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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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해 전부터 읽어보리라 마음만 먹다가 2019년 마지막 책으로 곰브리치 경의 THE STORY OF ART를 읽었다. 도화지 낱장과 색연필로 미술 시간을 어찌어찌 때운 초등학교 시절 말고는 미술이란 거에 관심도 재능도 없다. 세계사의 일부분으로 가르쳤던 미술을 떠올리며 읽었다.

 

서문에서 감동을 받았다. ‘전문용어를 쓰지 않고 평이한 글로 쓰고, 도판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작품에 한하고, 진정으로 훌륭한 작품만 선정하고, 걸작이나 개인의 기호에 따라 임으로 작품을 선정하지 않고, 원작을 직접 보았던 작품을 택하여 설명하려고 하였고, 작품들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이해하는 방향으로 유도하여 미술 입문자를 위해 썼다는 고백이다.

독서를 즐겨 20년 쯤 지나 책에 관한 서문을 이렇게 쓸 날을 고대한다.

 

1. 원시미술이 우리의 것과 다른 것은 그들의 기술 수준이 아니라 그들의 착상이다. 처음부터 이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미술사는 기술적인 숙련에 관한 진보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원근법에 의한 단축법(foreshortening : 인체를 그림 표면과 경사지게 또는 직교하도록 배치하여 투시도법적으로 감축되어 보이게 하는 회화 기법)은 기원전 500년경에 시도되었는데, 이집트와 아시리아 미술품에 이런 화법으로 그린 그림은 없다.

3. 고대 세계의 유명한 조각 작품들이 없어진 직접적인 이유는, 기독교가 승리한 뒤로 이교도의 신상은 어느 것이나 때려 부수는 것이 신성한 의무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4. 소크라테스가 조각가로 훈련 받았기에, 감정이 육체의 움직임에 미치는 과정을 관찰해 여혼의 활동을 표현해야 한다고.

5. 로마 인들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아마도 토목 공학일 것이다.(p.93) 로마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아치의 사용이다.(p.94) 모든 로마 인들이 충성과 복종의 표시로 흉상 앞에서 분향을 해야 했으며 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것이고 그들이 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pp.95)

6. 교회가 국가의 최대 세력이 되자 미술과의 모든 관계는 재검토 되어야만 했다. 예배 장소를 고대의 신전을 모델로 할 수는 없었다. 바실리카(basillica : 큰 회당)가 등장한 까닭이다.(p.103) 6세기 말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 역할을,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다.” 이는 우상숭배 금지에 대한 반론)

7. 정교한 디자인과 풍부한 색채의 배합 설계를 우리가 감상하는 것은 어쩌면 마호메트의 덕택이라 할 수 있다.(p.111)

8. 중국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는 일을 천한 일로 생각하지 않고 화가를 영감 받은 시인과 동등한 위치에 놓은 최초의 사람들이었다.(p.113)

9. 미술가는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근대적 관념으로 과거 대부분 민족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p.122)

10. 이집트 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것을 그렸고, 그리스 인들은 그들이 것을 그린 반면에 중세의 미술가 들은 그들이 느낀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p.124)

11.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미술가들은 아름다운 육체의 이미지들을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고딕 미술가들에게는 이 방법과 기교가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으며 그 목적은 성경이야기를 한층 더 감동적으로 신빙성 있게 전달하는 것이었다.(p.144)

12. 13세기 예술가들은 스케치북을 들고 실물을 보고 그릴 필요성이 없었다. 대강의 견습생으로 스승의 지시에 따르고 옛 서적을 모사하는 방법으로 그리는 방법을 배웠다.(p.146)

13. 르네상스기에 시인이나 화가를 칭찬할 때는 그의 작품이 고대의 것만큼 훌륭하다고 말했다.(p.167) 눈으로 본 것을 그린다는 관념은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등장 하였다.(p.433)

14. 성당을 거대한 돔(: 피렌체 대성당의 돔)으로 덮게 된 것은 15세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덕분이다. 고전 건축의 형식(열주, 박공 등)을 새로운 조화와 미를 창조하는 데 자유로이 이용했고, 그 뒤로 500년 가까이 유럽과 미국 건축가들이 그 발자취를 따랐다.(p.169) 미술영역에서도 수백 년간 미술을 지배했던 원근법(perspective)의 발견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p.170)

15. 15세기 초 반 에이크는 유화(안료의 용매로 달걀 대신 기름 사용)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다.

16. 보티첼리에게 그림을 주문했던 부유한 상인 메디치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고용주이기도 했다.(p.198)

17. 목판술, 동판술을 이용한 그림의 인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알프스 이북으로 전해져 북유럽 중세 미술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원동력 중 하나였다.(p.212)

18.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규모를 제외하고 원래 계획과 일치하지 않는 데 면죄부를 팔아 기부금으로 예산을 충당할 예정이었다.(p.219)

19. 고대 그리스의 귀족들은 머리를 가지고 일하는 시인들은 우대하면서도 손으로 일하는 미술가는 결코 대접하지 않았다.(p.216) ‘손을 써서하므로 비천하며그렇기 때문에 신사의 품위에 걸맞지 않는다고 기술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다.(p.222)

20.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30구 이상의 시체를 해부해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고, 자궁 속에서 태아가 성장하는 신비를 조사했고, 파도와 조류의 법칙도 연구, 곤충과 새들이 나는 것을 관찰하고 분석, 비행 기구 고안, 바위와 구름의 형태, 멀리 있는 물체의 색채에 미치는 대기의 영향, 초목 성장을 지배하는 법칙, 의 조화 등도 연구했다.(p.221)

21.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글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예견했다.(p.222)

22. 스푸마토(sfumato)란 윤곽선을 확실하게 그리지 않고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같이 약간 희미하게 남겨두어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인상을 피하는 기법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창안한 것이다.

23. 판테온에 있는 라파엘로의 묘비명 : “여기는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p.245)

24. 16세기 조르조네는 동시대 화가들과 달리 사물과 인물을 나중에 공간 속에 배치한 것이 아니라 땅, 나무, 공기, 구름 등의 자연과 인간을 그들의 도시나 다리들과 더불어 모두 하나로 생각했다. 이는 원근법의 창안과 맞먹는 새로운 영역을 행한 발돋움이었다.(p.251)

25.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거장들은 과학적인 원근법의 발견과 아름다운 인체를 완벽하게 표현하도록 하였던 해부학에 관한 지식, 고전 기대의 건축 형식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위업을 이루었다.(p. 257)

26. 16세기 플랑드르 화가들이 일상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풍속화라는 장르를 개척했다.(p. 287)

27.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만든 화가는 클로드 로랭이었다.(p.303.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

28. 목판화나 동판화보다 자유롭고 신속하게 작업할 수 있는 에칭(etching 부식 동판화)을 본격 사용한 것은 램브란트다.(p.324)

29. 후원자가 사라진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화가와 조각가들이 전시회를 열고 이를 위한 작품을 주로 제작하게 되었다.(p.365) 이러한 심각한 위기가 미술가들이 도처에서 새로운 주제를 찾아내야만 했다.(p.366)

30. 산업혁명은 장인 기술의 전통을 무너뜨렸다. 건축 분야에서 두드러졌는데 견실한 장인 기술의 결여는 양식에 대한 이상한 집착을 낳아 문은 고딕 양식으로, 건물은 성이나 궁전, 이슬람 사원 양식으로 해달라는 요구를 받게 되었다.(p.379)

31. 19세기에 들어서 전통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 주었다. 소재, 주제, 방식의 결정이 화가에게 맡겨졌고, 화가의 취향과 대중 취향의 간극이 점차 벌어졌다.(p.381) 관례를 따르고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는 부류와 스스로 선택한 고립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류로 미술가가 나뉘게 되었다.(p.382) 이 미술가들이 새롭게 가지게 된 자유와 능력은 세계 전체가 회화를 위한 주제를 제공했다. 미술가는 오직 자신의 감각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었다.(p.401)

32. 사진술의 등장은 성상 폐기만큼이나 미술가들의 지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p.403) 그러나 19세기 인상주의가 자리 잡는 데 일본의 채색 목판화만큼이나 사진이 기여했다.(p.403)

33. 세잔, 반 고흐, 고갱 이 세 화가는 절망적인 고독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었고 자신들의 예술이 이해되리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은 채 작품 활동을 했다.(p.425)

34. 미국 건축가 프랭크 라이드 로이트는 주택에서 중요한 것은 방이지 건물 정면의 외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부가 살기 편하고 거주자의 요구에 잘 맞는다면 건물 외관도 그럴 듯하게 보일 것이라고 확신했다.(p.430)

35. 19세기 건축학교 바우하우스의 기본 이념인 기능주의는 도시와 방을 어질러놓는 데 사용했던 불필요하고 몰취미한 잡동사니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p.431)

36. 20세기 전반기 표현주의는 인간의 고통, 가난, 폭력, 격정에 대해 아주 예민하게 느꼈기에 미술에서 조화나 아름다움만을 고집하는 것은 정직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측면이 강했다.(p.437)

37. “내가 미술의 역사를 끊임없이 새로 짜여지고 변화하는 전통의 역사로 설명하려는 것은 전통에 반기를 든 미술가들도 자기가 노력해 나아갈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되는 자극을 얻기 위해 전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p.461)

38. ‘미술은 표현한다라든가 미술은 구성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미술은 자연의 모방이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진실이 아니다. 어떤 이론이 애매모호하더라도 그 안에는 진실의 핵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대 미술가들이 새롭거나 낡은 다양한 이론에 관심을 갖는다.(p.462)

 

곰브리치 경의 서양미술사(문고판) p.504 부터 413개의 도판이 실려 있다. 참고문헌, 소장처에 따른 도판 목록, 도판 상세 설명, 색인까지 1046쪽 분량이다.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 THE STORY OF ART는 예경출판사에서 세 가지 판형을 내놓았는데 독자는 2013년에 초판을 내놓은 문고판으로 읽고 공부했다. 양장본을 구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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