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지정학 - 5000년 문명사를 통해 보는 세계질서의 대전환 ㅣ 그레이트 하모니 3
아미타브 아차리아 지음, 최준영 옮김 / 21세기북스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1세기 지정학 The Once and Future world Order

2026. 8. 1(토)~10.9(금)

우리가 서구의 발명품이라고 가정하는 많은 사상이 실제로는 다른 문명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다. 외교, 경제적 상호의존성, 해양자유, 전쟁과 평화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는 원칙, 환경보존, 주요 강대국 간의 협력 등 세계질서의 핵심적인 매커니즘과 가치들은 전 세계에 걸쳐 몇천 년 동안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p.11) 이 문장에서 패치워크 문명의 이론을 떠올렸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서구가 냉전에서 승리한 후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확대 추세가 불가피하고 공산 중국조차도 결국 민주주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며, 서구 사상과 관행의 지배력이 더욱 강해지리라 예상되었다. 이와 관련한 가장 유명한 것으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이론이 생겨났다. 이념 전쟁은 끝나고 서구가 영원히 승리하리란 것이다.

2026년 기준, 독자의 판단으로 후쿠야마의 생각은 틀렸다. 미국에서 팔란티어가 영향력을 확대하고, 중국이 미국을 추월해 가려는 상황에서 ‘국가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저자는 역사상 대부분의 시기에 중국, 인도, 이슬람 세계는 국제 무대에서 강력한 행위자였으며 문화적 다원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이 책에서 보여주려고 한다. 한 문명이 다른 문명과 상호작용 하듯이 세계질서는 종종 그들이 정복하거나 지배했던 세계질서까지 포함한 다른 세계질서와 상호작용하여 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장이다.

제1장 최초의 기반

세계질서에 존재해 왔던 공통 개념 중 하나인 ‘혼돈과 질서’는 고대 이집트, 수메르, 페르시아, 그리스, 인도(힌두교 및 불교 교리), 중국(책에서 제외하였지만 독자의 판단으로 삽입), 몽골, 아즈텍, 근대 유럽, 2차대전 이후의 미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오늘날 세계질서가 서구 역사와 서구 정치사상, 특히 자유와 민주주의의 파생물이라는 서구에 널리 퍼진 개념에 반대한다. 영어의 세계적 지배력은 강하다. 이런 언어적 유산은 전 세계 학자들과 전문가들로 하여금 표현된 사상들이 그리스와 로마, 즉 서구에서 발명되었다고 가정하게 했다. 이는 다시 이 학자들로 하여금 다른 문명 언어에서 동일하거나 유사한 의미를 가진 용어들에 대해 무지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서구 편향의 주요 원천이다.

서구의 부상은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가마가 1490년대에 아메리카와 인도를 ‘발견’한 때부터 19세기 중반 극적으로 가속화되면서 서구 제국주의는 전 세계를 휩쓸었다. 이와 관련한 결정적 사건은 아편 전쟁에서 중국의 패배, 영국의 인도 반란 진압,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에 의한 아프리카 분할이었다.

문명이나 세계질서의 부상은 전적으로 스스로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문명, 특히 선행하는 문명으로부터 정치적, 문화적, 기술적 사상과 혁신을 차용함으로써 도움을 받는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서구의 지배는 단지 잠깐 동안의 현상에 불과했다. 글로벌 문명은 문명들 간의 일종의 근본적 상호 연결성을 의미할 것이며, 이들 문명은 경쟁하면서도 문화적 정치적 차이를 유지하면서 협력한다.

제2장 그리스 신화와 페르시아의 힘

서구인의 마음속에서 고대 그리스는 가장 유서 깊은 문명이며, 현대 자유 민주주의 삶에서 근본적 사상과 관행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는 서구 역사가들로부터 지나치게 많은 존경을 받아왔으며 그 결과 서구 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업적을 과장하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그리스의 의존도를 과소평가한다.

고대 근동, 특히 이집트,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신성 왕권, 제국, 강대국 외교, 평화조약 체결 등 세계질서의 핵심 제도들이 출현했다. 그리스는 도시국가 체제였으며 헤게모니 세력이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 국가들은 전쟁 후 승리자 편에 서지 않음으로써 반패권주의적 자세를 유지했다. 국가의 패권 추구를 반대하는, 세력 균형의 원칙으로 알려진 이 원칙은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 체제의 주요 특징이었다. 그리스에게는 세계질서가 일종의 균형 잡기였다면 페르시아에게는 신성 왕권과 보편 제국이라는 두 가지 사상의 확장이었으며, 이후 많은 세계질서가 이를 채택했다.

서구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그들의 문화유산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로마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리스-아시아 또는 그리스-페르시아가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를 단일 문명으로 연결하는 것은 현대 유럽 또는 서구의 발명품으로, 그리스의 정체성 발전과 독립적 그리스 도시국가 체제의 생존에 있어서 페르시아의 중심적 역할을 무시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는 서유럽 및 북유럽과 전략적 상호작용이 거의 없었다. 실제로 그리스를 유럽 또는 서구 문명으로 간주하는 것은 역사상 가장 근거 없는 믿음 중 하나이다. 오히려 그리스인들은 유럽인들의 지성과 세계질서를 조직하는 능력을 경멸했으며, 아시아인들이 이 분야에서 우월하다고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이를 명확히 보여 준다. (p.60)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웃 누구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여겼지만, 문화적 언어적 자부심에 비하면 피부색은 중요성이 덜했다. 어두운 피부를 정신적 열등 또는 야만(barbarism)과 연결하고 흰 피부를 우뤌한 문명과 연결하는 현대 유럽의 관점과는 달랐는데, 이는 피부색에 기반한 인종차별주의가 유럽의 독특한 발명품이라는 생각에 신빙성을 더한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서구 학자들과 지도자들은 고전 그리스가 자신들의 조상이라 주장하고, 고전 그리스의 동방과 연결과 연계를 무시한 채 오직 유럽적 또는 서구적 정체성을 부여했다.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이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꾸며낸 전유물이었는지 잘 포착한다. ‘문명화된’ 것으로 식별할 만한 적절한 조상을 찾지 못한 현대 유럽인들은 그리스와 로마로 그 공백을 메꿨다.

브로델은 ‘그리스의 기적’이 바빌론의 선구적인 화학, 이집트의 의학, 메소포타미아의 천문학 같이 오래전에 확립된 견고한 기반 위에 세워진 것이라 본다. 그리스인의 세계관과 질서 개념에는 합리적 사고 능력과 미신에 대한 극도의 집착(신탁) 모두와 관련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 합리주의 사상은 오늘날까지 서구인의 마음속에 남아 있으며 아시아 및 다른 비서구 문명에 대한 서구 유럽 중심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 묘사를 재생산한다. 고대 그리스의 기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와 민주주의 사상이다. 서구인들은 그리스를 민주주의의 발상지로 숭배한다. 그러나 그리스 민주주의의 범위와 기간은 매우 제한적이며, 많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폭군이 통치했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현대 인권 개념의 본질인 정부의 침해로부터 개별 시민을 거의 보호하지 못했다.

그리스인들은 폴리스의 자급자족과 독립 유지에 지나치게 집착했기에 외부인뿐 아니라 서로가 상호 협력하는 체제를 발달시키지 못한 데다 국제질서도 발전시키지 못했다. 펠로폰네스 전쟁은 협력체제를 발달시키지 못하고 경쟁적인 권력 게임에 몰두한 전형적인 예다. 저자는 “전쟁과 평화 이면에 있는 경제적 도덕적 요인을 무시하고 있다”(p.65)며 미국과 중국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질 운명이라는 주장은 부분적이고 단순하다고 평가한다.

그리스가 서구 문명에 큰 공헌을 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집트, 아나톨리아, 페르시아, 중국, 인도를 비롯해 고대 여러 문명이 국가 간 협력, 전쟁과 통치에서의 인도주의적 원칙, 경제적 상호 의존성, 문화적 다양성 등 현대 세계질서의 핵심 측면에 더 실질적 영속적으로 기여했다.

헬레니즘화란 그리스 문화의 확산을 의미한다. 특히 그리스의 시칠리아 식민지화는 문화적으로 배타적이었다. 이는 동남아시아의 인도화와 대조적이다. 남부 아시아로 확장되었을 때는 그리스 문명이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리스 체제는 주변 문화로부터 과학, 예술, 조각, 기술, 철학에 대한 아이디어를 빌려왔고, 폭정과 공존하는 매우 제한된 민주주의 관행을 따랐으며, 다른 폴리스와 치열한 경쟁을 낳았으나 페르시아에 대해서는 공통의 적이자 보호자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아는 최초의 보편 제국은 BCE 550년 키루스 대왕이 건국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BCE 330년까지 지속되었고 일관된 행정 체계가 있었고, 효율적인 통신 및 운송 체계를 유지했으며, 독특한 세계관을 가졌다. 조로아스터가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형성했으나 정복당한 백성들에게 이 종교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조로아스터교의 핵심 교리는 선과 악의 투쟁으로, 세계 최초의 예언자 조로아스터(자라투스트라)가 BCE 1500~BCE 500년경 확립한 것이다.

현대 서구 출판물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경쟁을 서양의 도덕적 우월성을 보여주는 예시로 제시한다. (헤로도투스의 <역사> 광고에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투쟁을 ‘동양의 절대주의와 서양의 자유로운 제도 사이의 근본적 갈등을 내포함으로 묘사’한다. P.72)

하지만 그리스와 페르시아 통치자는 상당히 협력하기도 했다. 다양한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는 정책을 유지했다.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모두 잔혹한 폭력을 저질렀음에도 서구 역사가들은 페르시아인을 보편적으로 잔인한 사람으로, 그리스인을 온건하고 절제된 사람으로 일반화하여 묘사하는 데 몰두했다. 서구 역사가들은 편향된 그리스 기록에 의존해 그리스 사회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페르시아 제국이 피지배자들에게 제공한 개방성과 문화적 포용성을 과소평가했다. 구약성경에 나와 있듯이 키루스는 네부카드네자르가 바빌론에서 추방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했다. 현재 영국 박물관이 소장 중인 ‘점토 원통’에는 키루스가 현지 주민의 노예 노동을 중단시키고, 이웃 국가들의 사원과 종교적 숭배를 복원했으며, 유대인들에게 허락했듯이 바빌론에 추방된 사람들의 귀향을 허용했다고 명시한다. 일정 부분 이러한 관용 덕분에 명성을 얻은 키루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부터 토머스 제퍼슨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통틀어 세계 지도자들의 롤 모델이 되어왔다. 제퍼슨은 <키로파에디아: 그리스 철학자 크세노폰이 키루스를 이상적인 통치자로 보았음>를 읽고 지배적인 종교 없이 다양한 문화로 이루어진 국가라는 페르시아 모델에 매료되었다.

그리스 철학의 기원(BCE 580~BCE 500년으로 추정)은 페르시아의 아나톨리아 정복 시기와 겹친다. 정치적으로는 그리스 도시 국가 상당수는 아테네나 스파르타보다는 페르시아의 통치나 보호를 선호했다(P.76) 페르시아의 군사 및 행정 체제에 종사한 그리스인들도 많았고, 살라미스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가 등을 돌리자 피난처를 찾아 페르시아 궁정으로 도피했고, 그곳 총독으로 여생을 보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전집 Ⅰ.P189~215) 더욱이 페르시아는 여러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보호하면서 약탈을 일삼는 이웃 그리스 국가들에게 독립을 빼앗기지 않도록 도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의 몰락은 스파르타 해군력을 증강시킨 페르시아의 자금 지원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종종 페르시아의 균형자 역할에 의존했다.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를 응징하려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 문제에 개입하였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에 대한 찬양과 비서구 문명에 대한 비난은 역사에 대한 편협하고 편향된 시각이며, 세계가 새로운, 탈미국적 세계 서로 치닫는 상황에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식 공화정보다 동양식 군주제를 선호했고 페르시아 체제를 모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가 무정부적인 폭도 정치를 낳는다고 믿었으며, 군주제가 통치자의 이기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공동선을 위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페르시아 군주제를 폭정으로 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키루스 대왕을 이전 통치자인 메디아인으로부터 백성을 해방시킨 덕망있는 왕이라고 칭송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세계질서를 모방하고 채택하고 있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문명을 융합하여 세계 왕국, 인류의 형제애를 건설함으로써 공통의 정치 질서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는 그리스인들의 고립된 사고방식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수많은 동서양 통치자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로마 제국을 창시한 아우구스투스는 알렉산드로스를 숭배하고 본받으려 했고, 묘지를 방문해 꽃과 금관을 올렸고, 15세기 믈라카 술탄국의 창시자 파라메스와라는 자신이 이스칸다르(알렉산드로스의 말레이 이름)의 후손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세계는 그리스 문명의 유산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서구와 전 세계는 또한 페르시아의 유산인 종교적 민족적 관용, 타 문하 수용 능력, 광대한 영토 관리 능력을 배울 수 있다.

​

P.S. 나머지 독서노트는 파일로 붙여둡니다.(분량이 A4 25쪽 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