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폐허에서 - 저항과 재건의 아시아 근대사
판카지 미슈라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타지에서 독특한 레시피로 만들어낸 요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행복한 여행이다. <제국의 페허에서>가 보여 준 책 읽는 맛이 그렇다. 그 맛은 익숙한 맛이 아니라 새로운 맛이다.

십 여 년 전일까. TV토론에서 어떤 정치인은 발언에 답답했었다. 강대국의 눈 밖에 나면 나라가 금새 혼란에 빠지거나 망할 듯 토론자에게 정신차리라는 투로 말하더라. 의존하는 사고 방식과 세계 인식에 혀를 차는 것 말고는 시청자로써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몇 가지 차원에서 지적 호기심은 배우는 기쁨을 준다.

첫째, <제국의 폐허에서>19~20세기 영국, 미국이라는 서구 강대국의 시각에서 세계를 인식하도록 가르치고 배워왔던 기성세대에게 새 지평을 안내한다. 인도사람 판카지 미슈라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해석한다. 물질을 중시하는 서구의 시각이 아니라 정신도 중시하는 중국과 인도, 이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둘째, 앨빈 토플러가 3의 물결로 지식정보사회를 예견한 것처럼,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 량차오, 타고르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데, 선견지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20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말로를 예견했던 사상가들의 삶을 통해 21세기를 예견할 수 있게 한다.

셋째, 이미 황태연의 <갑진왜란과 국민전쟁>과 같은 국내 서적에서도 언급하는, 드러내기 껄끄러운 내용을 통해 알려준다. 러일전쟁이후 일본에 대한 중동,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반응은 환영주목이었다. 동양이 서양을 꺾었다고 인식한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 일부 지식인들도 같은 태도를 보였다고한다. 일제 식민지를 경험한 대다수 우리에겐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다.

넷째, 경제학자였던 슈펭글러가 아마추어라곤 하지만 <서구의 몰락>을 내게 된 배경에 물질주의의 만연, 1차 대전 이외에도 러일전쟁에 승리한 동양의 한나라, 일본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문화는 창조 모체인 영혼의 자기표현이며 영혼이 그 창조력을 고갈시켰을 때 쇠퇴한다는 기조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국사 교과서는 중국의 5.4운동이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운동이라고 가르친다. 대한제국의 3.1운동이 동양 강대국이었던 중국에 정신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관점이다. 책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중국인들이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중국의 요구를 제출하였으나,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산둥반도의 반환 등 중국의 요구가 무시됨에 따라 실망한 것이 기폭제였음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제국의 폐허에서>는 머리말을 통해서 판카지 미슈라의 연구 개요를 파악할 수 있다. 책은 현대 세계의 모습을 19055월 쓰시마 해협에서 있었던 러일전쟁에서 그려낸다. 서구의 대표로 나선 러시아와 동양의 대표인 일본이 싸워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서구 세계가 멘붕에 빠진다. 백인종이 무지몽매한 흑인, 황인종을 가르치고 깨우쳐 문명 상태로 만드는 것이 신의 뜻이며 이는 백인의 짐이란 인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다.

루스벨트, 인도 총독은 놀랬고 무스타파 케말, 자와할랄 네루, 타고르, 쑨원은 기뻐했다. 일본의 승리에서 오스만 제국, 이집트, 베트남, 페르시아, 중국의 신문은 추론에 들떴다. 세계 어디서나 식민지 사람들은 일본의 승리가 가진 심리적, 도덕적 함의를 열열히 받아들였다. 무슬림 나라의 학생들은 일본이 진보한 힘을 배우러 일본으로 향했다. 중국, 베트남, 인도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판카지 미슈라의 눈으로는 유럽은 쓰시마 해전과 1차 대전에서 대학살을 자행으로 도덕적 위신을 대부분 잃어버렸다고 본다. 게다가 “2차 대전 중 아시아를 정복한 일본이 기진맥진한 유럽 제국들의 손아귀에서 아시아를 떼어내는 일에 일조했다”(p.18)고 본다.

20세기 역사를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냉전으로 규정하는 유럽인과 미국인에 반하여, 아시아가 지적,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아시아와 유럽 제국들의 폐허에서 부상한 일이라고 보는 것이 판카지 미슈라의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서구의 아시아 침략에 대해 아시아의 사상가, 지도자들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살펴본다.

이 책의 두 주역은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닌 사상가 겸 활동가다. 먼저 자랄 알딘 알아프가니(1838~1897)19세기 후반 중동과 남아시아에서 오래송안 언론 활동과 정치적 권고에 주력한 무슬림이다. 또 한 명은 현대 주국의 가장 두드러진 지식인 량치차오(1873~1929)인데, 그는 오랜 제국의 확실성을 무너뜨린 여러 사건과, 중국이 온갖 참상을 겪은 뒤에 세계의 주요 열강으로 다시 부상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현대 초기의 이 두 아시아인은 아시아 전역에서 서구와 서구의 지배를 향한 분노, 조국의 무력함과 쇠퇴를 근심하는 마음이 대중의 민족주의적 해방운동과 야심찬 건국 계획으로 전환되는 과정의 선두에 서 있었다.”(p.23)

 

1: 종속된 아시아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은 서구인이 이슬람을 앞지르기 시작했음을 암시하듯, 1905년 쓰시마 해전은 동양이 서구에게 더 이상 허수아비가 아님을 암시한다. 비록 한국인의 입장은 기분 나쁘고 뼈아픈 역사일지라도.

헤겔은 중국이 세계사에서 뒤쳐진 까닭으로 해양 탐사에 무관심했음을 지적했다.

볼테르와 라이프니츠가 중국을 계몽주의의 정점으로 보았던 것과 반대로 19세기 초에 서구는 발달한 기술력과 상업적 성공에 힘입어 중국을 뒤쳐진 나라로 보게 된다. 중국인은 19세기 서구로부터 당한 치욕으로 아편전쟁과 원명원파괴를 기억하고 있다.

680년 이맘인 후세인 이븐 알리가 카르발라 전투에서 순교한 일은 수니파와시아파 대립의 출발점이다.

서구에 정복당한 사람들은 분개하면서도 정복자들을 부러워했고, 결국 그들 힘의 비법을 전수 받기를 열망했다.” (p71)

2: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의 기이한 여정

이란에서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는 이슬람 혁명의 지적 대부로 숭배받는데, 선구적인 반제국주의 지도자이자 사상가로 여긴다. “휴면기의 동양에서 처음으로 자각의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라고 평가 받는다. 대대로 인도를 통치 해 온 무슬림에게 세포이 반란이 진압된 사건은 근본적이고도 총체적인 정신적 패배를 안겨주었다고 한다. 그는 이란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으나 델리와 카불, 이스탄불, 카이로, 테헤란, 런던, 모스크바로 돌아다니며 이슬람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다.

신은 인간이 자기 조건을 바꾸지 전에는 인간의 조건을 바꾸지 아니하신다.”

다음은 여성의 권리를 강조한 알아프가니의 연설이다.

여성이 권리를 박탈당하고 자신의 의무를 모르는 한, 어리석음에서, 치욕과 곤경의 감옥에서, 암흑과 오옥의 심연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초급 교육과 기본적인 도덕을 가르칠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 여성의 교육이 경시될 때, 한 국가의 모든 남성이 박식하고 고매하더라도 그 국가는 한 세대 동안만 그들이 달성한 상태로 존속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세대가 사라지고 나면, 어머니의 품성과 부족한 교육을 물려받은 아이들은 그들을 배신할 것이고, 그 국가는 무지와 곤경의 상태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알아프가니는 이슬람 세계를 잠식해 오는 서구 국가들의 힘 앞에서 무슬림이 수동적으로 체념하는 태도를 버릴 것을 처음으로 역설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폭력적으로 대립하는 이항(二項)이라는 개념으로 이슬람과 서구를 사용한 최초의 주요 이슬람 사상가였다.” 무슬림 대중 사이에 아직 정치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시절에 대중운동에 참여하고 무슬림의 단결과 반란을 주장하는 등 여러모로 시대를 앞섰다.

 

3장 량치차오의 중국과 아시아의 운명

메이지 유신이후 서구를 따라잡던 일본인들은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을 깔보는 경향을 갖게 됐다. 1885년 후쿠자와 유키치는 아시아 나라들이 가망 없이 뒤떨어진 데다가 약함으로 일본은 아시아를 탈출해서 서구의 문명국들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당대 이론 엘리트들 사이에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1902년 일본과 영국의 군사협정은 유럽의 기준에서 본 국제관계에서 일본이 유럽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섰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부러운 것은 메이지 당시 일본이 서구와 맺은 불평등 조약을 근본적으로 개정하려고 노력했고, 성공했다는 거다. 아직도 SOFA(한미행정협정)에서 불평등한 상황인 현재 우리를 보면 더 부러운 거다.

189537세 캉유웨이와 제자인 22세 량치차오가 과거시험 보러 베이징으로 가던 기선이 동중국해에서 일본군으로부터 수색을 받는다. 이 기이한 우연으로 량치차오는 현대 중국에서 우상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한다. 당대의 주요관심사와 미래의 많은 관심사를 예측한 명료한 글로 마오쩌둥을 비롯한 몇 세대 중국 사상가들을 자극한다. 중국 고전에 대한 학식과 서구의 사상과 동향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능력을 다 가지고 있었다. 량치차오는 옌푸(염복, 천연론)의 번역서로 서구 철학자들을 만난다.

량치차오는 파리강화회의에 중국 대표로 참석해중국의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하고 참담한 상태로 귀국한다. 인도와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파리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1차 대전에서 인도 병사 8만 명이 중동과 유럽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고매한 이상이었을 뿐이다.(프랑스 총리 클레망소는 하느님도 10개조뿐이었다고 농담했다고 한다) 파리강화회의는 서구의 현실정치가 아시아의 지식인들과 활동가에게 가르쳐준 교훈 가운데 가장 뼈저린 일이다.

“1917년에 권력을 장악한 레닌은 프랑스, 영국, 제정러시아가 체결한 중동 분할에 관한 비밀협약을 폭로했고, 중국에서 누리던 특수이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이러니 일제에 고통 받던 조선 지식인들의 마음이 움직일 방향은 뻔했던 것이다. 공산주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현실을 타개, 개혁할 대안, 세력, 이념이 없었기에 선택한 것이다. 파리강화회의에서 명국, 프랑스, 미국이란 제국주의의 이익추구가 월슨의 배반과 러시아의 불평등 조약파기와 함께 아시아 민족들에게 공산주의에 눈을 돌리게 하는 원인이었다.

량치차오는 민족의 힘이란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에서 비롯되는데, 민주주의란 군주제의 이기심과 반대되는 그저 공공심(公共心)”일 뿐이라고 본다

 

41919, 역동하는 세계사

이탈리아-터키 전쟁의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의 활동은 쓰시마 해전과 같은 충격을 아시아와 서구에 주었다. 서구의 몰락에 내재한 물질주의는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자연을 정복하고 개인과 계급, 국민 들이 서로 충돌하는 다원주의적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끊임없이 새것을 원하고 끊임없이 좌절하는 서구의 물질주의적인 사람들은 전쟁에 지치고, 불안정한 현실에 괴로워하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유럽이 자랑하던 위대한 진보를 스스로 엄정하게 성찰하고 회의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유럽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눈에는 별안간 유럽이 멸망할 운명으로 보였고, 량치차오는 이를 감지한다.

 

량치차오는 유럽인은 과학의 전능을 고대해왔다. 이제 그들은 과학의 파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근대적 사유의 대전환기다.” 서구인이 보기에도 도덕적 질서를 강조한 공자와 맹자가 더는 부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신문화 운동의 급진주의자들이 옹호하는 과학은 더 이상 사회복지 문제에 대한 만능 해결책이 아니었다. 량치차오는 물질적 삶은 정신적 삶을 살기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목표에 이르는 수단으로 목표를 대체해서는 안 된다. ...... 우리의 문제는 어떻게 유교의 이상인 중용을 적용해서 모든 사람이 균형잡힌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느냐는 것이다.”라고 결론짓는다. 버틀란트 러셀도 우리 문명의 뚜렷한 장점은 과학적 방법이고, 중국 문명의 뚜렷한 장점은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라고 역설했다. 량수밍(1893~1988)중국 문화의 근본 정신은 중용에 의거한 사상과 욕구의 조화.”라고 말한다.

 

5장 아시아의 타고르, 망국에서 온 사람

타고르는 인도의 유럽화를 냉철하게 관찰하고 맹렬하게 비판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러일전쟁의 승리에 환호했던 타고르는 일본의 침략주의, 제국주의 팽창 의도를 알게 되자 신일본은 서구의 모조품일 뿐입니다.”“당신네는 유럽 제국주의라는 병균에 감염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193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참석한 뉴욕 만찬회에서 지금은 서구의 시대이고 인류는 여러분의 과학을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라고 인정하면서도 여러분은 이 유감스러운 선물 때문에 무력해진 사람들과 굴욕을 당한 사람들을 착취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6장 아시아의 재형성

일본의 이익은 아시아의 이익이라던 궤변은 역풍을 맞아 탈탈 털렸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에게 깨진 프랑스 대신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5년 사이공 미대사과 옥상에서 미군헬기가 철수해야만 했다. 1965년 싱가포르 리콴유는 아시아 전쟁세대가 더 이상 제국주의 국가에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량치차오가 이루지 못한, 국민이 공유하는 윤리를 중심에 두고 중국을 되살리는 일을 시작했고, 오늘날 중국 정부는 세계 곳곳에 공자학원을 설립하는 방법으로 노력하고 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정통 공산주의 보다 자유무역과 결합한 맹자의 공적 소유라는 경제적 이상에 기댄 듯한 원칙에 입각해 새롭게 출발하고 있다.

내부가 약했던 이슬람 세계는 외부 위협에 시달렸으나 신이 사회를 인도하고 공동선의 개념을 규정한다는 이슬람의 믿음은, 개인의 이익에 입각한 사회경제 질서와의 대결에서 살아남았다. 이슬람주의 세계관에 따르면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 이데올로기를 만든 서구 자체도 실패한 것으로 본다. 오르한 파묵은 서구 세계는 세계 인구의 대부분이 느끼는 이 압도적인 굴욕감을 거의 모른다며 테러리스트를 찾는 일 뿐만 아니라 서구 세계에 속하지 않는 가난하고 멸시받고 그릇된다수를 이해하는 것이 서구가 직면한 문제다라.”라고 일갈한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슬람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서구에 대한 적의를 강화했다.

 

유럽의 인종들은 대개 지독한 불한당이지만, 적어도 신의 의지와 힘을 부여하고, 한동안 인류의 우두머리 자리에 앉도록 예정해 둔 듯한 불한당이다. 지구상의 그 무엇도 그들의 영향력에 저항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1855년 알렉시스 토크빌의 예측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사실이다.

아시아인들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훼손한 과거의 종교적, 정치적 위엄을 잊지 않고 있다. 더불어 21세기 위싱턴 컨센서스(미국식 시장경제 체제의 대외 확산 전략, 외국 자본에 대한 규제 철폐, 무역 자유화와 시장 경제 국가 기간 산업 민영화 등)도 무너지니 신뢰를 잃고 있다. “분명 서구의 지배는 이미 제국과 문명의 기나긴 역사에서 놀랄 만큼 단명한 또 하나의 단계로 보이기 시작했다.”

 

<제국의 폐허에서>를 읽고 공부하면서 1920년대에 사상가와 활동가들이 세계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11쇄가 책과 함께에서 20138월에 본문 486쪽 분량으로 나온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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