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의 외부는 없(있)다!

-봉준호의 <설국열차>에 대한 인문학적 후기

 

 

 

 

이 영화가 던지는 사유의 논점 중의 하나는 바로 마지막 장면, 열차의 외부에 대한 기대와 상상력일 것이다. 결국 폭주하는, 특히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로는 더 이상의 의미 있는 생존과 번영이 불가능한 만큼 프레임을 아예 열차의 바깥, 제로베이스로 옮기는 것이 가장 타당한 선택안이라는 영화의 메시지를 이름이다. 이 기획이 그만큼 급진적이라는 것은 이미 봉 감독이 두 아이만 남기고 모든 탑승객,(특히 앵글로색슨계의 백인들)이 멸절되는 잔인한 참사의 설정을 통해 충분히 말해 놓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러한 극단적인 묵시론적 파국의 네러티브를 말한 사람은 봉 감독이 처음이 아니다. 멀리는 기독교를 위시한 종교들의 종말론적 묵시록들이 있었고 그리고 그러한 상징들과 환상의 범례들을 시대의 매듭마다 유사하게 성속을 끊임없이 변주, 재해석한 ‘파국의 지형’도들이 있었다. 우선 이러한 맥락에서 그 중에서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미셸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우엘벡은 역시 현 상황(작품에서는 탈-근대, 탈-권위의 세계관으로 인한 의식과 윤리의 무중력 상태에서 유실되고 황폐화되는 액체 인간---)에 대한 어떤 대안으로 아예 유전자 공학을 통해 현 인류의 바깥, 즉 새로운 인종을 창안하자는 발상까지 거론하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바깥’의 상상력은 물론 그만큼 내부가 절망적이라는 이유 있는 통찰과 해석에 상응해 있는 것이어서 그러므로 그것은 문자 그대로 거의 자기 처벌과 자기 살해의 고통과 각오 없이는 누구든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국면을 함의하고 있다고 하겠다. 영화의 끝, 희망이라는 것이 겨우 극한의 기후 속에 북극곰을 마주한 채 맨몸으로 마주선 두 아이(아담과 이브?)의 지난하고도 허망한(?)풍광이라는 설정은 바로 그러한 상상의 곤혹스러움을 정직하게 은유하는 그림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외부에 대한 벽, 문을 여는 것이 왜 그러하게 급진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모험인가? 그것은 필시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대적으로 윌포드의 프레임(자본주의)이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치력, 즉 합리성, 즉 기능성에 있을 것이다. 그 기능성의 맹위가 사실은 인간의 본성에 터한 가장 근본적으로 합치되는, 근원성을 띠는 형태라는 인식에서도 그 외부를 상상하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그를 두고 감히 합리적이라는 명예(?)의 아우라를 덧씌우는 것도 그 보수적 세계관이 사실 인간의 본성에 가장 잘 들어맞는 적실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경제적으로 때려눕힌 역사적 사실 또한 이러하게 자본주의가 인간 내면에 작동하는 욕망의 원리를 그만큼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 아닌가? 우선 우리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 사실을 이 지점에서 다시 곤혹스럽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여기에서 합리(경제)적이라는 사실이 곧 정의로운 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평자의 단서를 냉정히 존중하고서---.

 

이런 맥락을 현실적으로 존중하는 입장이라면, 사실 콘트롤 타워, 엔진을 탈취, 정복하자는 혁명의 논리나 균등을 말하는 사회주의의 논리는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듯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윤리, 즉 감성의 문제에 가깝다. 현실의 시스템을 바꾸고 생산성을 변혁 관리할 어떤 구조의 힘이라기보다는 불평등의 야만을 그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발동시키고 충족시켜 주는데 작동되는 감성에 속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윤리적 감성에 속한다는 것은 동원의 힘 외에, 관념의 힘 외에 그 이후의 시스템을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별개의 국면으로 무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증명해 주듯 재구성의 권력, 즉 경제의 기능 문제로 연결되지 않는 감성은 곧바로 권력과 경제의 진공상태를 불러오고 그 공간에서 예외없이 항시 승리하는 쪽은 지배와 권력욕에 기반한 징그러운 권력유지의 기술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작금의 유럽식 사회주의가 직면한 딜레마가 보여주는 것처럼 복지나 기회의 균등 또한 전체적으로는 경제를 만성적인 불황에 빠트릴 수가 있는 요인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혁명이나 분배가 상대적으로 감성적이라는 사실에 우리가 적극적인 이유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윌포드의 달콤한 논리에 급소를 맞은 우직한 파이터처럼 흔들리는 커티스의 동요는 사실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의 이유 있는 동요이기도 하다.

 

그에 터하여 영화가 쉽게 권력의 분배나 복지의 균등 가능성을 말해 주지 못하는 이유 또한 바로 이러한 난관을 잘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물론 이 설정은 정치공학의 임계점을 넘어서 버린 오늘날의 금융자본으로 인해 더 이상 분배로 작동되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교착상태를 은유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의 노동마저 배제하는 기계화와 모듈화의 공정으로 더욱 막강해진 자본의 공학에 더 이상 기회의 균등이나 분배 따위는 없다!)

 

사안이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시선을 약간 옮길 필요를 느낀다. 커티스로 대표되는 혁명의 진영과 윌포드로 대표되는 보수자본의 양 진영이라는 판에 박힌 고전적 설정은 서사적 풍광기 이외에 사실상 의미가 없는(길리엄과 윌포드의 공모관계는 사실 양진영이 서로의 적대로 인해 유지되는 필요충족율의 역설적 양면을 은유한 것으로 전혀 반전의 설정이 될 수 없다. 하여 그 은밀한 적대적 공모는 권력탈취 후의 이를테면 커티스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도 결국은 예외가 될 수 없는 동어반복의 문제다.) 것으로 그 모두를 정신분석적 권력의 시선,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보는 관점을 이름이다. 우리가 정의와 윤리를 사유할 때에도 본성을 고려할 때 그만큼 더 유리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입장에 있는 관객이라면 더욱 이 관점을 좋아할 것이다.

 

그쯤 해두고 이제 예의 그 열차의 ‘외부’를 상상하는 마지막 장면으로 가보자. 앵글로 색슨계의 백인으로 상징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문명이 파괴되고 멸절된 자리---새로운 인류의 희망인 비 백인계의 아담과 이브가 살아남았다. 하지만 열차의 외부에 서있는 그 가능성이 그만큼 희망적일까? 그냥 간단히 말해 이런 맥락에서 사안이 그렇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불리하도록 황망하고 어려운 자연과 생존조건, 저 쉽지 않은 환경과 싸워 생존을 보장받으려면 인류는 더더욱 그것을 개선시키고 변개시킬 권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권력형 문명을 추구하지 않을까? (아니면 문명의 위계를 버리고 수렵문화로 겨우 생존을 유지하는 원시 생태계의 수준에서 만족하는 편을 택하는 방법도 있겠다.)

 

그렇다고 한다면 단순히 인종과 공간만 바뀌는 물리적 변환이 추문적이라면, 이 지점에서 상상할 수 있는 외부는 이를테면 슬라보예 지젝같은 철학자가 말하는 또 다른 성격의 ‘외부’가 아닐까? 저 ‘외부’가 지리적 공간의 외부가 아니라 정신분석적 외부의 공간을 이르는 그 ‘외부’를 이름이다. 오늘날 라캉을 호출하며 인간의 무의식 내부에 존재하는 결여와 근원적인 구멍의 결핍을 거론하는 탈-해체론의 철학자들의 고민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면 그들이 열어젖히는 외부를 숙고해 보는 것은 또 어떨까?  설국열차의 물리적 외부와는 달리 정신분석이 지시하는 외부는 인간의 마음의 변환을 기획하는 저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좀 다를 수 있다. 곧 똑같이 권력관계의 자장에서 벗어난 지점, 새로운 권력이 창출되고 새로운 욕망이 발명되는 혁명적 지점을 호출하되 후자의 외부는 보다 정신이나 내면의 재건축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 좌표가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냥 간단히 말해 오늘날 지젝은 인간이 의미 있게 계속 생존하려면 누구나가 인민이(외부) 되어야 할 것을 주문하고 있지 않는가? 그 인민의 자리로서, 단순한 사회과학적 담론, 계급 위계로서의 인민이 아니라 경제적 위계나 권력의 위계와는 상관없이 누구나가, 내가 결국은 치명적인 결여와 곤궁의 빈 구멍을 지닌 한 연약한 인간이라는 자각, 그 외부, 자신안의 ‘외부’로 내려간 인민이 되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내가 아무것도 아닌, 무의 존재를 넘어서 ‘없음’보다 더 없는 마이너스의 자각을 통해 의미 있는 삶의 욕망을 발생시키고 그 부정의 낮음의 보편성으로 해서 권력관계의 위계를 넘어설 수 있는 공감과 연대로 재구성되는---.

 

이러한 보편의 공간이 존재할 수 있다면, 이러한 내적 혁명으로서의 공간은 그야말로 권력이되 그 권력의 힘이 더 이상 지배와 위계로 작동되지 않는 의미 있는 외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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