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시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5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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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분량이라 하루에 몇 챕터씩 차근차근 읽어나가기 좋다. 친절한 각주 덕분에 읽기 어렵지 않고 이해가 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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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NOON 세트 - 전10권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외 지음, 황현산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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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안 읽은 책, 이미 갖고 있는 책 등등... 의미가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새로운 모양새와 기획으로 나온 책들은 모두 내가 경험하지 않은 ‘새 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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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니체
질 들뢰즈 지음, 박찬국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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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궁금해서 선택했다가 들뢰즈가 더 궁금해졌다. 읽다 만 니체의 저작도 쌓여만 있는데, 읽고 싶은 철학자는 무섭게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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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
김영옥 외 지음,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기획 / 봄날의책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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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간관계 안에서만 인간일 수 있다.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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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역사는 ‘사람‘이 끊임없이 재/발명된 역사다. 누구나 ‘사람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인 인권은 천부인권설이 주장하는 것처럼 태어남과 동시에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계속 발명함으로써 주어진다. 출생지와 성별과 피부색과 종교, 또는 성정체성이나 계급을 두고 그래왔듯이, 아프고 늙고 의존하는 몸을 두고도 우리는 인권 차원에서 ‘사람‘을 고민하고 발명해야 하는 건 아닐까. - P22

환자나 보호자, 노인이나 장애인이 ‘시민‘이기 어려운 사회는 무언가 잘못된 사회다.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가 ‘시민적 관계‘에서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다면 우리 중 누구도 질병, 돌봄,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돌봄을 누락한 채 이루어지는 어떤 시민권/시민성citizenship 논의도, 나아가 시민을 전제로 하는 정치체제와 법제도도, 결국 거대한 부정의를 재생산하게 된다. 이 글에서 나는 "늙고 아프면 누가 나를 돌봐줄 것인가?"라는 질문을 똑바로 마주하고, 윤리로서의 시민성, 권리로서의 시민권, 문화적 가치로서의 시민다움을 재정의해나가기 위한 시론적 논의를 해보고 싶다. 그러려면 우선 ‘시민‘과 ‘가족‘ 사이, ‘시민‘과 ‘돌봄‘ 사이에 놓은 간극과 공백을 더듬어보아야 한다. - P32

한국 정부는 1960년대 이후 추진된 근대화 프로젝트 속에서 노동시장의 정년제와 ‘경로효친‘의 문화적 규범을 제도화했다. 이 ‘국가주도 경제발전‘의 패러다임 속에서, 인간은 ‘국민‘이고,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해야 할 ‘산업역군‘이며, 이를 위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의무교육을 받아야 하고, 정년이 지나고 나면 ‘경로효친‘의 대상이 되어 노동시장의 바깥에 모셔졌다. 여성의 위치는 모순적이었는데, 그는 ‘국민‘이라기보다는 ‘국민의 아내/어머니‘여야 했고,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하되 결혼 후에는 ‘부녀자‘로서 남성 가장을 매개로 국가와 관계 맺었으며, 노년에도 ‘경로효친‘의 대상이기보다는 어머니 노릇이 무한히 연장되는 삶이 기대되었다. 늙고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이들의 절대 다수가 여성인 지금의 현실은, 이처럼 반세기 이상 누적된 젠더 부정의injustice의 결과다. - P36

많은 관계들이 ‘가족 같은‘ 관계로 불리는 사회는 정이 넘치는 사회가 아니라 상상력이 빈곤한 사회다.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 우리가 취약할 때 바라는 모든 것을 욱여넣기 보다, 가족 바깥에서도 그럭저럭 시름시름 잘 살아갈 수 있는 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타인을 든든해하고 필요할 때 기댈 곳이 있으리라 믿으며 늙어갈 수 있는 사회를 구상하고 현실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 P43

그런데 정말 ‘의존적‘이지 않은 사람은 존재하는가?
사실은 의존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 뿐‘인 것이 아닐까? 왜 특정 의존은 ‘정상‘(심지어 ‘성취‘)으로 여겨지고 다른 의존은 모욕당하는가? 생계부양자인 남편은 아내의 돌봄노동에 ‘의존‘하지만, 통계상으로는 아내가 일방적으로 ‘의존‘한다고 여겨진다.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존‘하지만 한국에서는 ‘기업이 노동자들을 먹여 살린다‘고 생각한다. 전 지구적 노동 분업에 인류 전체가 의존하고 있지만, 자기 손으로 직접 옷을 만들어 입지 않는다고 해서 ‘의존적‘이라고 비난받는 사람은 없다. 지배집단의 의존은 ‘의존‘으로 보이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의존의 구조 속에 연결되어 있지만 ‘의존적‘이라는 낙인은 그 구조의 하층부를 떠받치고 있는 이들에게만 전가된다. 간단히 말해서, 독립과 의존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배체제를 지속시키는 허구적 프레임인 것이다.

- P57

필요한 만큼의 충분한 돌봄을 받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이다. 그리고 권리는 의무와 ‘무관하다‘. 즉, 권리는 ‘쓸모‘를 입증하고 구매해야 하는 상품이 아니고, 각자가 기여한 만큼 돌려받는 등가교환도 아니다. 권리는 인권과 존엄성의 관점에서 고민해야 하고, 의무는 어떻게 공유되고 분배될 때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방식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 P63

‘환자와 보호자 둘만 아는‘ 세계에 고립되어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많다. 사회적 안전망, 의료접근권, 간병 휴직 등의 제도 확대, 그리고 무엇보다 젠더 정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가 느리게 변할 동안에도 누군가는 심하게 아프고, 누군가는 전적으로 환자를 돌봐야 한다. 하나리 사치코의 대화가 보여주듯, 환자와 보호자 사이에 있는 위험과 긴장은 때로 ‘죽고 싶은/죽이고 싶은‘ 정도의 문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남들은 모르는 둘만의 밀실에서 미칠 것 같은 상황을 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이 밀실에 비상구를 만들어야 하고, 그 비상구 밖에 누군가 서 있어야 한다. 치열하고 힘겨울수록 더 고립되기 쉬운 돌봄의 국면을 견딜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우리 둘만이 아닌‘ 누군가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는 사실, 누군가 가까이 있다는 실감이다. - P124

그러다 너 나중에 후회한다"라는 협박은 내 마음속에서도 자주 메아리치던 말이었다. 그 ‘나중‘의 후회를 겁내느라 ‘지금‘을 돌보지 못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환자와 보호자의 "생과 사의 조건은 동일하다." - P127

좋은 관계의 기본이 상호성이라면, 비대칭 관계에서의 상호성은 절충과 타협, 끊임없는 조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분별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그 불가능한 지점에서 ‘어떻게든‘, 혹은 ‘그럭저럭‘ 해나가는 것이다. 완결은 없다. 후회도 피할 수 없다. 완벽한 돌봄이 아니어도 돌봄은 귀한 것이다. 완결이 없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살아 있는 인간 삶의 속성이고,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깨어 있게 만들어 지금 여기 내 앞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 힘껏 임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존재로서, 서로 힘껏 겪고 힘껏 마주할 뿐이다. - P128

우리는 우선 아픈 사람도 돌보는 사람도 ‘몸인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언제나 위험과 긴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환자와 보호자가 ‘둘만 아는‘ 현실에 고립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 모두의 유한성과 온갖 ‘어쩔 수 없음‘으로 둘러싸인 사회적 상황을 매개하는 ‘적당함‘의 감각, 돌보는 사람과 돌봄 받는 사람 사이의 갱신되는 상호적 관계성이 없다면,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은 파국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완전히 지칠 때까지, 한계에 몰리게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 P130

소위 ‘생애주기‘라는 개념은 "20~30대 젊은 남성들을 최고의 생산노동자로 동원하기 위한 장치"이자 "이 시기의 젊은 남성과 그 외의 인간에 대한 위계를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인위적 개념이지만, 사실 바로 그 인위적 개념이야말로 우리를 사회의 일부이게 하는 요소다. 인생의 시간표, 미래의 전망으로 연결되는 현재라는 시간관념은 질서의 핵심이자 ‘어엿한 사회인‘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질서는 사회적인 것이다. 질병은 바로 그 질서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병 그 자체라기보다, 질병이 무자비하게 삶에 끌어들이는 ‘예측 불가능성‘이다. 몸의 예측 불가능성이 높아질수록, ‘계획‘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해진다.

- P180

경험을 해석하는 것, 그 해석을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 이야기 안에 통합시키는 것, 나아가 사회에 대한 질문으로 바꿔내는 것은 단지 병에 걸린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질병이라는 모먼트에서 어떤 경험을 어떤 질문으로 변환시키는지가 모두 같은 것도 결코 아니다. 잘 아프자? 그러나 무엇이 ‘잘 아픈‘ 것인지는 ‘잘well‘의 정의에 달려 있으며, 당연히 가치관에 의존한다. 그리고 개인의 가치관은 사회구조와 문화적 규범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 P203

국가적 차원에서 치매를 ‘관리‘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는 정책보고서의 첫 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이 영상에서 치매에 걸린 사람의 삶은 ‘삶‘이 아닌 ‘비용‘이 된다. 그리고 그 생명이 유지되는 한 지속적으로 돌봄의 비용을 발생시킬 몸들이하고 규정하며, 그런 몸이 되지 않기 위해 준비하라고 경고한다. 그것이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가족에 대해, 혹은 국가에 대해 ‘책임‘지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 모든 준비와 관리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치매에 걸린다면? - P217

치매 ‘이전‘의 관리와 치매 ‘이후‘의 책임, 완전한 독립(정상)과 완전한 의존(중증치매)이 대립하는 가운데, 그 사이에 있는 삶에 대한 이야기들은 기이하게 사라진다. 완전한 독립과 완전한 의존 사이에도 지속되고 있을 사회적 관계들과 삶의 모습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멍하니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의 이미지일지도 모르겠다. 치매에 걸리게 된 당신의 미래는 주어가 될 수 없는 삶이다. 삶은 죽음이 오기 전에 치매와 함께 사라진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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