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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 - 침묵과 빈자리에서 만난 배움의 기록
고병권 지음 / 돌베개 / 2018년 12월
평점 :
묵묵
2025. 3. 25(화)
야학이란 단어를 들을 때 내 인식은 4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서울에서 운영하는 노들야학 철학 교사의 글을 현재 시점에서 읽는다는 것은 두 가지 지점에서 일상을 벗어난 일이다. 하나는 21세기 지식과 정보가 자본과 함께 집적된 서울에서 야학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고, 야학에서 기초적인 문해 교육이 아니고, 양보해서 인문학 강의도 아니고 철학을 가르친다는 점도 일반 상식 범위 밖에 있다. 철학을 가르치는 저자 고병권이 가진 관점의 폭과 깊이를 알아가며 내가 아는 세상은 구멍이 숭숭 난 그물이지 싶다. 다만,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을 읽으며 느꼈던 것과 프롤로그에서 과거에 “인문학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소한 장미 한 다발은 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문장에서 저자와 내가 만나는 지점이 있어 위안을 얻는다.
저자는 학교란 먹고 사는 삶의 현장에서 한 발 떨어져 있으나 야학은 삶의 현장, 생산 현장에 자리 잡은 학교라고 본다. 복지시설에 위문품을 전달하듯이 인문학자가 들고 오는 지식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별 도움이 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위화감을 조성한다고 인식한다. 말의 한계라는 지점의 시각은 “옳은 말은 그저 옳은 말일 뿐이다. 그것이 내 것이 되려면 내 안에서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라는 문장으로 풀어놓았다.
역사유물론의 핵심은 “역사를 관통하는 영원한 법칙 따위는 없으며, 각각의 사회형태는 고유한 법칙을 갖는다”(p.55)는 점이다. 이는 역사 연구에 소홀하지 말야야 한다는 의미다. 레닌은 『자본』에 대해 “통상적인 경제서적과 달리 노동자 계급에서 자본가계급을 비판한 유일한 경제서적이라고 말한다(p.55) 이제야 이런 이론들이 현실 세계와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만, 저자는 사유하는 인간이 고통받는 인간과 함께했을 때 심오한 ‘눈’, ‘사상’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2장은 <개가 짖지 않는 밤>이라 제목을 두고 사회적 모순들을 비판한다.
∙두 개의 눈. 보여지는 눈과 보는 눈. 타자의 시선의 대상이 된 눈과 그 타자의 시선을 보는 눈. 장애인의 한 쪽 눈은 위선을 꿰뚫어 본다.
∙저자는 기초생활수급권자의 주제에 ‘감히’ 해외여행을 한 해에 두 번씩이나 다녀온 사람들을 존경한다. 한편으로 그 억척스러운 생활력을 존경하고, 사회적 권리를 사회적 채무로 바꾸려는 권력자들의 음흉한 음모에 굴하지 않는 그 정신을 존경한다. 도덕이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맞아야 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들이 아니라, 자기들의 탐욕은 멈추지 않으면서도, 감히 주제넘게 두 번이나 해외여행을 했다고 가난한 사람들 목줄을 흔드는 사람들과 그들의 정부다.
∙삶이 막연할 때는 기본적이고 절실한 것을 움켜쥐어야 한다. 당장 시급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 잘 챙겨 먹고 따뜻하게 입고 다녀야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좀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여력이 되거든 애인들을 돌봐야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 만든 선감학원은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p. 93) 8세에서 18세까지의 아이들을 감화시킨다는 목적으로 만든 시설이다. 놀랍게도 1982년까지 운영되었다. 정부 인식은 일제 식민주의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제레미 벤담이 구상한 판옵티콘이 널리 알려졌으나 그에 따르면 ‘인류의 쓰레기들’은 민간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저자는 한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소수자들에게 인문학은 언어를 줄 수 있다고, 그래서 그들이 정치적 존재가 되는데 일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정치적 존재로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그들은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들을 수 있는가’이다.
∙현행법령은 동물 사체(반려견 등)는 일반 쓰레기라고 한다니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려야 하는가? 나는 모르겠다.
∙내 고통은 타인의 것이 될 수 없다. 고통이란 너무나 고유한 것이어서 누구도 그 고통을 가져갈 수 없다.
∙유대인 난민이 밀려왔을 때, 독일이 강요했을 때, 저항했던 국가는 덴마크와 불가리아 뿐이다. 이는 마크 마조워의 『암흑의 대륙』과 토니 주트가 지은 『포스트 위 1945~2005』에서 언급되어 있다.
∙비워둠은 삭제함이 아니라 마련함이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그를 위한 자리, 그가 깃들어 우리에게 말 건넬 그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장애에 관한 두 차원의 생각은 큰 차이가 있다. 장애를 기술만 충분하다면 극복할 수 있는 기능 부전의 문제, 마치 의료기술로 치료할 수 있는 질병 같은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는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장애를 만들어 내는 것, 장애해방을 위해 극복되어야 하는 것은 장애를 생산하고 차별하는 사회와 문화로 보는 시각이 있어야 한다.
∙디오게네스가 말하는 ‘장애인이란 배낭을 메지 않은 사람’이다에서 ‘배낭’은 종속되지 않고 자율적인 삶, 보호장치로서 울타리 바깥에서의 삶,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을 돌보는 삶을 상징한다. 무엇보다 주권자로서 투쟁할 수 없는 삶을 의미한다.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를 비교하는 관점을 배운다.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을 풀러 줄 영웅이 올 것이란 예언을 실현한 자는 헤라클레스였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마음속에 맹목적인 희망을 심어놓았다. 희망이란 미래를 보면서 갖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볼 수 없는 ‘맹목’에서 나온다.
『묵묵』에서 저자 고병권의 삶을 본다. 실천적 지식인의 삶이다.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를 검색하게 한다. 소개글을 보니 사야 할 듯하다. “고병권은 책과 세상을 리뷰하지만, 그가 관찰자나 평론가의 거리감을 유지하고 그것들을 바라보고 분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글에서 낯설지만 가슴 두근거리는 '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거리'의 낯섦은 고병권이 삶에 대한 긍정과 사회의 불합리에 대한 투쟁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극복할 것을 제안하고 있기에 가지는 낯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