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길 -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 자유주의 시리즈 71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지음, 김이석 옮김 / 자유기업원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조금 길어요(4,500)

 

1944년의 시점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실패하고 자유주의 경제야말로 경제의 흐름이 될 것이라는 하이에크의 선견지명(2022년의 시점에서)<노에의 길>을 통해 살펴본다.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영국 속에 잠재된 전체주의와 사회주의가 사회보장, 안전 등의 이름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우려하며 내놓은 글이다. 자유주의 경제의 전제인 시장이란 인지적 한계를 지닌 개인들이 경쟁을 통해 효율적인 생산방식과 소비자의 제품에 대한 수요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계획경제는 중앙이 생산을 통해 소비를 통제하는 시스템이다. 이제는 개인의 자유와 정부의 권위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읽는 고전이 되었다.

 

밀턴 프리드먼은 출간 50주년 기념 판 서문에서 자유시장과 사적 소유권을 주장하고, 거의 완전한 자유주의 정책을 방어하는 것이 과거 10년 전보다는(1994년 미국의 시점이다) 더 존경받는 일이 되었다. 그렇지만 정부 권력들이 개인들을 나쁜 기업들로부터 보호하고 빈곤을 완화하며, 환경을 보호하거나 평등을 증진하는 방법으로 선전될 때 대부분의 지식인 공동체는 여전히 자동으로 정부 권력을 선호한다. 현재 전국 규모의 강제 건강보험 프로그램에 대한 논의는 바로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라고 말한다. 코로나19를 경험하며, 미국의 건강보험 프로그램보다 한국의 건강보험 프로그램이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이 됨을 누구나 느끼고 있으니 프리드먼의 주장에 완벽하게 동의할 수 없다. 그런데도 1944년 영국에서 초판을 2천 부 출판했고 한 달 만에 매진되었으며, 1994년 기준으로 시카고 대학 출판부에서만 25만 부가 넘게 팔렸다. 20개국의 외국어로 번역본이 출간되었다고 하니 고전이란 평가에 수긍이 간다.

 

첫 문장에서 현재의 사건들은 이로 인해 초래될 결과들을 아직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지나간 역사와 다르다라고 말한다 이 문장으로부터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자본주의 경제와 계획경제를 비교한다. 사상이 사회진화의 방향을 잡아감을 지독한 만연체로 풀어간다.

 

직업과 소득을 보장하라는 외침이 커져 정책화하게 가격변화에 대한 조정 기능이 마비되어 고용과 생산의 급변을 가져오고 결국 경제와 빈곤 계층의 삶이 불안정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사회주의와 사회주의가 완화된 복지국가를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서 앤서니 기든스의 생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이 불안할 때 우리는 자신 말고는 다른 것을 비난한다. 지금의 암담한 상황이 분명 남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인 결과일 수 있고, 우리가 중시하는 이상의 추구로 빚어진 결과일 수 있다. 토크빌은 사회주의는 예속을 의미한다라고 경고한다. 현대 문명(서구 문명)의 기초는 개인주의이다. 인간으로서 개별 인간에 대한 존중, 그 자신의 견해와 선호를 그 자신의 영역에서는 궁극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과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과 취향을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신념이다. 하이에크는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제 뜻에 따라 점진적으로 만들어가는 시도가 허용된 체제로 전환된 것은 상업의 성장과 관련지어 해석한다. 북부 이탈리아의 상업 도시에서 뿌리를 두고 있다고 믿는다. 나아가 프랑스 혁명 이후 정치적 자유가 경제활동의 자유로운 성장을 가져왔고, 과학의 경이로운 성장까지 이끌었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이는 20세기 초 물질적 안정과 개인적 독립을 누리며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까지 믿게 되었다고 본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유럽대륙, 독일의 사회주의 발전 과정을 비교하며 사상의 대립과 교류를 살펴 간다.

 

독일에서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헤겔, 마르크스, 리스트, 좀바르트, 만하임 등에 의해 20세기 초 독일에서 사회주의가 절정에 달한다. 20세기 초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를 대신하여 대다수 진보주의자의 교리가 되었는데, 사회주의의 기초는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사회주의란 의도적으로 사회를 위계적인 방식으로 재조직하고 강압적 정신력을 강제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을 말살하려는 시도를 의미했다. 사상의자유를 19세기 사회의 근원적 악으로 간주하였다. <노예의 길>을 통해 알게 된 사상의 흐름이다. <노예의 길>에서 언급하는 서구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것과 의미가 다르다. 라인강 서쪽을 의미한다. 서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자유무역과 모든 형태의 국제주의와 평화 애호를 의미한다.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자유무역을 영국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만든 교리에 불과하고 영국이 세계에 준 정치적 이상들은 구제 불능일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한다.

 

자유주의의 주장은 인간의 노력을 조정하는 수단으로 경쟁의 힘을 가능한 한 최대한 잘 활용하자는 것이지 그냥 그대로 놔두자는 것이 아니다. 경쟁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경쟁이 유효하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을 때만 경쟁을 대체하여 확실히 국가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획경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경제체제는 필연적으로 독점자본주의로 진화한다는 생각이 확산한 것은 주로 자신들 국가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이를 일반화한 독일 사회주의 이론가들, 특히 좀바르트의 영향 때문이었다. 계획경제 속에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우월한 생산성 때문이 아니라 더욱 공정하고 평등한 부의 분배를 확보해 준다는 믿음 때문에 이를 지지한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나치와 파시스트들이 발명한 것이라 오해하기 쉬운 것들은 다음과 같다. 개인의 활동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두 관장한다는 발상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처음 실행된다. 아이들을 어린 나이에서부터 정치조직 안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한 사람들도 사회주의자였다. ‘세포조직의 양성과 사적인 삶의 영속적 감독을 위한 장치를 통해 전체주의 정당의 프로토타입을 만든 것도 사회주의자였다. 이런 것들은 전체주의의 시작이다. 사람들이 긍정적 과제보다는 적에 대한 혐오, 더 잘사는 사람에 대한 질시와 같은 부정적 강령에 대해 더 합의에 이르기 쉬운 것은 인간 본성에 가깝다. 독일의 반유태주의와 반자본주의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개인주의 사회철학자에게 권력 그 자체는 언제나 악덕이나 집단주의자에게는 권력 그 자체가 하나의 목표였다. 집단주의는 목적 달성을 위해 막강한 권력을 만들어야 비로소 성공한 것으로 판단한다.

 

독일에서 사회주의는 민족사회주의 세력을 지원했다. 독일 사상은 러시아 혁명이 있기까지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방식의 마르크스주의적 요소가 지배하는데 이는 좀바르트 탓이다. 개인적 삶보다 민족의 삶과 국가의 삶이 더 고귀했다. 이는 독일이 치른 영국과의 전쟁(1차대전)은 독일과 반대되는 이상, 즉 개인의 자유와 영국적 안락 추구에 대한 전쟁으로 본다. 독일 사회주의자 플렝케에게 조직은 사회주의의 본질이었다. 렌슈는 우리 게르만 민족은 조직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다른 국가들이 아직도 개인주의 체제 아래 지내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이미 조직의 체제를 달성해 놓았다라며 사회주의에서의 조직의 개념과 힘을 강조하였다. 그러니 사회주의의 행진 앞에서 영국의 부르주아가 패주하는 것으로 전쟁을 규정한 것이다. 우리에게 <서구의 몰락>으로 잘 알려진 슈펭글러도 영국의 구조는 부자와 빈자의 구분에 근거해 있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국가 구조는 명령과 복종 간의 구별에 근거해 있다. 따라서 계급 구분의 의미는 두 국가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라고 생각한 사회주의자이다.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1차대전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전쟁으로 보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알려진 영국 학자 E.H Carr조차도 전쟁의 도덕적 기능에서 19세기 전통에 젖어 영어 사용자권들이 1차대전을 몰상식하고 맹목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사회적 연대감을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인 전쟁이 창출하는 의미와 목적의 생생한 느낌을 느낄 수 있다는 견해를 펼칠 정도로 20세기 초 사회주의는 지식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만연체의 기술로 헷갈리기 쉽지만, 결론은 명확하다. ‘지도하고 명령하기 위한 기구를 고안하기보다는 개인의 창의적 에너지를 분출하도록 놓아두라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위한 정책이 유일한 진보적 정책이라는 핵심적 원리는 19세기 진리였듯이 현재에도 여전히 진리라고 주장한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유방임주의 경제가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로 이어지고 대처리즘, 레이거노믹스 등으로 계승돼 21세기 신자유주의 경제 패러다임에 으르게 된 경제학사를 본다. 이런 거시경제의 주류에서 케인스를 생략할 수 없지만, 이에 대한 반론, 혹은 절충론으로 앤서니 기든스의 <3의 길>을 차후 소개할 예정이다.

 

 

기타 등등

 

<리바이어던>으로 알고 있는 홉스가 고전을 가르치는 것은 자유라는 위험한 정신을 주입하므로 억제되어야 한다라고 했음으로부터 고전을 읽을 이유가 명확해진다.

돈은 사람이 발명한 것 중 가장 큰 자유의 수단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진실에 가깝다.”(p. 145)

고대인들에게 장님이라는 것은 정의의 신이 지닌 속성이었다. 이는 정의는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정의에 대한 찬사다.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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