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신학적 언어의 복권은 필연적인 흐름으로 보인다. 철학을 말하고 윤리를 기입하기 이전에 욕망이 걸리지 않는, 다시 말해 정치가 발생할 수 없는 후기 근대의 타자의 부재, 부유하는‘액체’형 무정치 공간이 이제 다시 신학을 욕망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필연으로의 회귀는 철학이 자초한 것이며 하여 손을 내민 쪽 역시 철학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 미셸 앙리 스스로가 발설하고 있듯 이제 “철학과 신학은 경쟁자들이 아니”(471)라 더 적극적으로 성적 관계 수준으로 올라가는 공모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무엇의 계기를 산출하게 하는 폭력적 시원을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오늘날의 철학에 비해 신학은 특성상 항구적으로 결정론적인 전제, 뚜렷한 고체의 경계면을 가지고 있다. 전제가 없는 사유는 그 무엇을 느끼고 설정할 수 있는 준거점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지만 탄력을 기축할 수 있는 신학적 사고는 그 고체의 근거 면에 반사되어 화학적인 반응이나 감각을 발생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윤리라는 것도 결국은 바로 이 정치의 가능성, 활성화 뒤에나 가능한, 권력 이후의 게임이라고 믿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오늘날의 이 ‘정치적인 것의 귀환’현상을 반길 것이다.
그렇다면 앙리의 신학적 철학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그것은 먼저 내가 여기 존재한다고 하는 삶의 수동성을 현상학적으로 느끼고 파악하는 그 ‘살’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바디우 식의 표현으로 하자면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수동적 양태의 ‘도래’요 발생된 ‘사건’이 아닌가? “최초의-지성체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낳는 절대적인 삶의 내적 운동에 속하며 자기-생성의 과정이 완성되는 방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삶은 자신의 것이며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는 삶이라는 조건에서 자기 안에 도래하면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낳는다.”(43)
키에르케고르를 충실히 안으로 기대어 앙리는 먼저 자신을 현상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무구에 대한 애초의 정념적인 불안으로 이해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무중력의 무화 상태에서 인간은 최초의 불안을 경험하게 되고 그 불안은 자신이 구체적으로 자신의 물질적 신체에 제한되어 있다고 하는 ‘애매한’ 종합에서 그리고 남녀의 신체적 성차에서 더욱 실재적으로 심화된다. 현상적으로 주어져 느끼는 이 필연적인 심리적 곤궁과 결핍의 불안이야말로 존재에 앞서는 외설적이고 초월적인 것으로서 피할 수 없는 삶의 전제라는 것이 앙리 현상학의 중심 정초 논제다.
왜 이것을 앙리는 중심 전제로 정초하는가? 이 초월론적 경험을 시원적 전제로 해서 인간은 비로소 그 밤의 부정적 힘을 가능성으로 자각하며 스스로의 권력을 발생,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이라고 하는 이 시원적 상태가 인식 이전에 현존한다는 기본 전제야말로 자신의 의식을 구조화하고 그 불안이 모순과 불일치의 애매한 불안인 한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용출시키는 계기로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기축점으로서 앙리 철학에서는 기본 코기토인 것이다. 이 전제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증여된 여기-있음을 불안과 모순, 결핍, 즉 ‘살’로 느끼며 그와 함께 스스로의 가능성의 계기를 산출하고 심화시켜 나아간다.
이 증여되어 수동적으로 느끼는 심리적 물질, 이것이 살이며 이 피할 수 없는 현상학적 토대는 그래서 바로 앙리에게서는 신학으로 변환되는 회전점으로 전유된다. 이 부정할 수도 변할 수도 없는 이 물질적 전제야말로 모든 사유가 개시되는 흔들 수 없는 계기라는 말이다. 결정론적인 신학의 기능을 떠 앉은 이 고체적 공간의 계기에서 비로소 인간은 그 삶에 대한 말하기가 가능해질 것이며 욕망이 발생하는 고유의 화학작용이 점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앙리는 이 전제, 밤의 기축점으로 해서 정작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사실상의 언어, 즉 욕망의 유능한 가능성을 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를 따라 불안을 느끼는 시원적 경험에서 인간이라면 예외자 배제자가 존재할 수 없는 만큼 그 유능한 욕망이 또한 모든 사람, 어느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가능할 것이라는 비밀의 문을 개방하고자 한다. 키에르케고르가 가슴 설레며 말했듯 그 배제자 없는 불안이야말로 배제자 없는 ‘보편’의 마법이 걸리는 최고의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불안을 올바르게 배운 사람은 최고의 것을 배운 사람이다”(임춘갑역, <불안의 개념>,309.)
“---각자를, 가장 미천한 가장 무의미한 각자를 그 자신의 것인 환원 불가능한 단독적인 개인성 안에서, 본질적으로 여기 혹은 저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발견되는 초월론적인 자기의 조건 안에서 유지하나, 이 어딘가 quelque partr가 극복되어야 하거나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될 수 있거나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만이 인간을 무에서 건져낸다.”(460,강조는 저자)
특히 이 키에르케고르의 자산을 더욱 내밀화한 가능성의 보편은 현상학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함께 미셸 앙리가 왜 유럽에서는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는 철학자인지 알게 해 주는 지점으로 나는 읽었다. 하여간 나는 2000년도에 나온 이 의미 있는 철학서가 왜 이제야 번역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