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본사 - 오리엔트-중동의 눈으로 본 1만 2,000년 인류사
이희수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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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류 대번영을 이끈 이슬람 문명의 역사

 

첫째, 세계사를 오리엔트-중동의 눈으로 보기는 서구중심 세계사와 비교한다.

이슬람의 황금기 : 압바스(750~1258)

압바스 제국은 500년 이상 이슬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중동-서아시아 역사의 주도권이 페르시아인에서 아랍인으로 넘어갔다. 압바스 제국은 아랍인 중심에서 벗어나 피정복지의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고 차별과 배제를 최소화하면서 글로벌 국가로 거듭났다. 이슬람이 세계종교로 확산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학문, 과학, 예술의 절정기를 이룬 무대가 압바스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였다. 1258년 바그다드는 몽골의 침략으로 초토화되면서 500년 압바스 제국의 수명을 다했다. 반세기가 지나서 오스만제국에 의해 재통일되어 아랍인에서 튀르크인으로 이슬람 세계의 지배자가 바뀐다.

 

이슬람은 예수의 신격을 부정하고, 철저한 일원론적 유일신으로 알라를 믿는 종교다. 이슬람에서는 아담에서 아브라함, 모세, 예수로 이어지는, 구약에 기록된 많은 선지자를 시대적 임무를 띤 훌륭한 인간 예언자로 인정하고 추앙한다. 무함마드는 예수 이후 신이 보낸 마지막 인간 예언자로 여긴다.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떤 중재자를 두지 않기에 예수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기독교 사상과 근본정신이 다르다. 현세에서 행한 선악의 경중에 따라 신의 심판을 받고 천국의 구원과 지옥의 응징으로 운명이 나뉜다는 내세관과 모든 것은 신이 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예속된다는 정명 사상을 갖고 있다. (p. 325)

 

이슬람 공동체가 무함마드의 동료였던 아부바르크(재위 632~634) 칼리프 이후 30년 만에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제국으로 발돋움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를 서구에서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란 표현을 사용해 빗대곤 하지만, 당시 비잔티움 제국과 페르시아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이슬람의 진출을 오히려 환영했고, 정복 과정에서 이슬람으로의 강제 개종은 실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p. 327) 이슬람의 호전성과 종교의 강압적인 전파를 설명하려는 의도이다. 이슬람은 일단 무력을 사용해 정복한 후에는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살육하거나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기존 토호 세력을 인정하며 그 지역에서 인두세(무슬림은 내지 않는다)를 거두어들이는 지방분권통치를 채택했고, 정복지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개종하면 세금 부담이 줄어드니 시간이 지날수록 개종하는 인구가 늘었다. 5대 칼리프 때에는 세금 감면을 노린 개종을 막기 위해 개종을 금지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꾸란에는 강제 개종을 금하는 구절이 있다. “너희 주님이 원하시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지게 될 터인데, 너희는 어찌하여 사람들을 강요해서 믿음을 갖게 하려는가”(꾸란10:99)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p.333) 이슬람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퍼진 것은 관용과 포용정책을 편 덕분이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적의에 가득 찬 수사는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 전역을 휩쓸던 이슬람 열풍을 막고 기독교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당대 최고의 신학자이자 이슬람 연구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가 정립해 놓은 극도의 이슬람 혐오 사상의 영향이다. (p. 334) 7세기 이슬람이 태동하면서 취한 타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명백히 관용과 포용이다. 적어도 제1차 세계대전까지 중동의 이슬람 사회는 다양한 민족의 각기 다른 종교와 풍습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적 공존에 익숙했다.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허용된 이교도를 딤미(Dhimmi)’, 혹은 아홀 알딤마(ahl al-dhimma, 계약의 백성)라 불렀다. 딤미는 무슬림 국가에 의해 허용되고 보호받는 비무슬림 시민을 일컫는 법률 용어였다.

 

셀주크튀르크(1040~1157)

분열되었던 이슬람 세계는 11세기 셀주크튀르크 왕조에 의해 재통일 되었고, 압바스조의 칼리프로부터 술탄의 칭호를 받고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수호자를 자처했다. 1071년 셀주크조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황제를 포로로 잡고 비잔티움군을 격퇴하였다. 아나톨리아 지역이 이슬람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차 십자군 원정의 빌미가 되었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기사 집단들 간에 통제 불능의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을 타개하고 1054년 동서 교회 분리 이후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간 비잔티움 제국의 동방 교회를 통합하여 로마 가톨릭의 관할 아래 둠으로써 교황권을 확대하는 데 있었다. (p.361) 예루살렘은 638년 무슬림에 의해 장악된 이후 종교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한 번도 순례를 방해받지 않았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상황을 왜곡, 과장하면서 성지 탈환을 호소하며 유럽인들을 부추겼다. 일상적인 폭력과 성적 타락으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칼을 포기할 수 없었던 기사들에게 이교로들 향해 칼을 휘두를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준 것이기도 했다. (p.362) 예루살렘을 정복(1099)한 십자군은 무슬림과 유대인을 학살했고, 2차 전쟁 때부터는 주변국을 약탈하거나 콘스탄티노플을 초토화했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왕국 : 호라즘샤(1077~1231)

호라즘샤는 칭기즈칸이 등장하기 전까지 중앙아시아(아랄해 남쪽부터 오늘날 이란 영토까지)를 제패한 순니 이슬람 왕조다. 호라즘샤-몽골 전쟁에서 패하여 중앙아시아의 튀르크화와 이슬람 전파가 저지되고 이슬람 문화도시들(사마르칸드, 호라산, 헤라트 등)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유럽인들은 몽골에 호라즘샤가 무너지자 안도했다. 그래서인지 몽골의 문화 말살과 살육보다는 칭기즈칸의 통치정책, 몽골군의 군사 전략, 문화 교류를 통한 이류 문명에 대한 기여 등을 연구하여 칭기즈칸을 우상화하고 영웅담을 확대재생산 해왔다. (p.384)

 

인류 최대의 대제국 : 오스만(1299~1923)

오스만제국은 20세기까지 존속한 인류역사상 최대의 제국이다. 페르시아 제국, 로마 제국과 함께 세계 3대 제국이라고 한다. (p.523) 13년 만에 분할된 알렉산더 제국, 반세기 만에 와해한 몽골 제국에 견줄 때 인구, 지배영역, 문화 수준, 세계관 등에서 명실상부한 대제국이다. 소수집단에 자치권 부여, 밀레트 제도(인재 등용 정책), 예니체리 등을 통해 남동부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세 대륙을 석권했다. 흑해, 에게해, 지중해, 페르시아만 바다를 독점했으며, 카스피해와 대서양은 물론 인도양까지 영향을 미쳤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공격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무너졌다.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군대에 함락되기 직전 교황청과 유럽 국가들로부터 군대를 파병하겠다는 제의가 왔다. 하지만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의 악몽에 시달리던 비잔티움 시민들은 콘스탄티누스 11세와는 달리 이교도의 터번에 무릎을 꿇을지언정 로마 가톨릭의 지배를 받아들이지는 않겠다면 유럽의 파병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스스로 패망의 길을 택했다. (p.365) - 인류 본사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진출로 인해 오리엔트 지역을 통한 종래의 동서 교역로가 차단되면서 유럽인들이 동방으로 향하는 새로운 항로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P. 541) 신항로 탐험은 오스만이 유럽에 진출하기 전에 이미 포르투갈인들이 시작한 일이다. 게다가 튀르크인들이 유럽에 진출한 후 동서 교역로는 오히려 활성화되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신항로 탐험에 나선 것은 이탈리아 상인들이 지중해-홍해-인도양 루트를 이용하는 유럽과 동방 간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소외된 이베리아반도의 상인들이 지중해와 홍해를 거치지 않고 대서양으로 나가는 또 다른 항로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둘째, 학교에서 배워 알고 있던 내용에 새로운 지식을 보탠다.

이슬람의 황금기 : 압바스(750~1258)

신라와 고려에 관한 기록이 담긴 수십 권의 필사본이 작성되고 보존된 것도 압바스 제국 때였다.

살라딘의 지도자로서의 덕성은 후일 유럽 기사도의 전형이 되었다. 십자군 전쟁 당시 사자왕리처드가 맨땅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백마 2필을 보내주며 왕의 권위와 체통을 지킬 수 있게 해줄 정도였다. 사후에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 말하고 세상을 떠났다.

 

중앙아시아의 르네상스 : 티무르(1361~1526)

티무르 제국은 정치적으로는 몽골 제국의 후예임을, 종족적으로는 튀르크 민족성을, 문화적으로는 페르시아 문화를,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을 표방한 독특한 통치체제를 갖춘 나라였다. 티무르는 3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정복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정복지에서 공예기술자, 장인을 데려다 사마르칸트를 세계적인 도시로 꾸몄고, 학자와 문인을 우대하여 학문의 발달을 밑받침했다. 천문학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동서 교통로를 통해 유럽과 동아시아로 전달해 주었다. 티무르 왕조 패망 시기에 권력 투쟁에서 밀린 자히르우드딘 바부르는 1526년 인도를 정복하여 무굴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티무르 제국의 문화와 종교, 제도 등은 고스란히 인도의 무굴제국에 계승되었다. 티무르 제국의 과학을 비롯한 학문상의 혁신 중 일부가 원과 명 시대 중국을 거쳐 15세기 조선, 특히 세종대 조선의 르네상스로 연결되었다. 저자는 당시 세계를 주도하던 이슬람 문명의 영향과 도입 없이 유럽의 르네상스나 조선의 과학 발달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p. 408)으로 본다.

 

이베리아반도에 꽃 핀 이슬람 문화 : 후우마이야와 나스르(756~1492)

후우마이야 왕조는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왕조가 압바스 왕조에 패망하고 6년 후인 756년부터 1031년까지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번성하며 중세 유럽에 이슬람 문화를 전하는 창구로 기능했다. 나스르 왕조는 이베리아반도에서 꽃 핀 800년 이슬람 문화의 마지막을 장식한 왕조였다. 알함브라 궁전은 나스르 왕조의 유산이다. 후우마이야 시대에 이베리아 반도에 전체 인구의 10%에 달했던 유대인들은 아랍 인구를 능가하는 비율이었다. 무슬림과 관계가 나쁘지 않았고 비즈니스와 학문 세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들은 세파르딤으로 디아스포라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한 유대인들의 후손이다. 오늘날 아슈케나짐(동유럽 거주 유대인), 미즈라힘(중동 및 남아시아 거주 유대인)과 함께 유대인 혈통의 주류를 이룬다. 나스르 왕조는 르네상스 이전에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놀라운 학문과 건축기술, 수준 높은 문명을 이루었다. 1492년 나스르 왕조는 멸망하고 이베리아반도는 781년 만에 기독교 왕국의 손에 넘어갔다.

 

 

이란 시아파의 자존심 : 사파비(1500~1736)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받아들여 오늘날 이란이 시아파의 종주국이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칼리프술탄’, ‘아미르대신 고대 페르시아 왕조의 황제 칭호였던 를 사용하며 이란 정체성의 뿌리를 분명히 했다.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남아있는 유적은 대부분 사파비 때의 것이다. 테헤란을 이란의 두뇌라 부르는데, ‘이스파한이란의 심장으로 여긴다. 이란 역사에서는 사파비 왕조의 개창을 근대화의 시작으로 본다.

사파비의 영적 중심은 수피즘이다. 꾸란을 읽고 해석할 줄 몰라도 간절히 기도하고 염원하면 알라께서 찾아오실 것이며, 자기 수양으로 알라를 영접할 수 있다고 하여 신앙의 길을 넓혔다.

 

사하라 이남 서아프리카의 이슬람 왕국

북아프리카에서는 아랍계 무슬림의 정복 활동을 통해 이슬람이 확산하였고, 동아프리카에서는 교역활동을 통해 이슬람이 확산하였다. 인류역사상 가장 짧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전쟁 기간은 총 38분밖에 안 되는 1896년 영국과 잔지바르 간 전쟁의 당사자인 잔지바르(프레디 머큐리가 태어난 곳)는 아라비아 반도국인 오만 술탄령이었다. 무슬림인 아랍인들이 동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교역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다.

 

인류 최대의 대제국 :오스만(1299~1923)

1차대전에서 독일, 오스트리아와 함께 동맹국에 가담하여 패전함으로써 제국은 산산조각이 나면서 무너졌다. 하나의 아랍공동체가 22개 개별 국가로 나뉘어 독립하고 팔레스타인 문제가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발칸반도를 뺏김으로써 보스니아 무슬림 학살, 코소보 내전, 체첸 사태와 같은 복잡한 갈등과 분열의 상처가 생겨난다.

소수민족 보호제도인 밀레트(milet)’는 오스만제국 다문화 포용정책의 핵심이다. 밀레트는 아랍어 밀라(mila)’에서 유래한 용어로, 터키어로 종교, 종교 공동체, 민족이라는 세 가지 뜻이나 민족보다는 종교 공동체의 성격이 강하다. 제국의 신민을 종교에 따라 구분하여 각 종교 공동체에 귀속하고, 자신들의 율법과 관습에 따른 자치를 허용하는 제도이다. 다만 오스만 술탄에게 복종해야 했다. 무슬림, 그리스 정교도, 아르메니아 기독교인, 유대교도로 구성된 4개 공동체가 가장 대표적이고 중요한 밀레트였다. 각 밀레트는 무슬림과 관련된 송사 외에는 오스만 중앙정부의 간섭없이 결혼, 이혼, 출생, 사망, 교육, 언어, 전통 등에서 완전한 자치를 누렸다. 모든 밀레트 구성원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출세를 할 수도 있었고, 개종하여 다른 밀레트로 이주할 수도 있었으나 밀레트 이주를 권장하지 않았다. 밀레트는 오스만 제국 500년 역사를 통틀어 이질적이고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포용하고 오스만 제국이라는 이름아래 통합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면서, 민족 간의 갈등이나 분쟁 없이 안정된 국가를 유지하는 초석이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은 아랍인들에게는 후사인-맥마흔 서한(1915~1916)’을 통해 전후 오스만의 영토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지지한다고 전하고, 유대인에게는 밸푸어 선언(1917)’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민족 국가를 세우라고 부추겼다. 그러면서 정작 프랑스와는 비밀리에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을 맺어 영국의 팔레스타인 통치를 약속받았다. (p.599) 실제로는 유대 국가인 이스라엘 건국을 도왔다. 모순된 영국의 행보는 중동 지역에 끊이지 않는 분쟁의 불씨다. 저자는 오늘날 중동의 갈등과 분열,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은 오스만 제국의 와해로 인한 역사적 후유증인 셈으로 본다.

타지마할을 낳은 제국 : 무굴(1206~1857)

무굴제국은 이슬람 문화에 페르시아와 힌두 문화를 융합한 독특한 문화를 창출했다. 돋보이는 예술 장르는 라지푸티나 회화궁정 세밀화이다.

 

셋째, 나름대로 아쉬운 부분은 더 깊게 배울 방향을 찾는 소재로 삼는다.

사하라 이남 서아프리카의 이슬람 왕국

기존 세계사에서 아프리카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최근 일부 소개하기 시작했으나 서양과 이슬람이 남긴 기록에 의지한다. 아프리카 역사 재구성의 한계다.

이집트 문명, 누비아 문명, 쿠시 왕국, 악숨 왕국이 기원전에 번성했다. 유럽 중세에 해당하는 시기에 아프리카 서부네 가나왕국(700~1240), 르네상스 시기에 말리 왕 (1235~1670), 송가이 왕국(1464~1591)이 수준 높은 문명을 주도했다. 아프리카 동남부에서는 짐바브웨 왕국(11세기~1450), 남부에는 무타파 왕욱(1430~1760), 동부에서는 에티오피아 왕국(1137~1987), 중부와 서부에 각각 콩고 왕국(1390~1914)과 베넹 왕국(1180~1987)이 번성했다.

가나왕국은 사하라 횡단 무역으로 금, , 상아, 소금을 낙타를 통해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유럽의 물품과 교환해 수익을 올렸다. 팀북투와 모로코의 시질마사를 잇는 서쪽 교역로가 가장 활발했다.

말리 왕국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고, 당시 아랍-이슬람 세계와 폭넓게 교류했다. 이때 축조된 이슬람 대사원이 흙벽돌로 지은 젠네 대모스크이다. 말리 왕국의 무슬림 만사 무사1324년 메카로 순례를 떠났는데, 동원된 사람이 6만 명, 그 중 12,000명는 그를 수행하는 노예였다. (p.501) 아랍인 역사학자 알마크리지와 이븐 할둔이 기록한 사실이다. 이슬람의 아프리카 수용은 종족성의 초월, 스와힐리어로 나타났다.

루츠 판 다이크의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를 다시 읽을 기회다.

 

인류 최대의 대제국 : 오스만(1299~1923)

크림 전쟁 참전을 계기로 유럽 열강이 오스만제국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한 1876년에 등극한 술탄 압둘하미드 2세는 탄지마트 정책이 추구하던 서구 지향적인 정치개혁을 중단하고, 무슬림의 지주성과 이슬람 이념의 통일을 바탕으로 하는 보수 정치로 회귀했다. 제국 와해의 위기 속에서도 다방면의 협력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했고, 1909년에는 대한제국에 비밀리에 사절을 보내 한반도 사정을 정탐하기도 했다. (p.596)

1차 세계대전 중 동맹국 편에 섰던 오스만제국은, “협상국의 한 축인 러시아가 제국의 동부를 침략해 옴에 따라 대안 없이 동맹국에 가담하여 국권을 지키려 했다.”(p.597) - 영국 편에 서려 했으나 받아 주지 않아 독일 편에 서게 됐다고 알고 있었다. 더 공부해야 할 역사적 배경이다 -

 

타지마할을 낳은 제국 : 무굴(1206~1857)

무굴제국은 330년 넘게 인도 아대륙에 번성했던 이슬람 왕조다. 무굴제국은 인도 아대륙에 국한된 지역 국가로 평가절하되면서 제국의 실체와 문명의 깊이를 제대로 고찰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무굴제국은 티무르 제국의 후예다. 무굴제국은 토착 문화와 융합하고 종교 간 화해와 다른 가치에 대한 관용을 바탕으로 독특하고 창의적인 문화를 이룩했고, 주변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목문화를 토착 힌두적 토양에 새롭게 이식함으로써 다원성이 발현되는 최고의 문화 용광로를 가동할 수 있었다. 수학, 천문학, 의학 분야는 물론 건축 분야에서도 타지마할로 대표되는 불멸의 문화를 꽃피웠다. 1857년 영국의 식민 통치받다가 1947년 간디 주도로 독립했으나, 800년 이상 인도 아대륙의 정치와 경제를 주름잡았던 북부의 이슬람 공동체가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독립하였다. 무굴제국에 관한 공부가 더 필요하다.

인도 남동부의 퐁디셰리는 힌두가 아닌 타밀족의 문화와 정신을 만날 수 있는 지역이다. 그중 랑골리는 쌀가루, 석회가루, 색모래, 꽃잎 등의 안료를 사용하여 마당이나 거실의 바닥을 장식하는 그림이다. 집을 나서거나 집에 들어올 때 밟는다. 세계적인 영적 공동체 오로빌(Aurovile) 도 있다. 40개 나라에서 온 1,800여 명이 공동체 생활을 한단다.

 

끝으로, 인류 본사가 가진 의미를 나름대로 적어본다.

낱권으로 중동 사람들의 종교, 역사, 문화를 다룬 책들이 있다. 40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책들이다. 머리가 커지면서 가졌던 지적 호기심은 이슬람 세계에 관한 관점을 갖고자 노력했다. 제국주의 국가와 서구 자본주의가 포장(왜곡, 축소 등)해 놓은 사실과 역사가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막연했던 지적 호기심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읽고,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물결을 따라 나온 책들을 보면서 일부 풀어간다. 하지만 완벽에 이를 수는 없다. 학교 교육으로 배운 것은 유럽 중심주의 관점에서 쓴 세계사 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글을 읽을 줄 알고, 지적 호기심이 있어 스스로 배우려는, 이른바 교양 쌓기를 하고 있어서 이희수의 일류본사를 만났다. 아마도 일류본사는 앞으로 읽게 될 오리엔트-중동에 관한 책들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기준으로 삼아야 할 듯하다. 아프리카의 이슬람 왕국과 무굴제국의 정치 경제와 문화, 1차 세계대전 직전 오스만제국의 국제 정세 판단에 대해서는 한 걸음 더 디뎌봐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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