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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현상학 ㅣ 뉴아카이브 총서 6
미셸 앙리 지음, 박영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우선 이 <물질 현상학>을 읽어 내려가면서 떠오른 것은 뜬금없게도 신학자 칼 바르트였다. 그가 그리스도인의 핵심 윤리 과제인 ‘성화’를 설명하면서 칼빈에게서 빌려 온 개념인 ‘동요(動搖,die Unruhe)'가 바로 그것이다. 윤리란 의지의 연속 작용이나 칸트적 이념과 같은 목적, 당위성의 전범보다는 어떤 권력적인 충격과 물질적인 의식적 힘에 의해 역동적으로 밀리고 흔들린 효과에 의해 비로소 거론될 수 있다고 통찰한 그 기독교 정통주의적 발상을 이름이다.(이에 관해서는 <로마서 강해>나 2010년도에 출간된 이정석의 <하나님의 흔드심-칼 바르트의 성화론>을 보라.)
그러고 보니 이 책, 앙리의 텍스트에도 동일하게 이 ‘동요’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는 데 그것은 분명 의식이 살아 있는 힘이어야 한다는 이해에서 이미 양자 간 발상에서 일말의 친근성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기사 앙리의 절반 이상은 이미 신학이 아닌가?
“그런데 이 소여들 그 자체가 손상을 입히는 것은 다만 흔들리고 불완전한 이 소여들의 토대 위에 세워진 이성성만이 아니라 소여들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론적인 동요의 결과이다.”(122.)
그러니까 결국 앙리도 인간의 의식이란 생성이나 운동만이 아니라 자신을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세우게 하고 자신의 제한과 곤궁의 아픔과 영광 속에 직면하게 하는 살아있는 흐름이자 ‘인상’이요 힘의 과정이라고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사유에서 “삶을 인식할 수 없는 무능”(<육화, 살의 철학>,127.)을 넘어 욕망이 가능하고 향후 스스로의 수동성에서 역동적으로 운동하게 하는 인식의 토대, 통로를 열어 놓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우선 이러한 앙리의 과제에서 볼 때 후설은 인식의 토대를 정초하는 소중한 과업을 열어젖힌 형편을 뒤로 두고 그 사유의 성격이 이성적이고 인식론적인 경향성에 편향되어 있는 한계를 지닌다고 반성된다. 의식의 토대요 출발점인, ‘내가 지금 여기에서 생각하고 존재 한다’는 소여성에 대해 후설의 사유는 그리스적 이성성으로 그 소여성을 구성적으로 기술하고 설명할 수 있을 뿐 그 소여성이 나타나게 되는 나타남 자체, 더 나아가 즉 그 나타남을 느끼게 하는 정감이나 실질적 인상을 밝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소여성이 단순히 일반적인 의식을 개화시키는 코기토로서의 인식론적 기능뿐 아니라 제한과 좌절,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이 운명적임에 한해 그에 대해 소중하게 리비도를 폭발시키는 욕망의 발전소, 가능성의, 삶과 그 정감의 촉발점으로까지 보다 유능하게 정초되고 해명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로 앙리는 후설이 전개한 지향성을 중심으로 한 인식론적 사유에서 그 성격을 달리하는 사유로 전환, 과월 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현상학에서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국면에서 의식의 토대를 구현하고자 하지만 그리스적 사유의 고전적 구성의 경향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질료’라는 협의의 세계에서, 더 살아 있는 현실로 내려가 정감으로 느끼고 고통 하는 심리적 느낌이자 실체인 ‘살’이자 ‘물질’이라는 보다 능산적인 사유의 현상학으로 과월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앙리는 키르케고르에 기반 하여 키르케고르의 변증법, 즉 정념적인 변증법을 내속화 하는 사유로 이 통로를 증폭시키고자 한다.
즉 보다 유능한 가능성을 “꾀어”내기 위해서 더 깊은 죽음, 부정의 사유로 내려가 키르케고르를 안으로 기대어 후설의 소여성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운명과 피할 수 없는 제한, 곤궁의 죽음으로까지 초월화, 그것을 절대화 하는 것으로 이 ‘과월’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하여 이 지점, 제2장 '현상학의 방법'에서 앙리는 후설과는 다른 초월의 얼굴을 분명하게 변별,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이 부분은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웠다.
후설에서의 초월은 주체에게 주어진 코기토적 수동의 심리적 조건이 인식-구성적으로 파악되는 의미에서 내속적인 초월이다. 하여 그 주어진 상황의 소여성은 역시 인식-구성적 상황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이러한 인식-구성적 주어짐의 상황 구조 속에서 이해되는 초월은 그 상황이 다만 주체에는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주체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주체의 능력 밖이라는 의미에서 초월이라는 지위가 부여되는 것으로, 그 초월이 이를테면 신학적 의식에서 운위되는 인격적 타자의 유신론적인 위격은 아니다. 이러한 이성적 초월이라는 개념은 그것이 주체의 의지 밖에 있는 외설적 국면이라 하더라도 곧 역시 이성적이고 인식론적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한계를 지닌다. 이러한 유물론적 일원론의 인식론적 초월에서는 사유의 시원적 개시점인 소여성도 후설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구성적인 차원이 되고 만다. 처음부터 의식에 대해 피와 살의 살아 있는 어떤 힘의 세계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인식-구성적으로 이해한 만큼 그 소여성도 결국 그 범주에서 소극적인 이해에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앙리 또한 주체의 소여성이 주체의 의지 밖에서 주어지는 구성적 초월이라는 철학적 초월 개념에는 후설과 같다. 하여 후설과 같이 초월에 대한 이성적 위계에서는 차이가 없다. 곧 앙리에게서도 초월은 이성 밖의 절대 타자의 신적 위격의 그것이 아니라 절대 의식 경험 안에서의 안과 밖, 뫼비우스의 띠처럼 구성되고 작동되는 내부적 단층으로서의 자기-내의 생성, 초월인 것이다. 하지만 앙리는 키르케고르의 얼굴을 내면화하여 이 소여성의 초월에서 정념적인 정감성을 안으로 내장, 결정적으로 차원이 다른 초월을 발화시킨다. 곧 이 초월적인 소여를 더 역동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변증법이 걸리도록 죽음의 사유의 장으로 현상학의 토대 자체를 아예 근본적으로 옮기는 것이다. 곧 그리스적 사유에서 울림과 진동, 동요를 가져오는 정념적인 변증법의 자리, 키르케고르의 장, 진자 속으로 차원을 바꾸어 정념적인 작동을 제대로 활성화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하게 키르케고르의 정념적인 변증법의 구성력으로 하면 소여성은 다만 주어지는 수동성이 작동되는 구성을 넘어 더 깊은 인간의 불안과 무의 근원에 연결되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거의 결정론적인 신학적 인식으로 까지 승격된다. 인식-구성적인 범주에서 과월하여 내가 지금 여기에서 불안과 무의 심연에 절대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라고 하는 피와 살을 느끼는 문자 그대로 ‘심리적 물질’의 중심에 정초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하게 소여성이 키르케고르의 ‘불안’의 효과처럼 결정론적인 ‘물질’로 경험되게 되면 소여성은 어떤 인식론적 구성에서 더 적극적으로 수동적인 범주의 ‘증여’, ‘자기-증여’로 더욱 역동화, 치환된다.
“항상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자신의 힘과 다른 힘이며, 이 힘 안에서 봄은 자기-촉발이며, 그런 방식으로 자기가 보는 것을 느끼며, 자기가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본다videmus”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보는 것을 느낀다sentimus nos videre"라고 말해야 한다. 이 자기-촉발은 본래적인 현상성이며, 자기-증여로서 본래적인 증여이며, 예를 들어 봄이 자기 자신을 주는 자기-증여이다. 다만 이 자기-증여만이 구조적으로 ‘관계함’에 이질적이다. 자기-증여는 그 자체로 이 ‘관계함’이 아니며, 절대적으로 그것의 배제이다. 자기-증여는 자기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존재한다.-초월성이 아니라 근본적인 내재성이다. 이 근본적인 내재성의 지반 위에서만 초월성으로서의 어떤 것이 가능하다.”(159.)
이렇게 소여가 절대적인 소여로, 그리하여 자기-증여로 치환되면 주체의 정념은 역시 내용이 달라진다. 코기토로서의 인식론적인 범주인 후설적 ‘개체’에서 그야말로 키르케고르의 절대 앞에 서 있는 ‘단독자’의, 보다 신학적이고 충동적인 정념으로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곧 구성되고 인식된 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근원 지층의 심리적 조건 속에서 스스로 배제되고 그 배제의 효과에 의해 주어지고 증여된 존재로 자신의 ‘여기 있음’의 운명이 더욱 피와 살과 짐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념의 스펙터클한 자기-내 생성의 초월 역학 구조는 거의 신학적이고 결정론적인 국면에 상응하는 효과를 창조해 개체로 하여금 더 유능하게 피와 살로 흔들리고 동요되어 더 자각적으로 깨어난 존재에 이르게 하지 않는가?
“cogitatio는 진정으로 실존이 아니다. 다시 말해 실존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이성성을 설립하기에 적합한 실존이 아니다. 그것은 cogitatio가 ‘단독적’이기 때문이다. cogitationes에 첨가되는 이 ‘단독적’이라는 관형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어지는 이 강의 전체에서 cogitationes의 자격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결국 그것을 철학적 문제의 지평에서 제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이 말에 경멸적인 방식으로 붙게 되는 이 관형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이것으로서, 순간적인 것 이상의 사실성 안에서, 비존재로 미끄러지도록 정해진 체험의 한 조각 그 자체에 한정된 환원 불가능한 성격을 표시한다. 단독성singuralite의 개념은 여기서 개체성individualite과 등가이며, 개체성은 시간 안에 자신의 자리에 의해 사물의 개체성 혹은 단독성을 정의하는 개체화의 원리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123.)
개체에서 단독자로, 앙리의 초월의 정념적인 효과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 이상 개체이기를 그치고 개체를 넘어선 단독자는 인식론적 범주에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심리적 ‘살’로서의 토대인 이를테면 키르케고르의 부정성, 초월의 무에 매 순간 접속되는 관계로 그 접속되는 불안과 무가 살아있는 느낌을 증여하는 인상인 만큼 매 순간 역사를 초월하여 항상 죽고 항상 새로이 경험되는 결의와 결단을 되돌려 받는다. 인식은 이 세계와 역사의 범주, 즉 ‘상기’ 와 ‘재현’이라고 하는 구성된 개념의 세계를 되돌려 받지만 강렬한 초월은 그 동요와 정념의 경험과 인상을 통해 ‘반복’을 추동시킬 만한 심리적 힘을 효과로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면은 물론 이미 키르케고르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이 명칭을 그대로 보존한 채, ‘제1의 철학’이란 이름 밑에서 이교 세계의 전체 학문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 제1의 철학의 본질은 내재성, 혹은 그리스적인 명칭으로는 상기想起라고 한다.) 그러고 나서 ‘제2의 철학’이란 이름 밑에서 그 본질이 초월 내지는 반복反復**인 철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임춘갑역, <불안의 개념>,37.)
앙리가 키르케코르를 내속적으로 욕망하고 현상학의 사유에서도 신학을 한 몸으로 욕망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유를 넘어설 수 있는 정념적인 초월의 가능성 때문이 아닌가?
어쨌든 이러하게 앙리는 현상학의 전제 자체를 아예 정념성의 변증법의 안으로 옮겨 결국 욕망과 에로스적 충동까지 스펙터클하게 가능한 현상학을 재 정초하고자 한다. 그러하게 키르케고르와 동일한 올림의 언어로 그 부정성을 변증법적인 ‘가능성’으로 보며 이 가능성을, 앙리는 자신의 현상학적 ‘초월’로 휘발시켜 폭발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미처 이 좁은 페이퍼에서는 정리할 수는 없지만 앙리는 그 부정성의 보편으로 해서는 현상학을 더욱 현상적이게 해서 역시 공-정념, 인식의 외피를 뚫고 진동의 울림으로 공명되는 공동체의 이념과 타자에 대해서도 유능하게 말을 걸고자 하는데, 이것이 또한 보기 좋게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편으로 신학적인, 그것도 기독교 정통주의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특히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앙리의 이와 같은 기획과 초월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번역자는 <육화, 살의 철학> 해설에서 출판된 앙리의 신학적 현상학에 대해서 프랑스 국내에서도 신학 쪽이나 현상학 쪽, 양자에게 일말의 비토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재치 있는 에피소드로 보고해 주고 있는데 신학 쪽에서 기독교를 잘못 이해했다는 평가를 되돌려 받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기독교적 논리의 맥락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앙리적 맥락에도 해당된다.
간단히 말해 먼저, 의식에 관한 이해에서 신학의 입장은 다르다. 앙리는 후설의 인식론 범주의 의식을 다룰 뿐인 고전 현상학의 한계를 문제 삼아 인상과 정념으로서의 의식으로 대체하고자 하지만 신학은 그 의식이 바울의 신학에서처럼 인상과 정념을 넘어 일종의 권력 상태라고 이해한다.(에베소서,2:1,2) 단순히 구성되어 주어진 의식을 시원으로 경험하고 그것을 의지적으로 변별하고 또 다시 구성해 낸다는 흐름과 그리고 앙리의 의식과 같은 정감, 정념적인 운동을 넘어 내면을 잠식, 점령, 황폐화 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는 또 새로운 권력으로 굴복시켜 휘황하게 활황화 될 수도 있는 그러한 권력의 가능 형식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의식이 그러하게 권력의 형태로 생성되고 흐르고 유동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또 그 권력의 변동과 사건을 현상학은 어떻게 사유되고 어떻게 구성할되어야 할 것인가? 전통적인 기독교의 이해처럼 그 의식이 권력이라면 그 권력을 전복하고 의미 있게 개시하려면 과연 초월도 어떤 위계와 단층적 구조로 구축 되어야 할 것인가? 신학은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그 자신 고유의 교의학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 하는 편에 서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앙리도 여전히 기독교의 이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