 동안 관심이 협착 되고 부정된 현세에서 보다 책임 있는 현세에의 충실을 위한 신앙의식, 내지는 패러다임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바울시대의 임박한 종말론 만에서 복음화를 위해 지연되고 있는 여지의 종말론을 균형으로 아울러야 한다는 것을 이름이다. 임박한 종말론에서 우주와 세계를 심판하시는 대주재로서의 통치개념을 보완, 지연된 종말론의 여지로 종말론의 압박을 극복, 그 나라의 현실에서의 실현을(정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가능케 할 비전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유연함과 해석이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종말론의 문제, 아니 정치적 해석의 논의를 떠나서 ‘하나님의 나라’ 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것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본다. 정치의 문제를 어떤 구체적인 참여나 실천, 운동 내지는 프로그램으로만 이해하는 협소개념을 떠나 사실 내가 나의 문제와 함께 삶의 외연을 확장해 가는 것 자체가 삶, 즉 정치적인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거듭났다면 새로운 존재가 된 그 자각, 자의식의 체험 자체가 이미 처음부터 정치적인 함의를 띠고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새롭게 거듭나 특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내면이 달라진 존재인데 그 달라진 의식의 편으로 자연히 환경은 재구성되고 재편 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신앙은 기본적으로 삶과 밀접하게 붙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읽어낼 수가 있다.

삶은 이미 처음부터 그렇게 구원론에 붙어 있었던 것인데 다만 신학적 해석의 오류에 의해서 그 점이 왜곡되고 협소하게 되었던 것이고 그리고 신학적 논의의 유통과정 속에서 불필요하게 ‘정치’라는 개념이나 규정 속에서 과도하게 휩쓸려 부정된 면이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삶에 대한 해석을 근원부터 막아왔던 폐해를 넘어 본래의 해석으로 돌아가야 하는 의미에서도 저자의 정리는 설득력이 크다.

또한 그런 면에서 역시 삶이라는 일원론적 개념보다는 원 해석에서는 여기와 저기, 이 세대와 다가오는 세대, 정치에 대한 부정을 통해 더욱 건강한 주체와 사회적 변화가 가능해지는 복음의 변증법적인 역설을 존중해야 할 것이라는 저자의 재천명 또한 특히 지금 삶이 없는 우리의 현실에서 울리는 바가 크다. 그 점에서 독자들은 이전의 복음주의 해석에서, 같은 원리였지만 잘 느껴 보지 못했던 삶에 대한 새로운 균형의 시각을 훨씬 선명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의 그 불변의 가치는 항시 항구적인 권위를 지닌다고 하겠다. 체스터턴의 말처럼 정통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이자 진정한 진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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