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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박에 한국사 : 현대편 - 지금 유용한, 쉽게 맥을 잡는 ㅣ 단박에 한국사
심용환 지음, 방상호 그림 / 북플랫 / 2024년 4월
평점 :
단박에 한국사(현대편)
2026. 4. 19(일)
2차대전 막바지인 1944년 영국과 소련 사이에 ‘퍼센트 합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서부와 남부 유럽은 영국이, 동부와 중부 유럽은 소련이 관리하겠다는 발상이었다.(P. 23)
1940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영국에 50척의 구축함을 공급하였다. 지원의 대가로 버뮤다, 자메이카, 세인트루시아, 트리니다드, 인티과, 영국령 기아나 등 영국 영토에서 미국이 99년간 군사기지를 운영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였다.(P.25) 이는 『미국, 제국의 연대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41년 미국은 ‘미국 방위에 중요한’ 모든 국가, 특히 영국에 무기를 팔거나 빌려 줄수 있는 ‘무기대여법’을 통과시켰다. 무기대여법은 이후 더 확대되어 소련 역시 지원을 받았고, 미 해군은 무기를 비롯한 각종 물자를 유럽으로 실어 날랐다.
미국은 일본의 영향력을 독일만큼 철저하게 약화하되 그 자리를 영국이 아닌 중국이 대신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한 원칙에 따라 카이로 회담(1943)에 장제스를 불러들였으며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독립을 명문화하였다. 1949년 NATO를 설립하여 미국은 유럽 내 전략적 요충지를 마음껏 사용하게 되었으며 유럽 국가들의 군사 정책에 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2026년 도널드 트럼프의 생각은 이와 다르게 보인다.
1944년 브레턴우즈회의는 금본위제와 고정환율제에 근거해 환율을 통제하고 이를 통해 국제 무역을 안정시킨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었다. 금 1온스당 35달러로 가치를 고정하였다. 달러가 기축통화가 된 것이다.
국내의 우익 세력은 송진우, 김성수 등을 중심으로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조직했다. 미군정의 지원을 받았으며 반공주의를 표방하였다. 지주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농지개혁에 소극적이었다.
해방후 농지개혁으로 지주제가 해체되면서 지주들의 토지 지배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토지 매매가 수월해졌으며 농민들이 노동자가 되기에도 유리했다. 즉 국가나 자본가는 보다 수월하게 필요한 토지를 구매할 수 있게 되었고 농민들 역시 고율의 소작료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도시로 가서 노동자가 될 수 있었다. 토지에서 벗어난 자본가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력에 따라 부를 축적할 기회를 얻게 된다. 1960냔대 이후의 산업화가 성고을 거둔 배경에 농지개혁이 있었던 것이다.(P.114)
북한의 제도는 소련을 본떴다. ‘민주집중제’라는 원칙에 따라 인민회의,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공산당 지도부가 전권을 행사하는 형태로 구조화된 것이다. 1990년대 초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되었을 때 선배들은 ‘민주집중제’가 아주 민주적인 것으로 호도하였고 의사결정방식에 의문을 품었던 나는 전교조 활동을 중단했다.
“북한은 남한에 약 3년 앞서 토지개혁에 성공하였다. 토지개혁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민중의 대대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가 지적하듯 오늘날까지 북한 사회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토지개혁의 수혜자들이다.”(P.161) 남한에서의 농지개혁이 근대적인 자본주의 생산 방식을 도입하기 위한 토대였다면, 북한은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처단과 결부시켜 공산주의 사회로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국공내전 당시 공산당에 참여해 국민당과 싸운 한인은 6만 명이 넘었고 전사자만 3,550여명에 달했다. 심지어 북한은 중국공산당의 배후기지 역할을 했다.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 시리즈에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김일성은 중국에 지원을 요청할 명문을 갖게 되었다. 중국은 ‘우선 25만을 긴급 투입하고 총 60만 정도를 투입해 북한을 돕겠다.’ 항미원조전쟁. 즉,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북한을 돕겠다는 발상이었다.
이승만은 오직 이승만을 추종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자유당을 창당하였는데, 전쟁 이후의 고조된 반공주의 등이 그의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민당은 민국당을 거쳐 민주당이라는 야당이 된다.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식 독재는 ‘개인 카리스마에 의한 동원체제’의 성격을 띠었다. 대한청년단, 호국군이라는 준군사조직, 학도호국단, 국민회(18세 이상의 모든 남녀는 무조건 가입)등을 조직하고 모든 단체의 총재는 모두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비공식적이며 비정상적인 징발체제가 일상화 되었고 이는 그만큼 부정부패가 만연하다는 말, 이후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괴롭힐 일상적인 부정부패는 이때부터 문화화되었다.(P.202)
“미국은 매번 한반도의 모든 현상을 긍정했다.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을 인정했고, 4.19 민주혁명이 일어나지 이를 지지했고, 다시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이 또한 받아들였다. 독재건 민주건 반공은 분명하지 않은가. 앞으로도 미국은 이런 행태를 반복할 것이다”(P.210) 저자와 달리 냉전이 끝났고, 중국경제력과 군사력의 급상승은 미국의 태도에 변화를 줄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마가세력의 입장에서 미국의 이익에 우선이 되는 방향으로 한반도를 처리할 것으로 보인다.
4.19혁명 당시 가장 격렬한 요구가 ‘경찰개혁’이었다. 해방 초기부터 3.15부정선거까지 경찰의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2026년 대한민국 국민의 요구는 검찰 개혁이다. 조작과 조직의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퇴직후 사법카르텔의 일원이 되어 호가호위하려는 검찰의 의도를 분쇄해야 한다.
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위해 미국은 ‘브라운 각서(1966)’를 준비했다.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은 미국이 감당하겠다. 한국군의 무기 및 장비의 현대화를 지원하겠다. 베트남 관련 물자와 용역은 가능한 한국 기업을 통해 조달하겠다는 내용이다. 베트남 전쟁에는 2만 4천여 명의 민간 기술자가 파견되었다. 파견된 한국인 기술자의 3분의 2가량이 외국 회사에 취업했다. 참전 군인 중 1,022명이 현지 기술자가 되었다. 이들은 1970년대 중동 진출 당시 중요한 해외 역군이 된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현대건설, 버마 현대건설 등으로 이직하는 등 한국 경제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65년 일본과 공식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내용은 미흡하다는 생각이다.
1964년 벼 육종 전문가 허문회 교수가 국제미작연구소에서 IR667이라는 교배종을 개발해 귀국하였다. 667회 교배를 통해 성공한 품종으로 이후 ‘통일벼’로 불리며 식량 자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중학교 다닐 때 농업 시험에서 통일벼의 본래 이름을 쓰라는 시험문제에 ‘IR667’을 아무도 쓰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일찍 돌아가신 농업 선생님은 당시 전자시계를 유일하게 차고 계셨었다. 통일벼로 지은 밥은 맛이 없다는 것이 총평이었다. 아마도 자포니카 품종의 쌀을 먹다 보니 인디카 종의 통일쌀은 풀풀 날려 입맛을 사로잡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전두환은 언론통폐합(980) 정책을 통해 수많은 방송국과 신문사를 없앴다. 군산에 있던 서해방송이 문을 닫던 날을 기억한다. 하지만 살아남은 언론사는 크게 번성하였다. 조선일보가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P.345) 전두환 정권기 언론사에 대한 각종 혜택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언론사는 부동산을 취득할 수 있게 되었고, 각종 사업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다. 1980년대는 언론기관이 수백억 매출을 내는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시기였으며 이 기회를 누렸던 조선일보, 동아일보 같은 언론사들은 보수적인 언론관을 구체화하기도 했다.(P.345)
1987년 6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된 순간 나는 용산에서 군복무 중이었고 88서울올림픽을 제대하고 머리가 자라기 전에 봤다. 군복무 기간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고,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먼 나라로 가야했지만 자세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