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교를 철학하다 - 21세기 불교를 위한 하나의 초상
이진경 지음 / 휴(休)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를 통해 ‘익숙해진다’는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다. 부모님이 특별한 종교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무신론자로 살아갈 수 있다. 어린 시절 이웃집 어른을 따라 교회에 다니다 부흥회의 분위기에 질겁하고, 소풍 길에 다녔던 절은 볼 거리이거나 쉼터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책을 통해 이슬람을 만나고 왜곡된 프로파간다에서 참모습을 찾으려 읽는다. 부모님과 함께한 어린 시절의 익숙함이 종교보다 자신을 믿고 살아간다.
<불교를 철학하다>는 시대정신을 잊지 않고 살아 온 이진경님이 불교를 종교보다 철학으로 이해하고 안내하는 불교철학 기본서 라고 판단한다. 바람 쐬러 다녔던 절, 스님들,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일체유심조’와 ‘가는 걸 잡지 말고, 오는 걸 막지마라’ 정도였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보왕삼매경’을 보고 좋다고 느낀 것도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 책을 읽고 불교 철학을 온통 이해했다고는 더욱 말할 수 없다. 몇 가지 불교 철학 개념을 알고 이해한 것만으로도 기쁘다.
<불교를 철학하다>는 14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장 ‘나의 본성은 내 이웃이 결정한다’에서 막혔던 가슴이 터지고, 답답함이 사라지며 ‘아 ! 그래, 그래’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연기적 사유’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책이란 독자가 읽었을 때 책이다. 가지고만 있으면 책이 아니라 짐이거나 스트레스일 뿐이다. 좋아했던 남자의 변심을 원망하고 안타까워하고 붙잡아 두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연기’를 받아들이지 못함이다. 연기緣起가 무엇인가? 어떤 조건에 연하여 일어남이고, 어떤 조건에 기대어 존재함이다. 그 조건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음, 사라짐이다.
“‘연기적 사유’는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와 결별한다.” 주역의 모든 것은 변한다와 같은 변화를 긍정함을 토대로 한다. 그러니 불변한 것을 찾으려는 서양의 형이상학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거다. 어떤 조건에도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실체 같은 건 없다. 하나의 동일한 사물이나 사실조차 조건이 달라지면 그 본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신혼 초기에 남편과 아내의 모습이 10년, 20년 후에 같기를 기대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연기적 사유는 동일한 것조차 조건에 따라 본성이 달라짐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업’이란 하던 것을 계속 하게 하는 성향으로 관성적인 잠재력이 포함되어있다고 한다. “업은 본성이 아닌 것조차 반복되면서 본성처럼 몸과 입, 의지에 달라붙어 관성적인 언행을 만들어낸다.” 연기적 조건의 차이에 업의 힘이 끼어들어 변화를 만들어간다.
불교의 가르침중 하나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상이란 조건이 달라져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무상이란 동일성이 없음, 동일성에 반하는 ‘차이’가 있음이다. “무상을 본다는 것은 동일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달라져가고 있음을 봄이다.” 무상을 보지 못하고 동일성을 유지하려 할 때 애착과 집착이 일어나 고통을 느끼고 고통을 받는다. 때로는 폭력이 되기도 하는 ‘동일성의 사유’도 배운다. 차이에서 출발하는 불교 철학은 차이화에서 생긴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동일성에 가두려는 힘에 대항하며 차이를 긍정할 것을 요구한다.
근대 과학의 분석적 인과성과 불교 철학의 연기적 인과성을 비교한다. ‘동일한 조건’이라면 이라는 단서로 독립변수와 종속 변수로 분석하는 인과는 서양의 분석법이다. 분석적 인과성에서 변수간 인과관계가 필연적이어야 하지만, ‘연기적 인과성’이란 필연성을 요건으로 하지 않는다. 필연성을 가진 법칙마저 조건에 따라 다른 결과를 빚어내는 우연성도 무시하지 않는다. ‘카게무샤의 눈물’에서 우리는 조건, 관계에 따라 다른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자아가 강하면 빨리 늙는다”를 풀어낸다. 자아는 ‘환경이나 관계 등 외부와의 만남에 의해 그때마다 만들어지는 잠정적인 안정성’이라 본다. 행동패턴은 익숙해진 일상생활을 쉽고 편하게 해 주는데, 이는 새로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패턴 안에 제약된다. “삶의 가능성이 ‘나’라고 불리는 성격이나 패턴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오십 정도가 되어야 자아가 안정된다는 말은 자아에 갇혀가는 시기라는 말이다. 자아가 강하다는 것은 나와 남에게 자랑거리가 아니다 남에게 폐가되고, 나에게 안타까운 어떤 상태를 표시할 뿐이란다. 그렇기도 하다.
지구는 가장 큰 공동체다. “일정하게 유지되는 대기비율처럼, 지구의 온도 역시 그런 항상성을 갖는다. 이런 이유에서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일 뿐 아니라, 강한 의미에서 하나의 생명체다.”
끌어당겨 내 것으로 가지려는 마음(탐심 貪心), 밀쳐 내거나 제거하려는 마음(진심 嗔心) : “오지 않은 것을 얻기 위해 치달리고, 갖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 집착하며, 가버린 것을 붙잡으려 애쓰고, 바로 옆에 있는 것을 피하려 하며, 피할 수 없이 다가온 것을 밀쳐내려 버둥거린다.”
‘도’라는 지혜는 선악호오, 미추정사 美醜正邪를 분별하지 않는 것이 요체다. 분멸은 모두 ‘나’의 기준을 척도로 행해진다. “호오미추의 척도를 내려놓고 애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저 사람이 하는 얘기가 들리고 그가 왜 저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분별하지 말라는 뜻은 호오미추의 판단을 떠나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空’이란 연기적 조건을 모두 지워 남는 것이 아무런 본성도 규정성도 없음이다. “공성을 본다는 것은 수많은 규정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음을 보는 것이고, 최대치로 열린 잠재성 속에서 어떤 것을 보는 것이다.”
‘윤회’는 영생불사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삶이란 모면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에 영원히 산다는 것은 그런 고통 속에 영원히 머문다는 것이다. 윤회의 중단은 고통스런 삶의 중단이요, 그로부터 벗어남이다. 열반, 해탈은 영원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연기적 조건 속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당대에는 혁명적 발상이다. “고통을 외면하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 고통을 차분하게 직시하고 그 안에서 넘어서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석가모니가 새로운 깨달음의 길을 다시 찾아 나선 이유였다.” 고통이나 번뇌 없는 깨달음은 없다. 윤회하는 현세적 삶과 별개의 해탈이나 극락 같은 것은 따로 없다. 윤회하는 삶을 떠나야 할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할 만한 것으로 바꾸어가라는 가르침이다. 고통에서 배우려고만 한다면 깨달음을 향한 길을 알려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난 것이다.
“가까운 자가 아니라 멀리 있는 자를 사랑하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만나는 이들에게 최대한 기쁨을 주고 최대한 슬픔을 덜어주며 살라.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은 집착이다. “연민 없이 사랑하라.” 동정이나 환대는 평등성과 거리가 멀다. 동정이나 연민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비대칭성이 전제되어 있다.
一切唯心造 : “내가 갖고 있는 마음이 일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밖에서 내게 다가온 연기적 조건이, 그 조건 속에 스며들어 있는 마음들이 나의 마음을 만들고 모든 것을 만든다.”
十二緣起 : 無明/行/識/名色/六處/觸/受/愛/取/有/生/老死
앞에 것이 뒤 것의 조건이다. 뒤는 앞이 있어서 일어난다.
“미움 없이 미워하라.”와 “눈 업이 보고, 코 없이 냄새 맡는 것들”, “十二緣起”의 어느 부분들은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불교를 철학하다>는 휴에서 2016년 11월 초판을 내놓았고, 2017년 9월 초판 6쇄, 본문 356쪽 분량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