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2021.12.6.(월)
“Ha! 은주가 찐하게 위진남북조에서 수당이랑 송원명청했다더라.” 독자가 중국 왕조를 쉽게 외우려고 암기용으로 만든 문장이다. 쉽게 잊히지 않는다. 배운 게 적어 아직 공자와 맹자, 주자학에서 왜 그토록 하은주 시대를 숭앙하는지 의문이다. 사마천의 사기 본기 중 오제 본기, 하 본기, 은 본기, 주 본기를 읽어도 풀리지 않는다.
학창시절 배운 동양사의 맥락은 유럽인의 개념이나 틀, 혹은 유럽화된 일본이 바라본 관점이 대부분이다. 라이샤워와 페어뱅크의 동양 문화사도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은 일본 학자들이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중국 내부의 시각에서 중국사상사를 조망하려는 의도로 집필한 책이다. 이런 까닭에 선개념이나 상투개념에 비껴나 있는 관점을 볼 수 있어 안목을 넓혀준다.
몇 가지를 옮겨 본다.
삼재(天․地․人) 사상을 처음 외친 것은 순자다.
도가의 ‘자연’은 문법적으로 부사였고, 뜻은 만물․백성이 자기 힘으로 자율적, 자발적으로 존재, 변화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고대 이래의 학문은 농담의 차이가 있긴 했으나 모두 시대의 움직임에 충실한 실천적인 사상이었다. 중국의 사상은 학문이란 형태를 취하며 자기를 표현 한 것이다.
당 태종대 정관 연간에 만든 오경정의는 오늘날로 보면 국정교과서였다.
송대 사대부들이 주자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소유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인쇄출판이란 기술혁신이 있었다. 이전에 경서나 주해는 기본적으로 암송해야할 대상이었다. 상업출판이 인쇄본의 주류가 되어 오늘날로 전해진다.
낙서란 1에서 9까지의 수를 3×3의 마방진(갈 세로 대각선, 어는 쪽으로든 합이 15기 된다)에 배치한 것
주자학에서 사서는 중급자용이고, 오경학습으로가는 단계에 불과 했다. 과거시험에서 사서는 필수, 오경은 선택필수라는 제도가 사서 편중 경향을 사회적으로 초래했고, 양명하기 취한 경전 경시 태도가 증폭시켰다. 맹자가 경서로 인정받은 것은 송대였단다.
왕양명이 말하길 “요순은 무게 1만의 황금, 공자는 무게 9천, 범인은 한 냥이다. 하지만 순수한 금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견주어 못하지 않다.”(보는 방식을 바꾸면 두 가지로 읽힌다)
중국의 황제질서는 예에 의한 통치로 서양식 정치학의 논리로 보면 ‘전제인데도 자유’라는 기묘함이 있다. 이와 관련해 「공자와 세계 1,2,3,4,5」를 보면 흥미진진하다.주자학의 등장이후 왕권이론은 천명을 받은 혈통에서 자기 수양으로 바뀐다.
화이사상은 송나라가 요에 대해 가졌던 굴절된 우월의식을 형성한다. 세계제국이었던 당나라는 화이를 구별함에 엄격하지 않았다. 당나라 사람들에게 호(胡)나 이(夷)는 이국적인 어떤 것으로서 인기를 누렸다. 그에 비해 서방이나 북방에 영토를 소유하지 못하고 남방으로 밀려나 있던 송나라는 자타를 엄정하게 구분한다. 서하도 당나라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중국은 요를 이적이라 여기고 자기를 중화라 여겼다. 국력이 찌그려져가는 일본이 혐한론을 부추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자학은 ‘심’논리가 자기의 마음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심을 두는 것을 양명학이 비판한다. 양명학은 행위의 타당성을 동기 차원에서 판단한다(“산 속의 적을 무찌르는 일은 쉽고, 마음 속의 적을 무찌르기는 어렵다.”)
주자학 양명학이 주목한 향리공간을 체계화한 것은 「주례」였다. (경복궁을 짓는데도 주례 동관 고공기를 참고했다니 주의 영향력은 시공간을 너머선다.)
중국 역사의 변화가 왕조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의해 왕조가 규정된다(이 문장이 이 책의 바탕에 깔려 있다)
송나라 이후 균분 상속의 역사(부조가 1000무의 토지를 소유할 때 자식이 둘 이라면 500무씩 나뉘고, 그 자식에게 다시 자식 두명씩 있다면 500무는 250무, 3대째는 4분의 1이되고, 자식이 다섯 명씩이라면 손자 대에는 25분의 1이다)에서 가난은 3대로 이어지지 않고, 부도 3대를 이시 못한다는 말이 생긴다.
송대에 도교, 불교에 대해 유교를 우위에 둔 관료들이 도덕을 수양하는 학문으로 변화시킨다.
명말 청초에 가장 이르게 사(욕망)를 긍정한 것은 이탁오다.(이탁오 평전 참고)
명나라 홍무제가 반포한 교육칙어인 육유에서 황제에 대한 충성이나 국가, 관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가문과 향리를 둘러싼 도덕을 중시한다.
당송 전환기 오대라는 분열과 할거는 신해혁명후 1949년 재통일까지의 시기와 함께 대전환기의 하나에 견줄만한 커다란 혁명이었다. (일본이 그 사이에 침략할 수 있었던 것은 대변혁의 혼돈에 편승했기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중세 서양의 봉건과 중국의 봉건이 다르듯이 중궁의 향치와 서양의 지방자치도 다르다. 중국의 향치는 “지방의 공사는 지방의 손으로”라는 차원에서 이뤄진 지방자치로 재벙이 자맂ㅂ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민간 주도라고 해도 실은 대부분 관과 향신, 백성이 합동으로 운영에 참여했느는 점이다. 태평천국군을 제압한 향신의 상군이 이와같은 맥락이다.
“만물이 가지런하지 않은 것은 물의 자연이다. 백성에 빈부의 차이가 있는 것은 수명에 장단이 있는 것과 같아 조물주도 어찌할 수 없다.”
균전제, 정전제가 명청대에 이르러 인구의 증가로 실현가능성이 멀어지고 중국동맹획가 토지국유를 주장한다.
중국 지식인들이 중국문화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은 1915년 무렵이다. 천두슈(진독수)에 따르면 종족제는 반개화, 봉건시대의 도덕으로 가장 먼저 비판해야 할 대상으로 결정되었다.
“형제는 타인의 시작이다”(일본에서 쓰는 관용구)
이미 알고 있는 바를 확인하는 재미도 있다.
- 전한 말기(기원전 1세기) 무렵에 유교가 국교화 되었다.
- 공자는 천과 귀신을 말하지 않았다. 도덕과 정치를 중심으로 한 인간사회와 인간의 힘 저편에 있는 명료하게 파악할 수 없는 이법(理法)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 유가는 종교적 의례였던 예를 세속화해 가족 도덕을 세우고 사람의 귀천과 상하를 구별하는 계급질서로 재구축한다. (맹자가 삼년상을 ‘효’의 구현이라 평가)
- 유가와 묵가가 제자백가의 앞에 있다.
- 도가의 ‘물을 물로 여기는 자는 물이 아니다’(물을 물로 여기는 자란 만물을 물로 여기고 존재 변화시키는 주재자를 가리키며, 물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을 행하는 자가 물이 아니고 도라는 말이다.)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은 글항아리에서 본문 365쪽 분량으로 내놓았다. 내용과 제목이 따로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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