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식 구성의 소설은 처음 읽어 보았는데 그 구조가 꽤나 독특하다. 소설의 본편에 해당하는 가여운 것들의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흡사 프랑켄슈타인을 오마쥬한 의사와 그가 창조한 여성을 통해 여성의 인권을 옹호하고 지배계층의 추잡한 이면을 보여주는 소설로 보였으나, 본편에 이어 또 다른 액자를 통해 보여주는 편지는 본편의 내용에 빠져있는 독자의 엉덩이를 냅다 후려차서 정신차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확연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본편에는 편협하고 부담스러운 감정의 기복, 세련되지 않은 고전소설의 투박하고 장황한 문체들이 만연하여 읽는 동안에도 신경을 거스르는 부분이 많았다. 반면, 뒤이은 편지의 글은 단호한 메세지가 세련되고 간결한 문체로 글쓴이의 상당한 필력을 엿 보인다. 작가가 계획한 것인지 아니면 나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부분이 본편과 편지의 저자가 다른 만큼 글의 수준과 필력 역시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 의도적으러 창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만일 그렇다면 정말 입체적인 액자식 구성을 만들어낸 것이라 놀랍다. 영화만 보았을 때에는 독특한 소재와 사회적 의식이 엿보이는 줄거리와 연출로 꽤 독창적이고 좋은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원작을 읽어보니 영화는 그저 원작에서 군데군데 차용한 자극적인 설정으로 인조인간 벨라 벡스터의 일대기에만 집중한 반쪽의 이야기였다. 원작은 여성의 인권을 포함한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사상적 충돌이 난무하는 격동의 시기를 한 편의 소설에 오롯이 담아냈다는 점, 그리고 이를 더욱 강력한 방식으로 전달하기 위해 책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는 점에서 더욱 높은 창작능력을 보인다.
작가들의 글 쓰기 방식은 저 마다 다르고 독특한 루틴 역시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읽었던 글쟁이들의 글쓰기에 대한 에세이에서는 모두 “어느 순간 부터는 통제하기 힘들다는 느낌이 든다”라고 말한다. 난 작가는 아니지만 그 느낌을 어렴풋이 알것 같았다. 나 역시 습작을 끄적여 보면 예상치 못한 구간에서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나를 끌어가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작가들은 큰 플롯과 작품의 근간이 되는 장치들은 분명 마음에 하나즈음은 그려놓고 글쓰기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일종의 목적지를 나타내는 깃대와 거기까지 도착하게 만드는 추진력이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읽는 동안 나는 작가인 앤디위워가 이 책에 쓰려고 고안한 깃발과 장치들이 얼마나 정교하게 제작되었을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과학적 사고와 지식의 범주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생기고 또 해결책을 마련하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분명 즉흥적인 이야기의 흐름만으로는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 자부한다(소심해서 자부하는 성격이 절대 아닌데).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수 많은 별들처럼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아스트로파지를 닮은 추진력으로 각자의 종의 생존을 위한 방법을 찾아내느라 고군분투한다. 그 사이에 싹트는 이종간의 우정은 차갑고 혹독한 환경의 우주를 배경으로 한 680여 페이지의 이야기를 훈훈하게 데워준다. 이 소설의 장면을 상상하거나 “와우 기발한데?!”라는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 책은 과학적 기본 소양을 다소 요구한다. 그래도 쉽고 간결한 문장이 머리의 부담을 덜어준다. 내 생각에 번역가가 출판 대리인이나 작가와 주고 받은 이메일이 꽤 많았을 것 같다.
약관의 나이에 아쿠타가와 상을 받아 화제가된 작가 스즈키유이의 수상작 ‘괴테는 모든것을 말했다’. 읽는 내내 참 럭셔리 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주제로 책을 쓴다는 것 부터, 소설 속 주인공과 그의 가족들이 소중한 시간과 심오한 고찰을 쏟아붓는 대상, 학문적 호기심 혹은 책임감으로 나선 여행, 매년 의미있는 기념일에 가족친지간에 주고받는 말, 글, 물건들 까지 모두 럭셔리하다. 그리고 소설 내내 사용된 풍부한 인문/철학 저서에서 따온 인용은 평소 여기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라면 럭셔리의 향연을 느꼈을 만하다. 그리고 이런 럭셔리를 대할 때 가지게 되는 약간의 동경심과 질투섞인 경외심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의 의식의 바탕에 깔려있음을 느낀다. 더욱이 무의식 중에 이 글을 쓴 작가의 이미지를 지성미 가득한 50대로 떠올리다가도, 불현듯 이 작가의 나이를 떠올리면 뒤통수를 여러차례 맞은 느낌이다. 무라카미의 자서전격 에세이에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주변의 반응과 그에대한 자신의 생각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다루었다. 그 만큼 일본 문학계에서 이 상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는 뜻인데, (개인적인 느낌이니 비난해도 어쩔 수 없다만)난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작가가 이러한 일본 문학계를 비꼬고 있다는 느낌이 떨쳐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의도의 소설을 쓴 약관의 작가에게 아쿠타가와 상이 수여되었다는 것이라면, 정말 재미있는 희대의 아이러니한 사건이 아닐까? 마치 작중 시카리 교수의 은밀한 장난과도 같이…
NPR 기사를 통해 알게된 존 밴빌의 맨부커 수상작 ‘바다’를 읽었다. NPR 기사에 등장했던 평론가는 밴빌의 문체에 대해 ’사색적인 분위기와 은은한 아름다움’ 이라고 표현했다. 작가의 14번째 장편인 ‘바다’에는 그러한 그의 문체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필경 소설이라는 매체이기 때문에 240여 페이지를 관통하는 굵은 이야기의 흐름이 있지만, 이 책은 그 이야기의 흐름에 집착하면 매우 읽기 어려운 책이 되버린다. 나 역시 처음에는 좀 처럼 따라 잡기 힘든 이야기의 흐름으로 인해, 내 문학적 소양이 이 책을 소화하기 힘든건 아닌가 하며 괜시리 자학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야기의 흐름에 집착하기 보다는 그의 문장 하나하나를 마치 시를 음미하듯이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이 책을 읽는 참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다행히 내 문학적 소양은 이 책을 읽는데 부족하지 않았다) 소설책 한권을 읽고 나면, 희뿌연 우유빛의 일광으로 가득한 어느 낯선 방안에 놓인 침대에 바로 누워 상실로 가득한 과거와 불행한 현실의 나를 번갈아 오가며 회상하는 듯 하다. 그리고 곧 이 느낌이 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장치가 아닌, 내 일상에서도 자주 찾아오는 순간임을 알게 된다. 존 밴빌은 이런 대중적인 일상을 ‘사색적인 분위기와 은은한 아름다움’으로 옮겨 놓았을 뿐이다. 화려한 줄거리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실망하게 되겠지만, 연이은 독서에 지친 독자가 잠시 쉬어갈 휴양지로 ‘바다’를 선택한다면 필경 만족한 선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