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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물리학자 - 명화에서 찾은 물리학의 발견 ㅣ 미술관에 간 지식인
서민아 지음 / 어바웃어북 / 202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미술과 물리학이 어떤 연관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예술과
과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회화와 무려 물리학이라니!
그러나 미술과 물리학은 많은 접점에서 얼키고 설켜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는
책이다.
빛의 성질에 대해 물리학자 맥스웰이 ‘맥스웰의 방정식’을
세우고, 외젠 슈브뢸이 색의 병치에 대해 연구하고, 헤르만
폰 헬름홀츠가 감산혼합과 가산혼합을 발견했을 때, 마침 화가들은 광학과 색채학에 바탕을 둔 연구를 기반으로
신인상주의를 발전시켰다. 조르주 쇠라의 그림은 한 면에 여러 색의 점을 병치하여 찍는 기법으로 그려, 멀리서 보면 그 점들의 색이 혼합되어 보이도록 그려졌다. 가까이서
보면 그저 점의 나열이지만 좀 떨어져서 보면 멋진 그림이 된다. 그것을 위해서 조르주 쇠라는 가로 3m에 달하는 크기를 자랑하는 그림들을 그렸다. 이렇게 회화 안에 과학이
녹아 있다.
교회에 가면 볼 수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 역시 과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그 옛날 사람들이
퀀텀닷 기술을 구현해낼 수 있는 기술을 가졌다니 놀랍다. 퀀텀닷은 지름이 수 나노미터 정도의 작은 물질로
빛이나 전압을 가하면 스스로 빛을 낸다. 퀀텀닷의 크기에 따라서 다른 색을 낼 수 있고 재료 조성을
바꿈으로써도 다른 색을 낼 수 있다. 현대에는 TV, 태양광발전, 바이오 분야에 쓰이는 이 기술의 핵심을 성당이나 교회를 지으면서 썼던 것이다.
그들은 투명한 유리에 금속 산화물을 넣어 색유리를 만들었다. 고온에서 유리와 금속을 녹이면
화합물의 입자 크기가 수 나노미터가 되어 일종의 퀀텀닷이 된다.
보색의 과학을 가장 잘 쓴 화가는 반 고흐다. 그가 즐겨 쓴 노란색과 남색은 정확한 보색으로
이 두 색이 결합하면 반발하는 두 색의 영향으로 각각 노란색과 남색이 채도가 더 높아져 뚜렷하고 두드러져 보인다.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고 많이 봐왔지만, 그림의 그 강렬한 느낌이 갖고 있는 비밀을 알게
되기는 처음이다. 좋아하는 그림인 <아를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에 그려져 있는 노란색의 휘황찬란한 밤 카페 조명과 남색의 어두운 밤하늘이 달리 보인다.
좀 더 본격적으로 과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미술은 옵아트이다. 흰 바탕에 화면 가득 검은
점을 찍어 그 검은 점이 가운데에서 모여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브리지트 라일리의 작품은 뇌의 인지 작용만을 자극하여 착시 현상을 불러 일으킨다. 이것이 미술인가 아닌가 의견이 분분할 수 있지만,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감흥을 일으키는 새로운 예술인 것만은 확실하다.
프랙털이라는 구조가 있다. 부분과 전체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삼각형 속의 삼각형, 정육면체 안의 정육면체가 반복되어 전체를 이루는
구조이다. 이 구조로 그려진 <원형의 극한 4>라는 작품에서는 천사와 악마가 반복되며 프랙털 구조를 이룬다. 우리
마음에 공존하는 선과 악을 그렸다는 점에서 과학 모형이 예술로 변하는 지점을 본다.
핵 실험에 크게 충격을 받아 그린 작품도 있다. 살바도르 달리의 <비키니 섬의 세 스핑크스>는 핵실험으로 오염되어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비키니 섬을 그렸다. 세 개의 머리를 그림으로써 핵실험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
문화유산 복원과 분석은 대표적으로 미술이 과학의 도움을 받는 부분이다. 각각 파장이 다른
테라헤르츠파, 엑스선,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을 그림에 쪼여 각각 다른 깊이로 그림을 분석할
수 있으며 그림에 차례대로 그려진 밑그림과 채색, 덧칠해진 부분을 분석할 수 있다. 그림에 숨겨진 밑그림이 분석되기도 하고, 서명이 없어 진위 여부가
불투명한 그림의 숨겨진 서명을 발견하기도 한다. 뭉크의 <절규>에 묻은 정체 불명의 흰 점이 촛농임을 밝히기도 했으며 물감의 성분을 분석하여 그림이 그려진 시대를 추정하여
모작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저자는 과학자이면서 주말에 그림을 그린다. 학창시절에는 미대 수업에 들어갔을 정도로 그림과
과학 사이에서 갈등했다. 과학을 선택한 후에도 그림을 계속 그렸다. 책에
수록된 저자의 수채화를 보니 수준급이다. 과학자이면서 미술에 조예가 깊어서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었다.
그림으로 떠난 물리학 여행이 어렵지 않고 즐거웠다. 더불어 명작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림에 관심이 있거나 물리학에 관심이 있다면 일독할 만 하다. 혹은
어디에도 관심이 크게 없다 하더라도 미술과 물리학의 연결 고리에 놀라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