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주드 로 주연의 2001년작 전쟁영화 ‘에너미 앳더 게이트’에는 이런 흥미로운 대사가 나온다. 영화에서 러시아 공산당 정치위원으로 나오는 다닐로프(조셉 파인즈)가 동지에서 연적관계로 발전해 버린 불세출의 저격수 바실리(주드 로)에게 내뱉는 말--- 
“나는 평생 사람과 세상이 공평해야 한다고 믿고 그 신념을 위해 싸워왔지. 하지만 아무리 싸워도 별수 없이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하더군. 누구는 아름다운 여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만큼 매력적이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지. 누구는 총을 잘 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게 서툴지---”    

마르크스가 정의로운 세상을 위하여 계급적 질서와 위계를 구성하게 하는 소유 관계를 부정한다고 할 때 모든 소유문제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여 ‘공산당 선언’에서도 철폐와 전복의 대상으로서의 소유를 그냥 소유로 지시하지 않고 ‘부르주아적 소유’로 명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분열과 위계적 차이, 굴곡의 불공정성 자체를 아예 부정해 버린다면 그야말로 인간은 자신의 생존에서 꼭 필요한 욕망과 의미 있는 충동, 추동의 자리 자체를 부정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반대로 강고한 차이의 장치에서 불공정한 게임에서 욕망과 충동이 발생하고 제대로 추동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는가? 하여 문학평론가 정여울 씨도 최근의 한 칼럼에서 지젝을 인용하며 이러한 역설적 국면을 재치 있게 진술하고 있다. 

“엄격한 부모가 자유방임적인 부모보다 훨씬 창조적인 아이를 길러낸다고 하는 것은 동서양 부모들의 공통된 합의사항이다. 지젝은 이렇게 설명한다. 엄격한 부모아래 있는 아이는 겉으로는 복종하더라도 내적으로는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훨씬 교활한 것은 포스트모던한 자유방임, 비 권위주의적 아버지의 명령이라고 한다. 예컨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정말 원하는 대로 하거라!’는 식으로 말하는 부모가 훨씬 교묘한 독재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의 내적인 자유를 강탈하고, 아이의 할 일뿐 아니라 스스로 원해야 할 것과 느낌까지 명령하는 것이다. 엄격한 금지가 오히려 내면의 빈 공간을 만들고, 그 내면의 공터에서 창조적 질문이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저 유명한 칸트의‘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도 이런 문장을 병렬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 안에 역설적인 것이 담겨 있다. 즉 ‘시민적인 자유’의 정도를 확장하면 할수록 그것이 시민들의 ‘정신적인 자유(Freiheit des Geistes)'에 유리해 보이지만 실은 정신적 자유에 오히려 엄청난 제약을 가져오게 된다. 그와 반대로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감소시키게 되면 오히려 시민들이 자신의 전반적인 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처럼 딱딱한 껍질 안에 자연에 의해 가장 소중하게 간직되고 있는 맹아인 ’자유로운 사고로의 경향과 사명’---”(칸트,「칸트의 역사철학」,이한구편역,서광사,22.)   

 
탈-권위, 해체주의는 동일성의 차이로 인한 그 폭력성을 제거하느라 모든 차이와 위계에 대해 부정의 혐의를 덮어씌웠지만 정작 돌아오게 된 것은 그 고귀한 평등을 느낄 심리적 토대, 경계선마저 희석시켜 평등이라는 정의 설정 자체가 감성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사태가 아닌가? 그러한 결과로 오늘날 포스트모던 이후의 무공간의 현대인은 다시 자신의 내부를 경계 짓고 창조해야만 하는 원점의 원시인적 딜레마에 재 직면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여 우리는 다시 내부와 외부에서 어떤 식으로든 분절을 긋고 자신의 공간을 재 구원해야만 하는 문제에 되돌아오게 된다.       

“장소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외부로부터 분리된 내부를 창조하는 것이다.---내부에 있다는 것은 당신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E.렐프,「장소와 장소상실」,김덕현외,논형,116)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저 의미 있는 장소를 위해 다시 근대적 계급, 계몽의 추문적 기획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저 장소를 구원하기 위해 포스트모던한 감성과 논리자체까지 무작정 부정할 필요는 또한 더더욱 없을 것이다. 어차피 서로의 사유들은 적대적으로 은밀히 공모하여 서로를 살해하고 그 시체들 위에서 더욱 유능한 사유에 이르게 하는 이율배반적 상응의 토대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계급적 평등, 사회과학적 평등을 확보하고서도 주체의 리비도 활성화를 위해서 어떤 불평등의 위계를 용인할 것이며 어떤 내 외부의 구조적 위상 공간을 인정, 옥석을 가릴 것인가? 오늘날 어떠한 곳에 어느 곳에 이러한 불평등의 자리를 위치지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위에 인용한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의 첫 문장은 또한 의미 있게 다가온다.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 미성년 상태의 책임을 마땅히 스스로 져야 하는 것은, 이 미성년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을 경우이다.”(칸트,위의 책,13.) 

칸트의 저 유명한 계몽에 대한 정의에서 걸려 있는 것은 역시 계몽의 보편적인 성격이다.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승격되는 저 계몽이란 것이 반드시 지적 재능이나 소수의 인식노동자들만이 독점할 수 있는 지식 체계나 정보가 아니라 누구나 필요를 자각하고 동기부여가 된다면 도달 가능한 인간 성장의 소명에 관한 문제이다. 지식과 정보이기 이전에 이해하고 통합하는 인격적 성장을 동반하는 것으로 누구든지 알고자하는 앎에 대한 호기심, 의지, 에로스가 발동된다면 도달 가능한 것이다. 그러하게 도달 가능한 성년이라면 성년에 이르지 못한 책임은 당연히 위계적 차이, 지성의 문제가 아닌 욕망의 결핍에 있다는 것이 칸트의 지적이다. 이로써 칸트의 비난이 함의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와 문명의 진보에서 동어반복 될 수 있는 계급과 위계의 재구성 함정을 극복하는 것이며 그 편으로써 인간 성장이라고 하는 성년 개념에서 ‘부르주아적 소유’의 권력성을 감산, 그것을 이를테면 마르크스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부연, 칸트적 기획을 추론 정리하자면 곧 계몽은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로 열려 있는 보편과 정의의 성장 게임이다. 하지만 그 게임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은 각자의 리비도 활성의 강도, 욕망의 여하에 따라 계몽 승격되는 량과 질이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후자의 불평등은 불평등이되 애초의 공정한 토대위에서의 사후적 욕망의 문제이므로 평등과 정의의 문제를 유발시키지 않는 보편에 속한 불평등이다. 

역시 칸트다운 문장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한편, 이 지점에서 또 유쾌하게 떠오르는 것은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진술한 문장이다. 

 

 

 


“나는 한 사람의 능력이 다른 사람의 능력보다 열등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능력이 똑같이 발휘되지는 않았다고 가정할 것이다.---그러므로 나는 동어반복의 자리를 약간 옮길 것이다. 나는 그가 덜 똑똑하기 때문에 덜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아마 덜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덜 좋은 일을 제공한 것이며, 그가 덜 유심히 보았기 때문에 덜 본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가 그의 일에 주의를 덜 기울였다고 말할 것이다.---그들의 ‘낮은’ 지능이 자연의 효과인지 사회의 효과인지 논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그들은 그들의 욕구와 실존적 상황이 그들에게 요청하는 지능을 개발한다. 욕구가 멈추는 곳에 지능은 쉰다. ---인간은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이다. 어쩌면 지적 성과의 불평등을 설명하기에 충분할 수도 있는 주의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의지가 불평등하게 절박하기만 하면 된다.”(랑시에르,「무지한 스승」,양창렬역,종려,103,104.강조는 많은물소리)

 
역시 이 인용문에서도 핵심으로 거론되는 것은 욕망의 문제다. 선천적 재능이 아니라 욕망이 지능을 활성화시키고 사물을 더 진지하게 숙고하고 자신을 잘 사용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하게 욕망의 문제로 관점을 위치시킴으로 위계와 차이를 생산, 재생산하는 동어반복의 자리를 극복, 어떠한 보편의 성감대를 활성화 시키고자 하는 것이 랑시에르의 의도인 듯하다. 그로써 재생산의 핵심 경험인 교육적 경험에서 애초의 보편을 정초하고 그 편의 유능한 평등의 사유의 어떤 토대를 묻고자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랑시에르의 이 문장에서 우리는 예의 그 보편과 정의에 속한 어떤 불평등의 자리를 확인하게 된다. 아니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랑시에르는 저 불평등한 것(욕망)의 발생장소까지 노골적으로 거론하고 있지 않는가?  

곧 불평등하게 절박한 의지, 욕망의 차이가 그것이다. 욕망을 발생, 구조화시키는 조건인 어떤 결여가 크다면 그야말로 욕망의 생산에서 그러하지 못한 사람보다는 불평등하게 욕망을 더 절박하게 발생시킬 것이 아닌가? 그러하게 강렬하게 발생시킨 욕망의 탄력위에 충동, 에로스가 작동되었다면 지능은 훨씬 제대로 떠들썩하게 활성화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여, 곤궁이야말로 계몽이나 성장게임에서의 도약판, 영혼이 아닌가? 결여와 욕망과의 이와 같은 에로틱한 결혼을 한편, 또 플라톤은 「향연」에서 이렇게 재치 넘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 포로스(계책)와 어머니 페니아(결여)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에로스는 다음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답니다. 우선 그는 늘 가난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섬섬하고 아름다운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며, 오히려 피부가 딱딱하고 거칠며 맨발에 집도 없습니다. 늘 땅바닥에서 요도 없이 누워 있고 문가와 길섶에서 하늘을 지붕 삼아 잠이 들지요. 어머니의 본성을 갖고 있어서 늘 결핍과 함께 삽니다. 그런가 하면 또 아버지를 닮아서 아름다운 것들과 좋은 것들을 얻을 계책을 꾸밉니다. 용감하고 담차고 맹렬하며 늘 뭔가 수를 짜내는 능란한 사냥꾼이지요. 사리분별을 욕망하고 그걸 얻을 기략이 풍부합니다. 전 생에 걸쳐 지혜를 사랑하며, 능란한 마법사요 주술사요 소피스트입니다.”(강철웅역,「향연」,128.)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부르주아적 소유로서의 위계의 전복은 이미 자연스럽게 결정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곧 결여, 곤궁이 클수록 비례하여 욕망이 활성화 된다는 것을 이름이다. 이로써 의미 있는 전복, 가난과 결핍이 더 통렬하게 유리해지는 마법, 정의로운 불평등이 정초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결여의 블랙홀, 스스로의 자신의 무의식 안에 고유하게 특권화 되는 욕망 발전소, 공정 장치로써의 그것을 구원하는 지젝, 라캉의 정신분석적 증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다시 묻지 않을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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