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문구 여행기 -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용기에 대하여
문경연 지음 / 뜨인돌 / 2020년 1월
평점 :
생각해보면 난 어렸을 때부터 문구 덕후의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신학기가 되어 부모님이
학용품을 사준다고 하면 엄청난 양의 문구를 골라 부모님을 당황하게 했다. 서점에 책을 사러 가서는 갑자기
고급 샤프를 사달라고 졸라대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자 내가 제일 먼저 산 것은 고급 볼펜이었다. 처음에는 마트에서 사다, 그 다음에는 서점으로 가고, 나중에는 전문 펜샵에서 구입했다. 어느 날 회사 동료가 라미 사파리 만년필을 보여준 사건은 내 문구 덕심을 폭발하게 했다. 그 날 이후로 난 고급 또는 보급형 만년필과 고급 볼펜, 색색깔의
잉크, 종이 질이 좋은 노트를 모았다. 심지어 노트 제본을
할 A4를 9000장씩 쟁이기도 했다. 노트 제본법을 독학해 해외 직구한 종이로 노트를 예쁘게 디자인해 만들고, 온라인
만년필 동호회에서 나눔하며 열심히 동호회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런 내게 <나의 문구 여행기>의
저자 문경연은 너무나 부러운 이력을 가졌다. 대학 졸업 후 전 세계로 문구를 탐방하는 여행을 떠나고, 돌아와 “아날로그 키퍼”라는
문구 브랜드를 만들었다. 지금은 크루도 있는 아주 인기 있는 문방구 주인이다. 온라인에서 “아날로그 키퍼”를
검색하니, 나와 비슷한 문구 덕후들의 제품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대형
업체에서 만든 브랜드가 아니라서 제품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특색 있는 제품들이었다. 더러는 나도
구매하고 싶은 메모지가 있었다.
저자는 파리, 베를린, 바르셀로나, 런던, 뉴욕과 도쿄, 상하이를
여행하며 수집한 문구 사진과 문방구들의 사진, 문구를 구매하고, 선물
받고, 멋진 공간을 구경한 경험을 써내려 가기도 했지만 취업을 미루고 여행을 떠나 온 불안감을 적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작업을 하기로 했으나, 지지부진한 모습에
노심초사하기도 하고, 하도 많은 문구를 사서 짐도 무겁고 여행길도 고되 짜증스러워 하기도 했다. 또한 가까운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문구를 탐색하러 여행을 하며, 난
문구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각국의 문방구 주인들이 번거로움을 감수해가며 문구를 소중히 다루고 사랑하는 모습에 감명받고,
문방구 구석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빈티지 문구를 발견하는 행복을 느끼기도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저자는 취업을 위한 포트폴리오 작업을 하다가, 문구 여행을 했으니 문구
디자인도 하자 싶어 몇 가지 시제품을 만들었다. 과연 잘 된 디자인인지 궁금해 친구들에게 돌렸다가, 쓰고 싶으니 좀 더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리고 아예 몇 가지
제품을 판매하기로 하고 취업 시즌 전까지 시한부 문구 사업을 했다.
취업 시즌이 되고, 시한부 문구 사업을 하며 너무 행복했던 저자는 아예 문구 사업에 정착하기로
했다. 사람들의 비난까지도 새겨 듣고 싶을 정도로 자신이 하는 일을 정말 사랑했다. 그래서 만든 아날로그 키퍼. 이제는 독립 사무 공간이 있고 크루가
있는 사업체가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문구는 온기가 머무는 것이었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나의 디자인도 결국 ‘온기가 머무는 것’이다.
(p. 187)
아날로그 키퍼 주인으로 떠나는 도쿄와 상하이 문구 여행에서는 문구점을 구경하고 와서 문구 디자인 아이디어가 떠올라 숙소에서 디자인
스케치를 할 정도로 열중했다.
온기를 담아 오래도록 남기는 일. 시간이 흘러도 나의 찬란한 시절을 내내 간직해주는 믿음직스러운 존재. 문구란
무엇인가. 이전에 답하지 못했던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다.
(p. 261)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세계로 떠나고, 실패할 수 있음에도 자신의 일로 만드는 것.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용기를 낸 그의 모습이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