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품을 분석하면 그것이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헛소리로 가득 차 있는 기묘한 물건”(지젝,<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국역본 338쪽에서 재인용)이라는 말을 마르크스가 한 적이 있지만 그러한 신학적 변덕들이 어디 상품, 물신을 둘러싼 영역 뿐 이겠는가? 아니 인간은 아예 기본적으로 그 자신의 유한성으로 인해 내부와 외부 경험하는 것들의 모든 위계에서 사실상 전부 신학적 의미와 함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근 무심코 읽은 야스퍼스의 <기술시대의 의사>를 나는 이러한 의미의 연장에서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인상적으로 흥미를 경험한 부분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더 나아가 환자는 본래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고자 한다. 의사의 권위란 환자에게는 자신의 숙고나 책임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소망하는 고정점이다.---환자는---알고자 하지 않는다.---그가 욕구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안정이다.

환자로서의 인간은 때로 이성적이지 않고 비이성적이거나 반이성적이기 때문에, 이상적인 의료관계는 어쩔 수 없이 전도될 수밖에 없다.”(야스퍼스,<기술시대의 의사>,김정현역,책세상,2010,13쪽)

 

 

 

 

명백히 우리는 저 문장을 환자와 의사라는 특수한 의료행위의 국면을 넘어 인간 실존의 조건을 지시하는 훨씬 일반화된 범주로 물론 확대하여 읽을 수 있다. 오늘날 비교적 대중적으로 읽히고 있는 신학자 알리스트 맥그라스도 이런 문장을 쓰고 있지 않은가?

“타락된 죄인의 본성에는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을 믿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는 듯하다.---사람들은 분명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확고하고 세련되며 권위 있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게 된다.”(맥그라스,<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신상길 정성욱 역,한국장로교출판사,2002,172,176쪽)

 

유한과 결여의 제한과 한계에 대항한 반사적 비상구, 이른바 대상a와 같은 애착과 원환으로도 절대와 완전에 대한 이상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 사물의 내 외면의 이상을 채울 능력의 부재에 대한 결여를 손쉽게 대체하고 보상할 대상물을 인간은 저러한 방식으로 생래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란 저러하게 불안한 조건에서의 방식이므로 인간은 사실 모든 인식과 경험에서 사물과 대상들을 그편에서 일정부분 이상 왜곡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허구적으로 굴절시켜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이러한 사태에서 인간 존재에서 외부의 위계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이며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주체의 결여와 그에 대한 외부의 어떤 우위를 말하는 라캉에 대해서도 우리는 얼마만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동의할 수 있을까를 기본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한 편, 들뢰즈는 <들뢰즈의 니체>에서 또 이런 문장으로 니체를 해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이 죽은 후 그는 자기 자신을 짊어지며 ‘인간적인’가치들이라는 짐을 지고 나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받아들인다고 자부한다. 그때부터 그는 ‘더 높은 인간들’의 새로운 신이다.”(들뢰즈,<들뢰즈의 니체>,박찬국 역,철학과 현실사,68쪽)

 

 

 

 

오늘날 신의 부재를 말하는 의미는 일찍 니체가 간파했듯이 단순한 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만 하면 되는 그러한 조악하고 손쉬운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생각보다 훨씬 기본적으로 신학적인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신이라고 하는 이름의 기표를 부정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사태에 엉기고 얽힌 보다 근본적인 절차와 문제로 인식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마치 덩굴식물들처럼 그 무엇의 지탱물을 통해야만 의식이 구조화될 수 있는 유한의 존재인 인간이 신이 살해됨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무한, 신의 지위를 책임지고 떠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의 죽음으로 저절로 신적 존재로 진보하거나 격상된 것이 아닌 만큼 저절로 그 스스로는 필연적으로 니체가 은유하고자 했던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낙타의 운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는가? 유한이 감당할 수 없는 무한을 감당해야만 하는 부담과 억압, 그 역할극이라도 떠안아야만 하는 공허와 무력감 ---이전에는 없던 황폐한 반복, 우울증은 어떤 문학평론가가 재치 있게 말했듯 이러하게 신이 죽고 인간이 우주의 중심으로 등극함으로 부터 본격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2.

이 지점에서, 신의 죽음이후 새로운 신이 된(신의 역할극을 떠안게 된) 인간에게 절박하게 필요해진 것은 그렇다면 이 주체의 허구와 부담, 무거운 짐을 해소하고 줄여 줄 새로운 외부의 발명이다. 니체 이후 신은 이미 죽고 없으므로 그 신의 지위가 기능하던 또 다른 방식의 외부가 다시 필연적으로 필요해진 것이다. 신이라는 지위와 위계에 의해 유지, 작동되던 내적 기제를 다시 활성화 할 신학적 기획이 다시 필요해진 것이다.

 

오늘날 탈-해체론의 진영에서 유물론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다시 말하는 일말의 저의는 무엇인가? 저마다 새로운 ‘유물론적 은총론’을 기획하고자 하는 저의들이야말로 이런 국면에서 본다면 또 다른 노골적인 신학적 요구에 대한 이미 예정된 응답들이 아닌가?

 

 

 

 

물론 이 변덕(?)의 지점에서 기독교의 유신론 신학과 가장 기능적으로 유사한 형태의 기획은 바디우의 은총론일 것이다. 존재 자체가 인식론과 이성의 위계를 넘어서는 반 철학, ‘사건’의 도래에 의존해야만 설명이 되는 반전과 충실의 존재를 그는 말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그 은총이 역동적으로 생성되고 작동될 수 있어서 가장 기독교에 가까운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사실상 ‘사건’은 바로 신과 그리스도의 기능과 위계를 지닌다.

 

이에 비한다면 지젝은 좀 남다르게 읽힌다. 그의 외부는 이미 정신분석적으로 결여라고 하는 부정성으로 내속 메커니즘 안에 장치되어 있다. 결여라고 하는 잔여, 합리적인 이성에 포획되거나 포착될 수 없는 원시적 추문과 잉여가 하향 내속 초월 그 자체로 이미 들러붙어 있어서 그에 대한 변증법적 반사운동으로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아닌 주인의 방식으로서 주체를 역동화 한다. 그에게서 삶은 또 다르게 주인의 책임이 변증법적 운동에 전가되어 다이내믹해 지지만 한 편, 칸트가 말하는 숭고의 감정은 잘 경험되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지젝의 역동은 내부에서 발화하고 폭발하는 메커니즘에 의한 운동으로 상대적으로 빤히 들여다보이고 읽힌다. 하여 감성적인 낭만이나 감격, 바디우적인 탈구와 위트, 고전적 감성의 우발적 찬탄은 그만큼 기대하기 힘들다. 그는 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훨씬 철저한 유물론자이며 그러한 논리적 귀결로도 그는 과학적이고 절차적이다. 대신 그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내부의 균열을 자산으로 한 변증법적 작용을 내면에서 촉발시킨다.

 

3.

이와는 한 편, 이와 관련해 굳이 같이 언급하자면 니체는 신의 이름을 맹렬히 부정했지만 의미 생성이 충분한 위계의 권위와 상관관계를 지닌다는 것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통찰을 처음부터 잘 보여 주었다. 그에게는 주인이 부정되지만 한 편으로 주인이 없다면 자유도 없다는 모순적 이율배반적인 국면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주인도 없을뿐더러 자유도 얻지 못하였다. 나는 지금 추억이라는 기쁨 이외에는 한 순간도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니체,<짜라투스트라--->,정강석역,삼성판세계사상전집21,1982,38쪽)

 

또한 그에게는 신(권위)을 설정하지 않는 의식의 평면지대에서는 그 무엇을 걸만한 지렛대의 부재의 사태와 다름 아니어서 더 이상 인간이 동경도 꿈도 어떤 의미 있는 ‘충동’의 생성을 경험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고 본다.

“욕될지어다! 이제는 인간이 인간 너머로 동경의 화살을 쏠 수가 없을뿐더러 그의 활줄이 울리지 않을 때가 온다.”(위의 책,41쪽)

 

 

 

 

그 역시 사실상 가장 신학적인 자신의 의식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지 않는가? 그를 읽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내면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인에 대한 기표와 기호만 히스테리컬하게 모순적으로 다를 뿐 그는 무신론 영역에서의 영낙 없는 바울이다. 결국 그는 의식의 배열과 위계를 경유, 다소 이를테면 이교적인 지혜를, 이율배반적인 인식, 인간의 내적 모순을 관통, 우발성과 필연성의 긍정을 설정,‘살아 있는 것을 풀어주기’생성의 음악과 리듬을 따라‘자유롭게 놓아주기’와 같은 ‘지혜’의 방식으로 주체의 짐을 경쾌하게 해제시키고 있지만 어쨌든 그 또한 신학적 변덕의 범주에서 절대로 달아날 수 없었던 것이다.

 

4.

결국 인간의 주체는 훨씬 모순적이고 무능하다고 읽어야 할까. 과거 이성의 권위로 신앙의 히브리스를 맹렬하게 해명, 결국 신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처단하는 해프닝을 벌였지만 이성 또한 그에 못지않은 히브리스를 이미 내장하고 있었다는 섬뜩한 사실을 부메랑으로 체득된 것을 보면 신앙이든 이성이든 사실상 그 모든 범주가 애초에 신학적이던 인간 앞에서는 구분의 의미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 모든 것들이 사실상 인간의 한계와 그 위험성을 지시, 소중하게 직면하게 해주는 것으로 인간 스스로의 본연의 사태의 본질적 참상의 얼굴이 아니었던가? 하여 이러한 사태들은 결국 우리 인간의 존재에 대해 다시 숙고해 볼 것을 요청하며 인간이 불완전한 조건에 있는 한 어떤 방식이든 우리로 하여금 다시 신학적 작업을 욕망하도록 강요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국면에서 역시 최근 출간된 재독 한인 철학자 한병철의 책 <권력이란 무엇인가>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읽힌다.(이 책은 이 고원의 김남시 님이 번역했다)

이 책에서 비로소 우리는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서 불안한 인간의 내외부에서 권력에 대한 오해의 맹목적 불신의 지대에서 벗어나 주체에게 올바른 권력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가가 해명되는 훨씬 진전된 통찰과 조우할 수 있다.

 

 

 

 

 

곧 권력은 인간을 억압하는 역기능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유와 역학적으로 깊은 상관관계를 지닌다는, 니체를 관통하는 통찰이다.

“오히려 권력은 그 속에서 물체 스스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장 場,Feld처럼 작용한다”

(한병철,<권력이란 무엇인가>,김남시 역,문학과 지성사,2011,18쪽)

사실 저자의 이러한 통찰은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오늘날 프로이트와 라캉을 어느 정도라도 용인한다면 인간의 내,외면에는 온갖 다양한 기제와 힘들이 혼재된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화학 정글 지대인데 그 혼재를 일정한 의미와 욕구의 공간으로 재편, 자유를 경험하려면 당연히 일종의 신학적 작업, 내적 의식의 권력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간 반가운 책이 아닐 수 없다.

 

5.

어쨌든 오늘날 우리는 정신분석, 특히 라캉, 지젝을 필두로 한 슬로베니아 패밀리의 도움으로 인간의 한계와 불완전성에 대한 이해를 상대적으로 더 잘 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또한 그에 터해 인간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일정부분 힘과 권위를 필요로 하는 신학적인 존재인가에 대한 보다 균형적인 이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 그 편에서 세공되는 인간 자체의 결함과 결여에 대한 이해에서도 그것이 반드시 과거처럼 인간으로서의 어떤 굴종을 용인하고 반-휴머니즘적 사실을 폭력적으로 인정해야만 하는 어떤 혐오나 굴종의 일 만이 아니라는 사실에도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인간의 결함과 위험한 한계의 결여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주체의 생성과 건축의 길을 탄력적으로 열게 하고 역설적으로 무한한 자유와 도약으로 직진하게 하는 충동의 기제, 소중한 발원지의 확보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러한 이해와 인식을 기반으로 다시 우리는 외부의 권위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 그리고 올바른 힘과 권위가 필요하다면 그 권능을 어떻게 유능하게 경험하고 사용할 것인가? 라고 하는 깊은 신학적 질문들을 다시 반복할 필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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