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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박에 한국사 : 근대편 - 지금 유용한, 쉽게 맥을 잡는 ㅣ 단박에 한국사
심용환 지음, 방상호 그림 / 북플랫 / 2024년 4월
평점 :
단박에 한국사(근대편)
2026. 4. 18(토)
학부에서 교양과목으로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을 샀다. 읽었다고 쓰지는 못한다. 2002년 전국역사모임에서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1, 2』, 2006년 김육훈이 지은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읽었다. 기억력을 시험해 보려는 의도로 몇 년 전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치렀다. 21세기에 역사학자가 아닌 교사들에 의해 한국사가 출간된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간은 흘렀고 2024년에 개정판 『단박에 한국사』가 근대편과 현대편으로 나누어 출간돼 통사를 읽는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으니 내가 읽는 교양 수준의 한국사는 소홀하게 다루거나 새롭게 역사에 반영된 부분은 무엇인가 알아보는 정도에 그친다. 20~30여 개 라벨을 붙여 두고 텍스트로 옮겨본다.
『단박에 한국사』는 첫째, 한국사만 다루지 않고 같은 시기 동아시아, 세계사를 함께 다루고 있어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을 넓게 해줄 수 있다. 둘째, 이와 연관된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제국의 폐허에서』, 『포스트 위』, 『암흑의 대륙』, 『값진 왜란과 국민 전쟁』, 『고종시 대의 재조명』, 『뜻으로 본 한국 역사』,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 시리즈』 등이 떠올라 책읽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셋째,
<근대편>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저자의 역사 인식을 살펴본다.
일본이 근대국가가 되는 과정에서 참근교대제도(산킨고타이제도) 덕분에 전국적으로 교통로가 발달하고 상업, 운송업, 수공업 발전을 촉진했으며 조닌(상인) 계층이 부를 축적, 가부키, 우키요에 등 독특한 조닌 문화가 발달하였다. 이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우키요에』에서 자세하게 다룬다.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 개혁이 일어나 일본 역사가 극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조슈번은 오늘날 야마구치현으로 요시다 쇼인,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메이지 지사들을 길러낸 곳으로 무역에 강점이 있었다. 사쓰마번은 가고시마현으로 사이고 다카모리의 고향으로 논을 사탕수수 재배지로 전환하는 농업개혁, 류큐를 활용한 중국무역, 나가사키를 통한 서양 무기를 수입한 곳이다.
갑오개혁이 여성 차별을 제도적으로 개혁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오래전부터 변화가 있었다. 동학, 천주교, 개신교에서 남녀를 동등하게 가르쳤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여학교 설립 운동은 한국 여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다.
“고종은 권력 유지에 급급할 뿐 비전이 없는 지도자였고, 수많은 백성은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기는커녕 황국협회 편을 드는 등 독립협회의 치열한 노력은 허망하리만큼 폭력적으로 무너져”(p.144)다고 기술하는 대목은 『고종시 대의 재조명』에서 고종의 역할에 긍정적(의병 활동 지원, 한양 도시의 개발, 도서관 설치, 정보기관 운영 등) 인 면이 있었음을 기술하는 것과 배치된다.
“일본의 승리에 열광한 아시아”(p.153)에서 기술한 마오쩌둥, 자와할랄 네루, 호찌민 등은 황인종이 백인종을 이겼다, 아시아가 유럽을 이겼다고 감격해했다는 등은 『제국의 폐허에서』 자세히 다룬다.
애국계몽운동과 의병 항쟁은 정신적인 부분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애국계몽운동은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았다. 하버트 스펜서와 토머스 헉슬리의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 침략을 문병화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한 것으로 중국에서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는 염복이 『천연론』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하였다. 『천연론』을 읽었어도 애국계몽운동과 연결하지는 못했었다.
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우리 역사에서 여성들이 최초로 등장한 사건으로 평가한다. 여성들이 주도하는 민족운동, 한국에서 여성사의 시작은 남녀 차별과 참정권 문제가 아닌 구국운동이었다.
포로 감시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징용을 갔던 ‘양칠성’은 일본 패전 후 귀국하지 않고 조선 노동자로 네덜란드와 싸워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여하였다는 기록을 만난다.
초기 독립운동사에서 이상설을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한다.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단을 세우고, 3.1운동 당시 활약하였고, 파리강화회의에 헤이그 특사로 활동, 간도에 서전서숙이라는 학교 설립, 대한광복군정부의 정통령을 역임하였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한·중·일이 연합하여 백인들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시대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국보다 앞선 근대국가인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은 세계의 대세를 따르는 기회주의적 행동이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가 무너졌다는 것이 안중근의 지론이었다.
일본 낭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흑룡회를 조직하고 일본당국의 첩보원이나, 만주에서 마적으로 활동하였다. 이홍장을 만나 남중국 분할을 제안하기도 했다. 일진화 결성을 지원하여 조선 병합을 후원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내전이 발생하자 일본은 수만의 병력을 시베리아에 파병하였는데, 흑룡회는 이때도 일본군과 함께 공작 활동을 벌였다. 이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관한 일들은 다른 책을 찾아봐야 실체와 규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되던 차에 일본으로 망명했던 동학의 지도자 손병희가 일본의 지원을 받아”(p.194) 동학 부흥 운동에 나섰다. 후에 손병희는 일본에 대한 기대를 접고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나서 얼마 후인 1905년 12월 1일 천도교를 창도한다. 동학농민운동에서 독립운동의 중심 세력 천도교로 급격한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폐하가 책임을 지고 황위를 양도하여 일본에 사과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라며 고종의 퇴위를 강요한 송병준. 이완용과 송병준, 흑룡회와 일진회는 나라가 어떻게 되건 이들에게 명분은 명분일 뿐 결국 중요한 것은 출세요, 성공이었다. 이처럼 기회주의적 성실함 앞에서 조선은 멸망하고 만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이재명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전쟁 행위는 인류의 보편적 인권에 어긋난다는 지적에 대하여, 일부 국회의원들이 이스라엘에 사과하라고 했다는 뉴스를 본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기회주의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은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있구나 싶다. 김형준 의원의 ‘이스라엘 대사 초치 요구’를 요구한 사례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러일전쟁을 반대하고 조선의 식민지화를 비판한 기복교 민족주의자다. 무교회주의자로 김교신, 함석헌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에서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중궁의 혁명가 쑨원은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에서 주장된 토지 단일 과세론을 통해 토지의 균등 분배 등에 영향을 받았다.
후세 다쓰지(1880~1953)는 양심적 행동가였다. 그는 천황 암살의 모의한 혐의로 대역죄 심판을 받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변호하였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나주 지역 500여만 평의 토지를 약탈한 사건에서도 조선 농민의 편에서 소송을 담당했고, 조선의 형평운동(1923~1935)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묵자의 영향을 받았으며 사회주의자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했다. 세종시 부강면에 <가네코 후미코 다실>이 있다.
1910년대 무단통치는 헌병경찰이 식민지를 운영하였으며 치안 관리뿐만 아니라, 세금 징수, 민사소송 업무, 마을 미풍양속까지 관여했다. 즉결 처분권, 태형 같은 권한, 영장 없이 사람 체포, 최대 4개월간 구금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고 하루 80대까지 태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
문화통치는 적극적인 친일파 양성을 꾀한 기만적 통치였다. 은사금을 하사하고 작위를 주었다. 1920년대의 문화통치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민족대표가 33인이 된 까닭은 숫자를 늘려서 대표성을 확보하고자 무명의 종교인들이 뭉친 것이다.(P.260) 3.1운동은 3월 초순에 격렬했으며 다시 3월 20일부터 4월 10일까지가 절정이었다. 5월 말까지 운동은 계속되었고 이후에도 몇달 간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다.(P.261) 3.1만세 운동은 조선과 서간도, 북간도, 미주 지역, 멕시코와 하와이, 연해주에서도 일어났다.
대조선국민군단을 결성하는 등 미주 지역에서 무장투쟁 단체를 이끌던 박용만(1988~1928)은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선임되었지만 참여하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이승만 세력에게 엄청난 테러를 당했기 때문이다.(P.271) 임시정부에서 “왜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임되었을까? 외교독립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한국인 최초의 박사학위자, 윌슨의 제자였기 때문(P.273)이다.
소련의 지도자 레닌이 모스크바에서 극동인민대표회의를 열었는데, 150명의 참가 인원 중 한인이 52명이나 됐다. 이러한 노력으로 소련은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했다.(P.275)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이 만주에 내렸던 봉금령을 1875년 해제하였다. 연해주를 빼앗긴 후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내린 조치였다. 봉금령 해제 이후 조선인들은 본격적으로 간도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신민부 자금 모집에서 흥미로운 점은 김병연 사건이다. 김병연은 밀양의 거부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김태진에게 만주에 땅을 구입하자고 꼬드겨서 3,000원을 받아낸 후 신민부에 보냈다. 1927년의 일인데 신민부 역사상 단일 자금으로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P.302)
강제 동원은 합법적인 탈을 쓰고 진행되었다. 국가총동원법이 포고되었고 해외 징용에 대해서는 좋은 조건이 제시되었다. 높은 임금과 좋은 근무 환경 등이 선전되었다. 일종의 취업 사기였던 셈이다. 일단 동원되고 나면 돌아오기는 불가능했다. 강제성이 분명했다. 징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뱃삯, 배 안에서 먹은 식사 대금, 지급된 옷값 등 소요 비용을 선대금이라는 명목으로 빚을 지웠다. 해외로 강제 동원된 인원은 200여만 명으로 추정된다. 강제 동원으로 누가 이득을 보았는가? 일제의 입장에서는 전쟁 수행을 위한 치밀한 정책의 일환이었고, 정부와 군을 비롯한 모든 행정력이 총동원된 사업이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대규모의 노동력은 결국 일본 재벌의 사업을 확장하는 데 쓰였다. 미쓰비시, 마쓰이, 스미토모, 후지코시, 일본제철, 도와홀딩스, 북해도 탄광 기선(북해도에 3만 3천 명을 동원하였다. 전쟁은 조선인에게는 끔찍한 고통을 안겼으나 일본 재벌에게는 엄청남 돈을 벌어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