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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 - 송나라 사신 고려를 그리다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0
서긍 지음, 한국고전번역원 옮김, 조동영 감수 / 서해문집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고려도경 高麗圖經
2018.9.14.(금)
세상에 첫 책 <독서로 말하라>를 내놓았다. 홍보한다고 동분서주하고 반응에 민감해지더라. 처음 경험하는 스트레스다. 책읽기에 소홀하니 머릿속이 텅 빌 것을 염려한다. 수일 전에 고려도경외 여섯 권을 사들이고도 며칠은 책을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새벽에 눈을 뜨고 <고려도경>을 읽고, 독서노트를 남긴다.
<고려도경>은 학창시절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를 다녀가 남긴 기록으로 후대에 고려를 이해하는 자료가 되었다고 배웠다. 시험 답안엔 서긍이나 고려도경을 쓰면 됐었다.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찌하다보니 ‘서해문집’에서 내놓은 ‘오래된 책방 시리즈’ 중 하나다. <징비록>, <간양록>과 견주며 읽는다. <징비록>은 조선의 고위관료가 후세를 경계하려는 의미로 지었으니 녹봉을 받는 고위직으로서 의무를 다한 것이다. <간양록>은 일본에 포로로 가 있던 기간에 개인이 보고 듣고 배운 바를 적었으니 조선을 아끼는 마음이 지극한 자료다. 이에 견주어 <고려도경>은 송나라 휘종 황제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며 ‘고려의 풍속’을 살펴오라는 명에 따른 것이다. 오늘날 공무원이 해외에 다녀오면 제출해야하는 국외체험보고서 격인 사행보고서다.
서긍은 송에서 파악한 고려에 대한 지식을 배경으로 개경에 다녀간 경과와 견문을 그림을 곁들여 엮어냈다. 서긍의 선지식에는 오류도 있으나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주관적인 평가도 곳곳에 남겨 두었다. 보고서에 들어있던 그림이 망실되어 아쉽다.
서긍이 고려에 다녀간 것은 1123년(고려 인종)으로, 북송이 금나라에 멸망하기 4년 전이다. 당시 국제정세는 송, 요, 금, 고려가 자국의 입장에 따라 외교전을 벌인다. 송나라 휘종은 요에 대한 굴욕을 씻고자 요의 동쪽 금나라와 협공으로 요를 치려고 하고, 고려는 네 나라가 균형을 이루기를 바랐다. 송의 의도를 파악한 고려는 송에게 사신을 보내 송의 계획을 포기하라고 종요하였다. 그러나 송은 계획대로 금과 손잡고 요는 멸하였으나, 강대해진 금에게 망국의 화를 당하고 휘종 부자가 북으로 끌려가는 참변을 당한다. 고려의 국제정세 파단이 옳았다.
서긍의 여행일정을 정리하면 요동을 금이 지배하니 바닷길을 이용해야 했다. 서긍 일행은 관선 두 척과 민간 소유 선박 여섯 척으로 출발했다. 저장 성 연안 항구에서 출발하여 흑산도, 고군산군도, 예성강 입구에 이르는 17일간의 배를 타야했다. 돌아가는 길은 바람이 좋지 않아 42일이 걸렸으니 개경 체류 한 달을 포함하여 대략 3개월이 걸렸다.
<고려도경>은 제1권 ‘건국에 관하여’ 부터 제40권 ‘같은 문물’까지 왕실계보, 성곽, 궁전, 의식용 물품, 의장과 호위, 수레와 말, 의식주 관련 사항, 연회, 숙소, 배, 바닷길 등에 대해 기록한다. 방대한 기록은 서긍 혼자만의 관찰은 아닐 것이다. 송에서 출발한 사신 일행은 뱃사람을 포함하여 모두 200명이 넘는 규모였다. 사신의 지위 고하에 따라 관찰 조사할 내용을 분담하였고 이를 취합하여 <고려도경>을 엮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다음은 책을 읽어가며 밑줄치고 메모한 내용이다.
도성 수비 근위부대 병력이 상시 3만을 유지했다.
당시 불승 중에 중국어로 독경할 수 있는 자가 있어 서긍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민(四民)의 업 중에 선비를 귀하게 여기므로,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기록으로 보아 교육열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연구원의 고려도경 서문은 ”우리 겨레가 오래 전부터 문화를 사랑하고 중시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하자고 말한다.
고려는 공예를 숭상하여 기술자의 수입과 사회적 지위는 농민들이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민가에 대한 기록에 풀로 지붕을 덮어 비바람만 막는 수준이라 마치벌집이나 개미구멍 같은 데 열에 한두 집만 기와를 얹었다고 한다.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이 없다. 조세에 관한 것을 제외하며 고을에서 송사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서긍은 고려의 의식을 보면서 “孔子가 살고 싶다고 하고 더럽다 하지 않은 이유다”라고 적었다. 땅값이 오를 것을 예상하여 공자가 동이로 오려한 것이 아니다. 예와 악을 중시했던 공자 판단에 동이에는 禮가 살아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나라의 등급을 정할 때 수레의 수를 보아 차등을 두었다. 서긍이 고려에 도착했을 때 사신을 받드는 안장과 말이 대력 왕의 것과 같아 참람되고 사치하다고 사양한다. 이는 사후 행장에서 보이는 서긍의 모습과 일치한다. 당시 고려의 관부, 복식, 풍속 등에 요나라에서 유래한 것이 있음을 발견하나 대부분이 중국에서 들여온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개경의 정부 창고에는 쌀 300만 섬을 쌓아 두었다고 한다. 서긍이 관찰한 바에는 내외직의 현직에 있어 녹을 받는 관원이 3000여 명이고, 녹은 없이 논밭을 급여 받는 사람이 1만 4000여 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고려에서 송에 의관을 요청한 후 의술에 통달한 자가 많아졌다고 한다.
거란이 고려에게 패한 것은 재가화상 무리 힘 때문이라고 들었다 한다. 재가화상은 형벌을 받고 복역하고 있는 자들로 수염과 머리를 깎아 버렸기 때문에 화상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서희의 담판이 정사라면 서긍이 들은 바는 야사다. 백성의 삶을 관찰한 바에는 남녀의 혼인은 경솔히 합치고 쉽게 헤어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內外法에 비추면 주목할 만하다.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고 부처를 좋아하나 시체는 들 가운데 버려두고 봉분을 만들지 않는다고 관찰하였다. 注에 불교의 영혼관 때문이라며 일본도 1세기 전에 이와 같았다고 한다. 고려에 밀이 적어 산동성이나 하남성 지역에서 사온다. 麵이 대단히 비싸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
중국인에 비해 고려인은 목욕을 자주한다. 고려에는 籌算이 없어 출납회계를 나무에 칼로 긋어 표시하고 버리니 지난 일을 따져 볼 수 없겠다고 보고 있다. 注에 우리나라에서 1910년대까지 전남 일부 지역에서 결승을 사용했단다.
후주後周에 유학하고 돌아오다 거란에 잡혀 벼슬한 최광윤이 거란의 침입 야심을 고려에 알려 지방 호족들의 군대를 연합해 30만 광군을 편성했다고 한다. 고려에 유통되던 그림부채는 일본에서 만든 것이다. 고려의 선박 건조 기술은 정교하지 않다. 배에 다락방이 없고 돛대와 노, 키가 있는 수준이다.
<고려도경>은 서해문집에서 2005년 8월 초판 1쇄를 발행하고, 독자는 2015년 초판 2쇄본, 본문 304쪽 분량으로 배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