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비겁한 승리
김연수 지음 / 앨피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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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6.30.()

강만길의 <분단시대의 역사역식>59권의 단행본과 강석화의 <조선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44편의 논문, <경국대전>26개의 자료를 바탕으로 임진왜란을 새롭게 해석한 책이다. 책을 읽는 내내 선조의 비겁과 무능, 일본의 교활함, 명나라 신종황제가 제발 자강하려고 애쓰라며 조선을 보는 태도를 보면 속이 터진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황폐화된 조선 강토에서 죽어간 민중과 살았어도 살아있는 게 아닌 삶이 보인다. 의병활동과 이순신, 김덕령을 폄하하고 죽이는 선조의 태도에서 어떤 철학이 선조에게 있었는지 답답하며, 지도자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한다. 전쟁을 대하는 16세기 말 조선과 일본, 명나라, 여진의 시각을 보며 현재의 국제정세와 비교해 본다. 저자 김연수가 왜 제목을 <임진왜란 비겁한 승리>로 지었는지 수긍할 수 있다.

 

임진년 왜의 침입을 대한 선조의 생각들은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에서 볼 수 있다. 왜가 침입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근거가 여러 사료에 남아있다. 그럼에도 조정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대대로 번봉을 지켜 조공을 착실히 바쳐 왔으며 제후의 법도를 어기기 않았기 때문에 중국이 우리나라 대하기를 내복內服처럼 여겼으며 알려 줄 일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알려 주었고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는 등 마치 한집 식구나 부자와 같은 친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귀국도 일찍이 들어서 알고 있는 터이고 천하가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선조수정실록 2451]

전쟁 전 사신으로 조선에 와 있던 일본 승려 현소를 통해 보낸 공식 문서 내용이다. 조선이 명의 속국이니 명이 지켜줄 거라는……. 명나라를 치겠다는 의도를 가진 왜가 이 문서를 보고 얼마나 헛웃음을 쳤을까? 미국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고 그럴 것이라고 믿고 TV에 나와 공공연하게 이를 언급하며 사드 등 전략무기에 믿음을 가진 정치인들이 떠오른다.

 

충주에서 패전 보고가 이르자, 임금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들여 파천에 대해 발의 하였다” [선조실록] 25428

왜가 부산에 침입해 보름이 지난 후에 선조의 반응이다. 대신들이 파천을 청하기를 기다리다 지친 선조가 스스로 입을 열어 도망가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승만이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대전으로 도망간 것과 다르지 않다.

 

“7년 동난 행한 모든 일이 움츠려 구차하게 보전하려는 계책뿐이었고, 쇄신 분발하여 적을 섬멸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리를 진작시키지 않았으니, 지금 비록 남쪽으로 내려가겠다는 하교가 있지만, 신은 믿어지지 않는다” [선조실록]31117

이는 의주로 도망가고 요동으로 도망가려 했으며, 조명 연합군이 한양 도성을 수복하고 조정 신료들이 한양으로 들어가자는 청을 6개월 동안 미루던 선조가 전쟁이 끝날 무렵에 경상도 남동 해안에 웅크리고 있는 왜군을 몰아내는데 임금이 내려가 독전하겠다는 선조의 말을 듣고 사관이 기록한 내용이다.

 

이외에도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153건 사료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대하는 임금과 조정 대신들의 시각을 드러낸다. 정말 다행인 것은 사관들이 임금과 대신 간에 주고받은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적어 두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야하는 이유를 누구나 알 수 있다.

 

다음은 조정 대신들의 시각을 실록에서 찾아본다. <선조수정실록> 2431일자다. 먼저 통신사로 다녀온 부사 김성일은 정사 황윤길이 필시 병화가 있을 것이다.”란 말에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말한다.

한양 도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출발하는 날 선조의 의중을 알아차린 도승지 이항복의 말이다. 의주에 머물만합니다. 만약 형세와 힘이 궁하여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바로 명나라에 가서 호소할 수 있습니다.”

이몽학의 난에 연관된 것으로 사태를 오판한 조정은 의병장 김덕령을 체포하고 처분을 논할 때, “국가가 차츰 편안해지는데 장수 하나쯤 무슨 대수입니까. 즉시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순신 장군의 若無湖南 是無國家와 어찌 이렇게 대비될 수 있는지…….

한편 조선에 군사를 보낸 명나라의 시각은 사료에 어떻게 기록돼 있는지 살펴본다.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칙유하노라. 그대의 나라는 대대로 동번을 지켜오면서 본디 공순함을 다하였고 (중략) 국왕은 서쪽 해변으로 피난하여 초야에 파천해 있다고 하였다. (중략) 지금 특별히 행인사행인 설번을 보내어 국왕에게 이르노라. 그대는 마땅히 조종이 전해 준 기업임을 생각하여야 할 것인바 어찌 차마 하루아침에 가벼이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급히 치욕을 씻고 흉적을 제거하여 힘써 광복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선조실록] 2592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자강책을 강구하지 않았던 조선이 명에게 다시 원병을 청한다. 이에 명나라가 조선에 보낸 비난이다.

어찌하여 몇 해 동안이나 휴식하면서도 군사훈련을 시키지 않고 스스로 와신상담을 잊고 왜군이 다시 쳐들어오게 되자, 전과 같이 또 장황하게 글을 바쳐 천조의 구원을 바라느냐. ...... 짐이 약소를 측은히 여기는 인과 어려움을 구해 주는 의로써 다시 군대를 보내고자 한다. ...... 짐은 구원병을 보내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만리 먼 길을 달려가 도와주는데 너희들은 사직을 지키는 의리에 소홀해서 한 가지 계책도 세우지 않았다. ...... 너희 마음이 너무 어두워 가련할 뿐이다.[선조실록] 301024

쪽팔릴 뿐이다. 주은래나 시진핑이 이런 역사적 사실과 모를 리 없고, 한반도를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동인 세력의 리더로 왜의 침입에 전쟁준비를 하자고 못하고 수수방관했지만, 유성룡이 <징비록>을 남겼음과 강항이 <간양록>을 남긴 것 말고는 온통 부끄러운 일 뿐이다. 충무공이 없었다면…….

 

역사에서 조선은 왜의 침입을 알지 못했다고 가르쳤다. 최소한 알고 있었다고 가르치려면 어떤 준비를 했는가를 말해야했기 때문이리라.

- “나는 이 적들을 한없이 우려했다.”<선조실록> 2552일자 기록을 보면 선조는 왜가 침략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대비하지 않은 것이다.

- 조선은 정보를 얻을 곳이 없어 조선에 와 있던 왜 사신 현소로부터 내년에 길을 빌어 상국(중국)을 침범할 것이다는 확언으로 조정은 의논에 들어간다.

- 중국은 일본이 조선을 거쳐 중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전쟁 8개월 전에 류큐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사실을 명에 통보했다. 일본에 머물던 중국 상인 진신과 허의후 등도 일본이 중국ㅇㄹ 침략할 것이며 조선이 일본군의 향도가 될 것이라는 정보를 중국 조정에 전달했다.

- 관동별곡으로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정철은 정여립 역모 사건을 기획하여 동인을 상대로 원한을 갚는 소인배인 듯하다

 

<임진왜란 비겁한 승리>는 앨피에서 20135월 초판을 내놨다. 본문 395쪽 분량이다. 사료를 토대로 한 글이지만 읽기 쉽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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