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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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2025. 4. 20()

 

 

나에게 책이란 무엇이라도 배울 것이 있어야 하고, 호기심을 해결하며 나에게 축적되어야 한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책들은 이런 목적과 용도에 알맞아 사서 읽는다. 2024년 가을에 출간한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 2를 살 때, 도올 선생도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었다(만해 한용운의 종교적, 사상적 가치와 위치)는 고백을 들었으니,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 2가 늦게 나온 까닭으로 한용운을 알아야만 하는 필연성을 감지하지 못했고, 우리 시대 담론의 그물에서 벗어나 있는 것“(p.29) 때문이다.

 

1권은 15개 장으로 엮었다. 동심의 세계에 승무로부터 일제강점기 한국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조계종을 태동시킨 민족 불교의 혈맥으로서 선학원의 위치와 역할과 프라이드를 명진 스님의 말로 풀어준다. 개왕절개, 아버지의 의료 활동, 소꿉친구의 피아노 연주 등도 공간에 뿌려 놓는다.

일본불교는 종파가 다양하나 한국불교는 통불교로 아름다운, 종교의 본질적인 모습을 간직한 이유를 설명한다. 조선의 사찰은 절제, 담박하고 언어나 교리의 폭력성이 없이 적인 순수성을 보존하고 있다. 더구나 조선조 시기에 승려가 도성을 출입하지 못하는 등 탄압과 비하 속에서 기름끼와 허세를 날려 버렸다. 3.1만세 독립 의거를 거치며 자주의 변혁 의지가 성장하였고, 그 결실로 선학원(몰랐기에 홈페이지를 살펴봤다)이 생겨났다. “선학원은 왜색에 굴복하지 않은 20세기 우리 민족사 불교 정신의 혈맥으로 만해가 10여 년간 주석하면서 민립대학 건립 운동, 물산장려운동 지원, 6.10 만세 운동의 주도적 활동, 신간회 조직, 광주학생운동 지원, 청년 비밀 결사 만당의 영수, 조선불교청년회 조직 등 선학원을 바탕으로 엄청남 민족적 과제를 헤쳐 나갔다.”(p.34)

 

예술은 주관적이다. 주관적이란 것은 시간 속에서 느낀다는 것이다. 시간이란 경과의 길이가 아니라 내 삶의 느낌의 충동이 예술 작품이 발하는 느낌의 충동과 만나 폭발하는 순간이라고 보는 것이 도올의 관점이다.

 

고려대 조지훈은 동학 연구는 현대 한국 사상연구의 중요한 과제로 본다. “동학이 출현하는 사회적사상적 분위기를 세종조 시기의 혁명적 사상 흐름에 비교하였으며, 3.1운동을 ”3.1혁명으로 규정하고 그 혁명의 주체가 기독교가 아니라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임을 밝히고 있다.”(p. 99) 특히 조지훈과 고려대 국문과 학생이 주동이 돼 1973년에 <한용운 전집> 6권을 발간하였으나 편집, 간행 위원에 이름이 빠진 것을 역사 왜곡이라 분개한다.

 

만해 한용운의 한학의 범위가 퇴계와 율곡을 뛰어넘는다는 평가에 수긍한다.(p.142) 만해의 정신 세계를 한학과 불교의 융합으로 보고 세 가지 품성을 지사(애국), 碩德(불학), 巨擘(문단)으로 도식화하고 있다.(p.153) 만해에게 <서상기>는 인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계속 떠오르는 질문을 제공하는 회의의 심연 같은 그것이 틀림없다고 하니 번역된 <서상기>를 읽을 일이다. 만해의 학문적 범위를 논하며 염복의 <천연론>을 언급할 때 읽어본 책이라 공감한다.

공자가 자로에게 한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를 다시 마주한다.

만해가 1910128일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했다.

일본은 임란중 의병의 활약 중에서 가장 용맹스럽고 전투력이 출중한 부대가 승병조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11년 사찰령을 발표해 조선의 불교를 조선총독부 행정체계 내로 편입시켜 관료조직화 하였다. 대중공의제도를 주지전횡제도로 바꾸었다. 총독은 본사의 주지들은 모두 대처승으로 임명하였다. 만해는 제도로서의 대처를 주장한 적이 없다. 불교의 혁신에 관해 발언한 것일 뿐이다. 만해 주장의 핵심은 승려 교육, 즉 스님이라면 불교학 공부는 물론이고 보통학에 달통해야 한다고 여겼다. 조선 승려의 도성 출입을 가하게 하는 총독부의 조치는 도심 포교를 가능하게 하였다.

 

첨가하였다. 만해는 태화관 연설후 민족대표들에게 옥중투쟁 3대원칙(변호사를 대지 말자. 서식을 취하지 말자. 보석을요구하지 말자) 제시했고 이 원칙을 지켰다.

 

최초의 우리말 신약성서 완역본은 1887년에 만주에서 간행한 <예수셩교젼셔>라 한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은 타고르의<키탄잘리>와 무관하고 차원이 다르다. “만해는 0.0000001%도 타고르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p.306) p.311근대성의 완성이란 문단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4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하였다. “세계 헌법사에서 민주공화제라는 단어는 우리 임정 헌장이 제일 빠르다.”(p.312) ‘자유자재(自由自在)’가에서 썼던 말로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의 경지라는 의미다.

 

님의 침묵에서 첫 키쓰,”3.1만세혁명이라는 민족사적 사건! 만해에게는 진정한 깨달음을 안겨준 민중의 각성이었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최초의 신체시라는 것은 잘못된 평가다. 백낙청의 평가에 의하면 한용운은 한국 최초의 근대시인이요 3.1운동이 낳은 최대의 시민시인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옛 한국 마지막의 위대한 전통시인이었다.

 

이제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2에 수록된 88편의 만해 시를 감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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