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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제3판 ㅣ 세상을 움직이는 책 2
E. H. 카 지음, 박종국 옮김 / 육문사 / 2011년 7월
평점 :
교양필수로 수강했던 역사학 개론에 대한 기억은 이제 찾아보지 않는 문서로만 남아있다. E.H. 카가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때도 지금도 의식하지 않고 산다. 요즘을 사는 내게 역사는 ‘고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일본의 역사왜곡’, ‘중국의 동북공정’, ‘아랍세계에 대한 역사적 무관심’, ‘아프리카에 대한 무지’, ‘가깝게는 극복하지 못한 친일의 역사’ 등등 언론에 비춘 내용 외엔 없다는 것이 되돌아본 현실이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채 역사 철학을 마주하는 무리수를 두고 책을 읽는 것은 더 늦기 전에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평가 때문이다.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는 E.H. 카가 1961년 1월부터 3개월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속 강연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2장 사회와 개인, 3장 역사와 과학과 도덕, 4장 역사의 인과관계, 5장 진보로서의 역사, 6장 넓어지는 지평선으로 구성하고 장마다 10개 이상의 소주제를 달아 놓았다. 80여개의 소주제를 살펴보면, 강연 내용이 무엇이고, 역사가 어떤 방향성을 갖는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엇을 고민하는가를 엿볼 수 있다. 역사에 무지한 독자의 눈에 띄는 내용을 요약해본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를 반영한 답을 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이란 어떤 특질에 있어서가 아니라 역사가의 선험적 결정에 좌우된다. 역사가가 그것을 찾아내 줄 때에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가는 불가피하게 선택적이다. 역사적 사실로서의 그 지위는 해석의 문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19세기 역사관은 세계를 평화롭고 자신감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의 산물인 자유방임의 경제 정책과 관계있다. 역사가가 역사를 만든다. 역사가를 먼저 연구해야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1장의 결론.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사회를 떠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가를 연구하지 전에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시오.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아들이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이중의 시선으로 역사가를 투시하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2장의 결론. 역사가와 그의 사실과 상호작용이라는 과정은 추상적인 고립된 개인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현재의 사회와 과거의 사회와의 대화이다.
베이컨의 언급. 관습의 완강한 지속력은 혁신과 같이 난폭한 것이다. E.H.카가 공감하는 엥겔스의 글(역사는 모든 여신 가운데서도 가장 잔인한 여신일 것이다. 전쟁에서뿐만 아니라 ‘평화적인’ 경제 발전에서도 이 여신은 시체더미를 넘어서 승리의 전차를 몰고 다닌다. 불행하게도 너무나도 우둔한 우리 남녀들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난에 시달리지 않고서는 진정한 진보를 위한 용기를 불러일으키려고 하지 않는다.)
역사의 연구는 원인의 연구이다. 역사가가 원인을 다양화하는 동시에 원인을 단순화해 나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 역사의 해석은 언제나 가치 판단과 떼놓을 수 없는 것이고, 인과관계는 해석에서 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에서 자유의 진전에 대한 액튼 경의 서술(역사는 획득된 기량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진보를 말한다. 변화만 빨랐고 진보는 늦었던 과거 4백 년간에 걸쳐서 자유가 보존되고 지켜지고 넓혀지고 마침내는 이해되기에 이르렀던 것은, 폭력과 끊임없는 악의 지배에 항거하기 위하여 수 없이 취해졌던 약자들의 집단적 노력에 의한 것이다.) 한 집단에게는 몰락의 시대로 보이는 것이 딴 집단에게는 새로운 전진의 시작으로 보이는 일은 흔하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진보란 모두에게 평등하게 동시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관은 우리의 사회관의 반영이다. 역사는 부단한 진보의 과정이다.
미국의 독립은 사람들이 의도와 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을 하나의 국가로 형성하고, 의도와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그러한 국가의 틀 속에 끌어들이려고 하기 시작한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다. 어떤 사회에서나 지배 집단은 대중의 여론을 조직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크건 작건 간에 강제적 수단을 쓰는 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다른 방법보다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것이 이성의 남용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과정 속에서 발견된 모든 발명, 혁신, 신기술은 어떤 것을 막론하고 긍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을 아울러 지녀왔다는 점이다. 누구건 희생자는 반드시 있었다. 역사상 모든 위대한 발전이 그랬던 것처럼, 발전에는 지불되어야만 할 희생과 손실이 있고 대결되어야만할 위험성이 있다. 1차 대전은 엄밀한 의미에서 유럽이 내란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1917년 러시아 혁명은 더욱 결정적인 충격을 초래했다.
과거 4백 년간 영어 사용 세계의 역사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기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세계사의 중심부로 취급하고 그 밖의 것은 모두 변두리 부분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왜곡된 관찰이다. 영어 사용 국가에 사는 우리(저자)들이 이리저리 모여 가지고, 다른 나라와 다른 대륙들의 터무니없는 거동 때문에 우리 문명의 은혜와 축복으로부터 고립되어 나났다는 이야기를 평이한 일상 영어로 지껄여대고 있는 동안에 오히려 세계의 현실적인 움직임에서 고립되고 있는 쪽은 이해력도 없고 성의도 없는 우리 자신이 아닌가 하는 기분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다.(멋진 자기반성이다)
독자가 읽은 것은 육문사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책’이란 테두리에서 2013년 10월 개정 3판 6쇄, 본문 240쪽 분량으로 전역(全譯)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