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사람의 길 - 下 - 맹자 한글역주 특별보급판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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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사람의 길 下
2025.3.1. 토요일
7,000자로 길다
이루장구 하
아래의 글은 모두 도올의 주해인 沃案을 바탕으로 정리한다.
맹자의 논의의 핵심은 인간의 ‘본성’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인 그 무엇이라는 신념을 드러낸다. 성선설이 나올 수 있는 바탕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사단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도올은 조선에서 율곡이 맹자의 대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본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중”과 “재”이다. 그것은 도덕과 재능이다. 두 가지를 구비하면 이 세상에 태어난 일인 몫을 하고도 남는다. 도덕과 재능을 구비한 자를 “현”이라 하고 그렇지 못한 자를 “불초不肖”라한다. 사극에서 들어 보는 불초소생이란 말의 불초다. 현과 불초의 양극화를 막으려면 가정교육이 중요하다. 방에 향기가 스며드는 것과 같은 가정에서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己所不欲 勿施於人”이야말로 진실한 도덕이다. 자공이 종신토록 행할만한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에 공자가 ‘서恕’라고 답한다. 서는 기소불욕 물시어인이다.
도올의 관점에서 서구철학의 최대 문제점은 아직도 상식 내에 신화를 수용한다는 것이다. ‘赤子之心’, 마음이 어린애 같이 순결한 인간이어야 대인이다. 진리에 도달하는 길은 자득이어야 한다. 진리는 반드시 스스로 자기의 체험 속에서 깨우치는 것이다.
박학은 설약說約(주제파악)을 지향해야 하고 설약은 박학을 지향해야 한다. 끊임없이 독서를 해야 하지만 종국에는 그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료하게, 단순하게, 간결하게, 요약하여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박학이 요약을 얻지 못하면 반드시 지식의 질병에 빠지게 된다. 내가 책을 읽을 때 하나의 문제의식을 갖고 수미일관해야 한다.
(기독교를 비롯한 일신교가) 불변과 영원이 불변의 가치인 양 선전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불안한 심리를 예속시킨다. 공자는 흐르는 물의 아름다움과 같이 우리의 삶이 흐르고 변화하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수용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제행무상의 개념도 다르지 않다. 무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이 금수와 다르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근소한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금수에 비해 인의의 도덕성을 살리고 보존한다. 인의를 통해서, 인의와 더불어, 인의 속에서 행동할 뿐이지 인의를 행동의 목적이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인(수평)하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요, 예(수직)가 있다는 것은 사람을 공경한다는 것이다.
군자에게 종신의 우환은 있을 수 있으나 하루아침의 걱정은 있을 수 없다. 하루아침의 걱정거리 같은 것은 군자는 걱정거리로 생각하지 아니한다.
중국 사람들은 ‘易地思之’란 말은 쓰지 않는다. 보통 “易地(則)皆然”이라고만 말한다. 받아들일만 하다.
불효의 다섯 가지는 부모의 봉양을 돌보지 않는 것, 놀음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음주에만 빠지는 것, 돈버는 데만 미쳐 자기 부인과 자식만 아끼는 것, 이 세 가지 탓에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것다. 耳目의 쾌락만 추구하거나, 쌈박질만 해대면서 부모에게 불명예를 안기거나 부모를 위태롭게 해드리는 것이다.
責善이란 붕우지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도리이며 부자지간에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졸저 <별일 없어도 읽습니다>에서 칼럼으로 수록함)
신을 인간으로부터 객화시키는 모든 사상은 사이비일 뿐이다.(p. 504)
동방인들은 철학을 어떤 특정한 진리 추구의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고 문학이나 역사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문사철을 겸비해야만 사상이 이루어진다고 여겼다. 논리를 논리로써만 펼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은유나 비유를 써서 표현하는 것이 휠씬 더 가슴을 파고드는 진실이 강렬하다고 생각했다.
만장장구 上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역사상 가장 음흉하고 잔혹한 인물이었다. 장인, 처형, 매부, 아들, 둘째 부인을 살해했다. “6명의 황제가 난립한 시기에 다신론적 사태를 1인의 황제체제 즉 유일신론적 사태로 전환시키기 위해 기독교라는 유일신종교를 활용했을 뿐이다.”(p.515) 읽어주길 기다리는 <중간세계사 비잔티움과 오스만제국>에서 언급하는지 지켜 보자.
하늘이 보는 것은 민중이 보는 것을 통하여 보고, 하늘이 듣는 것은 민중이 듣는 것을 통하여 듣는다. “오늘날 기독교가 조선땅에서 설치는 것도 맹자 덕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역으로 조선의 건강한 기독교인이라면 맹자가 말하는 민중 즉 인간의 보편성을 하늘의 의지로 수용하는 신앙인이어야만 한다.”(p.537)
만장장구 下
유하혜의 생각,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네가 내 곁에서 웃통을 벗거나 전 나체로 있든 그것은 너의 무례일 뿐 그것이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으랴!”(p.560) 공자가 스스로의 학문 세계를 스스로 자평하여 “술이부작”이라 말했다. 공감하기에 나의 첫 책 <독서로 말하라>를 출간하고 경인 방송 인터뷰에서 나도 ‘술이부작’이라는 공자를 따랐다.
서양 문명의 장처는 철학사에 있지 아니 하고, 과학사에 있다. 철학은 과학을 뒤쫓아왔을 뿐이다. 철학은 아직도 우주와 인간의 언어에 관하여 신화적 단계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p.565)라는 문장은 나에게 더 공부하라는 문장으로 읽힌다.
맹자에게 벗이란 나이, 신분의 귀천, 연줄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내 시간과 정력을 공짜로 빼먹으려 하는가 ! 지식이나 도덕이 공짜일 수 없다. 지식인을 대접한다는 것은 그 지식인이 정당한 사회적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물리적 여건을 만들어 주는 구체성이 있어야 한다.(p. 574) 모든 강연자가 공감하는 바다.
“사람과 교제하는 데 있어서는 공손한 것이 제일이다.”
맹자의 “所不召之臣”의 신념, 천하에 다스리고자 하는 군주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신하를 곁에 두어야 한다.
친구 사귀기와 독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역사에서 성현들을 추론하면서 벗 삼아라. 그들의 시를 읊고 책을 읽어라. 그래야 인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인간이 산 시대를 논구해야만 한다. “독기서부지기인가호 讀其書不知其人可乎” 그 책을 읽고도 그 사람을 모른데서야 말이 되는가.
성상근야 습상원야 性相近也, 習相遠也. 태어난 그대로의 성은 모든 사람이 서로 가깝다. 그러나 후천적 학습에 의하여 서로 멀어지게 된다.
고자장구 上
식색食色 그 자체로서 우리는 선악을 논할 수 없다. 식색을 본능이라는 말로 비하시켜서도 아니 된다. 우리의 모든 문화적 활동의 총체가 식색의 문제일 수 있다. 종교, 예술, 정치, 산업, 그 모든 것이 식색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p.615)
측은지심은 인의 발로이며, 수오지심은 의의 발로이며, 공경지심(사양지심)은 예의 발로이며, 시비지심은 지의 발로이다. 인의예지라는 것은 밖으로부터 나에게 덮어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도올은 인간의 염색체 배열 속에 인의예지라는 유전자가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하니 쉽게 알아볼 수 있다.
6a-7은 沃案을 여러 번 읽어도 (‘주희, 율곡, 퇴계가 말하는 理가 얼마나 유교의 본의와 동떨어진 것인가로 보여주는 위대한 로기온자료다’라는) 소화하기 쉽지 않다.
<牛山의 예>는 성선설은 명료하게 설파한 로기온자료다. 몸에 고유한 선한 마음을 방치하고 내버려두는 것은 마치 도끼와 자귀로 나무를 계속 베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매일매일 나무를 벌채하여 없애버리듯이 양심을 잘라 내버리니 그 아름다운 마음이 유지될 수 있을까보냐?
“조심操心‘이야말로 맹자 心學의 키워드이며 ”求其放心’의 다른 표현이다.(p.631) 학문의 길이란 별것이 아니다. 그 놓아버린 마음放心을 되찾아오는 것일 뿐이다. 쥐불놀이에서 원심력이 욕망이고 구심력이 도덕이다. 이 양자의 밸런스가 유지될 때 이성이 유지된다. 맹자의 생각에 인은 인간의 내면적 주체성에, 의는 인간의 사회적 행동과 관련된다는 생각이 있다.
고자장구 下
인간이라면 누구나 요순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도덕적 선의 주체성을 인간보편에게서 확립하려는 맹자의 노력이다. 율곡이 맹자에 정통했음을 절감할 수 있는 것은 <격몽요결>의 ‘입지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을 파악한다는 것은 양가적 사태를 전관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랑과 증오, 원망과 사모,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은 모두 같은 차원의 동시적 포섭적 가치일 뿐이다. 이러한 감정의 미묘한 표현이 일상적 삶에서 사라지게 되면 인간은 메마르게 되며 인간관계 또한 논리적일지는 모르나 각박하고 냉혹하게 되며 중층적 깊이를 상실한다.”(p.667)
“맹자라는 캐릭터 이외의 모든 인물을 모두 맹자를 빛내기 위한 부속적인 ~ 이러한 오류의 대표적인 주석이 주희의 집주이며, 맹자집주는 사서 중에서도 가장 졸렬한 작품”(p.671)이라는 품평에서 도올 김용옥의 학문적 자신감이 뿜어져 나온다. 이런 맛이 도올의 책을 선택하게 하는 매력이다.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다.
관중의 규구회맹 – 샘을 폐쇄하거나 물줄기를 전용하지 말 것, 인도주의적인 곡물의 매입을 막지 말 것, 일단 세운 태자를 갈아치우지 말 것, 첩으로써 정처를 대신하지 말 것, 부인들로 하여금 국사에 관여케 하지 말 것(2025 탄핵에서 ‘연’일 듯하다)
하늘이 사람들에게 거대한 역사의 임무를 내려주시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에 더없는 고통을 안겨주시고, 그 육신의 근골을 더없이 수고롭게 하시며, 그 몸뚱이를 배고프게 하시며, 그 육신의 삶을 공핍(궁급)하게 하신다(p.709) 대부분의 자기계발서에서 인용하는 글이다.
p.712를 읽으며(고자장구를 주해하는 과정에서 도올이 육체적 고통을 이겨왔음) 그 고통 덕분에 <맹자>를 쉽게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도올의 고자 주해는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어느 인간도 감행하지 못했던 새로운 밴쳐의 역정이었다. 현재의 주석가는 물론 조선왕조의 그 어느 누구도 <맹자>를 나만큼 이해하지 못했다”(p.713)라는 문장에 경의를 보낸다.
진심장구 上
생사를 초월하여 나의 몸을 닦음, 즉 수신에 전념함으로써 나의 몸속에서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입명 立命’의 길이다. 명은 인간이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완벽한 일방적인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불운한 죽음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마지막 순간까지 정의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맹자는 인의예지 사단을 말하지만, 인간의 감정 중에서 의와 관련된 ‘수치羞恥’를 특별히 중시한다.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정의로움과 관련된 수치의 감각은 그의 도덕성을 명백히 드러낸다. 치는 단순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수오羞惡’즉 악을 증오하는 사회적 정의감과 관련 있다. 수치가 외면적인 사회정의감일 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자기향상의 노력의 핵심을 이루는 실존의 동력이다.
무항산이면 무항심인 것은 범용한 민중이지만, 진정한 지식인은 무항산이라도 유항심하여야 한다. 경험상 무항산은 노년이 아닐지라도 무위고無爲苦를 수반한다. 성취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이는 크나큰 고통이다.
사람이 덕행이 뛰어나거나, 지혜가 출중하거나, 지모가 탁월하거나 하는 사람은 거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항상 삶의 진질疢疾(열병진, 환난이나 고난, 재난) 속에 놓여 있어 단련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의 글이 沃案에 자주 보인다. 서얼의 허통許通(벼슬길을 터줌)을 율곡에게 제안한 사람은 율곡의 큰누님 매창梅窓이었다.(p.739) 진심장구에서 인간의 고뇌, 고난, 재난을 바라보는 긍정적 시각, 소외된 계층의 인간을 품어주는 따사로운 맹자의 시각을 본다.
‘학기學記’에 나온 ‘학불엽등學不躐等(밟을 엽)’은 배움이란 단계를 건너뛰고 다음 계단을 오를 수 없다는 것이다.
순과 도척이 갈리는 것은 利를 탐하느냐 善을 실천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어떠한 일은 한다는 것은 비유컨대 우물을 파는 것과도 같다. 지하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중단해버리는 것은 우물 파기를 처음부터 포기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나라 법체에 ‘정상참작’의 정상이란 “情狀”이라고 쓰는데 인간의 감정을 고려한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다. 이는 유교적 전통에서 계승된 것이다.
칸트의 철학이 물리학을 골격으로 하여 ‘드라이dry’ 할 수밖에 없으나 맹자의 철학은 구체적 삶의 체험 속에서 이야기한다.(p.774)
배우는 사람은 자기를 무화無化시켜야만 한다. 겸허하게 자기를 비우고 낮추어야 한다. 신분을 믿고 현명함을 믿고, 나이를 믿고, 훈로勳勞가 있다는 것을 믿고, 연고를 믿고 물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꼭 해야 할 일을 먼저 실천하는 것이다. 本末과 輕重을 가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대인이란 결국 이런 경중을 가릴 줄 아는 時中의 대가들이다.
진심장구 下
민이 가장 귀한 것이요,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사직이며 가장 가벼운 존재가 군(맥락상 제후국의 군주다)이다. 백성의 마음을 얻는 자가 천자이며 천자의 신임을 얻는 자가 제후가 되는 것이다. 제후의 신임을 얻은 자가 대부가 되는 것이다. 제후가 무도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한다면 제후는 갈아치워야 한다. 그러나 민은 갈아치울 수가 없다. 2025년 겨울 대한민국에서민은 깨어있는 민과 어리석은 민으로 나뉘었다. 수출을 몇백억 못하는 것보다 민이 나뉜 것이 더 큰 문제다. 윤부부의 죄는 형법으로 단죄하기에 너무 크다. 이를 담은 ‘진심장구 하’는 맹자에서 인용 빈도가 높은 장이고 맹자의 래디컬한 사상이 드러나 역대 군주들로부터 탄압받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오늘 민주사회의 지도자들도 깨달아야 한다는 도올의 열망을 본다.
선비는 “남의 말”을 해서는 안된다. 자기 반성하기도 바쁜 마당에 “남의 말”을 해서 자신의 정결한 실존을 더럽히는가! 타인의 평판에 이끌리지 않고 자기자신이 확신하는 정의로운 길을 걸어가야 한다.
맹자는 한 나라의 제후가 토지, 인민, 정사를 보배로 삼으라 한다. 오늘날 주권의 개념이 군이 아니라 政事로 돼 있다.
인간으로서 큰 병통 중의 하나는 자기 밭은 내버려두고 남의 밭에 김매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엄청 많으면서 정작 자기가 걸머져야 할 책임은 소홀히 하는 짓이다.
生而知之, 學而知之, 困而知之 하든, 결국 안다고 하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본문에 쓰인 Logion은 ‘어록’이다.
포폄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P.S.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을 지켜보고, 민초로 살아갈지라도 맹자의 가르침에 견주어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 도올 김용옥이 주해한 『맹자 사람의 길 上下』(본문 851 쪽 분량임)을 읽었다. 대부분이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말이고 내 감정과 지식의 극히 일부만 보탰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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